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기억이 안 나는 건 아닌데…”
“괜찮아요, 혜안 씨. 일시적으로 기억이 불안정할 수 있어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에요. 현재로서는 특별한 징후가 보이지 않으니, 아마도 일시적인 현상일 겁니다. 자세한 검사는 내일부터 진행하도록 하고, 오늘은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유지하시는 데에만 집중하세요.네?”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닌데.
오히려 모든 것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는데.
이번에도 최홍서는 어긋난 틈새를 느꼈다. 외부의 빛이 가늘게 새어들 정도였던 틈이 끼이익, 끼이익 새된 소리를 내며 점점 더 넓게 벌어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분명하게 확인하기가 두려웠다. 외면해야만 할 것 같았다. 생각이 아니라, 예감이 그러했다.
시끌벅적한 두 사람이 들이닥친 것은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을 떠나간 직후였다.
“혜안아, 이 자식아! 깨어날 줄 알았다! 너 같은 독종은 죽었다가도 살아 돌아올 줄 알았어!” 막 벗겨지기 시작한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중년의 남자가 거의 문을 박차듯 밀어젖히며 등장했다. 과격한 말투와 달리 눈물을 글썽이는 그는 아무리 떠올리려 노력해 봐도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그 뒤를 따라와 발치에 선 거구의 젊은 남자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형, 고생 많으셨어요. 깨어나실 줄 알았습니다.”
발치에 선 젊은 남자가 붉어진 눈시울로 형이라 불렀지만, 아무리봐도 최홍서보다 최소 서너 살은 더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체형이나 분위기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슈트 차림의 두 사람은 언뜻 보기에 조폭 선후배 같기도 한 콤비였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에 조폭 물이 그다지 배어있지 않았다. 그쪽 손님이라면 호스트바 시절 제법 상대해 봤기에 특징을 잘 알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저하고는 어떤…”
최홍서의 질문에 두 남자의 얼굴이 움찔 굳었다. 조금 전 의사가 보인 반응과 같았다. 깨어난 환자의 두뇌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닐지 당혹스러워하는, 겁먹은 표정들이었다.
중년의 남자가 먼저 허리를 굽혀 최홍서의 눈앞에 자신의 둥글고 커다란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 내 얼굴 잘 봐봐. ENA 임 대표. 너하고 10년 동안 한솥밥 먹은 임상진! 여기는 용재. 구용재. 네 매니저. 티파니도 용재가 돌보고 있었어, 인마.”
ENA… ENA… 가늘게 눈을 뜬 최홍서는 어떤 실마리를 발견하고 기억 속을 빠르게 탐색했다. ENA, 분명 기억에 남아있는 단어였다.
“ENA는… ‘티탄’이 소속돼있던 회사 아닌가요?”
“그래, ‘티탄’! 기억하네! 야 인마, 순간적으로 식겁했다!”
중년의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재킷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의 말과 홍서의 기억 사이에 틈이 메워진 것은 전혀 아니었다.
ENA 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와 아이돌 그룹 ‘티탄’을 기억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최홍서 자신은 그 회사와도 그룹과도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적어도 지금의 기억으로는 그랬다.
아니면, 내가 속해 있었던 UB 엔터테인먼트 명 사장과 ENA의 임대표가 친한 사이이기라도 했었나? 그런 얘기는 전혀 못 들었는데…
명 사장. 명 사장. 그 이름을 떠올리자, 최홍서의 미간과 입술이 일그러졌다.
그래, 명 사장은 어떻게 됐지? X군 스캔들이 제대로 터졌다면, 이번에야말로 그 자식도 빠져나가진 못했을 텐데.
분노와 증오로 혈압이 오르자 곧바로 두통이 밀려왔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관자놀이의 통증에 최홍서는 얼굴을 찌푸렸다.
“너 안 깨어났으면 어쩔 뻔했냐, 인마. 조 사장 겁주려고 그랬던 거지? 이 헛똑똑이야, 네가 이런다고 조 사장이 눈 하나 깜짝할 거 같아? 그 양아치 새끼, 너 누워있는 몇 개월 동안 연락 한 통 없고, 코빼기…!”
“사장님, 오늘은 그만하세요.”
“어?”
“의사 선생님도 오늘은 절대 안정을 취하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잖아요.”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최홍서가 알아듣지 못하는 얘기를 늘어놓던 ENA 대표를 젊은 남자가 말리고 나섰다.
“그래, 그래․ 앞으로 잘 살면 되는 거지. 네가 깨어났다는 게 중요한거 아니겠냐.”
물론 최홍서는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요? 제 어머니나… 다른 가족들은 모르세요? 아니면, 저희회사 식구들은… UB는 어떻게 됐나요?”
“……”
ENA 대표의 얼굴이 다시 한번 사색이 되었다. 그는 최홍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손을 더듬어 거구의 팔을 찾았다.
“용재야, 얘 진짜 왜 이러냐. 머리에 이상 생긴 거냐? 어? 의사 불러야 돼?”
용재라고 불린 젊은 거구가 대표를 밀어내고 최홍서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형. 오늘은 절대 안정을 취하시는 게 중요하대요. 다른 생각은 하지 마세요. 앞으로 천천히 하나씩 해결해 나가면 되는 거니까요. 아셨죠?”
그들의 말이 옳은 것 같았다. 알지도 못하는 이 사람들이 왜 친근하게 구는 건지는 몰라도, 지금은 일단 이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기보다 스스로 상황을 파악해야 할 것 같았다.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확인해야만 하는 사실들이 너무 많았다.
X군 스캔들, 이서경과 UB 엔터테인먼트의 명 사장, 그리고… 가장 궁금한 사람까지.
“제 핸드폰이나 소지품 같은 건 어떻게 됐나요?”
“너 발견됐을 땐 핸드폰이고 지갑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어, 인마. 그냥 옷이나 겨우 걸치고 있었지. 오피스텔에 있던 세컨드 폰은 용재가 여기다 가져다 놨다.”
ENA의 대표는 침대 옆 서랍을 열어 뒤적였다.
“전원 안 나가게 용재가 항상 충전해뒀어. 너 깨어나면 분명히 핸드폰부터 찾을 거라고.”
“……”
“근데 진짜 핸드폰부터 찾네, 이놈.”
임 대표는 허탈하게 피식거리며 핸드폰을 건넸다. 그러나 임 대표가 손에 쥐여준 것은 최홍서가 사용하던 기종, ‘그’가, 이해성이 선물해주었던 ARA 전자의 핸드폰이 아니었다.
두 콤비가 하는 얘기도 최홍서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른 입술을 달싹거려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감사합니다. 좀… 쉬고 싶네요.”
“그래, 그래. 지금 너는 숨만 쉬어도 피곤할 거라고 의사가 그러더라. 푹 자고 회복해. 내일 또 올 테니까.”
“……”
“참 얄궂지 뭐냐. 마침 딱 오늘 네 오피스텔을 내놓아야 하나 어쩌나 하던 차였는데…”
복잡한 표정으로 그렇게 얘기한 임 대표는 용재를 데리고 병실을 떠났다.
낯선 두 사람의 등장과 퇴장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우스꽝스러운 연극 같았다. 아무 정보도 없이, 초반 20분을 놓친 채 중간부터 보게 된 연극.
최홍서는 생각했다.
의사의 말대로 ‘사건’ 후에 일시적으로 기억이 불안정해진 것일까. 내일이 되면, 혹은 모레가 되면 조금 전 그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이 기억나게 될까.
아니, 의사의 추측은 틀렸다. 나는 내 이름을 기억 못 하는 것이 아니다. 기억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기억과 나의 기억이 서로 다르다는, 그게 문제였다.
흠씬 두들겨 맞은 듯 몸이 무거웠지만 편안히 잠을 청할 상황이 아니었다. 어긋난 그 틈이 무엇인지를 확인해야만 했다.
핸드폰의 잠금 설정은 최홍서의 지문으로 간단히 해제되었다. 배경화면과 앱의 배치까지 모든 게 자신의 핸드폰과는 달랐다. 그러나 그런 것을 일일이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우선 인터넷을 실행시킨 최홍서는 검색창에 자신의 이름부터 적어넣어갔다. 하루에도 수십 번, 아니, 어떤 때는 백 번 이상, 강박적으로 검색해 보곤 했던 자신의 이름이었다.
기사는 물론이고 각종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게시물이나 개인의 블로그, SNS에서 오가는 멘션들까지.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훑어봐야만 직성이 풀렸었다. 제 살을 파는 자해인 줄을 알면서도 그 짓을 멈출 수가 없었었다.
최… 홍… 서…
“……”
길지도 않은 이름 석 자를 모두 적어 넣었지만, 쉽사리 검색을 실행시키지 못했다. 이름 뒤에서 깜빡이는 커서를 한참 노려보고 있던 최홍서는 글자를 전부 지워버렸다. 그리고 다른 이름을 입력해 나갔다.
이… 해… 성.
액정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떨리고, 심장의 운동이 빨라졌다.
마른침을 삼키는 목구멍이 불덩이를 넘기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결과가 로딩되는 짧은 시간이 잔인하도록 길게 느껴져, 바싹 말라 껍질이 일어난 아랫입술을 이로 씹어댔다. 자신이 아는 그 이해성의 흔적이이 세상에서 전부 사라져있는 건 아닐지, 그런 두려움이 일었다.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페이지 가장 상단에는 포털사이트에 등록된 공식적 프로필이 게재되어 있었다. 수없이 보아왔던 익숙한 그의 프로필 그대로였다.
이해성. 기업인.
소속, ARA 전자 무선사업부 부사장.
가족, 아버지 이우혁, 어머니 유하영, 할아버지 이강문, 동생 이도연, 동생 이주성
학력, 스탠퍼드 대학교 경영 대학원 경영학 박사과정 수료
아주 기본적인 사항들만 간단히 표기된 프로필 옆에는 조그마한 사진도 첨부되어 있었다.
맨 처음 자신의 방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던 순간. 그때 보았던 사진과 동일했다.
그 사진을 두고 그는 언젠가 불만을 토로했었다. 여의도로 출근하는 샐러리맨 아저씨처럼 나와서 별로라고. 홍보실에서 선택한 사진이라 어쩔 수 없지만 마음에 안 든다고. 약간 쑥스러운 듯이, 감추고 싶은비밀을 들켜 멋쩍어진 소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