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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5. 오래된 마음 (13/13)
  • 외전 5. 오래된 마음

    서이호의 팀은 그해 한국 시리즈 진출에는 성공했지만 우승까지는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성공적인 결과라고 다들 입을 모아 얘기했다.

    서이호의 팀은 매해가 갈수록 승승장구를 했다. 다음 해엔 우승, 그해 서이호는 골든 글러브까지 수상했다. 또다시 서이호에게 전성기가 찾아왔다며 다들 입을 모았다. 누군가는 그건 전성기가 아니라 그저 상태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의견에 가장 크게 동의한 사람은 물론 최다윤이었다.

    그사이 다윤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다. 다윤이 만든 영화는 작은 영화제에서 상영회를 열었다.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몇몇 사람들의 마음에 울림을 주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다윤은 영화 제작 작업이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후 졸업을 하고, 다윤은 아르바이트 생활을 청산하고 바로 회사에 들어갔다. 그 회사가 바로 서하의 선 엔터테인먼트였다.

    “형, 아니, 대표님.”

    “그냥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형, 혹시 형은 돈이 엄청 많아?”

    “응, 나 부자야. 그러니까 네 월급도 주지, 몰랐어?”

    서하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다윤은 이 작은 사무실에 있는 유일한 자신의 공간에 앉아 그런 서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가끔 시나리오를 쓰기도 하고, 소설을 쓰기도 하고, 서하가 하는 책이나 다른 콘텐츠 제작 사업에도 함께하는 게 제 일이었다. 그 모든 것들이 그다지 돈은 크게 되지 않는 일이었는데 서하는 늘 여유로웠고 제 월급도 일반 직장인 초봉을 훨씬 뛰어넘는 돈까지 챙겨 준다는 게 늘 의아했다.

    “여기 회사를 키우고 싶은 마음은 없어?”

    “딱 이만큼이 좋아.”

    서하는 그렇게 말하며 나른하게 웃었다. 지금의 상태가 좋다면서 다윤은 그런 서하를 보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정말 서하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굴러가는 회사. 정말 서하다운 회사였다.

    요즘 서하는 알게 모르게 전과 다르게 더 여유로워진 느낌이었다. 물론 제 기분 탓일 수도 있다. 서하는 늘 그렇듯이 여유로웠으니.

    다윤은 서하에게서 시선을 돌려 컴퓨터 화면을 바라봤다. 모니터 화면에는 다윤이 아주 오래전부터 고민해 왔던 일이 검색창 위에 떠 있었다.

    마음은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확고해졌다. 문제는 이걸 서이호에게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하는 것이었다. 일단 화면을 끄고 다윤은 다시 한글 파일을 열었다. 회사에선 일을 해야지, 그래야지 서하 형 회사에 적자가 안 나지. 서하보다 이 회사에 더 책임감을 가지게 된 다윤이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일에 집중했다. 정작 서하는 딴생각에 푹 빠져 있다는 걸 모르고 말이다.

    * * *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마음이 더 깊어만 간다는 것이 이호로서는 신기할 따름이다. 사람의 마음과 관계라는 건 늘 한결같을 수 없다는 것이 다윤을 좋아하기 전 서이호의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곧 다가올 천 일이 이호에게는 더 애틋하게 느껴졌다. 물론 앞으로 더 많은 날들이 있겠지만, 다윤과 함께해 온 천 일이라는 시간을 기념하고 싶었고,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한테 자랑을 하는 거냐, 지금? 얼마 전에 대차게 까인 나한테?”

    “응.”

    이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씩 웃었다. 얄미운 그 웃음에 민우가 에라이, 하며 이호에게 먹던 오징어포를 집어 던졌다. 더욱더 얄밉게도 이호는 살짝 머리만 옆으로 기울여서 오징어포를 피했다. 얄미운 놈이라고 중얼거리며 민우가 오징어를 씹었다.

    이번 시즌도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두 사람은 휴식기를 맞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작년에 정규 시즌을 채웠고, 이호에게는 재작년부터 해외 오퍼가 꾸준히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다들 예상했듯이 메이저 리그로 향할 거라는 기대를 무너뜨리고 아직까지 유니콘즈에 남아 경기를 뛰고 있었다.

    민우야 아직 스스로 판단하기에 역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여기에 남아 조금 더 단련하고 싶어서 그렇다지만, 서이호의 이유는 달랐다. 그는 그저 가기 싫다고 했다. 자신의 연인과 헤어지는 게 싫어서.

    벌써 다윤과 이호가 연인으로서 함께한 지도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전에는 친구였다고 들었으니 친구였던 시간까지 합치면 꽤나 많은 시간을 함께했는데, 저리도 좋을까 싶었다. 그는 늘 매 순간 새롭게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굴었으니까.

    “그렇게 좋냐?”

    “어, 좋아.”

    “신기하다, 그 정도 만나면 권태기가 올 법도 한데.”

    “권태기?”

    이호가 그 단어는 아예 생각해 본 적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민우는 그걸 너무 쉽게 생각할 게 아니라며 감자튀김으로 향하려던 젓가락을 이호 쪽으로 들이대며 말했다.

    “원래 익숙해지면 소중한지 잘 모르는 법이거든. 너네는 또 동거도 오래 했으니까, 혹시 모르잖아. 다윤이 걘 그렇게 느끼고 있을지.”

    민우의 말에 이호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자신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다윤만 보면 아직도 뜨거워지는 아랫도리가 그랬고, 매 순간 함께 있고 싶어서 늘 안달 나는 마음이 그랬다. 그런데…… 다윤의 마음도 그렇다고 장담할 수 있나?

    솔직히 말해서 다윤이 저를 먼저 좋아한 건 맞지만 마음의 깊이를 굳이 지금 따지자면 제가 더 깊이 좋아하고 있는 건 맞다. 늘 먼저 연락하고, 닿지 못해 안달 나서 껴안고 달려드는 쪽은 저였으니까. 그러면 못 이기겠다는 듯이 다윤은 받아 주곤 하니까.

    물론 그걸 불만이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최다윤은 그런 게 또 귀엽기도 하고, 어차피 이미 사귀는 마당에 좋아하는 마음의 크기를 따질 필요도 전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권태기라…….

    “너, 불안하구나. 그치?”

    문득 저도 모르게 불안해져서 손가락을 탁자 위로 몇 번 튕기자 민우가 씩 웃으며 말했다. 이호가 그런 민우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좋냐, 불안해서?”

    “아니, 뭐, 좋다기보다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줄 알았는데 의외기도 하고.”

    민우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런 민우를 보며 이호가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좋아하는 마음의 크기를 따지자면 늘 내가 더 크다고 자부할 수 있어. 그래서 그런 거야. 다윤이가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그 마음이 나보다 덜한 건 맞으니까.”

    “그 말 진짜 닭살인 거 알지? 야, 그건 네 다윤이한테나 가서 얘기해!”

    민우가 짜증 난다는 듯이 테이블에 있던 팝콘을 이호에게 던지고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얄미운 놈, 안 그래도 며칠 전 차인 친구 앞에서 저렇게 닭살을 떠는 건 대체 뭐냔 말이다.

    “아, 윤이 연락 왔다.”

    “뭐? 야, 아직 다 안 먹었잖아.”

    “너 혼자 다 먹고 가, 간다.”

    친구 따위 어떻게 되든지 신경도 안 쓰고 이호는 휴대폰이 울리자마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겼다. 그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쌩 하니 나가 버렸다.

    “어휴, 내 처지야.”

    친구에게도 버림받고, 애인에게도 버림받고, 나는 어디로 가나. 답답함에 가슴을 마구 치며 민우가 남은 맥주를 들이켰다. 속상하니까 소주나 더 시켜야겠다. 사실 혼술을 좋아하기에 서이호가 계속 있든 말든 그다지 상관이 없는 민우였다.

    이호는 차에 올라타 다윤이 문자 보낸 가게로 향했다. 이러려고 민우가 술을 마실 때 저는 꾹 참고 있었던 거다. 다윤이를 데리러 가려고.

    다윤도 오늘 세아와 저녁 약속이 있다길래 끝나고 만나기로 했다. 다윤이는 술이 취하면 몸이 나른해지니까 대중교통보다는 차로 이동하는 게 훨씬 편할 것 같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데리러 가겠다고 한 거고.

    빠르게 달려 다윤이 알려 준 장소에 도착했다. 이제 막 파장 분위기인 듯, 안에서 지갑과 가방을 정리하고 앉아 있는 다윤과 세아 쪽으로 이호가 다가섰다. 다윤의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보자마자 이호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그래서, 사실 정말 어떻게 이호한테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어.”

    다윤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이호가 저도 모르게 우뚝 멈춰 섰다. 다윤과 정면에 앉은 세아와 이호의 눈이 마주쳤는데 이호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그, 그러니까 왜 망설여지는데? 서이호 걔야 잘 얘기하면…….”

    “솔직히 쉬운 일은 아니잖아, 결정하기에. 걔 마음은 어떨지 나는 자세히 모르고, 근데 이미 난 확고한 상태라…….”

    이호가 주먹을 꽉 쥐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거지. 설마…….

    “걔는 작년에 나 때문에 해외 오퍼 오는 것도 다 포기했는데. 걔 마음이 깊다는 걸 너무 잘 알아서 더 고민이야. 혹시라도 서로 마음이 달라서 그러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상황이 이어지면…… 난 그것만큼 안 좋은 것도 없다고 생각하거든.”

    저렇게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다윤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다윤의 얘기들은 모두 이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까 민우에게서 들은 되도 않는 권태기라는 그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말들.

    이제 그만, 그만 말해. 이호가 그렇게 생각하며 다윤 쪽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다윤도 고개를 돌렸다.

    “……어, 이호야. 너 우리 얘기하는 거 들었어?”

    다윤의 당황해하는 표정에 이호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애써 웃으며 거짓말을 했다. 아무것도 못 들었다고.

    “진짜?”

    다윤이 의심스럽다는 얼굴로 이호와 세아를 번갈아 봤다. 왜 이호가 왔는데도 알려 주지 않았냐고 타박하는 듯한 눈빛을 받으며 세아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금방 왔는데, 무슨 얘기를 했길래?”

    “……진짜 금방 온 거야?”

    “응, 무슨 얘기 했어?”

    “아냐, 아무것도.”

    이호가 태연하게 다윤의 옆에 앉아서 묻자 다윤이 그제야 안심한 듯 고개를 저었다. 방금 다윤이 한 얘기를 이호는 최대한 모르는 척해야 했다. 얘기를 피하고 싶다면 차라리 못 들은 척하는 게 가장 효율적일 테니까.

    이호가 아무렇지 않게 다윤을 보며 평소처럼 태연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편에 드는 불안한 마음은 끊이지 않고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세아를 집에 데려다주고 차에 둘만 남게 되자 이호가 다윤을 덥석 끌어안았다. 나른한 술기운 때문에 온몸이 시트 위에 노곤노곤하게 녹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던 다윤이 갑작스러운 이호의 스킨십에 놀란 듯 살짝 몸을 움츠렸다. 그것마저도 싫다는 몸의 저항으로 느껴져서 이호는 다윤을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왜 그래, 우리 뭉청이.”

    “……한 번만 더 불러 봐.”

    “뭐? 뭉청이라고?”

    “응, 나 그 애칭 좋아.”

    “너도 참 특이하다. 너 멍청하다는 게 듣기 좋아?”

    다윤이 나른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이호가 나직하게 웃었다. 응, 너무 좋아. 네가 나를 그렇게 불러 주면 너랑 나 사이에 느껴지는 거리감이 아무것도 없는 느낌이야.

    그러니 다윤이 계속해서 저를 그렇게 불러 줬으면 했다. 지금 다윤을 어떻게든 꽉 끌어안아도 알게 모르게 두 사람 사이에 거리감 같은 게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하여간 귀여운 놈…….”

    다윤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살짝 이호의 머리카락에 부볐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와 행동이었지만 이호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불안함을 감추려 애써 다윤의 얼굴에 입을 맞추고, 통통한 입술에도 깊이 입을 맞추려던 순간이었다. 다윤이 손을 들어 올려 이호와 제 사이를 막았다.

    “……왜?”

    “나 오늘 마늘 엄청 먹었어.”

    입에서 마늘 냄새 심하게 날 거야, 안 돼. 집 가서 양치하고 하자, 응?

    다윤이 달래듯 하는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물론 평소에도 술 마시고 키스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다윤이었지만 지금은 한 생각에 오래 머물고 있었기에 다른 쪽으로 생각할 틈이 없었다. 혹시, 그냥 저랑 키스하는 게 싫어서 그런 건 아닌지.

    “너, 무슨 생각 해?”

    다윤이 심각해진 얼굴로 제 옷자락을 꾹 쥐고 있는 서이호 앞에 얼굴을 가져다 대며 물었다. 그제야 이호가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다윤 쪽으로 돌리고 씩 웃었다. 평소처럼 괜찮다고, 키스하자고 졸라 대지도 않고 이호가 다윤의 입에 쪽, 하고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알겠어, 얼른 집으로 가자.”

    평소와 다른 이호의 분위기에 다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정말 아까 세아랑 한 얘기를 들은 건 아닌지 조금 걱정도 됐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그런 얘기를 들으면 불편할 수도 있는데.

    다윤은 집으로 가는 내내 제가 혹시 그 얘기를 제대로 들었는지 이호의 눈치를 살폈지만, 이호는 그저 아무 말 없이 운전을 할 뿐이었다. 하긴, 서이호가 들었으면 지금 얌전히 있을 리가 없다. 분명 긍정이나 부정의 대답 중 하나를 하고도 남았겠지. 다윤은 그런 생각을 하며 창밖을 봤다. 그 얘기를 정말 어떻게 꺼내는 게 좋으려나 고민이 됐다. 아무래도 조금 떠보는 게 좋을 듯싶었다.

    이를 닦다가 갑자기 입을 맞추긴 했어도, 서이호는 평소와 비슷했다. 그냥 조금 더 진득해진 게 차이라면 차이였다. 한시도 떨어지지를 않으려고 하고, 그런데 그 모든 행동이 평소 하는 행동이었기에 다윤은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두 사람은 나란히 이를 닦고, 아까 못한 입맞춤을 마저 했다. 원래는 나가서 하려고 했는데 칫솔을 내려놓자마자 달려드는 서이호 때문에 차마 나가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키스에서는 화한 치약 향이 났다. 그 향기가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럽게 느껴지는 게 좋아서 다윤은 웃었다. 늘 그렇듯 다정한 키스였는데, 조금 더 애절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서 손을 들어 올려 이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마치 위로해 주듯이.

    그 위로를 느낀 건지 아니면 느끼지 못한 건지, 이호는 조금 더 고개를 내려 깊숙이 다윤의 입 안쪽에 제 혀를 더 밀어 넣었다. 입 안의 점막을 훑고, 혀를 마치 무언가 갈구하듯 감싸는 행위에 다윤은 저도 모르게 낮게 신음하며 머리를 뒤로 물리려 했다. 그러자 이호의 커다란 손바닥이 제 뒤통수를 눌렀다. 마치 도망가지 말라는 듯이.

    “……너 무슨 일 있지.”

    “……아니.”

    낮게 신음을 참으며 다윤이 물어도 이호는 고개를 저으며 다윤의 윗옷을 벗겼다. 그러고는 늘 그렇듯 어깨와 가슴 위에 제 흔적을 만들어 갔다. 늘 하는 입질 같은 거라서 평소와 같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민우랑 혹시 무슨 얘기를 한 건 아닐까. 혹시…… 작년에 왔던 해외 오퍼를 모두 거절했던 걸 후회하고 있다거나……. 다윤은 욕조에 걸쳐 있던 손을 들어 이호의 한쪽 얼굴에 가져다 대고 제 쪽으로 올렸다. 늘 싱글벙글 웃고 있던 눈동자가 오늘은 어딘지 모르게 시무룩한 게 확연히 느껴졌다.

    “……민우랑 무슨 얘기 하고 왔어?”

    “…….”

    “너, 혹시 해외 오퍼 거절한 거 후회해?”

    “아니.”

    절대 아니라는 듯이 이호가 고개를 저었다. 방금의 시무룩한 얼굴과는 다르게 단호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혹시 다른 기색이 있나 하고 저를 쳐다보는 다윤의 눈동자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이호가 말했다.

    “후회 안 해. 난 야구보다 네가 더 중요해.”

    “……난 괜찮아. 네가 가고 싶다고 하면…….”

    “싫어.”

    헤어지기 싫어.

    이호가 제 어깨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부비며 말했다. 메이저 리그로 간다고 해서 헤어지자고 하는 건 아닌데. 물론 다윤도 이호가 가는 게 싫었으니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 네가 괜찮다고 하면 정말 괜찮은 거겠지, 하고 애써 생각하면서.

    이호가 저를 번쩍 들고 안아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평소처럼 바짓단에 손을 대는 순간이었다.

    “이호야, 오늘은 나 피곤한데 그냥 안고 자면 안 될까.”

    다윤이 미안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고 이호의 입에 입을 맞췄다. 정말로 머릿속이 온통 복잡해서 일찍 잠들고 싶었다. 물론 그래도 이호가 하고 싶다고 한다면 할 의향이 있긴 하지만.

    평소처럼 하고 싶다며 보채 올 줄 알았는데, 이호는 이번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웬일로 이런 데서 말을 이렇게 잘 듣지 싶어서 다윤이 웃었다.

    “고마워.”

    이호의 얼굴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다윤은 그를 꽉 끌어안았다. 이호는 그런 다윤을 말없이 끌어안았다. 다윤은 몰랐다. 이호가 어떤 식으로 땅을 파고 있는지. 전혀 말이다.

    * * *

    이호는 일어나자마자 제 손안에 느껴지는 어떤 감촉을 느끼려 했으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음에 서늘함을 느끼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 옆에 누워 있어야 할 제 연인이 없었다.

    어제 내내 내심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다윤이 저를 예전처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잤다. 그런데 일어나자마자 손에 닿는 곳에 없다니.

    혹시 어디 나갔나 싶어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가니 다윤이 노트북을 켜서 무언가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호를 보자마자 놀란 눈동자로 급하게 노트북을 닫았다.

    “뭐 하고 있었어?”

    “응? 아무것도 아니야. 잠깐 서하 형이 뭐 자료 좀 보내 달라고 그래서.”

    그런데 왜 그렇게 급하게 닫았어? 마치 내가 보면 안 되는 것처럼.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윤의 얼굴에서 아차 하는 기색이 떠오르거나 무언가 찔린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 어젯밤 내내 걱정했던 그 일이 현실이 될까 봐 두려워서였다.

    “참, 냉장고에 먹을 거 하나도 없던데, 내가 나가서 재료라도 사 올게.”

    “같이 가.”

    “아냐, 맨날 네가 요리해 주는데 장 보는 거라도 내가…….”

    “같이 가자, 윤아. 응?”

    평소처럼 치대듯이 다가와서 칭얼거리는 투가 아니라 조금 더 애절하게 제 손끝을 살짝 붙들고 말하는 이호를 올려다보며 다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돌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다윤을 보는 이호의 시선이 더 근심으로 물들었다.

    각자 서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두 사람은 나란히 차를 타고 마트로 향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대화와 행동이었다. 그런데 다윤의 사소한 변화도 잘 알아채는 이호는 알 수 있었다. 다윤이 평소와 달리 조금 어색하다는 걸.

    “뭐 먹고 싶어, 다 해 줄게.”

    그래서 이호는 부러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려 애썼다. 저 또한 이상하게 행동해 버리면 관계가 완전히 어그러질까 봐 무서웠으니까. 다행히 다윤은 눈치채지 못하고 이호를 보며 씩 웃으며 말했다.

    “카레 먹고 싶어. 당근이랑 감자 크게 썰어서.”

    “그래, 해 줄게.”

    “맛있겠다.”

    주말 늦은 점심에 카레라니, 다윤의 들뜬 얼굴에 이호도 그제야 씩 웃었다. 이호가 당근과 감자를 몇 개 신중하게 골랐다. 다윤이 먹을 카레니까 더 싱싱하고 맛있는 재료가 필요했다. 마치 타석에 서서 공을 고르는 것처럼 신중한 얼굴로 당근과 감자를 고른 이호가 다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윤아, 가자.”

    “…….”

    “윤아?”

    “어, 어 응. 그래, 가자.”

    잠시 멍하니 무언가를 보고 있던 다윤이 고개를 돌려 이호를 쳐다봤다. 이호도 고개를 돌려 다윤이 한참을 보고 있던 곳을 봤다.

    아기였다. 카트 위에 얌전히 앉아 있는 아기는 아이스크림 하나를 들고 손에 잔뜩 묻히며 자신의 부모를 보고 있었다. 남자, 여자, 그리고 아기. 이호는 다시 다윤을 봤다. 다윤이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뭐 해, 가자며.”

    “……응.”

    혹시나 하는 불안감들을 계속 감추려고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내내 마음에 오랫동안 자리 잡았다. 혹시나 다윤이 그런 것을 원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남들이 전형적이라고 생각하는 가족의 형태를. 자신은 절대 다윤에게 줄 수 없는 것을.

    그런 게 아닐 거라고 애써 생각했다. 그래, 아닐 거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

    * * *

    “나 어떡해…….”

    시호가 혀를 쯧쯧 차며 제 남동생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머리를 잔뜩 쥐어 싸매고 있는 남동생이 진심으로 한심해 보였다.

    “나 진짜 어떡하지. 다윤이가 나한테 헤어지자고 하면 난…….”

    “미친놈아, 그럴 일 없다고 내가 몇 번을 얘기해?”

    시호가 옆에 있던 쿠션을 이호에게 던졌다. 그 쿠션을 정면으로 맞고도 이호는 여전히 시무룩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그 앞에 쌓인 맥주와 소주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다윤이가 그럴 애냐? 얼마 전에 둘이 집에 놀러 와서 내 염장을 그렇게 지르고 가더니, 그사이에 다윤이가 그럴 리가 있냐고.”

    “내가 윤이 더 잘 알아. 조금만 달라져도 금방 알아챈다고.”

    시무룩한 목소리와 얼굴이 완전히 버림받은 강아지 꼴이었다. 하여간, 웬일로 제 집에 왔나 했더니만 쓸데없는 일로 하소연이나 하려고 온 게 역시 맞았다는 생각에 시호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호는 꽤나 진지하게 다윤이 정말로 제게 질린 것 같다고 얘기했지만, 시호는 그게 너무나 쓸데없는 고민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 이유를 말해 주기 위해 시호가 가볍게 탁자를 탁, 쳤다.

    “잘 들어, 이 멍청한 동생 새끼야.”

    “…….”

    “다윤이 너 진짜 오랫동안 좋아했어. 넌 기억도 못 했던 애기 때부터 너만 쭉 좋아한 애라고 걔가. 그런 애가 너 싫어졌으면 진작 그 찌질했던 중학생 시절 때 싫어하지, 왜 지금 와서 그렇게 푹 식을 거라고 생각하냐고. 걔가 그럴 애야? 아니라는 걸 잘 알잖아.”

    “…알아, 아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내가 다윤이에게 줄 수 없는 게 너무 많잖아. 다윤이가 그런 걸 가지고 싶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해?

    이호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이 생각은 저번 주말 같이 마트에 다녀온 뒤 싹트기 시작했고, 다윤의 작은 행동들에 의해서 견고해졌다. TV를 보면서 아기들이 나오는 걸 빤히 본다거나 아기들만 지나가면 멍해지는 얼굴 같은 것이 그랬다.

    “천 일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다윤이가 나를 좋아해 준 시간은 그것보다 더 길어. 지금 와서 다윤이가 나를 전처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 내가 할 말이 없는 것도 알잖아.”

    시호가 멈칫했다. 정말 진지하게 푹 한숨을 쉬며 고민하는 동생을 보자니 확실히 심각하긴 한가 싶었다. 물론 다윤이가 그럴 리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쓸데없는 일 가지고 저렇게 고민할 놈도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서시호.”

    “취했냐? 이게 어디서 반말이야.”

    “……누나.”

    “왜.”

    “나 옛날에 진짜 쓰레기같이 살 때, 나 좋아해 준 사람들한테 그렇게 막 대했던 게 이제 와서 후회되는 거 알아?”

    이호가 그런 말을 하며 피식 웃었다. 자기가 그런 일을 회상하며 후회하게 될 줄은 몰랐다. 좋아하는 마음을 거절당하는 일이 이토록 마음 아픈 일이었다면 그렇게 쓰레기같이 살지 말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모두 자업자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이호가 탁자 위에 놓인 맥주를 한 입 더 들이켰다. 그사이 시호가 눈치껏 빠져나가고 이호는 앞에 있는 술을 더 들이켰다. 술이 취하지도 않는 제 몸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쓸데없이 술은 세 가지고.

    이번 년도 들어 가장 시즌 성적이 좋았고, 여러 상까지 수상한 이호는 사랑하는 다윤과 함께 남부러울 것 없이 사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던 얼마 전의 저를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뭘 가지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고 그런 한심한 생각이라니, 전 아직도 한참이나 멀었다.

    “……이게 다 뭐야.”

    다윤이 한숨을 쉬며 이호를 내려다봤다. 탁자 아래위로 쌓인 맥주병과 소주병들이 지금 서이호가 왜 탁자 위에 쓰러져 있는지를 증명해 주고 있었다.

    “아까 내내 계속 혼자 처마시다가 지금 뻗은 거야, 그 새끼.”

    “……대체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걔가 그럴 일이 뭐 있겠니, 야구 아니면 다윤이 너뿐인데.”

    다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야구 문제는 당연히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 끝난 시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니까. 그러니 문제는 저인데, 저와 서이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다고 이렇게 뻗어 버린 걸까.

    “다윤아, 너 혹시…… 아기 가지고 싶어?”

    시호의 말에 이호에게로 뻗는 다윤의 손이 멈칫했다.

    “……그, 어떻게 알았어요, 누나?”

    “진짜야? 그래서 서이호랑 헤어지려고 한 거야?”

    “네? 그건 무슨, 아니,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이 물음에는 다윤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시호가 대체 무슨 일이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윤은 시호를 한 번, 그리고 쓰러져 잠든 이호를 번갈아 봤다. 제가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서이호가 아무래도 단단히 오해를 한 듯했다.

    이호가 끔벅끔벅 눈을 떴다. 그 희미한 사이로 다윤이 보였다. 다윤이 낑낑거리며 제 팔을 어깨 위로 올리고 문 앞에 서서 번호 키를 누르고 있었다. 삑, 삑, 삑, 삑 하는 소리가 들리고 두 사람이 함께 사는 집 문이 열렸다.

    “다 왔다, 하, 진짜 힘들어 죽는 줄- 어, 깼어?”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저를 빤히 보고 있는 이호의 시선에 다윤이 고개를 들어 이호를 봤다. 좀 더 일찍 깨면 좋았을까. 하다못해 택시에서 내린 직후라도. 다윤이 원망의 눈빛으로 이호를 올려다보는 순간, 그가 갑자기 제게 달려들었다.

    “어, 어!”

    쿵, 하고 다윤이 신발도 차마 벗지 못하고 현관 바로 뒤로 쓰러졌다. 다행히 두 팔로 저를 꽉 끌어안고 있는 서이호 덕분에 완전히 뒤로 넘어간 건 아니어서 아프진 않았지만 당황스러웠다.

    “윤아, 나 버리지 마.”

    물기를 가득 머금은 이호의 목소리에 다윤이 작게 숨을 내뱉었다. 솔직히 잔뜩 슬픔에 절어 있는 서이호를 두고 이런 생각을 해도 되나 싶었는데…… 정말 귀여웠다. 제가 혹시나 저를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술을 잔뜩 먹고 취해서 끙끙거리는 게. 눈은 눈물에 젖어 반짝반짝 빛나고, 버리지 말라며 울먹거리는 목소리는 또 어찌나 귀여운지. 제 안에 이런 이상한 가학성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다윤은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이호의 등을 감싸며 말했다.

    “내가 널 왜 버려.”

    “버릴 거잖아. 그럴 거잖아.”

    “안 그래, 뭉청아. 넌 대체…….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다윤이 이호의 등을 가볍게 쳤다. 그런 제 행동에도 아랑곳 않고 이호가 다윤의 품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허리에 두른 팔은 더 힘을 주어 제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다윤은 그런 이호를 진정시키려 몸에서 힘을 뺐다. 그러자 이호의 몸에서도 나른하게 힘이 빠지는 게 느껴져서 다윤은 그제야 이호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서이호, 내일 얘기하자. 응? 너 술 깨면…….”

    “나 너 없으면 이제 못 살아.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 없이 못 산다고 할 때 한심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아니야. 나한테 이제 네가 전부야, 그러니까 윤아, 나 버리지 마.”

    “서이호.”

    또다시 횡설수설하는 이호를 탁, 하고 얼굴을 감쌌다. 횡설수설하던 이호가 단호한 다윤의 얼굴에 시무룩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다윤이 저를 제대로 쳐다보라는 듯이 이호의 얼굴을 꽉 붙잡았다.

    “너 먼저 좋아한 것도 나고, 더 많이 좋아한 것도 나야. 내 마음 절대 단순하게 보지 마.”

    다윤의 눈동자는 짙고 진지했다. 이호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가늠할 수 없는 마음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마음이라는 것. 제가 얼마나 한심하게 굴었는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런데도 걱정되는 것이 있었다. 이호가 다윤의 얼굴을 붙잡아 제 쪽으로 가까이 대고 코끝을 마주 대며 물었다.

    “……윤아, 그럼, 아기는?”

    “…….”

    “아이 가지고 싶은 거 아니야? 내가 줄 수 없는 거잖아. 그건 어떻게 해?”

    제 얼굴 가까이 와서는 애절하게 묻는 그 얼굴에 다윤은 한숨을 쉬었다. 이건 분명 모두 제 탓이었다. 뜸을 들이다가 결국 서이호가 이상한 데로 땅굴을 파게 만든, 제 탓.

    “그건…… 좀 더 고민하다가 얘기하려고 했는데…….”

    “싫어, 안 헤어질래.”

    “무슨 헛소리야. 자꾸.”

    제 얘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덥석 그렇게 말하는 이호의 이마를 탁 쳤다. 꽤 세게 맞았는데도 아프지도 않은지 이호가 또다시 울먹이는 얼굴로 다윤을 봤다. 마치 저를 버리지 말라고 애절하게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이건, 진짜 내일 얘기하면 안 돼? 너 술 취한 것 같고, 좀 더 진지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나 하나도 안 취했어. 알잖아.”

    하긴, 서이호는 도통 술에 취하는 법이 없었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잠깐 자다가 일어나면 금방 멀쩡해지는 것도. 그렇지만 이 얘기는 이렇게 현관에 널브러져서 신발도 제대로 벗지 않고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럼 일단 자세라도 좀 제대로 하자는 마음에 다윤이 낑낑거리며 제 신발을 그리고 이호의 신발을 벗겼다. 그리고 현관에 나란히 앉아서 이호를 쳐다보며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진짜 예전부터, 아주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던 거야.”

    “…….”

    “그래도…… 그래도 이호야, 난 이 일보다 네가 더 좋아. 그러니까 네가 싫으면 바로 싫다고 말해도 좋아. 혹시라도 나 때문에 억지로 그러거나 하지 않아도 되니까…….”

    “윤아.”

    저도 모르게 자꾸 말이 횡설수설 튀어나왔다. 내내 고민했던 말들이었다. 다윤은 저를 부르는 이호의 목소리에 말을 멈췄다. 마치 다 괜찮다고 말해 주는 듯한 그 목소리에 다윤이 피식 한숨 쉬듯 웃었다.

    “……나 말이야, 우리 엄마 아빠가 했던 대로 똑같이 누군가를 사랑으로 구원해 주고 싶어.”

    “…….”

    “나같이 버림받았던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는 말이야.”

    다윤은 그렇게 말하고 설핏 웃었다. 그의 웃음을 보자니 이호는 순간 온몸에서 긴장이 탁 풀리는 걸 느꼈다.

    “어렵고 책임감이 따르는 일이라는 거 잘 알아. 당장 바로 힘들다는 것도. 그런데 지금 이렇게 너한테 얘기하는 건…… 나만큼 네 마음이 단단하고 깊다는 걸 더 잘 알게 되어서 그래.”

    아마 메이저 리그 진출을 포기했을 때 얘기를 하는 듯했다. 그때 다윤은 정말 괜찮겠냐고 물어보면서 복잡한 얼굴을 했었다. 자기 때문에 더 좋은 기회를 포기하는 건 아니냐며 고민하는 다윤을 보며 이호는 내심 기뻤다. 다윤이 그런 식으로라도 저와의 관계에서 조금 더 무거움을 느낀다면 저를 쉽게 떠나가거나 버리지 못할 테니까.

    그런데 다윤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그것도 모르고 저는 얼마나 땅을 파고 있었던 거지. 다윤은 역시…… 저와는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다. 바보 같고, 어리석은 서이호와 달리 다윤은 어른스럽고 완벽했다.

    “근데, 네가 싫다고 하면 안 해. 난 다른 무엇보다 네가 중요하니까. 나랑 앞으로 평생 같이 살 서이호가 내려 줄 문제야.”

    “윤아, 나는…….”

    “…….”

    “나는 네가 뭘 하든 네 뜻을 존중하고 따를 거야. 나랑 헤어지자는 것만 아니면 뭐든 할 수 있어.”

    “…….”

    “네가 원하면 그렇게 해. 네 오래된 꿈을 나 때문에 포기하게 만드는 건 싫어.”

    이호의 말에 다윤이 어색하게 웃었다. 차마 이호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면서 미안함이 담긴 미소로 다윤이 중얼거렸다.

    “……나는 네 꿈을 포기하게 만들었는데, 그래도 괜찮아?”

    “그게 무슨 소리야.”

    “메이저 리그 가는 거, 나 때문에 포기한 거잖아.”

    내내 마음에 걸리는 문제였다. 제가 훨훨 날 수 있는 서이호의 야구 인생을 꺾어 버린 건 아닌지. 한국에만 있기에는 너무나 큰 사람을 억지로 붙들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 그는 저를 위해 모든 걸 해 주겠다는데, 저는 그런 사람의 꿈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게 내 꿈이라고 누가 그래?”

    순간 이호의 말에 다윤이 슬쩍 눈을 돌려 이호를 봤다. 씩 웃고 있는 그는 저보다 더 어른스러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이호가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 두 입술이 맞닿았다. 다윤의 통통한 아랫입술을 이호가 혀를 살짝 내밀어 부드럽게 핥았다. 마치 사랑한다고 말하듯이. 그 사랑스러우면서도 기분 좋은 입맞춤에 다윤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내 꿈은 최다윤이랑 평생 알콩달콩 늙어 가는 거야. 그리고 한날한시에 눈감는 거.”

    “……참나.”

    “진짜야, 우습게 보지 마. 알지? 나 엄청 집념 강한 거. 내 꿈을 위해서라면 다 해.”

    “그래, 그래.”

    다윤이 웃으며 눈을 감고 다시 이호와 입을 맞췄다. 조금 더 깊은 입맞춤이었다. 익숙하고, 부드럽고, 이제는 너무 편안해서 따듯한 그런 입맞춤. 혀와 혀가 만나고 얽히는 과정 속에서 다윤도, 이호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무엇도 더 이상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 없다는 것을.

    조금 더 닿고 싶어서 안달을 내듯 이호가 고개를 더 기울이고 손을 다윤의 얼굴 옆으로 가져다 댔다. 늘 그렇지만, 이럴 때면 잡아먹히는 기분도 들었다. 강아지라고 생각했던 서이호가 커다란 대형견이 되는 순간이다.

    이호가 다윤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고는 두 팔로 다윤을 들어 올렸다. 이제는 익숙한 동작이었다. 처음에는 내려놓으라며 이호를 타박했던 다윤도, 이제는 두 다리를 자연스럽게 허리 쪽으로 가져다 댈 줄도 알았다.

    침실에 도착해 이호가 다윤을 침대 위에 올려 두었다. 부드러운 침구가 머리에 닿자마자 다윤은 이호를 끌어당겼다. 늘 그렇지만 매번 닿으면서도 계속 더 안달이 나는 느낌이다. 매번 새로운 것처럼.

    다급하게 두 사람이 서로의 옷을 벗겼다. 한 겹, 한 겹 두 사람을 이루고 있던 옷자락이 모두 벗겨지고, 태초의 나신 상태로 서로가 서로를 가득이 끌어안았다.

    “윤아, 내 꿈은 너야.”

    “…….”

    “그러니까, 내 꿈이 더 행복해질 수 있게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해.”

    자신의 꿈이 온전히 저라는 사람에게 무어라고 더 말을 할 수 있을까. 다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 일이라는 시간이 옹색하게도 두 사람의 마음은 낡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윤이 고개를 들어 이호의 어깨에 입을 가져다 댔다. 혀를 내밀고 자신의 흔적을 만들고는 고개를 들어 이호에게 씩 웃어 보였다.

    “내 꿈도, 너야.”

    “…….”

    “아주 예전부터 그랬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떠날 생각 안 해. 늘 여기 있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이호가 제 다리를 들어 어깨에 올리고 손가락으로 제 안을 급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었다. 어서 하나가 되고 싶어서. 물론 그건 최다윤도 마찬가지인지라 다윤은 이호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괜찮, 괜찮으니까 그냥 들어와…….”

    “……너.”

    “응? 얼른. 이호야.”

    재촉하듯 중얼거리며 다윤이 이호의 귀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통통한 입술이 귓가에 느껴지자 이호는 눈앞이 흐려지는 걸 느꼈다. 술을 마시면 하나도 안 취하는데 이상하게 최다윤이랑 있으면 이랬다. 독한 술도 감히 제 머리를 어지럽게 할 수 없었지만, 최다윤은 가능했다.

    손가락을 뺀 뒤 급하게 콘돔을 씌우고, 이호가 다윤의 안으로 들어섰다. 다윤이 끙, 하고 신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들어오라고는 말했어도 역시 힘든 건지 안쪽이 평소보다 더 빠듯하게 들어차고 있었다.

    “힘, 빼 윤아, 응?”

    “아, 응…… 으읏.”

    “괜찮아, 그냥 이대로 있을 거야.”

    “……으, 응…….”

    정말 이대로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면. 세상이 영원히 이 시간을 묶어 버렸으면.

    이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윤의 숨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온 얼굴에 입을 맞췄다. 너는 모른다.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지. 아마 이제는 더 이상 사랑이라는 말로도 감히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오래된 마음을.

    다윤의 몸이 나른하게 풀리는 걸 느끼면서 이호는 천천히 제 것을 빼냈다가 다시 안쪽 깊숙이 다윤이 좋아하는 곳으로 찔러 넣었다. 따듯한 안쪽이 제 것이 빠져나갈 때마다 마치 나가지 말라는 듯이 조이고, 들어가면 기분 좋게 풀어 주는 게 제 머리를 정신 못 차리게 만들 셈인 듯 보였다.

    두 사람의 신음 소리, 침대 프레임이 살짝 흔들리는 소리, 두 살이 맞닿아 나는 소리가 침실을 가득 울렸다. 이호는 웃었다. 예전엔 야구 배트를 들고 타석에 서는 순간을, 자신이 때린 공이 멋지게 담장을 넘는 순간을 가장 사랑했다면, 지금은 이 순간이었다. 행복이 조금 더 편안하게, 가깝게 다가온 거다.

    “하, 아읏, 으! 이호, 이호야, 나 갈, 갈 것 같……!”

    “조금만 참아 봐, 같이 가자, 응?”

    “으, 응, 손, 손 좀……!”

    이호가 다윤의 성기 끝을 엄지로 틀어막고 웃었다. 다윤이 그러지 말라며 도리질을 쳤다. 그 빨갛게 달아오른 피부도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이호는 고개를 내려 다윤의 신음을 삼키듯 입을 맞췄다.

    다윤이 손을 들어 이호를 마구 밀어내려 했다. 사정은 하고 싶은데 막혀서 나오진 않지, 안쪽으로는 자꾸 쳐올려서 사정감은 계속 올라오지, 막힌 숨은 이호의 입 때문에 더 시원하게 터져 나오지는 못하지, 아주 총체적 난국이었다. 가장 난감한 것은 이 순간에 가장 크게 쾌감을 느끼고 있는 자신의 몸이었다.

    탁, 탁, 하는 소리가 점점 빨라지고, 다윤은 이호의 허리에 두른 다리에 더욱 힘을 주었다. 빠르게 빠져나가던 이호의 허리가 아주 깊숙이 박혀 파정하는 듯 느릿해졌다. 그 순간 손을 풀어 준 덕분에 다윤의 것도 두 사람의 배를 질척하게 적시며 파정했다.

    나른하게 숨을 내뱉으며 눈을 감는데, 이호의 것이 다시 단단해지는 게 안쪽에서도 확연히 느껴졌다. 다윤이 울상을 지으며 이호를 봤다. 그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한 번만 더 하자, 응?”

    내가 이래서 몸이 힘들거나 피곤하면 하기 싫다고 하는 거야. 다윤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서이호를 거부 안 할 저 자신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어차피 시작한 이상 끝을 볼 터였다.

    결국 몇 번을 더 사정한 끝에 두 사람은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마치 훈장처럼 서로의 몸에 빨갛게 흔적을 매달고. 마지막엔 제 안에 싸 놓은 걸 빼 주겠다며 욕실에 가서 한 번 더 하느라 정말 이젠 기진맥진했다. 이호는 힘들지도 않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뒷정리까지 다 하고, 다윤을 끌어안고 웃고 있었다.

    “넌 진짜…… 체력이 무슨, 괴물 같아.”

    다윤이 중얼거리며 이호의 어깨에 얼굴을 댔다. 이호가 다윤의 말에 낮게 웃느라 몸에 옅게 파동이 일었는데 그 기분 좋은 파동을 느끼며 다윤은 눈을 감았다.

    “아이는 어떻게 입양하지?”

    “그…… 알아봤는데 내 호적으로 올려서 입양하고 데려오는 게 좋을 것 같아. 우리나라는 동성 결혼이 합법적으로 안 되니까, 미혼자 입양은 일반 가정 입양보다 절차가 까다롭고 기준도 좀 까다롭긴 한데, 몇 년 후면 아마 될 것 같아.”

    다윤이 조곤조곤 말했다. 그동안 얼마나 고민하고 알아보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다윤 또한 제게 그 얘기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마음 썩히고 있었는지도. 이호는 그런 다윤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그 어깨 위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우리 엄마 아빠처럼.”

    “응, 최다윤이니까 괜찮을 거야. 그리고 나도 있잖아.”

    다윤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호가 다윤의 어깨에 그대로 입술을 댄 채로 속삭였다.

    “아까 말한 거 있지 마. 내 꿈은 너야. 그러니까 앞으로 네가 행복해지는 데에만 집중하는 거야.”

    “…….”

    “나 버릴 생각도 하지 말고.”

    “안 버린다니까. 왜 자꾸 그런 말을 해, 뭉청아.”

    멍청하다고 자꾸 놀리니까 정말 멍청이가 됐나? 다윤이 진지하게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진지한 그 얼굴이 귀여워서 이호가 웃으며 다윤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잠이 들기 직전 다윤이 중얼거렸다. 고맙다고, 나를 네 꿈이라고 말해 줘서. 내 유일한 연인이자, 영원한 우상이자, 소중한 친구이자, 사랑스러운 꿈에게.

    * * *

    시간이 많이 지난 어느 날, 고아원이 조금 떠들썩했다.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윤을 알아본 몇 명의 아이들이 다가와 펄쩍펄쩍 뛰었다.

    그동안 매주 한 번씩 들른 탓인지 아이들은 다윤을 좋아했다. 다윤은 한 아이 한 아이 모두에게 다가가 인사를 나누었다.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주고 늘 같은 눈높이에서 자신과 대화를 나누어 주는 어른을 아이들이 싫어할 리 없었다.

    “자, 간식 먹으러 갈까, 얘들아?”

    “네에!”

    놀이터를 왁자지껄하게 만들며 놀던 아이들이 앞다투어 고아원 안으로 들어가고, 다윤은 가장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한 아이를 봤다. 고개를 푹 숙이고 땅을 보고 있는 아이.

    아마 저도 저런 모습이었을까. 엄마는 그런 제게 어떤 마음으로 다가와 마음으로 저를 품어 주신 걸까. 다윤은 그때의 엄마와 똑같이 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 제 앞으로 다가온 어른을 아이는 조심스럽게 올려다봤다.

    “……안녕.”

    그리고 그때 엄마가 했던 것처럼 아이에게 인사를 했다. 아이가 쭈뼛쭈뼛 손을 들어 제 손을 만지작거렸다. 부끄러워하고 있구나, 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 그 언젠가 엄마와 아빠가 제게 주었던 사랑을, 서이호가 제게 주었던 것과 같은 크기의 사랑을 아이에게 주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가 저처럼 행복해질 수 있도록, 따듯해질 수 있도록.

    그게 다윤이 생각하는 가장 다정한 종류의 사랑이었다.

    <최고로 다정한 연애 –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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