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6/185)

6.

한서 그룹에게 거세당하고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 이서경은 ‘X군 스캔들’ 뿐만 아니라, 그 외 여러 혐의로 기소당해 재판에 처해졌다. 게다가 동남아시아 몇몇 국가에서 부동산 투기를 목적으로 정부 고위층들에게 수수했던 거액의 뇌물도 문제를 일으켰다.

국내에서의 1심 판결 후, 이서경은 타국의 사건 조사에 출석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수사 물망에 오른 해당 정부의 고위층 인사들이 뇌물 수수를 부정하고 있어, 공여자인 이서경을 불러다 조사하려는 목적이었다. 이와 관련해 이서경은 태국과 말레이시아 2개국에서 조사를 받을 예정이었다.

수의(囚衣) 차림에 수갑을 차고 포승줄에 묶인 채 방콕에 도착한 이서경은 공항 내의 경찰 시설로 연행되었다. 그 모습이 바로 몇 시간 전, 국내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었다.

그리고 다음 뉴스는 이서경의 피살 소식이 되었다.

어떻게 보더라도 현재의 이서경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혼자만 죽을 수 없다는 억하심정으로 이서경이 태국과 말레이시아의 조사과정에서 입을 함부로 놀린다? 그렇게 되면 난처해지는 사람은 얼마든지 존재했다. 한서 그룹이라는 배경을 잃은 이서경이 불편해진 사람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번 기사를 점검한 이해성은 이전 페이지로 되돌아갔다. 그사이 수십 개의 관련 기사가 새롭게 업데이트되어 있었다.

이서경 전무는 호송 차량에서 내려 방콕의 검찰청 건물 내부를 향해 이동하는 사이에 총격을 받았다. 뒤통수와 뒷목, 등 위쪽. 총 세 곳에 총상을 입고 즉사한 것으로 최초 보도되었던 내용이 다섯발로 수정되어 있었다.

단지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숨통을 끊는 것이 목적인 피살이었다. 어설픈 부위를 노렸다가 치료를 받고 기적적으로 살아나기라도 한다면 낭패였으니까. 실수 없이 깔끔한 전문가의 솜씨였다.

“흠…”

태블릿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이해성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껐다.

차분한 크림색 커튼이 8월 중순의 햇빛을 부드럽게 걸러주고있었다. 늦은 오후의 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고요한 실내는 외부와단절된 공간 같았다. 이해성은 잠시 그 고요함을 음미했다. 아름다운 음악을 즐기듯이.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이해성의 침실은복도 끝의 마스터룸에서 가장 가까운 방이었다.

마스터룸의 문 앞까지 걸어간 이해성은 매번 그렇듯, 바로 문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문 너머에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신경 쓰이는 대상의 방문 앞에서는 누구라도 노크를 하기 전, 멈춰서서 숨을 고르게 되는 것처럼.

하나, 둘, 셋, 넷, 다섯…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숫자를 센 뒤에야 천천히 문을 열었다.

이 집이 ‘레이어드’ 멤버들의 숙소였던 시절, 최홍서가 사용했던 방이었다. 방은 최홍서가 생전에 사용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작곡을 위한 간단한 장비들이 세팅된 책상, 둘이서 눕기에 그다지 넉넉하진 않았던 더블 사이즈의 침대, 좋아하는 만화책이 빼곡히 꽂힌 낮은 책장.

책장 위로는 영화 포스터가 몇 점 걸려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본 영화들이었다. 영화를 같이 볼 때마다 그 영화의 포스터를 선물했었는데, 고작 세 작품밖에 되지 않았다.

앞으로 더 많이 걸어야 할 테니까, 일부러 간격을 좁게 해서 걸어둔 거라고. 최홍서는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서로 바짝 붙은세 개의 포스터 옆으로는 긴 여백만이 남아있었다.

욕실 쪽의 드레스룸에도 손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양말 한쪽, 칫솔 하나 버리지 않았다.

낡아가지 않게, 먼지가 앉지 않게.

바로 오늘 아침, 그 아이가 이곳에서 일어나 출근한 것처럼.

새벽이 되면, 일정을 마친 그 아이가 이곳으로 돌아올 것처럼.그런 모습으로 유지하기 위해 특별히 세심한 지시를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을 열어볼 때마다 이곳의 모든 것이 흐릿해지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뒤로 밀려나고, 변색되고, 서서히 가라앉아 매몰되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마음은 그대로인데, 최홍서가 그런 것처럼 이 공간도멀어져 가는 것 같아서, 그 낡아감이 고통스러웠다.

침대에 앉거나 누워보는 것은 여전히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방 입구에 멈춰 문틀에 어깨를 기댄 이해성은 과거의 시간이고여있는 것만 같은 공간을 구석구석 천천히 눈에 담았다.

이서경 전무가 피살되었다.

이것으로 조금이나마 너의 한이 풀렸을까.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 주었더라면…

어느새 이해성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가슴속이 술렁거렸다. 풍랑이 이는 밤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어선이 된 것 같았다. 단단해 보이는 것은 단지 감정을 읽히지 않도록 오랫동안 훈련해온 결과일 뿐이었다.

천천히 방 안으로 걸음을 옮긴 이해성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베개를 괜히 여러 번 고쳐 놓고는 아주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누군가, 아주 소중한 사람이 잠들어있기라도 한 것처럼.

방문을 닫는 이해성의 등 뒤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강 실장이었다.

“부사장님, 정지인 씨와 이한 전무님께서 방금 지하에 도착하셨습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함께 휴가를 떠났던 이한과 그의 연인인정지인이 휴가에서 돌아오는 날이었다. 이해성은 내일부터 북미출장이 잡혀 있어, 부득이하게 오늘 시간을 내달라고 부탁했었다.두 사람은 강 실장을 제외하고, 최홍서와 이해성의 관계를 제대로알고 있던 유일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입매를 굳히는 것으로 표정을 숨긴 이해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내가 직접 마중 나가죠. 실장님은 개인실에서 좀 쉬고 계세요.”

“인사라도 드린 후에 들어가겠습니다.”

“아니요. 오늘은 두 사람하고 사적인 자리니까 마음 쓰지 마세요. 자리 비켜 준다 생각하시고.”

“알겠습니다. 그럼.”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강 실장은 이해성이 앞설 수 있도록 복도 한쪽으로 비켜섰다. 강 실장을 지나쳐 현관을 향해 걸어가던 이해성이 문득 걸음을 늦췄다.

“강 실장님.”

“네, 부사장님.”

“영화 말입니다. 강우현 감독님 작품이요.”

“네.”

“다시 제작에 들어가도록 추진하죠.”

“……”

이해성의 목소리에서 특별한 각오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마음에 고여 있었던 말을 자연히 흘려보내듯 평온했다. 강 실장을 돌아본 그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강 실장이 드물게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최홍서가 죽은 지금, 투자는커녕 이해성이 더 이상 이 영화와 어떤 식으로도 관여되고 싶지 않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는 주인공 역할에 캐스팅되었던 최홍서의 죽음 이후, 수개월째 아무런 진행이 없는 상태였다.

“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투자하기로 한 게 아니라고, 홍서한테 그렇게 말했었거든요. 지금 투자를 중단하면 거짓말한 게 되잖습니까. 그러긴 싫거든.”

“알겠습니다.”

강 실장은 토를 달지 않았다.

감정을 가두어 경직시켰던 이해성의 입매가 한순간 부드럽게 녹으며 미소를 보였다. 그러나 찰나의 순간일 뿐이었다. 미소는 곧 복잡한 빛을 띠다 사그라졌다.

다시 등을 돌린 그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약 2주간의 휴가를 즐기고 돌아온 정지인과 이한 커플은 보기 좋게 그을려 있었다.

“두 사람 다 아주 건강해 보이네. 더 미남이 됐는데?”

“형이 더 미남이 돼서 제가 곤란한 일이 많았죠.”

이해성의 환영 인사에 이한이 엄살을 부리며 농담을 했다. 여행 기간 동안 재미있는 얘깃거리가 많은 듯했다.

이해성은 두 사람을 식당으로 안내했다. 긴 비행을 마친 손님들을 위해, 가벼운 요리들과 마시기 편한 샴페인으로 저녁 식탁이 마련되어 있었다.

“여독 때문에 피곤할 텐데, 오늘 보자고 해서 미안해요.”

“저희 집 바로 근처잖아요. 한이는 내일까지 휴가고, 저는 다음 작품 정해지기 전까지는 백수니까, 부담 가지지 마세요.”

정지인이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로 대답했다.

‘X군 스캔들’의 폭로, 최홍서의 죽음, 이서경의 기소와 재판 등을 거치면서 정지인은 드라마 배우에서 본래의 꿈이었던 연극배우로 완전히 진로를 바꾼 상태였다.

최홍서와는 방식이 달랐지만, 정지인 역시 이서경 전무의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고, 최홍서를 많이 아꼈기에, 이해성은 그에게 감사한 동시에 남다른 동지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정지인과 이한, 두 사람에게는 큰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모처럼 가까운 곳에 살게 돼서 그동안 즐거웠는데. 두 사람 유럽으로 가버리고 나면 적적할까 봐 벌써부터 걱정이야.”

“아직 최소 1년은 더 있어야 하는데요, 뭐.”

1년은 충분히 긴 시간이라는 듯 이한이 웃으며 말했다.

정지인과 이한 두 사람은, 이한이 지금 회사에서 맡고 있는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면 프랑스 파리로 거처를 옮길 예정이었다. 두 사람에게는 잘된 일이었지만, 이해성은 벌써부터 아쉬웠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 최홍서가 화제에 오르는 횟수도 줄어들 테고, 그렇게 혹시라도 그 아이의 기억이 조금씩 흐려지지는 않을지… 그것이 못 견디게 아팠다.

“저 그런데, 소식… 들으셨죠?”

평소와 다름없이 쾌활했던 이한과 달리 무슨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이해성의 기색을 살피던 정지인이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응? 아… 그래, 들었죠.”

이해성은 마시고 있던 샴페인 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경 전무의 피살.

이 자리에 모인 세 사람 모두에게 의미가 큰 사건이었다. 그 얘기를 꺼내지 않는 것도 어색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해성은 굳이 굉장한 사건인 양 의미를 두고 싶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은 평이한목소리로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두 사람은 비행기에서 내린 후에 들은 건가?”

“네.”

“처음엔 세 발을 맞았다고 발표하더니, 조금 전엔 총 다섯 발이었다고 수정 기사가 났다는군.”

그렇게 말하는 이해성의 목소리 역시 날씨나 스포츠 같은 뉴스를 언급하듯 덤덤했다. 이한 역시 충격이나 동요가 전혀 느껴지지않는 표정과 목소리로 사건에 대해 얘기했다.

“최고급 전문가의 솜씨예요. 범인도 안 밝혀질 겁니다. 아마 최소 수십만 달러는 들었을걸요?”

“어쩌면 백만 달러 이상 지불했을지도 모르고.”

샴페인 잔을 입술로 가져가면서 이해성이 무심하게, 이한이 추측한 의뢰 비용을 정정하듯 말했다.

간단하게 준비한 식사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이한이 기지개를 켜면서 정지인에게 담배를 권했다.

“비행기에서부터 쭉 참아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싶은데, 같이 갈래요?”

담배라는 얘기를 듣자, 정지인도 흡연 욕구를 느끼는 표정이었다.

“형, 저희 담배 좀 피우고 와도 되죠?”

“그럼. 천천히 다녀와.”

두 사람이 다정하게 식당을 나간 후, 이해성은 사람을 불러 샴페인이 아닌 레드 와인을 한 병 오픈하도록 했다. 축하할 일이 있거나 중요한 날에 마시려고 계획했던 귀한 와인 중 하나였다.

포크와 나이프를 이용해 따끈한 로스트비프를 얇게 썰어냈다.직접 썰어 먹을 수 있도록 덩어리째 내놓은 고기에서는 이해성이칼질을 할 때마다 육즙과 소스가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잘라낸 고기를 입속에 넣고 살코기를 씹으며 잔을 들어 검붉은와인을 삼켰다.

정지인과 이한이 앉아있던 자리, 이해성의 맞은편으로는 한강을 사이에 둔 서울의 야경이 화려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풍경위로 고기를 씹고 와인을 마시는 이해성의 인영이 흐릿하게 겹쳐졌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