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사랑하는 아빠에게
본격적으로 두 사람이 같이 살기 시작한 때는 서로 바빠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호는 이호대로 막 시작된 정규 시즌 때문에 매일매일 정신이 없었고, 다윤은 다윤대로 간간이 영화 제작 작업과 학기 시작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집에서 함께 산다는 그 사실 하나가 두 사람을 더욱 견고하게 했다. 이제는 정말로 누가 감히 떼어 낼 수 없게 사이가 단단해진 것 같았다.
“…….”
“……웃기지?”
다윤은 소파에 앉아 서 있는 서이호를 올려다봤다. 가게에서 봤을 때도 이 정도라고 생각 못 했는데……. 다윤은 최대한 웃음을 참았다. 서이호가 역시 이상한 것 같다며 당장이라도 벗어 던지지 않게 말이다.
다윤이 이호에게 사다 준 것은 다름 아닌 강아지 잠옷이었다. 그것도 하나가 통째로 된. 반은 놀리려고, 또 반은 그냥 이걸 입은 서이호가 보고 싶어서 사 온 건데 입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정말 영락없는 개였다.
“나 벗을래.”
“아아아, 왜 벗어. 잘 어울려. 너무 멋있어.”
“……거짓말이지?”
다윤의 반응이 영 시원찮아서 이호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다윤은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고개를 저었다. 절대 거짓말이 아니라고, 정말 잘 어울린다고.
“……푸흐.”
“…….”
“아하하, 하하하! 아 진짜 웃긴다! 나 진짜 못 참겠어. 하하하하!!”
다윤이 결국 참지 못하고 소파 위에 쓰러지며 웃었다. 저 머리에 올라온 갈색 귀하며, 뒤에 축 처진 꼬리하며, 심지어 사이즈가 작아서 터질 것 같은 가슴팍도 너무 웃겼다. 저 덩치도 큰 운동선수가 한순간에 귀여운 개가 되어 버린 게 너무 재밌었다.
“그렇게 재밌어?”
“응, 푸하, 하하!”
다윤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려서 서이호가 바로 잠옷을 벗어 던지려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호는 딱히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바닥을 치며 박장대소를 하고 있는 다윤의 앞에 앉아 싱글벙글 웃으며 다윤을 보고 있었다.
“나 계속 이러고 있을까?”
“응, 맨날 이러고 있어.”
“그래, 네가 그러라면 그러지 뭐.”
진짜 그러겠다고 할 줄 모르고 대답한 건데 이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순한 얼굴에 다윤은 피식 웃으며 이호의 머리에 올려져 있는 귀를 쓰다듬었다.
“이거 사진 찍어서 올리면 대박이겠다. 서이호 너 팬들이 엄청 까칠하고 야구밖에 모르는 외골수로 알고 있는데.”
다윤은 그렇게 말하면서 피식 웃었다. 여전히 웃긴지 입가에는 계속해서 웃음을 머금고 있는 다윤의 얼굴 위로 이호가 입을 맞췄다. 우스꽝스러운 잠옷을 입어도 괜찮다. 최다윤만 이렇게 박장대소를 하며 웃어 줄 수 있다면. 최근 들어 일 때문인지 부쩍 피곤해 보이는 다윤이 이렇게 웃을 수만 있다면.
두 혀가 얽히고 질척한 소리가 울렸다. 두 사람의 밤은 오로지 두 사람의 것이었다. 낮에는 야구에, 영화에 학교 수업에 시간을 빼앗겨도 밤만은 두 사람을 방해할 수 없었다.
마치 신혼 같은 분위기가 따스하게 두 사람을 감쌌다. 정말 신혼부부라고 해도 반박할 수 없을 듯했다.
* * *
누가 저 서이호를 애인 앞에서 맞지도 않는 강아지 잠옷을 입고 웃는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다윤은 저 멀리 진지한 얼굴로 타석에 들어오는 서이호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안타를 치고 달려, 서이호! 홈런을 치고 달려, 서이호!”
경기장 안이 서이호를 응원하는 소리로 가득했다. 9회 초 2사 만루 상황. 1점 차이로 상대팀에게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서이호만이 희망이었다. 서로 순위 다툼을 하고 있는 경쟁 팀과의 대결은 지금 저 타석에 서 있는 서이호에게 더 큰 압박감을 주고 있으리라.
공이 빠르게 스트레이트 직구로 들어왔다. 마치 서이호가 어떤 공을 고를지 투수가 간을 보는 것처럼. 일단 서이호는 첫 번째 공을 인내심을 가지고 참아 냈다. 경기장 안의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는 것 같았다.
다윤의 손도 점점 축축해졌다. 왜 제가 더 긴장이 되는지. 마치 타석에 있는 서이호와 같은 마음이 되는 기분이었다. 이어 온 두 번째 공과 세 번째 공은 볼, 네 번째 공은 파울로 가볍게 쳐냈다. 제발 이제 끝내주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마지막 공까지 아슬아슬하게 빠져 풀 카운트까지 몰리고 말았다.
응원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다윤은 제가 기절하고 싶은 심정으로 투수가 공을 날리자마자 눈을 감아 버렸다.
「쳤습니다! 서이호 선수, 멋진 끝내기 안타!! 공이 정확히 그라운드 한가운데에 떨어집니다!」
「치기 힘든 공이었는데, 서이호 선수 아주 멋지게 받아 쳤어요. 이전에 어깨 부상으로 약간은 슬럼프를 겪는가 싶더니, 역시 유니콘즈의 에이스답게 이번 시즌 멋지게 활약해 주고 있습니다.」
와아아, 하는 함성 소리에 다윤은 눈을 떴다. 경기장 안이 번쩍거렸다. 옆에 있던 세아가 펄쩍펄쩍 뛰면서 기뻐하는 걸 보면서 다윤은 그제야 희미하게 웃었다.
분명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을 텐데, 이상하게 서이호와 눈을 마주친 느낌이었다. 서이호가 저를 보며 웃었다. 다윤도 그를 따라 웃어 주었다. 반짝반짝하게 빛나는 그라운드가 지금 서이호가 있어야 할 자리가 맞는다는 듯이 환하게 빛났다.
“와, 진짜 너무 멋있더라. 어떻게 그 상황에 거기까지 몰아치고, 끝내기 안타까지 치냐. 솔직히 상대 투수 존나 잘해서 난 서이호 삼진 당할 줄 알았는데.”
“이호가 무슨 삼진이야. 난 무조건 안타 칠 줄 알았어.”
“어휴, 그런 애가 눈 감고 보지도 못하고 있었어?”
“……그냥 무서워서 그런 거야, 무서워서.”
다윤의 말에 세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 다 이번 시즌 처음으로 같이 오는 경기 직관이었다. 원래는 매 시즌마다 시간 될 때마다 맞춰서 직관을 하곤 했는데 최근엔 다윤도 세아도 취업 준비로 바빠 미처 만날 기회가 없었던 탓이었다.
오랜만의 직관에 두 사람 다 들떴다. 심지어 역전승을 거둔 날에. 유니콘즈 관람석에서 나오는 사람들 모두 다 들뜬 목소리로 서이호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이번 시즌은 확실히, 제대로 기대해 볼 만하다는 분위기였다.
“이거 봐, 서이호 인터뷰했나 보다.”
세아가 휴대폰을 제게 내밀어 보여 주었다. 세아의 휴대폰 화면 속에 서이호의 얼굴이 들어왔다.
「이번 시즌 멋진 활약을 이어 가고 있는 서이호 선수, 많은 팬분들이 이번 시즌엔 유니콘즈의 한국 시리즈 진출을 기대하고 있는데요. 어떤 각오로 이번 포스트 시즌을 임하고 있는지 말씀해 주세요.」
「늘 그렇지만 매 타석에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다른 무엇보다 좋아해 주시는 팬분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이번 시즌에는 기대에 부응할 수 있게 저뿐만 아니라 팀 전체가 노력하고 있으니 많은 기대와 응원 부탁드립니다.」
“서이호가 웬일이래. 이런 말도 할 줄 알고.”
세아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다윤도 그런 세아를 따라 웃고 말았다. 저런 인터뷰를 하면 항상 다 제가 잘났다는 듯이 말하곤 하는 서이호였으니까. 세아뿐만 아니라 유니콘즈 팬들 모두 서이호가 정신 개조가 된 거라느니,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다며 혹시 분유 버프를 받는 게 아니냐며 기대할 정도였으니까.
다윤은 멍하니 휴대폰 속의 서이호를 봤다. 너무도 잘나고, 대단하고, 멋진 내 애인. 인터뷰를 하고 있던 서이호가 카메라 화면을 바라보며 한번 싱긋 웃었다. 화면 속 서이호와 눈이 마주치는 느낌이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늘 응원해 주시는 팬분들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내 윤이에게 늘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마지막 서이호의 말에 다윤이 놀라 눈만 깜박였다. 세아도 경악하는 얼굴로 화면과 다윤을 번갈아 봤다.
“……진짜 서이호 너한테 푹 빠지긴 했나 보다, 야. 인터뷰에서 저런 얘기도 할 줄이야. 내가 살다 살다 진짜 별꼴을 다 본다.”
“……못 산다, 진짜.”
“왜, 귀엽구만.”
인터뷰가 끝나고 다윤이 한숨을 쉬었다. 세아가 웃으며 팬들 사이에서 돌고 있는 분유 버프 얘기가 확실시 될 것 같다고 다윤을 놀렸다.
“윤아! 나 잘했어?”
일정을 끝내고 두 사람은 주차장에서 만났다. 다윤을 보자마자 이호가 칭찬받고 싶어 하는 강아지처럼 활짝 웃으며 물었다. 인터뷰에서 그렇게 얘기한 거에 타박을 하려고 했는데 막상 저렇게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인 양 활짝 웃는 걸 보니 타박도 못 했다.
“그래, 엄청 잘하더라.”
다윤은 그런 이호를 칭찬하듯 손을 들어 이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더 쓰다듬어 달라는 듯이 이호가 고개를 기울였다.
“인터뷰는 봤어?”
안 봤다고 하면 실망할 기세로 눈을 반짝이며 묻는 서이호에게 다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는 듯이 칭찬해 달라는 그 눈빛에 다윤은 이호의 얼굴에 가볍게 입을 맞춰 주었다.
“근데 너 분유 버프 얘기 도는 건 알고 있어? 그거 완전히 쐐기 박는 인터뷰였잖아.”
“음, 몰랐는데 상관없지 뭐.”
정말 상관없다는 듯이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마는 서이호를 보며 다윤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정말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예전엔 자신의 얘기가 조금이라도 이상하게 도는 걸 싫어해서 팬들도 쉬쉬하는 느낌이었는데, 요즘은 야구에 대해서 도는 자신의 소문은 별 신경 안 쓰는 느낌이었다. 그게 조금 더 유해지고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 거라는 걸 다윤도 알기에 그런 편한 태도가 좋았다.
“네가 직접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더 떨리더라. 그리고 오늘은 잘 보이고 싶은 사람도 있었으니까.”
일요일 경기를 늦지 않게 끝마치고 두 사람이 가기로 한 곳이 있었다. 바로 다윤의 삼촌 댁. 그동안 찾아뵙겠다고 말은 했지만 원정 경기로 이호의 시간이 채 맞지 않아 미뤄 왔는데, 오늘은 서울 경기이기도 했고, 때마침 다윤도 쉬는 주말인 데다가 다음 날 이호의 경기가 없었기에 가능했다.
“나 떨려.”
“왜?”
“음, 모르겠어. 잘 보이고 싶은데, 지금 머리도 완전 헝클어지고, 괜찮을까?”
차가 빠르지 않게 서행했다. 다윤은 안정적인 속도를 느끼며 잔뜩 긴장하고 있는 서이호를 봤다. 백미러 너머로 제 머리카락을 보고 있는 서이호를 보며, 다윤이 피식 웃었다.
“걱정 마, 삼촌도 너 좋아하신다니까. 지혜도 그렇고, 숙모도 좋은 분이시라 따듯하게 대해 주실 거야.”
“말실수하면 어떡하지.”
“너 말실수하는 게 한두 번인가.”
다윤의 농담 섞인 말에 이호가 잔뜩 울상을 지었다. 다윤은 그런 이호의 얼굴을 몰래 사진 찍었다.
“너, 또 내 사진 찍었지.”
“…….”
“잘생긴 얼굴 찍어야지, 이상한 표정 하고 있는 사진을 찍으면 어떡해.”
“뭘 해도 잘생겼는데 왜.”
“……윤아, 나 운전하고 있는데.”
“운전 잘해, 응?”
타박하듯 말하는 다윤의 말에 이호가 착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호를 보며 다윤이 한 번 피식 웃고 제 사진첩에 있는 서이호를 봤다. 웃고 있는 서이호, 울상 짓는 서이호, 긴장한 듯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서이호, 자면서 입을 벌리고 있는 서이호.
요즘 다윤의 취미이자 습관 같은 거였다. 서이호 사진 찍기. 예전에는 어떻게든 스크랩하고 기사 속 사진을 오리면서 덕질을 하곤 했다면 이제는 직접 제 앞에 있는 서이호의 얼굴을 매일 한 장 이상씩 찍으면서 덕질을 하는 것이다.
이호는 내심 툴툴거리면서도 그런 다윤이 싫지 않았다. 애정 표현이 자신에 비해 진하지 않은 다윤 나름만의 애정 표현 방식이었으니까.
“어서 와요, 경기 하고 오느라 힘들진 않았어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숙모와 삼촌, 그리고 지혜가 두 사람을 반겼다. 아까까지만 해도 잔뜩 긴장을 한 듯싶더니, 막상 세 사람을 마주하자 이호는 사교성 있게 먼저 인사를 하고 가져온 선물도 내밀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오늘 두 분 뵐 생각에 기뻐서 경기도 빨리 끝낼 수 있었어요. 이건 약소하지만 작은 선물입니다.”
“뭐 이런 걸 다. 그냥 빈손으로 와도 된다니까. 얼른 들어와요. 운동하고 와서 시장할 텐데 와서 식사해요.”
“오느라 고생 많았다, 다윤아, 이호야.”
삼촌이 다윤과 이호의 어깨를 한 번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그 옆에서 지혜가 두 사람에게 뭔가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인지 흘끔흘끔 눈치를 보다가 잠시 틈이 생긴 사이에 두 사람의 팔을 붙들고 흔들며 들뜬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늘 경기 봤어요!! 진짜 멋있었어요! 나랑 엄마랑 마지막에 일어나서 소리 질렀어요. 진짜 최고!”
이호를 만나기 전에는 야구가 어떤 스포츠인지 관심도 없던 지혜가 요즘 야구에 푹 빠져 있는 건 순전히 이호 때문이었다. 숙모와 삼촌이 이호가 나오는 야구 경기만 꼭꼭 챙겨 보는 바람에 옆에서 같이 보던 지혜가 푹 빠진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이호 오빠, 사인 좀 해 주세요. 동기들이 오빠 사인 받아다 달라고 난리야.”
“지혜야, 밥 먼저 먹어야지.”
“아, 응. 맞다, 맞다. 아까 경기 보고 들뜬 게 아직도 심장이 쿵쿵 뛰어서. 다음엔 나도 꼭 직관 갈래!”
지혜의 활기찬 목소리에 삼촌도 숙모도 모두 환히 웃었다. 다윤은 세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 따듯한 온기와 분위기가 좋았다. 언젠가 저에게도 있었던 그 따듯한 가족의 품.
돌아가신 부모님을 떠올리며 우울해하는 듯한 다윤의 얼굴에 이호가 다윤의 손을 잡고 먼저 들어가라며 눈짓했다. 다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다윤과 이호가 나란히 숙모와 삼촌 앞에 앉았다. 마치 결혼 허락을 받으러 온 커플 같다는 생각을 이호는 내내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물론, 결혼은 이미 했지만. 제대로 말하자면 결혼을 하고 나서 처음으로 인사 오는 느낌이 더 맞을 거였다. 그랬기에 조금 긴장했지만 늘 그렇듯이 이호는 능숙하게 두 분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경기 정말 멋있더라고요. 내 조카 애인이라고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요.”
“그러셔도 괜찮아요. 그리고 숙모님, 그냥 말 놓아 주세요. 그게 제가 더 편합니다.”
“음, 그럴까? 그래, 그럼. 조카며느리 한번 잘 뒀네. 이렇게 싹싹하다니.”
조카며느리라는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다윤도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쩐지 서이호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면서도 어울리는 단어였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기분 나쁘지 않을까, 한번 쳐다봤는데 전혀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오히려 기분 좋다는 듯 웃고 있는 이호의 얼굴을 보며 다윤이 안심했다.
삼촌과 숙모에게 너무나 감사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하는 관계는 아니었으니까. 그런 두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 준 두 사람에게 너무나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간 삼촌에게 다윤이 다가섰다. 삼촌은 다윤이 오자마자 씩 웃으며 다윤을 가볍게 한번 안아 주었다.
“……감사해요, 삼촌. 오늘.”
“아니다. 감사할 게 뭐가 있어. 오히려 잘 지내는 모습 보니까 기분이 좋던걸.”
삼촌이 그렇게 말하며 다윤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다윤은 잠시 눈을 감았다. 아주 오래전 자신의 등을 끌어안고 웃던 아버지의 온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무슨 할 말 있니?”
포옹을 마치고, 삼촌이 다윤에게 물었다. 다윤은 입을 한 번 달싹였다. 사실 삼촌에게 물어보고 싶은 얘기가 있었다. 하지만 선뜻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삼촌이 걱정할 만한 얘기였으니까.
“…….”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오늘 식사도 너무 맛있었다고요. 삼촌 요리 솜씨가 나날이 느시는 것 같아요.”
“하하하, 고맙다. 숙모가 집에서 만든 음식을 워낙 좋아하니까 계속하다 보니 이렇게 느는구나. 반찬 몇 개 싸 줄 테니 가져가고.”
“네, 감사해요.”
“이제 들어가자. 이호 오늘 경기 하고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어서 가서 쉬어라.”
“네.”
다윤은 집 안으로 들어서는 삼촌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들어서자마자 현관에 있던 지혜가 삼촌을 와락 껴안고 애교를 부렸다. 삼촌은 그런 지혜를 따듯하게 웃으며 감싸 주었다.
다윤은 물어보고 싶은 얘기를 더욱 목 아래로 삼켰다. 삼촌, 혹시…… 혹시 말이에요. 혹시 삼촌이 저희 아빠 같은 상황이었다면…… 지혜를 조금이라도 원망하는 마음이 아예 없었을까요? ……그러니까, 아버지는 죽기 전 저를 원망하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곧 아버지의 기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호를 만나면서 잊고 있었던 마음 한구석의 죄책감이 그날이 다가오니 어쩔 수 없이 커졌다. 두렵고, 무서웠다. 그날의 기억이 다윤을 덮쳐 오는 것 같아서.
“윤아.”
여전히 현관에 서 있는 다윤의 손을 잡으며 이호가 다윤을 불렀다. 저를 내려다보는 걱정 어린 얼굴에 다윤은 애써 방금 들었던 생각을 꾹꾹 눌렀다.
다윤은 다시 평소처럼 웃으며 삼촌과 숙모에게 인사를 나누고 지혜와도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차에 올라탔다.
집에 오는 내내 다윤은 이호에게 최대한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행동했다.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척 웃고 있었지만, 이호도 알 수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라는 걸.
“……뭐야, 깜짝 놀랐네.”
베란다 앞에 서서 멍하니 바깥을 보고 있던 다윤의 뒤에 다가가 이호가 덥석 끌어안았다. 축축한 머리카락이 다윤의 얼굴 옆에 닿고, 머리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어깨에 닿았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다윤이 그제야 고개를 옆으로 돌려 이호를 봤다. 막 씻고 나온 이호는 평소보다 더 귀여웠다.
“……너 진짜.”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얼마 전 다윤이 선물해 준 강아지 잠옷. 그때 한번 입고 난 이후로 어디로 갔는지도 몰랐는데 그걸 입고 있었다. 마치 제가 우울해하는 걸 알고 기쁘게 해 주려는 것처럼.
“귀엽지.”
“……네 입으로 그런 말 하면 안 부끄러워?”
“안 부끄러운데.”
“진짜 나 동네방네 소문내고 싶어. 서이호가 이런 인간이라는 거.”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윤은 씩 웃으며 이호의 머리 위에 있는 귀를 좌우로 흔들었다. 사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다윤은 아무도 이런 이호를 몰랐으면 했다. 자신에게만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애인이었으면.
그런 생각을 하는 걸 다 아는지 이호가 씩 웃으며 다윤의 코끝에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시작된 키스는 얼굴 위로 온통 쏟아져서 입술에서 끝이 났다. 두 혀가 부드럽게 얽히고, 타액이 섞여 질척한 소리가 들려와도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이 다윤은 이호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우울한 거 알고 있어.”
“…….”
“곧 아버님 기일이잖아.”
알고 있었구나, 싶어서 다윤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다윤의 웃음 위로 이호가 한 번 더 가볍게 입을 맞춰 주었다. 마치 네 마음속의 우울을 가져가고 싶다는 듯이,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네 잘못 아니라는 거 알잖아.”
“……응. 알고 있어.”
이호의 말에 다윤이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고 있다. 자신의 탓이 아니다. 그걸 알기에 혼란스러웠다. 알면서도 자꾸 우울하고 슬퍼지는 마음 때문에.
“그냥…… 머리로는 아는데 한편으로는 죄책감이 조금 남아 있는 건 어쩔 수 없나 봐, 아버지 기일 날이 다가오기도 하고.”
“……같이 가, 기일 날. 아버님께.”
“안 돼, 너 그날 대구 원정 경기 있잖아.”
“야구가 뭐가 중요해? 나한텐 네가 제일 중요해.”
“그런 소리 하지 마. 나한텐 야구 선수 서이호도 소중해.”
다윤이 이호의 이마를 탁 치며 말했다. 타박하는 말에 묻어 있는 애정에 결국 더 고집을 부리지도 못했다.
“야구 선수 하지 말걸 그랬나.”
한숨 쉬며 다윤의 어깨에 고개를 푹 묻고 이호가 중얼거렸다. 무슨 헛소리냐고 다윤이 화를 냈다.
하지만 정말 속상했다. 이럴 때 같이 가 주지도 못하고. 요즘 경기로 인해 다윤과 함께 있는 시간도 줄고. 자신의 직업이 평범했다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말이다. 그렇다고 지금 후회해 봤자 늦은 일이었다. 이제 와서 제 진로를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것도 제 애인이 이토록 사랑해 주는 제 직업을.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이다. 사랑하는 애인이 우울해할 때 조금이라도 기쁘게 해 주는 것.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는 것. 눈을 마주치고 위로 되는 말을 해 주는 것.
“자책하지 마, 윤아.”
“……그냥, 그런 생각이 아주 조금 들었어.”
“무슨 생각?”
“돌아가시기 직전에…… 아주 조금이라도 날 원망하진 않으셨을까, 하는 거. 쓸데없는 고민이라는 걸 잘 알아. 그런데, 그냥 그날이 다가오니까 나도 모르게 자꾸 그런 생각이 드네.”
다윤의 말에 이호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한심하게 여기고 있으려나 싶어 살짝 눈만 들어 이호를 올려다보자 그가 흠, 하고 잠시 고민하는 듯 숨을 내뱉고는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뭘?”
이호가 웃으며 말하는 걸 들으며 다윤도 웃었다. 저를 이렇게 생각해 주고 위해 주는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
“그날 원정 경기에서 우리 팀이 이기면 아버지가 널 원망하지 않았던 거야. 그걸로 한번 점쳐 보자.”
그때 베란다 앞에서 저를 끌어안고 말했던 서이호의 말이 떠올랐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다윤이 타박했지만, 이호가 반박했다. 이번에 상대 팀이 얼마나 막강한지 아냐고, 야구 경기에서 이긴다는 건 모든 우연과 변수가 얽히고설켜서 만들어지는 거라고. 그게 만약 맞아 들어가면, 네가 고민하는 것들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 또한 맞게 되는 거 아니겠냐고.
말이 안 되지만, 이상하게 설득당했다. 오늘 아침, 자신이 꼭 해내 보이겠다고 온 카톡을 봤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위로받는 기분이다. 그냥 그렇게라도 제 고민을 해결해 주려고 하는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제가 대체 전생에 얼마나 많은 복을 받았길래 이렇게 좋은 애인을 얻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오늘 기분 좋아 보이네.”
저를 돌아보며 서하가 말했다. 나른하게 웃으며 저를 쳐다보는 서하에게 다윤도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에게 가기 전, 다윤은 잠시 영화 촬영 장소에 들렀다. 이제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사실 엄청나게 스케일이 큰 영화는 아니어서 그랬다. 촬영 팀도 무척이나 협소했고, 나오는 배우들도 많지가 않았다. 정말 작고 소소한 영화. 그런데도 마무리가 된다는 생각에 마음 한편이 벅차올랐다. 자신의 첫 영화였으니까. 부모님이 살아 계셨다면, 정말 좋아하셨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니 입 안이 조금 썼다.
“안 와도 괜찮은데, 오늘 갈 곳 있다며?”
“그래도, 이 장면은 보고 싶었어.”
이제 서하와 완전히 말을 놓았다. 그게 더 편하다며 먼저 말을 놓기를 권유해 준 서하 덕분이었다.
촬영장이 서서히 고요해졌다. 촬영 감독이 자리에 앉아 컷 신호를 보냈다. 서하가 다윤을 한번 흘끔 보며 촬영이 시작되는 곳에 시선을 두었고, 다윤도 서하의 옆에 서서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연기하는 남자를 봤다.
자신을 키워 준 아버지에게 남자는 화가 치솟아 마음에도 없는 얘기를 한다. 어차피 친아버지도 아니면서, 당신도 날 싫어하지 않느냐고, 왜 나를 입양해서 날 더 힘들게 하느냐고.
자신이 쓴 대사가 세상 밖에 소리로 꺼내져 나오는 과정을 보면서 다윤은 생각했다. 물어보고 싶었던 얘기였다. 혹시 한 번이라도 후회해 본 적이 없으신지, 나를 입양한 것에 대해서…….
“넌 내 아들이야. 누가 뭐래도 변함없다.”
늙은 남자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떨군다. 어떻게든 제 욕망을 채우려 고군분투했던 의욕이 꺾이는 순간이었다. 원래 영화대로라면 이 장면이 여기서 끝이 나는 게 맞았다. 그때 순간 아버지 역할의 배우가 주인공을 끌어안았다. 토닥, 토닥. 늙은 남자의 손이 주인공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난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
다윤은 순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배우의 애드리브였다. 한참 후에야 컷 소리가 울리고 다시 촬영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서하가 뒤로 물러선 다윤을 물끄러미 봤다.
“……괜찮아?”
“…….”
다윤이 한동안 멍한 상태였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서하를 보며 씩 웃었다. 역시, 이 장면을 보러 오길 정말 잘한 것 같았다.
“……저 이제 가 볼게요, 형.”
이제 어서 해가 지기 전에 아버지에게 가 봐야겠다는 생각에 다윤이 등을 돌렸다. 남자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라탔다. 다윤은 자리에 앉자마자 서이호의 경기 상황을 찾아봤다. 아까 확인했을 때만 해도 경기는 유니콘즈가 이기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경기 상황은 상대 팀으로 넘어가 있었고, 홈런포를 터트린 건지 상대 팀이 1점 차이로 역전을 한 상황이었다.
진짜로 이기겠다는 건가. 아니, 그게 애초에 본인만 잘해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
물론 이기지 못하더라도 괜찮았다. 그냥 그런 식으로라도 저를 위로하려고 노력해 주는 서이호의 마음이 고마울 뿐이었다. 다윤은 이어폰을 꽂고 휴대폰 화면을 보며 경기에 집중했다.
덜컹거리는 버스가 편안한 요람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바깥에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이 따스하게 느껴져서 그랬다. 다윤은 손에 휴대폰을 들고 순간 잠이 들었다. 아버지가 나오는 꿈이었다.
자신을 데리러 오려고 준비 중인 아버지, 아버지의 얼굴엔 행복이 가득하다. 다윤은 아버지 옆 조수석에 앉아 그런 아버지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응, 이제 다윤이 데리러 가려고. 괜찮아, 당신은 편히 쉬고 있어. 금방 데리러 갈 테니까. 그래, 그래. 우리 아들 제대하는 건 꼭 직접 데리러 가서 축하해 줘야지, 안 그래? 그래, 그래, 조금 있다 봅시다 여보.”
아버지는 어머니와의 마지막 통화를 끊고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순간 시야가 번쩍 흔들리고, 아버지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든다.
화면은 마치 슬로모션처럼 느리게 흘러간다. 다윤이 고통에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아버지의 얼굴이 제 눈앞에 나타났다.
“우리 다윤이…….”
그는 제 손에 무언가를 꼭 쥐었다. 사진, 돌아가셨을 당시에 손 안에 꾹 쥐고 계셨던 사진. 엄마와 저, 그리고 아버지 셋이 찍은 가족사진.
「와아아!」
「역전 포를 터트립니다!! 아니 이게 뭡니까! 오늘 경기 아주 흥미롭습니다! 두 팀의 나란한 홈런 역전 포, 그 끝을 이번에도 서이호 선수가 장식합니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다윤은 번쩍 눈을 떴다. 서이호는 정말 제가 말한 그대로 승리를 손에 쥐고 함성을 받고 있었다. 많은 선수들이 그에게 다가가 축하를 담은 포옹과 인사를 건네는 것도 보였다.
서이호는 카메라 화면을 오래도록 응시하며 웃었다. 마치 제가 맞았지, 하는 것처럼.
서이호도 제가 한 말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 걱정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혹시라도 제게 순서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자신이 한 말을 지킬 수 없었을지도 모르고, 투수와의 싸움에서 조금이라도 긴장의 끈을 놓는다면 공을 제대로 쳐 낼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 저렇게 보기 좋게 해내 놓고 웃는 얼굴을 보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았어. 모든 변수들을 이기고 내게 확신을 주려 노력한 사람에게 고마움을 담아 다윤은 웃었다.
버스에서 내린 다윤은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있는 그곳으로. 그동안 느꼈던 어떤 모종의 무거운 마음 없이 가벼운 발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