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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로 출근하는 이런 샐러리맨 아저씨가 어디 있어요. 배우 프로필 사진 같은데.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아무 말도 못 했었다.사회적으로 너무나 대단한, 최홍서가 생각하기엔 세상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데다가, 열두 살 연상에 건장한 체격을 가진 그였지만, 쑥스러워하는 모습이 어딘가 귀여웠었다. 괜히 입가가 간질거렸었다. 그런데도 웃어주는 대신 입술을 깨물기만 했었다.
낯간지러워서, 익숙하지 않아서, 용기가 안 나서… 그런 이유들로그에게 해주지 못했던 말이 그것뿐일까.
빠르게 뛰던 심장이 이번에는 울컥울컥, 더 많은 양의 피를 한꺼번에 토해냈다. 입술의 껍질을 손끝으로 뜯어내면서 프로필 아래, 관련뉴스들을 터치했다.
오늘 자 뉴스의 타이틀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이해성 부사장, 내일 캐나다로 출국… 북미 출장 성과 기대
클릭한 기사 본문에는 과거에 출장 전, 공항에서 간단한 기자회견을 가지는 그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이해성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그룹의 경영인치고는 상당히 노출이 적은 편이었다. 같은 3세 경영인인 그의 사촌들이 이끌어 가고 있는 한서 그룹 패밀리와는 대조적이었다. 한서 그룹 남매들은 스스로 언론 노출을 즐기지는 않아도 사적인 행보가 공유되는 것을 강력히저지하지도 않았다. 그에 비해 이해성은 일각에서 ‘신비주의’라 일컬을정도로 조용히 경영에만 집중하는 성격이었다.
ARA 전자, 나아가 종국에는 ARA 그룹을 이끌어갈 이해성이 영화광이라는 것도, 그래서 ARA의 자본과는 완전히 무관하게 개인적으로투자사를 설립해 몇몇 영화의 제작을 후원해 왔다는 사실도, 일반 대중들은 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특별히 비밀은 아니었다.
그가 굉장한 카메라 컬렉터이자, 가명으로 비밀리에 여러 번의 전시회를 열어왔을 만큼 사진 찍기를 즐긴다는 사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수족과 같은 개인 비서 한 명을 제외하면, 오직 최홍서만이알고 있는 극비 사항이었다.
그것은 이해성이 역할이나 의무에서 벗어나 그저 인간 이해성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최홍서는 떨림이 멈추지 않는 손끝으로 스크롤을 내리며 과거를 향해 거슬러 올라갔다.
이해성 ARA 부사장, 비밀리에 긴급히 태국 방콕으로 출국… 이유는?
수척해진 모습으로 귀국하는 이해성 부사장
휴가 얻은 이해성 직접 운전해 별장행, 일각에선 ‘건강 이상’ 염려
ARA 전자와 관련된 이해성의 행보 사이에서 찾아낸 몇몇 뉴스들에 최홍서의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그 날짜들은 모두 자신이 방콕의 32층에서 뛰어내린 직후를 가리키고 있었다.
방콕에 왔었구나… 입술을 뜯던 최홍서의 손이 멈췄다. 한 자 한 자기사를 읽어 내려가는 눈동자가 극심히 흔들렸다.
최홍서가 뛰어내린 직후에 이해성이 서둘러 방콕으로 출국했고, 그건 적어도 ARA와 관련된 공식 일정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최홍서의 사고 때문에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출국이라고 판단하는 것도 엉뚱한 망상만은 아닐 것이다.
그럼… 그 이후에는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그와 나의 관계는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내가 그런 짓을 벌인 것에 실망했나? 그렇겠지? 아니 어쩌면… X군 스캔들의 전말을 전부 알게 돼서 거기에서부터 나에게 완전히 정이 떨어져 버린 걸지도 모르지…
그래서, 이런 나와는 더 이상 미래도 뭣도 없으니까…
직접 핸들을 잡고 서초동 자택 주차장을 벗어나는 그의 옆모습은 그리 선명하지 않았다. 밤중에 촬영한 데다, 선팅이 되어 있는 창문을 통해 찍힌 탓이었다.
그런데도 좋았다. 늘 부드럽고 다정한 표정을 보여주었던 그의 얼굴이 낯선 사람처럼 예민하고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지만, 이 세상에 살아 숨 쉬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이제 다 끝난 것이다.
그가 가진 부드러움도 다정함도 조심스러움도, 그리고 비밀도, 이젠 전부 내 것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나 자신이 내 손으로 그에게 돌려줘 버린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는 돌려받은 것이 아니라 무참히 버려졌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가 주었던 모든 소중한 가치들을 내가 32층에 서서 휴지 조각처럼 전부 날려버렸다고.
손가락만이 아니라 최홍서의 전신이 극심히 떨리기 시작했다.
토기가 치밀었다. 이상이 있으면 즉시 호출하라고 했지만, 간호사가 오기까지 기다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1인 병실 내의 화장실로 달려갔다. 천천히 걷는 것은 가능해도 멀쩡히 달리는 것은 아직 무리였다. 몇 번이나 무릎이 꺾여 기다시피 해서야 화장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린 후 목구멍으로 넘긴 것이라고는 서너 모금의 생수가 전부인데, 최홍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누런 액체를 게워냈다.
변기 앞에서 겨우 일어난 뒤에는 세면대 가장자리를 붙잡고 버티어섰다. 젖은 손등으로 입가를 훔쳐내다 무심코 거울 속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
솨아아아아. 수도에서는 계속해서 물이 쏟아지고, 최홍서는 비명조차도 지를 수 없었다.
병실을 찾아와 친근하게 말을 거는 사람들이 낯설었던 건 약과였다. 별것도 아닌 일이었다.
거울 속 얼굴이 생면부지인 것에 비하면.
@
한여름의 끝물이었다.
아직은 아슬아슬하게 여름 성수기에 속해 있어도, 한창 무더웠던 시기에 비하면 한풀 꺾인 느낌이었다.
이해성은 창가에 놓인 일인용 소파에 앉아, 태블릿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손가락에 걸린 담배에서는 유난히 창백해 보이는 연기가 느릿하게 피어올랐다.
분당과 서초동, 두 곳에 자택을 두고 번갈아 오가며 지내고 있던 그는 얼마 전부터 이곳, 한남동 맨션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도 역시 그의 소유이기는 했지만, 항상 임대만 했었지 실제로 거주한 적은 없는부동산이었다.
이곳은 홍서가 그의 그룹 멤버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지냈던 숙소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사고’ 이후 다른 사람에게 임대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그 이후 오랫동안 이곳에 발 디딜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렇게 이해성은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한 채로 이곳을 한동안 그냥 두었었다. 최홍서의 흔적이 남은 이 모습 그대로 시간 속에 굳혀버리려는 사람처럼.
최홍서의 흔적을 확인하는 것은, 그 부재를 확인하는 것과 같았기에… 이 집에서 지내는 것은 여전히 고통을 동반했다.
그러나 이제는 털어내고 잊어버리려 애써 노력하지 않기로 마음을정했다. 노력은 충분히 해보았고, 그리고 이런 일에는 노력이 통하지않는다는 것도 충분히 알게 되었다.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그렇듯, 누군가를 잊으려는 노력 역시도 무의미했다.
잊으려 노력하기보다는 차라리 흔적 속에서 그리워하는 편이 나았다. 잊으려 노력하는 동안에도 그립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태블릿 화면 속 뉴스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이해성은 재떨이에 툭툭 재를 털어냈다.
지금 이해성이 태블릿으로 꼼꼼히 정독하고 있는 자료는 그의 사촌, 이서경에 대한 기사들이었다. 정확히는 이서경의 죽음에 대한 기사.
모든 문제는 ‘X군 스캔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이 도화선이었다.
아이돌 그룹 출신 남자배우 X군이 실은 호스트바 접대부 출신이며,데뷔 후에도 몸 로비를 통해 일을 받아왔다는 자극적 내용의 스캔들.그것은 동영상 공유 사이트의 몇몇 연예 채널들로부터 시작해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몇몇 인물들이 X군으로 특정되었고, 그 과정에서 X군으로 몰린 한배우가 극단적 시도를 하기도 했었다. 다행히 그는 목숨을 건졌지만,일부 대중의 광기는 멈추지 않았다.
그사이 사건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X군에게 성매매와 접대를 강요하고 착취해온 포주가 따로 있으며,그 포주가 바로 X군의 현 소속사 대표라는 사실이 새롭게 드러난 것이다.
최홍서의 소속사인 UB 엔터테인먼트의 명도훈 사장이 바로 그 포주, 사건의 진짜 피의자로 입건되면서, 이번에는 웹상에서 최홍서가 X군으로 지목되었다.
해외 도피를 시도하던 명 사장이 공항에서 체포되고, 태국 방콕에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던 최홍서가 투신하기까지는 채 몇 시간도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X군 스캔들’ 먹이 사슬의 피라미드, 착취의 정점에 있었던인물.
그것이 바로 이해성의 사촌, 한서 그룹의 이서경 전무였다.
이서경을 기소하고 법정에 세우기 위해, 이해성은 이서경의 동생이자 오랜 숙적인 이한과 손을 잡았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서경에게깊은 원한을 가졌던 이한은 이해성에게 사적인 복수를 제안해 왔었다.
【“팔다리 하나쯤 잘라내 버리고 싶다고 생각 안 하세요? 그분이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던… 같은 높이까지 끌고 올라가서, 몇 번이고 되풀이해 밀어버리고 싶다는 생각, 정말 안 하세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저는… 형을 살고재산을 몰수당하는 정도로는… 그러니까, 법적 처벌만으로는 도저히용서가 안 될 것 같아서요.”】
당시의 이해성은 이한의 제안을 거절했었다.
그러나 이후에 생각이 바뀌었다.
‘X군 스캔들’을 악의적으로 터뜨린 것도 이서경 전무였으며, 애초에 최홍서를 ‘X군’으로 만들어온 배경에 이서경이 깊숙이 관여했다는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서경은 최홍서만큼은 건드려서는 안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