8.
병원비가 아깝다는 발언에 임 대표와 용재는 서로 슬그머니 마주보았다. 돈이 아깝다는 것은 윤혜안의 입에서 나오기 힘든 말이었다.
“이상은 없으니까 선생님도 퇴원해도 된다고 하셨어요. 통원 치료면 될 것 같대요.”
서랍 속에 든 윤혜안의 소지품들을 꺼내 침대 위에 늘어놓던 최홍서가 문득 손을 멈췄다. 그리고 침대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멀뚱히 선 임 대표와 용재를 건너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까.”
“어? 어… 왜?”
“일인실로 잡는 바람에 병원비가 장난 아니게 많이 나왔어요. 의식도 없이 누워있기만 하는 사람인데 뭐 하러 일인실을…”
이번에는 임 대표와 용재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흡사 충격을 받아 말을 잃은 사람들 같았다.
그래도 먼저 입을 연 건 임 대표 쪽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윤혜안 체면이 있지. 네 품위 생각해서 일부러 일인실로 했는데, 인마.”
입원비는 고스란히 윤혜안의 통장에서 빠져나가고 있었지만, 임 대표는 자기 돈으로 병원비를 지불하기라도 한 것처럼 섭섭한 듯이 말했다. 그러다 뒤늦게 뭔가 실수했다는 식으로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자신의 말을 수정했다.
“아, 그렇지. 혜안이가 아니라, 홍서. 홍서.”
“아니요. 안 그러셔도 돼요. 제가 윤혜안이라는 건 이제 알겠어요. 저도… 눈이 있으니까요.”
“어? 그래? 기억이 돌아온 거냐?”
임 대표는 반색을 하며 침대를 빙 돌아와 최홍서의 어깨를 붙잡았다. 육중한 몸집에 비해 날렵한 움직임이었다. 최홍서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윤혜안에 대한 기억은 아무것도 없긴 해요.”
씁쓸히 입맛을 다신 임 대표는 최홍서의 어깨를 잡았던 손으로 자신의 뒷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너도 담당의한테 이미 들었지?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라고 하잖냐. 스트레스받지 말고 이전 생활로 돌아가서 지내다 보면 얼마든지 기억이 돌아올 수 있다더라.”
“네, 차차 그렇게 되겠죠.”
내가 진짜 윤혜안인데 미쳐버린 건지. 아니면 최홍서인데, 누구도 믿어주지 못할 그런 사고가 일어나버린 건지.
상황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일단 이 병실을 벗어나 바깥세상으로 나가야 한다고, 최홍서는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었다. 누구에게 호소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누가 믿어주겠는가, 그런 얘기를.
침대 위에 늘어놓은 얼마 안 되는 소지품들을 가방 속에 밀어 넣으려던 최홍서는 생각났다는 듯 허리를 펴고 임 대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저, 일 시작하겠습니다.”
“……”
임 대표는 눈만 끔뻑거렸다. 일을 잡아다 줘도 이건 이래서 싫다, 저건 저래서 싫다, 내 수준에 안 맞는다, 퇴짜 놓기 바쁘던 윤혜안이 스스로 일을 하겠다니. 그것도 저렇게 마음 단단히 먹은 사람처럼 확고한 표정으로.
“아니, 그래도… 당분간은 좀 쉬는 게 좋지 않겠냐?”
윤혜안으로 보이는 최홍서는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가방 속에 던져 넣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꼭 보고 싶은 오디션이 있어서요.”
환기를 위해 열어놓은 창문으로 매미 소리가 청각을 찌를 것처럼 맹렬히 파고들었다. 어지러운 여름의 열기가 거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울음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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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혜안은 강남의 한 오피스텔에 살고 있었다. 대형 건설회사에서 지은 주상복합 아파트 같은 형태의 건물이었다. 윤혜안의 집은 전용 면적 85제곱미터 정도로, 대궐처럼 넓다 할 수는 없어도 건물 내에서는 가장 넓은 유닛(unit)이었다.
강남 중심지, 초역세권, 대로변의 대기업 오피스텔.
윤혜안이 속해 있던 아이돌 그룹 ‘티탄’이 분명 한때 잘나가기는 했었다. 그러나 겨우 회사에 투자비를 갚고 이제 막 수익이 창출될 정도였을 것이다. ‘티탄’도 최홍서가 속해 있었던 ‘레이어드’처럼 무명 시절이 꽤 길었고, 그만큼 회수해야 할 투자비도 만만치 않았을 테니까.
게다가 팀이 막 부상하기 시작했던 무렵, 윤혜안은 배우 활동에 전념하겠다는 이유로 돌연 탈퇴를 선언했었다.
그 일로 소속사였던 ENA를 나오지는 않았다. 탈퇴 기자회견에도 ‘티탄’의 멤버가 모두 참석해 윤혜안의 앞길을 응원해 주면서 원만히 성사된 탈퇴라는 인상을 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윤혜안의 배우 커리어는 기대만큼 잘 풀리지 않았다.
최홍서가 기억하기에, 윤혜안은 탈퇴 직후 곧바로 공중파 미니시리즈의 주연을 맡았었다. 몇몇 조연과 단역밖에는 경험해 본 적이 없었던 그를 주연으로 캐스팅한 것부터 자격 논란이 있었지만, 방송국에서는 예정대로 진행을 감행했다.
결국, 주연 배우인 윤혜안의 연기력 논란과 함께 작품은 최악의 시청률로 막을 내려야 했다.
몇 개월 뒤, 윤혜안은 다른 작품에서 다시 한번 주연을 맡았다. 그간 연기 연습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각오가 담긴 인터뷰도 가졌었다.
하지만 작품이 방송된 후 대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말과는 달리 발전된 모습을 전혀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연기력이 전혀 없는 일부 아이돌 출신 배우들이 실력과 무관하게 주연을 맡는 풍토를 비판하는 내용들도 여러 번 기사화됐었다.
이전 작품보다 더욱 저조한 시청률로 인해, 작품은 조기 조영을 해야만 했다.
그것이 최홍서가 기억하는 윤혜안의 마지막 연예 활동이었다.
그런 윤혜안이 이런 고급 오피스텔에 거주할 만큼 충분한 경제력을 가졌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전혀 기억에 없는, 낯선 구조의 거실로 들어서면서 최홍서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여긴 월세인가요?”
“……”
뒤따라 들어와 식탁 위에 짐을 내려놓던 용재는 손을 멈추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건가? 라는 말을 하고 싶은 듯했다.
“네, 월세요.”
“회사에서 계속 내준 건가요?”
“처음엔 조 사장님이 내주셨는데… 그다음엔 가불로 쓰셨어요. 이 집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셨거든요. 형이.”
“조 사장님이요?”
“……”
용재는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말실수를 했다 싶은 얼굴이었다.
“다 옛날 일이죠, 옛날 일. 여기 월세는 1년 정도 가불로 쓰셨는데, 사고 후에 병원비하고 월세는 형 계좌에서 빠져나갔을 거예요.”
서둘러 화제를 바꾸면서 용재는 별로 치울 것도 없는 주방을 괜히 분주히 돌아다녔다. 냉장고에 먹을 게 아무것도 없다면서 장을 봐와야겠다는 말 따위를 중얼거리면서.
며칠 지켜본 바에 의하면, ENA의 임 대표는 평범한 사람 같았다. 악덕 사장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마냥 사람 좋은 자선사업가도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정도 있고 모진 사람은 아니지만, 제 살을 깎아가면서까지 남을 위할 인물은 아닌… 딱 보통 사람.
숨이 붙어있는 사람의 목숨을 나 몰라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깨어날지 어떨지 알 수 없는 환자의 병원비와 월세를 제 돈으로 감당해가며 기다려 줄 사람도 아닌…
하지만 연예계에서는 그 정도만 해도 상당히 인정 있는 사람이라 할 만했다.
아니면, 내가 너무 운이 없어서 벗겨 먹으려 혈안이 된 인간들만 상대해 왔던 건가. 최홍서는 그런 생각으로 씁쓸히 조소하며 창가 쪽으로 걸어가 보았다.
건물의 코너에 자리한 윤혜안의 집은 거실 양쪽 벽면이 모두 창문이었다. 남향으로 난 창 앞에서 논현동 일대를 내려다보며 최홍서는 드러난 피부 위를 햇볕이 따뜻하게 데우는 느낌을, 살아있는 그 감각을 음미했다.
“제 마이킹이 얼마나 됩니까?”
“네?”
되묻는 용재를 돌아본 최홍서는 표현을 바꾸어 다시 말했다.
“회사에서 가불해서 쓴 돈이요.”
“아, 네. 그게… 얼마나 되냐면… 지금 바로 재무팀에 연락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바로 대답하지 않으면 불호령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용재는 커다란 덩치를 움츠리고 핸드폰을 찾았다.
“바로 그러실 필요는 없구요. 대충 얼마나 되는지 아세요?”
“아마… 못해도 5~6천쯤은…”
능력이 안 되면서도 집은 꼭 강남이어야 하고, 브랜드 아파트나 오피스텔이어야 한다고 고집부리는 아이돌이나 배우를 최홍서도 얼마든지 알고 있었다. 한 번이라도 스타 대접을 받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일수록 그 고집은 더욱 심했다. 먹어봤기에 더더욱 그 맛을 못 잊는 것이다.
데뷔 전 호스트바 시절, 이름과 얼굴이 알려진 연예인들도 가끔 선수로 가게에 얼굴을 내밀었었다. 회사에 진 빚을 못 갚아서 결국 거기까지 흘러들어온, 한때 잘나갔던 소위 ‘퇴물’ 연예인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같이 ‘난 너희 같은 밑바닥 인생들과는 달라’라는 태도로 다른 선수들을 벌레 취급했었다.
VIP 고객 전담 상대라고는 해도 대부분의 손님들은 호기심에 한두번 그들을 불러보는 게 다였다. 오히려 자존심을 꺾지 못해 손님에게 컴플레인을 당하고 정산도 못 받은 채 쫓겨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 모두는 한 명도 빠짐없이 자신이 곧 전성기를 되찾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때 그들은 어디에서 뭘 하면서 지내고 있을까.
이런 식으로 1년만 더 지난다면, 윤혜안도 결국 호스트바 마담의 명함을 손에 쥐게 되겠지.
씁쓸히 웃는 최홍서의, 아니, 윤혜안의 얼굴이 유리창에 흐릿하게 비쳤다.
“용재 씨는 저랑… 친했나요?”
돌아본 용재의 얼굴은 의혹을 담은 채 이쪽을 살피고 있었다. 혹시라도 기억이 안 나는 척하며 자기를 떠보는 게 아닐까, 경계하고 겁내는 듯했다.
“친했다기보다는 아무래도 제가 형에 대해 잘 알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