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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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소된 혐의들 보니까 죽어도 싼 놈이긴 하더라구요.”

“남이야 죽든 살든, 내 알 바 아니고.”

손을 휘휘 내저으며 커피를 내려놓은 임 대표가 육중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걸쭉한 목소리를 낮추어 용재에게 은근히 물었다.

“나쁜 놈들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조 사장님 쪽에서는? 여전히 아무 움직임도 없으시고?”

.그렇죠, 뭐.”

“자기가 버린 애가 저렇게 돼서 누워있는데, 몇 개월이 되도록 코빼기도 안 보일 수가 있냐? 그게 사람이야?”

혹시라도 남들에게 들릴까 싶어 목소리를 낮춘 상태에서도 임 대표는 표정을 구기고 윽박지르듯 말에 힘을 주었다.

“따지자면 조 사장 때문에 저 지경이 된 거잖냐! 애를 그렇게 단물빠진 껌 뱉듯이 내치지만 않았어도! 혜안이 그 자식이 설마하니 다리에서 뛰어내릴 그런 무서운 생각까지 했겠느냐는 거야!”

조 사장님이었던 호칭은 순식간에 조 사장으로 격하되었다. 말을할수록, 생각할수록 괘씸하다는 듯 임 대표는 콧김까지 뿜어대며 열을올렸다.

“아무리 스폰 관계일 뿐이었다 해도 말이야, 한솥밥만 먹고 살아도정이 드는 게 인간인데. 그러게 내가 재벌이니 뭐니 하는 인간들하고는상종하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말렸는데도 그놈은…”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냐라는 심정에 임 대표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는 컵에서 빨대를 뽑아 버리고 쓴 술이라도 되는 것처럼 벌컥벌컥커피를 들이켰다.

용재가 눈치만 살피는 사이, 임 대표의 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이요란하게 울렸다. 윤혜안이 한때 속해 있었던, 지금은 해체되어 버린그룹 ‘티탄’의 히트곡이었다.

“뭐야, 모르는 번혼데?”

귀찮은 표정으로 중얼거린 임 대표는 높은 볼륨의 음악 소리를 피하기 위해 손바닥으로 왼쪽 귀를 틀어막은 채 전화를 연결했다.

“네, 여보세요. 아, 병원이시군요. 난 또 어디라고.”

윤혜안의 오피스텔을 내놓을 만한 주변 부동산을 검색해 보려 핸드폰을 꺼내 들었던 용재는, 병원이라는 말에 임 대표를 쳐다보았다.

“네, 저 맞습니다. 제가 윤혜안 환자 보호자 임상진입니다. 그런데무슨 일로… 네, 네. 아… 네에??”

점점 표정이 심각해지며 고개를 아래로 수그리던 임 대표가 별안간고개를 높이 쳐들었다. 핏발 선 누런 흰자가 번들거리고, 자재 박스 위를 내리치듯 올려놓은 컵에서 커피가 흘러넘쳐 슈트 소매와 손등을 더럽혔다. 그런데도 그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아니 그게… 대체 어떻게… 언제… 아, 네… 일단 알겠습니다. 여기, 여기가 지금 강남이라 시간은 걸릴 것 같은데… 아무튼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네.”

뜨거운 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펄쩍 뛰었던 임 대표는 전화를 끊은 후에는 귀신에 홀리고 난 뒤처럼 얼이 빠져 움직이지를 않았다. 용재는 혹시라도 병원의 환자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건가 염려스러워졌다. 그는 커다란 덩치를 구부리며 임 대표의 눈치를 살폈다.

“병원인가요?”

“어? 어… 그래, 병원.”

“뭐라고 했길래 그러세요.”

임 대표는 사지가 뻣뻣이 굳기라도 한 듯 목은 그대로 둔 채 눈동자만을 움직여 용재를 돌아보았다.

“혜안이가… 그놈이 글쎄 깨어났단다.”

가장 먼저 본 것은 빛이었다.

어떤 사물도, 사람도 아닌, 그저 빛.

침대 옆으로 길게 이어진 커다란 창으로 풍성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참 하얗고, 그러면서도 투명하고, 아낌이 없는 넉넉함.

잠시나마 천국에 있는 것 같이 마음이 편안했다.

최홍서는 곧 자신이 실재하는 입술로 미소 짓고 있음을 의식했다.

눈알을 굴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불 속에 누운 얄팍한 몸의 부피감이 눈에 들어왔다. 이 장소가 어디인지를 추론해낼 정도의 의식도 가지고 있었다. 어깨까지 얌전히 덮고 있는 이불 위에 파란 글씨로 새겨진 것은 어느 유명 대학병원의 이름이었다.

꿈인가? 이것도 순식간에 뒤바뀌던 여러 장면 중의 하나인가?

아니면, 32층에서 뛰어내렸던… 그 기억이 실은 꿈이었던 건가? 아니, 그건 아니다.

덜컥, 모든 장기가 위쪽으로 쏠리면서 심장이 움찔 수축하던 당시의 감각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충돌의 순간과 동시에, 아픔을 느끼기도 전에 파열되어 사라져버렸던 경험과 함께. 아니, 그것을 경험이라고 할 수 있나?

소름이 끼치고, 이불 속에서 최홍서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어떠한 기적도 32층에서 뛰어내린 사람을 구해낼 수는 없다. 그것은 결코 꿈이 아니었다.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없다. 그럼… 역시 이 순간도 꿈의 연장인가? 이승과 저승 사이의 어딘가에서 나는 계속 표류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지금은 분명 육체를 가지고 있는데?

그 순간, 병실의 문이 열렸다.

“다들 끼니 놓치면서 일하고 있는 거 뻔히 알면서 자기 짬 났다고 혼자만 밥 먹으러 갈 맘이 드냐고.”

투덜거리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하루에 몇번씩 기본적으로 이루어지는 활력 징후 측정을 위해 병실을 찾은 간호사였다.

곧장 침대로 다가온 그녀는 누워있는 최홍서의 손목을 잡아 입원팔찌의 이름과 리스트의 이름을 대조해 체크했다. 그러고는 고막 체온계의 주입 부분을 소독솜으로 닦은 뒤, 체온 측정을 위해 환자의 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 환자를 대상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몇 개월이나 똑같이 진행해온 절차였기에 모든 움직임은 거의 기계적일 정도로 막힘없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먹는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 그래, 넘어가겠지. 밥이 안 넘어갈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으, 으아악!”

얌전히 눈을 감고 있어야 할, 수개월 내내 그래왔던 환자였다. 그런 환자와 눈이 마주친 간호사는 순간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며 괴성을 질렀다. 분명 죽었는데, 죽은 것을 내 눈으로 보고 땅에 묻기까지 했는데.

저도 모르게 왼쪽 가슴을 움켜쥐었던 간호사는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최홍서에게로 허리를 굽혔다.

“환자분, 말씀하실 수 있겠어요?”

최홍서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와 소통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율로 다가왔다.

“무리는 하지 마시고 대답해 주세요. 언제 깨어나셨어요?”

“아마… 5분 정도.”

목소리는 건조하게 갈라져 있었지만, 말하기가 고통스러운 정도는아니었다.

당황에서 완전히 벗어난 간호사는 빠르고 정확한 움직임으로 환자의 상태를 체크해 나갔다.

“불편하신 곳은요?”

최홍서는 고개를 저었다. 간호사는 밝은 얼굴로 최홍서를 안심시켰다.

“체온, 맥박, 호흡, 혈압… 전부 정상이세요. 정말 애쓰셨어요. 곧담당 선생님 모셔 올게요.”

출입문 쪽으로 빠르게 걸어가던 그녀는 다시 환자를 돌아보았다.

“정말 잘 돌아오셨어요, 혜안 씨.”

간호사가 남기고 간 마지막 말에 최홍서의 마음에는 어떠한 틈이벌어졌다. 꼭 들어맞지 않는 뒤틀린 문과 문틀 사이처럼, 짝이 맞지 않는 열쇠와 열쇠 구멍 사이처럼. 무언가가 어긋나 있었다. 그녀가 떠나고 난 뒤, 최홍서는 그 어긋난 틈 사이에 갇혀버린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틈은 담당의가 도착한 뒤 점점 더 넓게 벌어졌다.

환자의 안정을 위해 간호사 한 명만을 대동하고 찾아온 의사는 병실 안에서 할 수 있는 기본적인 검사들을 시행했다.

눈만 겨우 깜빡거릴 수 있는 사람부터, 한숨 자고 일어난 것처럼 곧바로 일상생활이 가능한 사람까지. 의사는 의식 불명 상태에서 깨어난환자들의 상태는 천차만별이라고 설명했다. 최홍서는 비교적 컨디션이아주 좋은 편이었다. 완전하게 정상적이지는 않았어도, 영화 <킬 빌 (KiII Bill)〉의 우마 서먼처럼 엄지발가락부터 하나씩 움직여야 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가벼운 스트레칭 후 발을 디디고 서서, 병실 안을 천천히한 바퀴 걸을 수도 있었다.

그 시체가 살아 되돌아온 것이라도 목격한 듯 놀란 것이다.

“아주 훌륭합니다. 혜안 씨는 그동안 호흡도 편안하셨고, 사고 당시에 얻은 신체적인 손상도 거의 회복이 되셨으니까요. 하지만 오늘은 일단 안정을 취하시는 게 좋아요. 내일부터 조금씩 재활에 들어가죠. 절대로 무리하게 움직이려고 하지 마세요. 아시겠죠?”

환자의 안정을 위해 다들 침착한 태도를 보이고 있긴 해도, 의사와 간호사 모두 흥분을 억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적을 목격한 환희와 감격에 젖은 그들을 둘러보면서 정작 최홍서는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32층에서 떨어졌다.

살아남았을 리가 없고, 살아남았다 한들 이렇게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지금의 자신은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던 순간처럼 영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피가 흐르고 살이 만져지는 명백한 현실의 존재였다.

그들이 하라는 대로 앉고, 서고, 걸으면서도 최홍서는 바로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식사도 내일부터 천천히 시작하시고, 오늘은 시간 맞춰서 물부터 조금씩 드시죠. 보호자분께도 연락해 두셨다고 하니까 혜안 씨 보시러 곧 도착하실 겁니다.”

“선생님.”

“네.”

침대에 다시 누워있는 최홍서를 내려다보는 담당의의 표정은 온화했다.

“제 이름이…”

“……”

희망에 차 있던 두 사람의 표정에 순간적으로 어둠이 스쳤다. 담당의는 애써 동요를 숨기고 차분히 환자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이름이 기억이 안 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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