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다정한 연애의 정의
제가 말해 놓고 너무 멋없었나 싶었다. 다음에 얘기할걸 그랬나. 조금 더 멋진 분위기에서 무릎이라도 꿇으면서. 사실 한 번도 연애 같은 걸 해 본 적도 없고, 좋아한다는 얘기를 어떤 상황에서 해야 하는지도 몰라서 그냥 일단 저지르고 본 건데, 서이호의 입장에선 황당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멍하게, 한동안 아무 말도 없는 걸 보면 말이다.
“아니다, 다음에 다시…….”
다시 얘기해 줄게, 라고 말하려는 순간 서이호가 달려들었다. 그건 ‘달려들었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순간 뒤로 넘어갈 뻔했지만 다행히 뒤에 벽이 있어서 그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안 돼. 못 물러. 이미 얘기한 이상 끝이야, 끝. 이제 너 평생 나한테 저당 잡힌 거야.”
참나, 본인이 잡혔다는 생각은 안 하고……. 다윤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온 인생을 통틀어서 서이호만 좋아해 온 최다윤의 인생에서 서이호와 헤어지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걸, 이호는 모르는 모양이다. 물론 알 리가 없겠지만.
“너야말로. 나 앞으로 끈질기게 달라붙을 거거든. 네가 나 싫다고 해도 아주 끈덕지게 달라붙어서 안 떨어질 거야.”
다윤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푹 이호의 어깨에 묻었다. 희미하게 풍겨 오는 서이호의 향이 좋았다. 바로 귀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머리카락도, 온몸으로 자신을 감싸 안는 동작도 모두 다 좋았다. 서이호가 왜 항상 저에게 이런 식으로 안겨 드는지 조금은 알 것 같은 순간이었다.
휙, 하고 순간 다윤이 들렸다. 뭐지 싶었는데 서이호가 저를 둘러업고 부엌을 벗어나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야, 서이호.”
순간 당황해서 다윤이 서이호의 등을 가볍게 치며 이호를 불렀으나 이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나저나 힘이 얼마나 세면 사람을 이렇게 들고 숨 한 번 격하게 쉬지도 않고 걸어가나 싶었다.
닫혀 있던 방문 중 하나가 벌컥 열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닫혔다. 이호가 그제야 다윤을 내려놓았다. 푹신한 침구가 다윤의 등 뒤로 닿고, 다윤이 갑작스럽게 부엌에서 밥을 먹다가 벌어진 일에 대해서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이호가 다윤의 입술을 찾았다.
아랫입술이 부드럽게 깨물리고, 그 안으로 급하게 이호의 혀가 들어왔다. 이제는 익숙한 감각이었지만 그렇다고 설레지 않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매번 더 심장이 뛰고 좋아져서 큰일이었다. 이 감각이 없었을 때는 어떻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 마음을 편안하게 하면서 동시에 구름 위를 떠다니는 같은 몽글몽글한 느낌이 든다. 딱 그런 느낌이었다.
이호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다윤은 처음부터 그랬다. 처음 입을 맞춰 온 사람도 다윤이었고, 입으로는 싫다고, 안 된다고 하면서 입맞춤을 할 땐 제 목덜미를 더욱 당겨 오는 사람도 다윤이었다. 귀여워, 너무 귀여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손바닥 안이 마구 간지러웠다. 미치겠다, 최다윤의 귀여움은 치사량 이상이다.
또 처음엔 무척 어색하게 혓바닥을 어찌할지 몰라 그저 이호가 하는 대로 가만히 두고만 있었다면 그다음엔 어색하게 따라 하려고 했고, 지금은 얼마나 늘었는지 제가 먼저 입천장을 훑고 이호의 혀를 감쌌다. 최다윤은 배우는 것도 참 빨랐다.
두 혀가 부드럽게 얽혔다. 마치 하나의 혀인 것처럼. 서로의 타액이 입가에 잔뜩 흘러내리고, 그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입맞춤이 지속되어 다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순간 제 아랫도리가 뻐근해져 오는 게 느껴졌다.
“…….”
“섰어?”
“아…….”
“윤아, 말해 봐. 키스만 해도 꼴려?”
이 미친……. 다윤이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이 와중에도 자꾸 달라붙어 오는 서이호도 얄밉고, 밥 먹다가 갑자기 키스하고, 또 거기에 꼴려서 잔뜩 달아오른 저도 싫었다. 그래, 서이호는 뭐 이런 행위가 쉽고 아무렇지 않은 일이겠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갑자기 억울하네.”
그런 생각을 하자니 정말 억울해져서 다윤이 저도 모르게 말했다. 이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뭐가?”
“넌 엄청 여유로운데 지금 나만 안달 난 것 같잖아.”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고 중얼거리는 다윤의 귀 끝이 빨갰다. 그런 다윤을 보는 순간 눈앞이 핑 도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 귀여워! 너무 귀여워!
아까도 말했듯이 최다윤의 귀여움은 치사량 이상이다. 자신보다 고작 10cm밖에 작지 않은, 평균으로 보자면 큰 키에 무표정한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척 차가운 사람이겠다 싶은 인상의 최다윤은 사람을 이렇게 미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이런 다윤을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이런 다윤을 누군가 알게 되면, 자신처럼 푹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할 테니까. 태평양보다 넓은 다윤의 매력에서.
“아.”
다윤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콱, 하고 목덜미가 깨물렸다. 그리고 잘근잘근 이로 씹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뱀파이어에게 물리는 기분은 이런 걸까. 거의 지워져 가는 흔적 위에 다시 서이호가 자국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하고,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뭉게뭉게 떠올랐다.
“내가 지금 여유로운 것처럼 보여?”
이호가 다윤의 한쪽 손을 가져다가 제 아래쪽으로 끌어당겼다. ……아니. 다윤이 그제야 고개를 저었다. 얼굴만 봐서는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이라는 걸 못 믿을 정도로 평온하더니 아랫도리는 어떻게 참았나 싶을 정도로 발기되어 있었다.
“나도 너랑 똑같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냥 닿고만 싶어. 너랑 있으면 정신이 혼미해져서 나도 모르게 자꾸 이성이 사라져.”
이호가 이로 제 어깨를 물면서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속으로 꾹꾹 눌러 참고 참는 듯한 목소리였다. 너도 그렇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 억울하다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늘 하루 종일 사람을 자꾸 미치게 안달 나게 만드는 최다윤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밥 먹고 있던 사람을 침대 위로 데려와서 이런 상황에까지 와 버렸지만 이호는 그만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꾹꾹 자제시키고 있었다.
참자, 참자. 서이호 진정해라. 눈앞에 홈런을 칠 수 있게 날아오는 직구를 놔두고 배트를 그저 손에 들고만 있는 기분으로 이호는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뛰고 있었다. 그때였다.
“난 좋아, 정신 나간 서이호도.”
“…….”
“그러니까…… 음, 해도 된다고? 나도 좋으니까. 우리 이제 사귀는 거잖아.”
다윤이 뒷얘기를 하고 부끄러운 듯 볼을 긁적이고 웃었다. 살짝 튀어나온 혓바닥이, 붉게 물든 두 볼이 서이호의 두 시야를 아예 까맣게 암전시켰다. 그리고 페이드아웃.
“아으, 야……! 좀……!”
“……하, 윤아, 좋아?”
“물고, 으읏, 으응……! 물고 말하지, 아읏……!”
질척하니 머리를 절절하게 울리는 야한 소리가 다윤의 신음 소리와 마구 뒤엉켰다. 아까 그런 소리 하지 말걸. 다윤은 아까 제 입방정을 후회했다.
그 얘기를 하고 어딘지 퓨즈가 나간 듯한 서이호가 제게 달려들었다. 아까는 다행히 뒤에 벽이 있어서 발라당 넘어지는 참사는 막았지만 이번엔 막지 못했다. 침대 헤드가 꽤나 먼 탓이었다. 침대 뒤로 넘어가고 나서 몸에 있던 모든 천 조각이 정신 차릴 새도 없이 날아가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저도 서이호도 팬티 하나 없이 알몸이었다.
온몸이 그냥 절절하게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마치 프라이팬 위에 올려진 버터처럼 달구어지는 기분이라 다윤은 다리를 서이호의 어깨에 올렸다가 내리기만을 반복했다. 발가락 끝이 간지러워 자꾸 곱았다. 눈앞이 흐릿했다. 쾌감 때문에 눈물이 날 것 같은 건 처음이었다.
처음엔 손으로 한 번, 그다음에 입으로 한 번, 다음엔 두 성기가 맞비벼지면서 동시에 한 번 더, 그리고 지금 또 입으로 다시.
혓바닥이 성기 위를 부드럽게 감싸다가, 귀두 끝을 찌르기도 하고, 아예 전체를 삼켜 입에 힘을 주어 빨았다. 서이호는 혹시 남자랑도 해 본 게 아닐까, 대체 어째서 이렇게 입으로 하는 패팅이 익숙하단 말인가.
“아…… 읏……!”
결국 참지 못하고 다윤이 또 한 번 사정했다. 이번에도 서이호는 제 성기에서 입을 떼지 않았고, 저는 서이호의 입에 그대로 사정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제발 좀 떨어지라고 사정사정했지만 이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아는 다윤은 그저 사정의 여운을 느끼며 숨을 몰아쉬었다.
“좋았어?”
“…….”
올라와서도 이미 몇 번의 사정으로 수그러든 제 성기를 야하게 만지작거리며 서이호가 물었다. 제가 몇 번이나 사정한 증거처럼 입가에 묻어 있는 하얀 정액이 더 서이호를 야하게 만들고 있었다. 운동선수라 덩치는 웬만한 사람과 비교도 안 될 정도면서 저렇게 입에 정액을 잔뜩 묻히고 묻는 꼴이라니. 더럽게 야한 놈……. 다윤이 그런 생각을 하며 서이호의 어깨를 밀었다.
“윤아, 내 입이 좋아?”
“야, 쫌…….”
“그렇게 질질 싸고도 또 세울 정도로 좋아?”
“이 미친놈아…….”
화낼 기운도 없어서 다윤이 중얼거렸다. 피식 웃고 있는 서이호의 얼굴이 지독히도 얄미웠다. 그 와중에 또 섹시해서 다윤이 고개를 들어 서이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제 정액 냄새가 났는데 이상하게 그게 더럽다는 생각보다는 야하게만 느껴져서 꼴렸다. 저도 서이호를 닮아 가나.
이호가 손을 들어 서랍을 뒤적거렸다. 다윤은 한쪽 눈만 들어 서이호가 무엇을 꺼내는지 지켜봤다. 로션 통 하나와 콘돔이 툭 하고 빠져나왔다.
“……준비해 두고 있었어?”
다윤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긴, 그 서이호인데……. 제가 알기로 서이호는 중학생 때 동정을 뗐다. 저보다 조숙해도 한참 조숙하구나. 이해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집에 데려온 사람은 너뿐이야.”
“거짓말 치지 마.”
“진짜야. 사귀던 사람들한테는 집이 어딘지도 말 안 했어. 괜히 귀찮은 일 생기면 곤란하니까.”
고맙다고 해야 할지, 다윤이 피식 웃자 이호도 웃었다. 하여간 개죽이. 우리 인기 많은 개죽이랑 사귀는데 제가 감수해야 할 질투심 같은 거였다. 다윤이 손을 들어 이호의 머리카락을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 희미하게 웃은 이호가 슬쩍 하고 다윤의 엉덩이 사이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하얀 로션 같은 것을 여유롭게 짜낸 이호가 제 질척한 손가락으로 다윤의 안쪽 구멍을 살살 쓰다듬고 있었다.
“아읏, 뭐, 뭐야…….”
다윤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앞에만 지독하게 괴롭히던 서이호가 이번엔 뒤쪽으로 타깃을 옮긴 모양이었다. 다윤은 저도 모르게 눈을 꾹 감았다. 그 찡그린 얼굴이 지독히도 사랑스러워서 이호는 그 위에 도장 찍듯 입술을 내렸다.
“너무 섹시해, 윤아.”
“…….”
“너무 섹시해서…… 그냥 내가 다 먹어서 없애 버리고 싶어.”
누구도 볼 수 없게 감추고 싶어. 다윤은 이호의 말을 머릿속에서 판단할 정신이 전혀 아니었다. 한 번도 무언가 들어간 적 없는 그곳을 손가락 하나가 쿡 찔러 오는 순간이었으니까.
“아……!”
로션의 질감 때문에 안쪽을 쑤시는 소리가 아까보다 두 배로 야했다. 질척질척한 소리가 귀를 울리고 다윤은 본능적으로 이호를 밀어내려고 했다. 이건, 이건 아니다. 아프기도 아플 뿐더러 무언가 이상한 부분을 건드리는 느낌이었으니까.
“자, 잠깐만, 기, 읏, 기다려, 아읏……! 기다리라니까!”
“기분 좋게 해 줄게. 아까처럼.”
“아니, 으읏……!”
손가락이 한 개, 두 개, 종래에 가서는 네 개까지 들어갔다. 풀어 줘야 나중에 더 아프지 않다면서 이호가 끈질기게 제 안을 손가락으로 절절히 녹였다.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딘지 모르게 더 부끄러운 일이었다, 뒤가 쑤셔지는 건. 서이호가 영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다윤은 그 어깨에 얼굴을 박고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때였다. 길쭉하게 쭉 뻗은 손가락이 어디 한 곳을 스치자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쾌감이 전신을 쭉 훑었다. 다윤은 눈이 크게 떠지고 신음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가는 다물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기구나.”
그렇게 말하면서 서이호가 여유롭게 그 부분만을 반복해서 문질렀다. 온몸이 쾌감점이 된 기분이었다. 이 와중에 앞은 다른 한쪽 손으로 패팅 하듯 문질러지고 있었다.
“아, 아읏! 으응! 으……! 응……!”
참지 못하고 다윤이 정액을 터트렸다. 몇 번의 사정 끝에 이제는 묽은 액이 뚝뚝 서이호의 손을 적셨다. 안쪽을 지독하게도 괴롭히던 손가락도 다윤이 사정하자마자 부드럽게 빠져나왔다.
끝난 건가. 다윤은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진짜 미치게 야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정신을 갈무리할 무렵, 이호가 제 다리를 번쩍 들어 올려 제 어깨에 올렸다.
순간 그런 이호와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을 보자마자 다윤은 깨달을 수 있었다. 아직 멀었다는 걸. 어쩌면 이제 시작이라는 사실도.
“근데, 있잖아…….”
“응?”
다윤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미 참을 대로 참아 한계까지 온 이호는 흐릿해지는 시선을 최대한 붙잡으며 다윤을 쳐다봤다. 진지한 눈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느리게 깜박이다가 이내 말했다.
“지금 네 걸 넣으려는 거지?”
갑작스럽게 나온 직설적인 말에 오히려 이호가 놀라서 헛기침을 했다. 하여간 최다윤은 사람을 방심할 틈을 안 줬다. 하지만 다윤은 그런 이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그게 가능해?”
그러니까…… 그렇게 큰 게, 가능해? 찢어질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손가락만으로도 빠듯했었다. 나중에야 조금 괜찮아진 거지 솔직히 처음엔 고통 때문에 좋은지도 몰랐었다. 그런데, 저 큰 게? 언뜻 봐서는 전혀 가늠도 안 됐다. 솔직히 조금 무서웠다.
“하지 말까?”
저렇게 잔뜩 세워 놓고, 심지어 이젠 콘돔까지 다 끼운 상태에서 무슨 말이람. 하여간 서이호는 아랫도리랑 머리가 따로 노는 것 같았다. 다윤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지 말라 그러면, 안 하게?”
“네가 싫다면 안 해.”
“됐어.”
싫은 게 아니라 좀 무서운 것뿐이었다. 그 전에 그저 서로의 것을 훑고 수음해 주는 것을 뛰어넘는…… 뭔가 서로 연결된다는 그 감각이 그랬다. 물론 저도 성욕이 있는 사람이고, 오래도록 좋아하고 짝사랑해 온 상대와 드디어 마음이 맞고 몸이 맞는 상황을 거부할 리는 없었다.
“나도 좋으니까.”
그냥, 모든 걸 다 떠나서 네가 좋으니까. 그러니까 하고 싶은 거라고. 다윤은 중얼거렸다.
“윤아, 그거 알아?”
“……뭐?”
“내가 훨씬 더 좋아해.”
다윤이 이호의 말에 피식 웃었다. 어느새 어깨에 올려놓았던 다리가 밀려 위로 올라가고, 입구에 닿아 있던 귀두가 조금씩 밀려들고 있었다.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보다 좋았던 건 세상 누구보다 다정한 서이호의 눈빛과 말들 때문이었다.
정말이야, 너무 좋아 윤아. 사람을 이렇게 좋아하는 게 말이 되나 싶을 정도로. 가끔 이러다가 이 감정이 나를 잡아먹을까 봐 무서울 정도로 좋아.
그런 말들이 허공 위를 둥둥 떠다녔다. 느릿하게 밀고 들어오는 이호의 것이 하나도 아프지가 않았다. 오히려 더 닿고 싶어서 다윤은 이호의 어깨에 걸려 있던 다리를 허리에 감쌌다.
“아읏…….”
머릿속에서 그런 말들이 둥둥 떠올랐다. 아마 너는 상상하지도 못할걸. 내가 널 얼마나 오랫동안 좋아했는지. 너를 어떤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어쩌면 나보다 더 나 같은 너를 얼마나 원하는지.
마음의 크기를 재고 따지는 일이 그 흔한 연인의 눈꼴신 싸움이 될 것 같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입 밖으로 나오는 건 몸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신음 소리뿐이었다.
“조여, 윤아.”
“으…….”
“조금만 천천히 할…….”
“아니…….”
다윤이 아까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자 이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허리를 뒤로 빼려고 했다. 그때 다윤이 손을 들어 이호의 어깨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힘겨워하면서도 이호가 뒤로 멀어지려 하니 다윤이 간곡히 이호에게 매달렸다.
“그냥, 그냥 해.”
“…….”
“이호야, 괜찮으니까, 으읏-!”
참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이호가 허리를 들어 깊숙이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느릿하게 파고들어 올 때보다 강렬한 쾌감이 머리를 절절 하게 울렸다. 게다가 아까 계속 손으로 괴롭히던 그 부위를 커다란 성기가 단번에 누르고 있었다.
완전히 삽입된 상태로 이호가 입술을 내려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그 어떤 부분도 결합되지 않은 부분이 없는 것처럼 두 사람은 마치 한 몸처럼 달라붙었다.
다윤보다 이호가 조금 더 괜찮아 보이는 것뿐, 사실은 하나 남은 이성을 간신히 붙들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안쪽을 더 깊숙하게 찔러 넣고 제 욕구를 채우고 싶었다. 다윤의 흐트러진 얼굴을 더 흐트러트리고 싶었다. 이 와중에 다윤의 눈가에 살짝 맺힌 눈물도 미치게 섹시했다. 누구든 최다윤 앞에서는 이렇게 정신을 놓게 되지 않을까. 처음 하는 것처럼 사람을 어쩔 줄 모르게 만들지 않을까.
처음에는 느릿하게, 안쪽을 부드럽게 찔러 넣었다. 뒤로 빠지면 마치 나가지 말라는 듯이 달라붙고, 다시 깊숙하게 찔러 넣으면 제 것을 끊어 먹겠다는 것처럼 조여 들었다. 이호는 이를 꽉 깨물었다. 저도 모르게 작게 욕설이 새어 나오는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으읏, 흐, 흐읏…… 하.”
“왜 웃어?”
고통스러운 듯, 혹은 제 쾌감에 어려 신음을 하던 다윤의 목소리에서 살며시 웃음기가 느껴져서 이호가 물었다. 두 사람의 코끝이 부딪히고, 다윤의 눈 바로 앞에 이호의 눈동자가 있었다. 맑고 부드러운 눈동자가. 다윤은 손을 들어 이호의 머리를 쓱, 쓰다듬으며 말했다.
“으, 응……. 귀여워서.”
귀여워. 개죽이.
개죽이, 다윤이 중학생 때 저를 부르던 별명이었다. 그렇게 말하고 제 머리에 얹은 다윤의 뜨거운 손이, 그리고 살며시 올라가는 입꼬리가 이렇게 섹시할 일일까. 그러면서도 제 아래에서 흔들리는 그 모습이 말이다.
“아, 아! 아! 읏, 야, 으읏……! 너무 빨, 빨라…… 으읏……!”
“시발, 진짜…… 윤아, 윤아.”
느릿하던 움직임이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다. 그 크고 넓은 침대가 삐걱거렸고 출렁이는 듯한 착각도 들었다. 이호는 제 쾌감점을 누르고, 빠르게 치고 들어오며 뭉근하게 짓눌렀다. 눈앞이 번쩍번쩍했다. 무언가가 지나갔다가 스치고, 또 지나갔다.
아까는 몇 번을 손으로, 그리고 입으로 갔던 성기가 이제는 만져 주지도 않았는데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저 뒤를 쑤시는 것만으로도 이런 기분이 든다는 게 참 신기했다. 아까보다 훨씬 더한 쾌감 같은 것. 그건 어쩌면 좋아하는 사람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아, 흐읍……!”
“후…….”
한참을 이호의 아래에서 흔들리던 다윤이 저도 모르게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헉,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그와 동시에 다윤의 성기에서 정액이 터져 나왔다.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었다. 이호의 것도 느릿하게 안을 파고들며 사정의 여운을 즐기는 듯했다.
“윤아, 너 진짜 섹시해.”
“뭐라, 흐끅, 뭐라는 거야…….”
저도 모르는 사이에 울고 있었나 보다. 이제는 정말 뭘 말할 힘도 없어서 다윤은 축 늘어졌다. 질척하니 야한 소리를 내며 이호의 것이 안에서 빠져나오고 마치 다윤의 입구가 안달하듯 한 번 수축됐다가 이완되었다. 그 모습에 이호는 방금 사정한 성기가 다시 뜨거워지는 걸 느꼈지만 꾹꾹 참아 냈다. 다윤의 지금 눈을 보면 잠들기 직전이었다. 하긴, 제가 오랜 시간 너무 괴롭히긴 했다.
이호는 혀를 내밀어 다윤의 얼굴을 오래도록 핥았다. 축축하고 짠맛이 느껴졌는데 그 어떤 것보다 달콤했다. 마치 과육을 훑는 느낌이 이런 걸까 싶을 정도로.
“이제 그만…….”
다윤은 뒷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달콤해서 이호는 다윤이 잠들고 나서도 오래도록 다윤의 허리를 끌어안고 제 온몸을 마구 비벼 댔다.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게 이토록 사람을 안달 나게 하는 거라는 걸, 이호는 차근차근 깨달아 가는 중이다.
처음 먹어 본 캐러멜 맛이 입에서 계속해서 맴돌았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캐러멜. 서이호가 처음으로 건네줬던 캐러멜.
“나 너처럼 예쁜 애는 처음 보는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면서 부끄럽다는 듯이 웃는 얼굴을 보고 다윤은 어이없이 웃었지만 그때 솔직히 마음이 쿵쾅쿵쾅 이리저리 뛰었다. 내가 예쁘다고?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꼬질꼬질하고 못난 모습만 보였으니까.
캐러멜뿐만 아니라 책, 그리고 제가 훌륭한 야구 선수가 될 거라며 꼭 간직하라고 어설프게 사인을 해서 건네줬던 야구공까지. 다윤은 모두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또 간직하고 있었다.
자신의 다정함은 아버지에게서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서이호에서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자기 것은 오로지 자신이 챙겨야만 하고, 남을 생각할 수 없던 그곳에서 이호는 유일하게 제게 무언가를 베풀어 주던 사람이었으니까. 그 베풂이 아니었다면 다윤은 평생 그런 걸 받는 기분도, 주는 기분도 몰랐을 거다.
“하…….”
한숨과 함께 눈이 떠졌다. 포근하고 따듯한 꿈을 꿨는데, 기억이 흐릿했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몽롱하게 눈을 깜박이던 다윤이 그제야 제 옆에서 저를 꼭 끌어안고 잠든 서이호를 봤다.
밤에는 그렇게 저를 몰아붙이더니 자는 모습은 아주 애였다. 다윤은 손을 들어 이호의 볼을 살며시 꼬집었다. 이호가 고개를 살짝 털더니 작은 소리를 내며 다윤을 더 세게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강아지 같은 그 모습에 또다시 살며시 웃음이 나왔다.
잠시 그렇게 누워 있다가 다윤이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허리가 뻐근하니 찌릿한 감각이 다리에서부터 올라왔다. 그래도 온몸이 끈적거리거나 하는 것 없이 뽀송한 데다가 기억도 안 나는 서이호의 옷을 입고 있는 걸 보면 어제 먼저 잠든 다윤 대신 이호가 모두 뒤처리를 한 듯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밥 먹다가 그런 거였지……. 참, 저나 서이호나 제정신은 아니었다. 밤에 있었던 일이 모조리 다시 떠올랐다. 저를 보며 안달 난 표정을 짓던 서이호, 제 안에 들어와 다급히 저를 헤집던 동작들. 처음 해 보는 성관계였는데 너무 좋았다. 이렇게 좋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다윤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이호의 가슴팍에 묻었다. 그 동작에 서이호가 낮은 숨소리를 내면서 손을 들어 다윤의 어깨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윤아…….”
잠꼬대를 하듯 중얼거리고 다시 느린 숨소리를 뱉으며 자는 이호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났다. 윤이라니. 기억도 못 하면서 늘 저를 그 이름으로 불렀다.
어제 하루가 유독 길었던 느낌이다. 다윤은 다리를 침대 아래로 조심스럽게 빼서 희미한 빛으로 보이는 이호의 방을 훑어봤다. 침대와 작은 탁자 하나가 전부인 깔끔한 방이었지만 서이호의 방이라고 생각하니까 온 구석구석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시호 누나와 함께 있느라, 그다음엔 이호랑 이런저런 일들을 하느라 집을 둘러볼 틈도 없었다. 무척 궁금했었는데. 다윤은 이호가 깨지 않게 까치발을 하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 한복판에 있는 장식장. 다윤은 처음 왔을 때부터 이곳을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다윤은 야구 하는 서이호 선수의 팬이었으니까. 장식장 안에는 서이호가 신인 MVP를 받았던 것부터 시작해서 재작년 한국시리즈 우승 때 받은 트로피, 그리고 세계 대회에 나갔다가 받은 상도 있었다.
반짝거리는 은패에 서이호, 라는 이름이 가득했다. 온 마음 가득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차올랐다. 이렇게 멋있는 사람이 내 친구고, 내 애인이고, 내 스타라는 생각에. 다윤은 피식 웃었다. 조금 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에 장식장 앞으로 발을 더 내밀던 순간이었다.
“왜 나 버리고 가…….”
누가 들으면 진짜 버리고 도망갔다는 착각이 들게 할 만큼 갈라진 목소리로 이호가 애틋하게 다윤의 어깨를 마구 비볐다. 곤히 잘 자고 있더니 왜 깬 건가 싶었지만, 제가 아무리 조용히 한다고 해도 걷는 소리가 났겠다 싶었다. 공연히 깨워서 미안해지기도 했고.
“깼어? 미안. 조용히 움직인다고 했는데.”
“소리 나서 깬 거 아니야. 허전해서 깬 거지.”
“허전해?”
“응, 최다윤 없으니까 잘 때도 허전해.”
잔뜩 잠긴 목소리로 그런 소리를 하는데, 솔직히 훅 하고 넘어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서이호는 참 이런 말을 잘했다. 저는 아직 어색하기만 한데. 그런 생각을 하며 다윤이 아프지 않게 이호의 어깨를 살짝 치며 말했다.
“완전 선수야, 서이호.”
질투가 가득 담긴 그 목소리에 이호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 웃음에 다윤이 더 심통이 나서 이호를 꽉 끌어안았다.
“다른 사람한텐 이런 얘기 한 번도 한 적 없다니까.”
나 좀 믿어 줘, 응?
쪽, 쪽. 이호의 입술이 다윤의 머리카락 위에 닿았다. 다윤은 어쩔 수 없다는 목소리로 “그래, 생각해 볼게.” 하고 중얼거렸다. 다시 한번 이호가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이거 보고 있었던 거야?”
“응.”
이호가 장식장을 가리키며 묻자 다윤이 다시 빙글 돌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려한 트로피 장식들이 새벽임에도 밝게 빛이 나는 듯했다.
“그냥, 아까는 제대로 못 봐서 좀 자세히 보고 싶었어.”
“이거?”
“응. 멋있어.”
다윤의 말에 이호는 흐릿한 눈으로 상패들을 바라봤다. 그가 뒤에서 그런 시선으로 제 트로피를 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다윤이 여전히 반짝반짝 빛이 나는 눈동자로 장식장을 봤다.
“너 줄까?”
“무슨 소리야.”
“너 다 가져. 다 줄 수 있어.”
“헛소리 좀 그만해라? 응?”
다윤이 손가락으로 이호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튕기며 웃었다. 이호가 진심인데, 하고 작게 중얼거리며 다윤의 어깨에 턱을 기댔다.
언젠가 이 트로피를 들고 카메라를 보던 서이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땐 무척이나 경직되어 있었는데. 우승을 한 사람치고 즐거워 보이지도 않았고. 지금 이렇게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이 더 즐거워 보일 정도로 말이다.
“나 이때 다 기억해. 너는 모르겠지만, 우승 경기 보려고 내가 경기 티켓 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다윤은 그렇게 말하며 설핏 웃었다. 우승 트로피들 하나하나를 보는 최다윤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런 다윤의 눈빛을 보면서 이호가 중얼거렸다.
“정말 이상해.”
“뭐가.”
“난 늘 잘해야만 누군가 나를 그렇게 응원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아닌 나를 예전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쭉 좋아해 주는 네가 신기하고 고마워.
이호의 말에 다윤은 웃었다. 이호의 야구는, 그의 성공은 제게 무엇보다 큰 위안이었다. 그가 뛰는 경기들은 제 삶을 행복하게 해 주는 조미료 같은 것들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잠시 슬럼프에 빠졌던 순간에 다윤의 위안이 사라졌나,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다윤은 늘 확신 같은 게 있었다. 저 그라운드 위에 서 있는 한, 서이호는 제게 늘 힘이 되어 줄 거라고. 그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지 말이다.
“……예전엔 오로지 야구 할 때 내 생각만 했는데.”
이호가 그렇게 말하며 뒤에서 다윤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은 배트만 잡으면 네 생각밖에 안 나. 너를 생각하면, 늘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네가 좋아했으면 좋겠어서.”
“안 그래도 돼.”
다윤은 몸을 돌려 이호를 다시 똑바로 봤다. 그에게 또 다른 마음의 짐이 되는 건 싫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웃었다. 새벽의 푸른 공기가 두 사람을 온전히 감싸고 있었다.
“난 너만 있으면 되니까. 잘하지 않아도 좋아.”
이호의 눈빛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아마도 이런 얘기를 해 주는 사람이 없었겠지. 그동안 그는 오래도록 이런 말들을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아, 내 애인 너무 좋아…….”
이호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윤의 목덜미에 제 얼굴을 마구 비볐다.
애인이라. 그 말이 낯간지러우면서도 좋아서 다윤은 피식 웃었다. 나도 내 애인 너무 좋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윤은 저를 끌어안는 이호를 마주 안았다. 사랑스러운 새벽 시간이었다. 영원히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만큼, 소중한 순간이었다.
* * *
거의 4개월 만에 다시 온 1군에서 이호는 환대를 받았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만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다시 와서 기쁘다며 인사를 건네거나, 부상 회복은 다 된 거 확실한 거냐며 알게 모르게 견제하는 선수들도 있었다.
감독님을 만나 얘기를 나누고, 이호는 훈련장으로 들어섰다. 한창 준비 운동에 들어간 선수들이 먼저 기구를 이용해 운동을 하고 있거나 바깥에서 가볍게 캐치볼을 하며 몸을 풀고 있었다.
솔직히 속이 좀 울렁거렸다. 다시 본격적으로 시작한다고 생각하니 무척이나 긴장이 됐다. 거의 몇 년을 지내 온 구장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오자마자 알게 모르게 공기가 달라진 듯한 1군의 분위기 때문에도 그렇고.
그래도 마음이 불안할 때면 다윤이 해 준 말을 되새기려고 노력했다. 잘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 그런 말을 하며 예쁘게 웃던 내 애인 최다윤 생각.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불안함은 어느새 싹 가시고 실실 웃음이 나온다. 제가 그 최다윤의 애인이라는 것을 생각만 해도 자랑스러워지는 느낌이라 굳이 야구를 잘하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편한 마음으로 이호가 훈련용 신발로 갈아 신고 있을 때였다.
“서이호!! 이 짜식!”
휙, 하고 그런 이호의 등에 누군가 달라붙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떨어져.”
“아, 언제 봐도 까칠하다니까. 그래도 네 그 사포 같은 까칠까칠함이 없어서 심심했다, 야. 해외 훈련도 어찌나 재미가 없던지.”
민우가 실실 웃으며 이호에게서 떨어졌다. 저와 다시 훈련을 한다고 하니 꽤나 좋은 모양이었다. 이호는 그런 민우를 무표정하게 한번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서이호, 간만이네?”
이호와 포지션이 겹치는 기정이 먼저 이호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기정은 저보다 선배였지만 제가 들어오고 나서는 매번 포지셔닝에서 밀려 알게 모르게 이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호가 꾸벅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 운동을 하려 기구 쪽으로 다가가려 했다. 탁, 하고 기정이 이호의 어깨를 건드렸다.
“몇 달 안 봤더니 예의는 다시 밥 말아 먹었냐? 똑바로 인사 안 하냐?”
꼭 이런 새끼들이 있었다. 하라는 운동은 안 하고 팀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세우는 데만 급급한 새끼들. 이호는 그런 놈들이 가장 한심했다. 하지만 다시 1군으로 복귀한 첫날부터 문제를 일으키고 싶진 않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잘해 보자 앞으로. 아, 뭐 아직 어깨도 시원찮아 보여서 제대로 송구나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잔뜩 가시 돋친 말을 하고는 기정이 피식 웃었다. 타격 수준이나 혹은 수비 수준도 이호보다 한참 모자란 기정이 내세울 수 있는 건 이호의 어깨 부상뿐이었다. 물론 예전과 같은 힘을 쓸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때와 다름없는 상태라는 걸 알면서도 기정은 굳이 그 얘기를 걸고 넘어졌다.
하긴, 뭐 저런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거야 그런 것들뿐이지. 기정의 뒷모습을 보며 이호가 생각했다. 민우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이호 옆에 서서 속삭였다.
“저 인간은 하여간……. 굳이 오랜만에 보는 사람 옆에 와서 미운 소리를 얹냐.”
“됐어.”
이호가 민우를 뒤로하고 훈련장으로 들어섰다.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저런 인간들 정도야 어딜 가든 있었으니까.
야구는 그랬다. 같은 포지션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든 끌어내리고자 하는 그 지독한 마음. 물론 서로 한마음 한뜻으로 경쟁하는 건 좋지만, 저런 식이라면 그런 마음은 오로지 해만 될 뿐이다.
저런 인간들에게 에너지를 쏟기엔 제 에너지가 아까웠으니까. 제 에너지는 사랑하는 애인에게만 써야 하는데.
이호는 훈련을 하는 내내 다윤을 떠올렸다. 오기 전에 한참 동안 전화 통화를 했는데도 아쉬움은 달래지지 않았다. 야구나 훈련을 하는 와중에 다른 사람을 떠올리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인데도 어쩐지 그게 아주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온 일처럼 익숙하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하니 더 훈련도 잘되는 것 같고. 코치님과 감독님은 2군에서 회복 훈련을 잘 받고 와서 감이 떨어지진 않은 것 같다며 좋아했지만, 이호는 그게 다른 이유 때문이라는 걸 알기에 씩 웃었다.
“자, 이번 시즌 생각하면서 너무 기죽지 말고, 각자 타격감이랑 능력치 최대로 끌어올리는 거만 생각하는 거다. 스프링 캠프 가기 전까지 각자 스스로의 장점만 끌어올려 봐. 다들 내년 시즌은 힘내 보자.”
“예!”
감독님의 말에 가게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이호와 다른 몇몇 선수들 복귀 기념으로 회식을 하게 되었다. 다들 오랜만에 먹는 고기라며 눈이 반짝반짝해서는 기세 좋게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팀 내에 핵심 투수라고 할 수 있는 외국인 투수의 재계약 관련 소식, 그리고 유망주인 투수와 타자들의 복귀가 선수들을 들뜨게 만들었다. 이번 시즌은 결국 좋지 않게 끝이 나 버렸지만, 다음 시즌엔 더 잘하겠다는 마음이 모두의 마음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이호는 계속 휴대폰을 봤다. 지금 가더라도 11시쯤에야 볼 수 있으려나 싶었다. 다윤은 오지 않아도 괜찮다며, 어차피 저도 시험 기간이라 도서관에서 밤을 새워야 할 것 같다는 연락을 했지만, 저는 그럴 수 없었다. 하루 종일 보고 싶었는데 결국 못 본다는 건 진짜 말도 안 된다.
그렇다고 술을 뺄 수는 없어서 적당히 받아 마셔 가며 분위기를 맞추다가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몰래 뒷문 쪽으로 빠져나갔다. 이미 안쪽의 답답한 분위기에 참지 못한 선수들이 몇몇 나와 있었고, 그 중엔 민우가 끼어 있었다.
“아, 이호 선배.”
“안녕하십니까.”
“됐어, 인사 깍듯하게 할 필요 없어.”
담배를 피우던 후배들 몇이 피우던 것을 떨어뜨리고 바닥에 지진 후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호는 손을 내저으며 하던 것 마저 하라고 시선을 주었다. 어딘지 모르게 감동한 듯한 후배들이 이호를 보았다.
“이호 선배 진짜로 그만두신다고 할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얘네가 오죽하면 나한테 맨날 와 가지고 너 관두냐고 들들 볶았다, 진짜.”
민우의 말에 벽에 기대선 이호가 후배들을 빤히 쳐다봤다. 이호의 무표정에도 후배들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선배가 워낙 잘하시니까 그 위 선배님들도 건드리지 않으시잖아요. 그러면 알게 모르게 그 딱딱한 분위기가 풀린다니까요. 선배 없으셨을 땐 얼마나 분위기가 살벌했는지.”
“하여간, 야구 연습도 제대로 안 하면서 다들 이상한 데에 집착한다니까. 그런 사람들이 2군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말이야.”
“기정 선배는 아무래도 내려가실 것 같습니다. 이번에 타격감 많이 나빠지셨던데요.”
“그 인간이야 뭐, 언제 내려가도 사실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 여기 오래 있는 게 용한 거지.”
민우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딱히 구단 내의 가십에 흥미가 있지 않은 이호는 휴대폰을 들어 연락 온 데가 있나 확인했다. 다윤에게선 아직 연락이 없었다. 아르바이트는 끝났나. 지금은 시험공부 하느라 바쁜가, 연락해 볼까, 그런 생각만 몽글몽글 피어오르느라 구단에서 누가 어떻게 되고 그런 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참, 서이호 너 소개팅 안 받을래?”
“뭐?”
통화 버튼 위에서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 민우가 물었다. 어딘지 비장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로 민우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내가 너 때문에 우리 애인님한테 특별히 부탁해서 연락처 받아 왔는데. 차였다며? 원래 사랑은 사랑으로 극복해야 하는 법이거든.”
“네? 이호 선배가 차여요? 대체 누굽니까?”
“와, 말도 안 됩니다. 진짜.”
호들갑을 떠는 후배들을 뒤로하고 민우가 이호에게 사진을 보여 주었다. 이호는 관심도 없다는 얼굴로 쳐다보지도 않고 휴대폰을 밀었다.
“필요 없어.”
“왜. 사랑은 사랑으로 잊는 거야, 짜샤. 이분 어때? 내가 진짜 부탁하고 부탁해서 소개팅 확정 받아 왔는데.”
“애인 있으니까 됐다고.”
“뭐? 야! 너 나한테 차였다고 한 지가 언젠데!”
당황한 민우가 이호를 보며 소리쳤다. 하여간 저 무표정한 얼굴. 진짜 얄밉기 짝이 없었다. 이호는 여전히 덤덤한 얼굴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근데 안 사귀는 상태였어도 안 받았을 거야.”
백 번 차여도 천 번 들이댈 예정이었으니까.
이호는 다른 쪽을 쳐다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그 말에 민우와 다른 후배들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서이호 선배가, 저런 얼굴에, 저런 멘트라니. 혹시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후배들에게 군기를 잡거나 눈치를 주진 않아도 은근히 서늘한 사람이 서이호였다. 특히 연애 문제에 그랬다. 하루가 멀다 하고 구단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찬바람 쌩 돌게 보내는 모습을 목격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저런 외모에 저 정도 능력이라면 저럴 수 있다고 모두 입을 모아 얘기를 했지만 말이다.
“아, 연락 왔다.”
“야, 서이호 어디 가! 폭탄 터트려 놓고 이 자식아!! 더 얘기하고 가!!”
“감독님이 혹시 나 찾으면 집안일 때문에 먼저 갔다고 얘기해. 간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해맑게 웃는 얼굴로 이호가 전화를 받으며 사라졌다. 모두 방금 스치듯 본 서이호의 얼굴이 정말 그의 것이 맞나 싶어 경악에 빠졌다. 그런 모두를 뒤로한 서이호만이 혼자 태평하게 사라져 버렸다.
한편, 그때 다윤도 한창 이호를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아르바이트를 일찍 끝내고 시험을 준비하려 모인 도서관에서 지율과 준구가 다윤의 다정함에 대해 얘기하고 있을 때였다. 처음 시작은 지율과 함께한 팀플에 대해 얘기했을 때부터였다.
“걔네 진짜 뻔뻔하다니까. 다윤이가 그냥 다 받아 주고 무른 거 아니까 그러는 거라고.”
지율은 이번 학기 내내 불만이었다. 조장이라는 핑계로 매주 내야 할 과제를 다윤에게 떠넘기는 게. 저는 꼼꼼하게 정리해서 제 분량을 제출하지만 다른 애들은 대충대충 하고 넘겨서는 다윤이 정리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속에서 열불이 나는 것 같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화를 내자 왜 당사자인 다윤이가 괜찮다는데 네가 그러냐며 되레 타박을 듣기도 했다.
정작 다윤은 아무렇지 않은 듯 보여 지율은 더 화났다. 다윤이 워낙 다정한 성격이라는 건 과 내에서도 유명했지만 그렇다고 착한 사람을 이용하는 게 당연한 일은 아니니까.
“괜찮아, 걔네도 바빠서 그랬겠지.”
다윤은 그렇게 얘기하며 졸린 눈을 비비며 책을 봤다. 이미 끝난 일을 가지고 딱히 화를 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다정도 병이야. 확실해.”
“다윤이 넌 너무 착해서 문제야.”
준구와 지율이 입을 모아 말했다. 다윤은 그런 두 사람을 빤히 바라봤다. 착하다라, 너무 다정한 것도 문제라는 건 조금 슬픈 일이었다.
아주 오래된 습관 같은 거였다. 한 번 버려진 아이는 버림받지 않기 위해 모든 걸 양보하고 꾹꾹 참아 왔다. 다윤은 다정한 아버지를 보면서 그런 제 성격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나쁜 거라니. 그런 얘기는 조금 서글펐다.
“물론 다윤아, 알지? 네 성격 탓이라기보다는 그걸 이용하는 애들이 나쁜…….”
“응, 알아. 나 잠깐 편의점 좀 다녀올게. 너무 피곤해서 커피 좀 사 와야겠어. 너네 것도 사다 줄까?”
“됐어. 얼른 갔다 와. 갔다 와서 커뮤니케이션 이론 같이 보자.”
다윤이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눈치 없는 준구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지율은 내심 다윤에게 미안한 듯 다윤의 뒷모습을 봤다. 아까와는 달리 처진 어깨를 보니 방금 한 말들에 상처를 받은 모양이었다.
“준구 너도 참 눈치 없다.”
“엉? 내가?”
에휴, 하고 지율이 한숨을 쉬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눈을 깜박이는 준구를 봤다. 눈치든 착함이든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쪽이 힘든 건 확실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두 사람을 두고 밖으로 나온 다윤은 길게 숨을 뱉었다. 12월의 바람은 쌀쌀했지만 머리를 식혀 주기엔 충분했다. 편의점에 가려던 다윤은 일단 도서관 뒤쪽 벤치에 앉았다. 잠시만 혼자 있고 싶었다.
이호의 연락은 아까 12시 즈음에 온 것을 마지막으로 끊겨 있었다. 도서관에서 밤을 새운다는 제 말에 알겠어, 라고 했던 말이 끝이었다. 회식을 한다더니 술 많이 마셨나. 연락해 볼까.
지금 딱 이렇게 지칠 때 얼굴 한번 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오늘 훈련에 회식에 지쳐 있을 이호를 보자고 부르기엔 너무 미안했다. 그래도 전화라도 하자 싶어 통화 버튼을 눌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결이 된 듯 소리가 들렸다.
- 응, 윤아.
전화 너머 소리가 시끄럽다기보다는 고요했다. 집인가? 하긴, 지금쯤이면 회식이 끝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이야?”
- 아니.
“그럼 어디야?”
- 음, 비밀?
“그게 뭐야.”
다윤이 낮게 웃었다. 그러자 서이호도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호랑 얘기하면 다른 사람이랑 얘기할 때와는 다르게 유독 편안하고 좋았다. 마음의 긴장이 어느새 풀리는 기분이었다.
- 피곤해?
목소리만 듣고도 알아차리는구나. 다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그렇게 하면 전화 너머에 있는 이호가 알아차리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설핏 웃음이 나왔다.
“괜찮아, 이번 주만 좀 고생하면 되지.”
- 이번 주면 시험 끝이야?
“응, 그래서 이번 주만 아르바이트도 좀 줄이고 도서관에서 밤새우려고.”
- 그럼, 이번 주 내내 못 봐?
통화라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에 다윤은 이호가 입을 잔뜩 부풀리고 삐져 있을 게 상상이 갔다. 그 때문에 다윤은 다시 낮게 웃었다. 지금 전화 통화만으로도 몇 번을 웃은 건지. 세기도 힘들었다.
- 아, 최다윤 못 보면 내가 힘들어서 안 되는데.
“참 나, 서이호. 자꾸 그런 말 하면 내가 더 좋아질 줄 알아?”
- 어? 아니었어?
아니라고 당연하게 반박해 줘야 하는데 다윤은 그저 웃기만 했다. 사실이니까. 그런 얘기를 하면 이상하게 더 좋아지곤 했으니까. 이호가 다윤의 웃는 소리에 피식 웃었다.
- 나도 알아, 최다윤 매일매일 나 더 좋아진다는 거.
“네가 뭘 아냐.”
- 내가 그러거든.
아, 귀엽다. 정말 귀여웠다. 맨날 어떻게 그렇게 신박한 말들을 배워 와서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지. 그때 이호가 말했다.
- 내가 지금 네 기분 맞혀 볼까?
“뭘 어떻게.”
- 너 지금 나 보고 싶지?
아니라고, 장난스럽게 말하려는 순간 너무 가까이에서 들리는 듯한 목소리에 다윤이 고개를 들었다. 핸드폰이 귀에서 떨어졌는데 숨소리가 가깝게 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 보이는 얼굴.
뛰어왔나, 싶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서이호. 이상하게 현실이 아닌 듯한 서이호.
“맞혔지?”
“…….”
“내 마음이랑 똑같잖아, 그렇지 윤아?”
다윤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들어 웃고 있는 서이호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제야 현실감이 느껴졌다. 진짜 서이호구나, 내가 만들어 낸 환상 같은 게 아닌 진짜 서이호. 보고 싶은 마음이 억지로 꾸역꾸역 만들어 낸 환상이 아니라, 정말로 최다윤을 보고 싶어 하는 서이호 말이다.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호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런 이호에게 피곤할 텐데 왜 왔냐며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 아, 애인이라는 건 이런 거구나. 보고 싶을 때 당장 이렇게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거. 그래도 괜찮은 거.
조금 더 빨리 사귈걸.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호가 제 얼굴 위에 얹혀 있던 다윤의 손바닥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웃었다. 그런 이호를 보자니 언제 시작했든 지금 순간 두 사람이 연인이라는 사실에 더 만족스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다윤은 이렇게 연애의 즐거움을 하나하나씩 알아 가고 있었다.
도서관 뒤쪽에 있는 벤치는 학교 내 연인들 사이에서 꽤 유명한 명당이었다. 사람이 거의 오지 않을 뿐더러, 은은한 조명과 부드러운 풀 냄새 같은 것들이 그랬다. 겨울이 되면 알록달록하게 달아 놓은 크리스마스 조명들 때문에 더 인기가 많았다.
다윤은 거의 4년, 군대 때문에 휴학한 것을 빼면 약 2년 정도 학교를 다녔지만 이곳에 한 번도 제대로 와 본 적은 없었다. 그저 그냥 그런 곳이 있다더라, 하는 얘기만 언뜻언뜻 들었을 뿐이다.
막상 오게 되니 왜 연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장소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은은한 조명들이 서이호의 얼굴 위로 비치는 걸 보면 추운 날씨인데 마음이 따듯해지는 기분이었으니까.
“아파서 쓰러진 지 얼마나 됐다고 무리해.”
이호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툭 튀어나온 입술이 가볍게 다윤의 이마 위로 닿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이호가 매고 있던 목도리는 다윤의 목 위에 둘러진 채였다. 저는 괜찮다고 말해도 막무가내로 제 목에 두르더니 해맑게 씩 웃던 서이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웃으라고 한 말 아닌데.”
저도 모르게 웃고 있었나 보다. 다윤은 고개를 이호 어깨 쪽으로 해서 편하게 기댔다. 그러자 이호의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불편해?”
“아니, 안 불편해. 계속 이대로 있어.”
그 때문에 머리를 다시 들어 올리려던 다윤을 이호가 저지했다. 몇 분 더 그러고 있으니 완전히 긴장이 풀린 듯 두 사람은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서로에게 기대고 있었다.
이호도, 다윤도 하루 내에 느꼈던 긴장과 모든 스트레스가 그 순간 날아가는 것 같았다. 신기하지,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런 기분이 들다니. 두 사람 다 같은 생각을 하며 옅게 웃었다. 맞잡은 손이 따듯했다.
서이호 앞에서는 무리해서 온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된다. 사랑받으려고 억지로 남의 눈치를 볼 필요도, 비위를 맞출 필요도 없다. 모든 사람에게 쏟아지는 부자연스러운 제 다정이, 서이호에게만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다.
어쩌면 지율이와 준구가 얘기했던 게 이런 것일지도. 부자연스러운 다정은 병이라는 말은 맞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윤은 이호의 손등을 조심스럽게 쓸면서 물었다.
“오늘 어땠어?”
“어?”
“1군 복귀했잖아. 다시 가니까 어때?”
다윤의 말에 이호가 시선을 다른 곳에 두며 피식 웃었다. 좋을 게 뭐가 있을까. 그냥 거기도 똑같은 훈련 장소일 뿐인데. 그저 조금 더 치열하고, 정신없는 곳일 뿐. 몇 년을 그곳에서 야구를 했지만 매번 익숙해질 수 없는 공기들이 부유하는 곳.
“얼른 내년 돼서 너 야구 하는 거 보고 싶다.”
“…….”
“매년 세아랑 가서 너 야구 하는 거 보는 게 내 삶의 낙이었는데. 비시즌엔 못 봐서 너무 아쉬워.”
다윤은 이제 서이호 팬이었다는 사실을 숨길 의지가 없었다. 어차피 세아나 준구로 인해 다 들킨 상황이고, 숨길 필요도 없으니까. 정작 그렇게 덤덤하게 얘기하니까 이호가 부끄러운지 머리를 긁적였다. 이호가 한참을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못할 때도 왔어?”
“응?”
“나 말이야. 못할 때도 많았잖아.”
이호가 그렇게 말하며 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다윤은 살짝 고개를 비틀어 이호의 얼굴을 봤다. 애써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괜찮다고, 다윤은 제가 못하든 잘하든 사랑해 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다윤이가 그런 제 모습을 봤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웠다. 그런 이호의 얼굴을 다윤이 두 손으로 붙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못할 때든, 잘할 때든 매번 보러 갔어. 내가 보고 싶었던 건 야구 잘하는 서이호가 아니라 그냥 야구 하는 서이호였으니까.”
“…….”
“괜찮아, 아직 그런 생각 할 수도 있지. 네가 괜찮아질 수 있게 맨날 말해 줄게.”
하루에 백 번이고 말해 줄 수 있어. 다윤이 그렇게 말하자 이호의 눈빛이 반짝였다.
“키스하고 싶다.”
다윤은 이호의 말에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제 마음도 서이호랑 같았지만…… 누가 갑자기 나타날지 모르는 바깥이었다. 다윤은 좌우로 고개를 돌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 이호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고 바로 떨어졌다.
“이거로 참아.”
이호의 입꼬리가 예쁘게 올라가는 걸 보며 다윤도 웃었다. 그 짧은 입맞춤이 그리도 기분 좋았나 보다.
“최다윤 없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어, 그동안.”
“그러게. 서이호 나 없이 어떻게 살았대.”
다윤이 장난스럽게 받아 주며 웃었다. 그 말을 듣는데도 귀가 마구 간지러워서 이호가 다윤을 붙잡은 허리에 힘을 꽉 주었다.
덩치도 큰 놈이 이렇게 귀엽기까지 하니 제가 좋아하지 않고 배길까. 이호가 참는 것처럼 다윤을 꼭 끌어안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만 반복했다. 다윤은 그런 이호의 머리에 살짝 머리를 기대 놓고 그의 숨소리를 들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어느 드라마의 진부한 대사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이호가 조금 가라앉았는지 평온해진 얼굴로 다윤에게서 살짝 몸을 떼고 물었다.
“네 친구랑 경기 보러 왔다 그랬나?”
“어? 응.”
“다른 지역에서 하는 것도?”
“응.”
다윤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차 했다. 이호의 눈에서 이글이글 질투가 타올랐기 때문이다.
“나랑은 여행 안 간다고 해 놓고…….”
서이호가 가장 잘하는, 불쌍한 척하기. 근데 불쌍한 척을 하려면 몸을 좀 떼어 놓고 해야 하지 않나. 와중에 꼭 달라붙어서는 바로 앞에서 눈꼬리가 축 처져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웃기고…… 또 귀여웠다. 자기도 아는 게 분명하다. 이러면 귀여워 보인다는 거.
“여행 아니야. 항상 당일치기 일정이었거든. 경기 시간 맞춰서 기차 타고 가서 또 새벽 기차 타고 다시 왔어.”
“나랑은 한 번도 같이 기차 안 타 놓고…….”
손가락 끝이 간질간질했다. 이제는 여행뿐 아니라 기차 같이 안 탔다고 질투하고 있었다.
아, 귀여워.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귀여워 보일 건지. 저 사소한 거 하나에 질투하는 모습까지 귀여워 보일 지경이라니. 정말 답이 없었다. 다윤은 심각하게 진지한 얼굴로 이호의 손을 잡고 말했다.
“너 그렇게 귀여워서 어떡해.”
다윤의 말에 이호가 피식 웃었다. 누가 누구보고 귀엽다고 하는 거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 와중에 다윤은 손을 들어 이호의 목을 껴안고 말했다.
“여행 가자. 나 이번 시험 끝나면 같이 가자. 학기 끝나면 조금 여유로울 거야.”
다윤은 그렇게 말하며 이호의 귓가에 얼굴을 부드럽게 마찰시켰다. 엄마 간병도 그렇고, 이제 다음 주면 감독님을 만나 영화 제작도 하게 될 거라 정신이 없을 테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애인과 함께하는 시간 정도 못 낼 것도 없었다.
그때, 다윤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한창 달라붙어 있던 몸을 떼고 다윤이 휴대폰을 봤다. 아마 한참을 들어오지 않는 저를 찾는 준구나 지율의 전화일 거라고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그 예상은 빗나갔다.
“누군데?”
이호의 말에 다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번호가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다윤은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이호에게 손을 들어 올려 보이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그다음에 흘러들어 오는 음성으로 인해 다윤의 몸이 순식간에 굳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했던 한기가 다윤에게로만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다윤의 얼굴을 보며 이호의 표정도 덩달아 굳었다.
- 나야, 다윤아.
다윤은 그 목소리에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서리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로 전화한 걸까, 그것도 이 시간에. 갑자기 새벽에 제 생각이 나서 욕이라도 한바탕 해 주고 싶었나. 서리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드는 그런 생각을 떨쳐 내기가 힘들었다.
- 다윤아?
“아, 응. 나 맞아.”
다윤은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입이 바짝바짝 타는 기분이었다. 옆에서 이호가 무릎 위에 팔을 올려놓고 전화 통화를 하는 다윤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다윤은 그게 전혀 의식이 되지 않을 만큼 전화 너머에 있는 서리에 온 정신이 뺏겨 있었다.
- 아, 다행이다. 연락 안 한 지 꽤 돼서, 번호가 바뀌었나 했어.
“…….”
- 늦은 시간에 연락해서 미안해. 지금 아니면 연락할 용기도 안 날 것 같아서. 자다가 깬 건 아니지?
다윤은 괜찮다며 설레설레 고개를 젓다가 이내 입 밖으로 괜찮다고 말을 꺼냈다. 시험 기간이라 학교에서 밤을 새우고 있다는 두서없는 말도 마구잡이로 흘러나왔다.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아는지, 순간 이호가 손을 들어 다윤의 손을 붙잡았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맞닿은 손이 따듯해서 다윤은 퍼뜩 고개를 들어 이호를 봤다. 이호는 아까와 달리 진지한 눈빛으로 다윤을 보고 있었다.
어떤 위로를 건네려고 한 일이 아니라, 그냥 떨고 있는 다윤을 붙잡아 주려고 손을 내민 것 같았다. 그게 어찌나 그렇게 안심이 되게 하는지. 다윤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작게 쉬었다. 이호의 온기가 다윤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 그, 다른 게 아니라…… 우리 엄마가…….
고모. 그 말에 다시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다윤에게 고모라는 존재는 온몸을 딱딱하게 굳게 만들었고, 목 끝까지 두려움을 일으키는 존재였다. 처음 입양되었을 당시부터 그랬다.
고모는 저를 욕하면서 동시에 엄마에게까지 싸늘했던 사람이었다. 제가 서리랑 노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었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땐……. 다윤은 고모와의 마지막 만남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제 볼 위로 와 닿았던 차가운 고모의 손바닥과 싸늘한 눈빛들.
“너 때문이야! 너 같은 게 들어와서 우리 오빠가……! 우리 오빠 살려 내, 살려 내라고!”
“아가씨, 그만하세요! 다윤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언니도 똑같아요. 언니가 애만 낳았어도 이런 애가 들어올 일이 있었어요? 난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처음부터!”
그 말을 듣던 다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 그저 멍하니 아버지의 영정 사진만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아무 말도 반박하지 못해 슬퍼하던 기억이. 고모의 말이 모두 맞는다고 생각했으니까.
- 다윤아? 내 말 듣고 있어?
“어?”
순간 고모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기억이 복기돼서 다윤은 서리의 말을 하나도 제대로 듣지 못해 되물었다. 서리가 낮게 웃다가 이내 다시 말했다.
- 우리 엄마가 숙모 병원이 어딘지 물어봐서. 괜찮으면 알려 줄 수 있을까.
“아…….”
- 미안, 그때 그렇게 난리 쳐 놓고 염치없다는 건 아는데…….
“아니, 아냐. 괜찮아. 문자로 보내 줄게.”
- ……응, 고마워.
끝으로 서리가 머뭇거리는 게 느껴졌다. 다윤은 그 머뭇거림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기에 먼저 입을 열었다.
“……병원 가시는 날짜 얘기해 주면, 나는 그때 안 갈 테니까 걱정 마.”
- ……미안해, 다윤아.
다윤은 알고 있다. 고모에게 자신은 평생 가족이 될 수 없다. 그러니 아마 평생 저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게 서리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다윤은 웃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들을 자격이 제게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그럼, 끊을게. 시험공부 잘하고.
“……너도.”
- ……다음에 만나자.
전화가 끊겼고 다윤은 후, 하고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무릎 위로 올렸다. 그제야 이호의 얼굴이 보였다.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서이호의 얼굴이.
“왜 그렇게 봐.”
다윤은 애써 장난스럽게 웃으며 이호의 팔을 툭 쳤다. 하지만 이호는 다윤을 따라 웃지 않고 여전히 진지한 눈빛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이만 들어가야겠다. 너도 얼른 집으로 가. 늦었잖아.”
“윤아.”
자리에서 일어나는 다윤을 이호가 불렀다. 평소보다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누구야?”
“……사촌.”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돼?”
“…….”
다윤은 그 말엔 입을 꾹 다물었다. 얘기할 수 있을까. 아니, 할 수 없었다. 솔직해지고 싶다고 생각한 게 엊그제인데 이 문제만큼은 솔직해질 수 없었다. 이건 제가 짊어져야 할 무게였다. 속죄의 무게 같은 거였다.
“다음에 얘기해 줄게.”
지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다윤을 붙잡고 이호는 다행히 더 물어보지 않았다. 다만 언제든 얘기해 달라고, 언제든 네 얘기를 들어 줄 준비가 되어 있다며 다윤을 위로할 뿐이었다.
다윤은 그런 이호를 보며 옅게 웃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다. 곧 이호에게 고모와 있었던 일을 털어놓고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날이 언젠가 왔으면 좋겠다.
* * *
유일하게 실내 구장이 있는 유니콘즈는 겨울에도 마음껏 타격 훈련을 할 수가 있었다. 곧 다가올 스토브리그를 대비하면서 선수들은 자발적으로 나와 훈련을 하고 있었다. 이호는 굳이 스토브리그가 아니더라도 빼지 않고 매일 훈련장에 나왔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서이호가 야구 배트를 천천히 휘두르고 있었다. 민우가 그런 이호 쪽으로 다가갔다.
서이호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을 땐 항상 이유가 똑같았다. 타격감이 제가 생각한 대로 나오지 않을 때. 혹은 몸이 자기 맘대로 움직여 주지 않을 때.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 1군 올라온 지 얼마나 됐다고.”
“…….”
이호가 무심한 눈빛으로 제게 다가온 민우를 바라봤다. 민우가 씩 웃으며 자리에 앉아 신발 끈을 고쳐 묶었다.
“너 올라오고 나서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졌어. 다들 엄청 열심히 하는 것 같아. 물론 곧 다가올 계약 문제 때문이겠지만, 하여간. 그나저나 또 뭐가 그렇게 안 돼서 죽상이야?”
“뭐?”
“아까부터 지켜보니까 내내 회전 연습만 하던데. 타이밍이 잘 안 맞냐?”
아, 하고 이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제가 설마 잘못 짚었나 싶어서 민우가 물었다.
“아님, 뭐 몸이 잘 안 따라 준다거나? 그런 거야?”
“아니.”
그러고 보니 들어와서 연습하는 내내 야구에 관한 생각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배트를 들고 연습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말이다. 그라운드에 서 있는 순간에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 있다니. 이호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예전 연인들이 항상 그런 얘기를 했었다. 너는 야구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놈 같다면서. 종일 머릿속에 야구, 야구……. 자신을 야구처럼 그렇게 골똘히 생각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냐면서.
그런 걸 물어 올 때면 이호는 고개를 저었었다. 그 대답에 누군가는 울기도 했고, 뺨을 한 대 거세게 치고 간 적도 있었다. 제가 잘못한 게 있었기에 그냥 조용히 맞아 주긴 했다.
그런 제가, 최다윤을 생각하느라 야구를 소홀히 하고 있다니. 얼떨떨해하는 민우를 앞에 두고 이호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뭔데, 왜 그렇게 웃는데……? 사람 무섭게.”
민우가 소름이 돋는다는 듯 어깨를 한번 쓰다듬었다. 그런 민우를 무시하고 이호가 민우 옆에 앉아 신발 끈을 풀어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들어오고 난 후 겉으로는 연습을 하긴 했지만 내내 다윤을 생각하느라 시간이 얼마나 갔는지도 몰랐다. 제 타격감이 어땠는지, 제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늘 그것을 생각하느라 골머리를 앓았는데, 그런 시간이 이상하게 멀게만 느껴졌다.
“야, 박민우.”
“어?”
이호가 신발 끈을 풀다 말고 한참을 또 멍하니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고개를 비스듬히 해 민우를 불렀다.
“너 내가 연애 못할 거라고 그랬지.”
아, 그거……. 민우가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얘기를…… 악담처럼 하긴 했지. 민망함에 대답하지 못하고 민우가 훈련장에 들어섰다. 마치 서이호와 바통을 터치하듯이. 그리고 몸을 풀기 위해 스트레칭을 하는 와중에 뒤에서 서이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그런가?”
어렵다, 연애.
민우가 가볍게 뛰던 동작을 멈추고, 이호를 봤다. 저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내가 지금 들은 게 진짜 맞는 거야? 그런 표정으로.
서이호는 최다윤에게서 많은 위로를 받았고, 그만큼 많은 힘을 받았다. 저 자신도 다윤에게 똑같은 에너지를 주고 싶었는데 그게 왜 그렇게 어려운 건지. 저를 믿지 못하는 것처럼 아예 힘든 얘기는 꺼내지도 못하는 애인.
가벼운 관계가 아닌, 조금 더 깊고 내밀한 관계. 그러니까…… 다정한 연애. 그래, 이호는 다윤과 그런 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건 대체 뭘까. 대체 어떻게 할 수 있는 걸까.
“야, 너 막…… 무슨 도플갱어나 그런 거 아니지? 아니면 무슨 AI 같은 거라든가.”
“뭔 소리야.”
진지하게 뻘 소리를 하는 민우를 이호가 노려봤다. 아니, 뭘 또 그렇게 정색을 하고……. 깨갱 하고 주눅이 든 민우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했다.
“그냥, 네가 뭐 연애 문제로 그렇게 고민하는 거 본 적이 있어야지. 심각한 얼굴 하고 있으면 대부분 야구 문제였잖아. 맨날 내가 연애 얘기하면 관심도 없던 놈이.”
이번엔 민우의 눈빛이 활기를 띠었다. 여태 궁금하긴 했었다. 서이호의 애인. 그것도 이때까지와는 영 다른. 대체 어떤 사람일지 이 기회에 한번 캐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아나운서? 치어리더? 그것도 아니면 톱급 연예인? 이호에게 그동안 관심이 있다고 소문이 났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방금까지만 해도 잠깐 몸을 풀러 왔던 민우가 다시 이호 옆자리에 앉았다.
“내가 연애 박사잖아? 해영 씨랑도 내가 먼저 대시해서 사귀었고. 말해 봐. 들어 줄 테니까.”
“…….”
별로 못 미덥다는 눈으로 이호가 민우를 봤다. 제가 서이호보다는 외모가 조금 떨어질지는 몰라도 여자들에게 인기는 더 많은 편이라고 자부하는 민우가 자랑하듯 주먹으로 가슴을 두 번 쳤다. 그런 그를 보던 이호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못 미덥긴 해도 지금은 물어볼 사람이 박민우밖에 없었다.
“그…….”
민우가 이호 옆에 바짝 붙었다. 그에 이호가 살짝 몸을 뒤로 당겼다. 부담스럽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니 민망한 얼굴로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고민을 말하기 조금 망설여지는 건,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자신이 저조차도 너무나 낯설어서였다. 그 고민은 몇 개월 전만 해도 이해가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었으니까.
“……내가 편하지 않은 것 같아.”
부끄러운 듯 이호의 귀가 잔뜩 빨개져 있었다. 본인은 의식도 못 하고 얼굴이 잔뜩 빨개진 채 서이호가 덤덤히 뒷말을 이었다. 분명 해결해 주겠다고 다 얘기해 보라고 한 건 민우였는데, 그런 서이호가 낯설어서 민우는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힘든 일 있는 거, 화나는 거, 그 애 마음을 나는 다 알고 싶은데 그걸 어려워해. 캐물었다가 더 상처받을 것 같고. 이럴 땐 어떡하냐.”
“……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근데 내가 그 사람한테 좋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겁이 나.”
민우는 입을 떡 벌렸다. 그냥 단순히 제가 조금 더 좋아하는 것의 문제라거나, 혹은 맞지 않는 부분의 문제가 아니라, 정말 온 진심을 다해 제 마음을 어떻게 전달하느냐의 문제라서. 그 문제를 지금 서이호가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워서 아무런 말도 나오지가 않았다.
한참 후에 정신을 차린 민우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아직은 연애 초반 아니야? 벌써부터 다 알려고 들면 안 되지. 연애라는 것도 천천히 해야지, 처음부터 급하게 다 돌진해 버리면 빠르게 식어 버리거든. 가볍게 물어봐. 오늘 기분은 어떤지, 좋아하는 건 뭐고 싫어하는 건 뭔지. 그런 식으로 물어보다 보면 깊은 얘기도 가능해지겠지.”
만난 지는 꽤 됐지만, 어쨌든 연애를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은 건 사실이기에 이호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혼자서 끙끙 앓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이호는 민우 말대로 하기로 했다.
“야, 그나저나 진짜 이쯤 되면 얼굴이 너무 궁금해지는데, 나 좀 보여 주면 안 되냐? 이래 봬도 내가 동기 중에 젤 친한데. 모르는 게 말이 되냐?”
민우가 그렇게 말하며 눈을 반짝 빛냈다. 꼭 보고 말 거라고, 이 목석같은 놈을 사로잡은 사람을 꼭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연애 고수일 테니까.
보여 달라는 말에 이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살벌한 얼굴에 민우가 꿀꺽 침을 삼켰다. 그런 민우에게 이호가 여전히 단호한 얼굴로 한쪽 눈썹을 찡그리고는 말했다.
“안 돼.”
“뭐? 왜? 닳는 것도 아니고, 왜!!”
“닳아.”
“뭐?”
“닳는다고, 내 애인.”
이호가 그렇게 말하고 씩 웃었다. 얼떨떨해하는 민우를 뒤로하고 이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태평하게 다시 연습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여전히 멍한 얼굴로 바라보며 민우는 생각했다.
저 새끼가 2군에서 무슨 정신 개조 같은 걸 받았나……. 아예 사람이 달라진 수준이었다. 물론, 지금 상태가 훨씬 낫긴 했다. 예전엔 진짜 괴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요즘은 좀 사람 같았다.
저를 두고 민우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이호가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아까보다 조금 더 몸이 가벼워진 듯했다.
“내가 할게.”
시영은 옆에서 들려오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예상했던 대로 다윤이 서 있었다. 시영을 향해 한 번 맑게 웃은 다윤은 시영이 들고 있던 박스를 가뿐하게 받아 들어 뒷문으로 향했다. 시영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시영은 다윤이 좋았다. 잘생긴 애들치고 성격 좋은 애는 본 적이 없는데 다윤은 그 두 개를 모두 충족시켰으니까. 다른 애들 일도 잘 돕고, 말도 예쁘게 하고, 무엇보다 순하고 맑은 그 성격이 시영의 마음에 꼭 들었다.
아르바이트에 처음 왔을 때를 시영은 기억한다. 일머리가 영 없는 시영을 도와서 옆에서 몰래 이것저것 알려 주던 다윤은 정말 말 그대로 맑은 애였다. 키도 꽤 큰 편이고 잘 웃지도 않는 편이라 처음에는 조금 경계를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생긴 거와는 달리 그는 무척이나 따듯한 사람이라는 것을. 시영은 박스를 들고 뒷문으로 향하는 다윤의 뒷모습을 보면서 예전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웃었다.
“왜 나와?”
“아, 응. 바람 쐬려고.”
다윤은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윤이 옆에서 박스를 정리하고 병을 분리하기 시작했고 시영도 그 옆에 서서 같이 도왔다. 다윤이 미안한지 뒷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나 혼자 해도 괜찮은데. 여긴 춥잖아. 먼저 들어가, 시영아.”
제 손도 추워서 잔뜩 빨개진 주제에 누굴 걱정하는 건지. 시영은 다윤의 다정함에 그저 씩 웃었다. 다윤은 무슨 이유로 웃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해 본 적은 시영에게도 처음이었다. 그냥 적당히 좋아하고 적당히 헤어져 왔던 그 연애 경력 속에, 다윤이 들어온 거였다. 자신에게 저렇게 하나도 관심이 없어 보이는 것조차 매력적이었다.
“다 했다. 이제 들어갈까?”
분리를 다 끝내고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 다윤을 시영이 다급하게 붙잡았다. 혼자서 속으로 좋아하느라 막상 하고 싶은 얘기는 하지도 못했다. 시영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저, 저기.”
다윤이 의아한 얼굴로 시영을 내려다봤다. 최근 다윤이 시험 기간이라 아르바이트에 통 오지 못해서 말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얼굴이 잔뜩 빨개진 시영이 다윤을 올려다보며 용기 내 말했다.
“그때, 저번에 얘기했던 연극 있잖아. 표를 구했는데, 같이 갈래?”
“아…….”
“그, 대학로에서 하는 거고, 아는 선배가 진짜 좋은 연극이라길래. 다른 뜻은 없어. 진짜 그냥 표가 두 장 생겨서, 부담 갖지 말고…….”
다윤의 난처해하는 얼굴에 시영이 횡설수설했다. 그래도 다윤이 당연하게 가겠다고 얘기할 줄 알았다. 그때도 약속했으니까. 그런데 저렇게 난처한 표정이라니. 불안함에 시영의 얼굴이 울상으로 찌푸려졌다.
“학교 수업도 이제 끝나서 방학이지 않아? 그때 한다는 바쁜 일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런 거라면…….”
“미안해, 시영아. 나 애인이 있어서 단둘이 연극 보러 가는 건 힘들 것 같아. 애인이 싫어할 것 같아서.”
다윤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시영의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다윤의 폭탄선언에 시영은 사고 회로를 잊어버려 멍한 얼굴로 입만 벙긋하기를 반복했다.
“어, 언, 언제. 그, 언…… 제…….”
언제 애인이 생겼냐고 물으려고 하는 건데 말이 문장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지금 제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시영은 울 것 같았다. 한 번도 다윤에게서 애인이 생겼다는 얘기는 들어 보지 못했는데. 인기가 많지만 그만큼 철벽도 엄청난 다윤이었다. 그래서 시영은 거기에 있어서는 괜찮을 거라고 자부했는데, 모두 말짱 꽝이었다니.
“연극은 다른 애들이랑 다 같이 보러 가자.”
다윤이 그렇게 말하고 뒤돌아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추워, 어서 들어와, 하고 말하는 다윤을 시영은 멀뚱히 바라봤다. 차였다. 그것도 보기 좋게. 시영의 어깨가 축 처졌다. 대체 어떤 운 좋은 사람이 저렇게 좋은 사람을…….
머리가 새하얘졌다. 당장이라도 다윤을 붙잡고 그 사람이랑 헤어지면 안 되냐고, 내가 너 좋아한다고 다부지게 말하고 싶었지만 해맑게 웃고 있는 다윤을 보자니 그럴 수도 없어 허허, 하고 허무한 웃음만 흘렸다.
“대학생인 놈들은 시험도 끝났을 거고, 알지? 오늘은 한 놈도 빠짐없이 참석이야! 핑계 안 통한다!”
“아, 형. 피곤해요~!”
“그래서 장사도 일찍 접었잖아. 연말 파티 겸이야. 다들 얼른 앞치마 벗어.”
또 시작이다, 하는 얼굴로 모두 투덜대면서도 가게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시영은 아까부터 완전히 넋이 나가서는 포크를 계속해서 천으로 닦아 내고 있었다. 시영의 손에서 포크들이 무기력하게 깨끗해지고 있었다.
“사장님도 참 노는 거 좋아하신다. 그치?”
“세준 형이 그렇지 뭐.”
병규는 신이 난 듯 웃고 있었다. 사실 이런 일이 아니면 사람들 사이에서 섞여 노는 일도 없었으니까. 다들 말은 싫다고 해도, 수당 다 챙겨 주는 와중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놀 수 있는 이 시간을 좋아하긴 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오래 일하는 사람도 많았고.
한편 다윤은 벽시계를, 그리고 휴대폰을 번갈아 봤다. 분명 이호가 데리러 오겠다고 했는데 이 상황에 빠져나갈 수 있을까?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이탈자를 봐주지 않겠다는 단호한 눈빛을 한 세준을 보니 그럴 순 없을 것 같았다.
일주일 내내 시험공부 때문에 제대로 된 데이트도 못 했던지라 오늘은 다윤도 기대해 왔다.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걸 예상 못 한 건 아니었지만. 다윤이 이호에게 전화를 하려 휴대폰을 들고 뒷문으로 나가려는 참이었다.
“어! 서이호, 너 웬일이냐?”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가게 안이 잔뜩 소란스러워졌다. 세준이 반갑다는 듯 인사하는 걸 들으며 다윤은 밖으로 나가려던 걸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문 바로 앞에 오늘도 역시 옷도 갈아입지 않고 급하게 온 건지 유니폼을 입고 있는 서이호가 보였다.
“자식, 너 그렇게 입으니까 진짜 야구 선수 같은데? 잘됐다. 너도 오늘 연말 파티 참석해라.”
다시 재회했던 그날처럼 사람들이 이호 주변으로 몰렸다. 그 와중에 이호와 다윤은 서로 눈이 마주쳤다. 어떻게든 이호의 눈을 피하려던 그때와는 달리, 다윤은 이호를 보고 활짝 웃었다.
시영도 원래 술자리를 좋아하긴 하지만, 오늘은 날이 날인지라 기분이 영 아니었다. 아까부터 죽상을 하고 다니는 시영을 보던 사람들도 얼른 사장님 몰래 빠지라며 도움을 주기도 했다.
뒷문으로 빠져나온 시영은 한숨을 푹 쉬었다. 다윤이 자신의 인생의 남자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꽤나 깊이 좋아한 사람이었는데. 그렇다 보니 상실감이 이토록 크게 드는 모양이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우울한 티를 내고 있는 것도 싫고, 그냥 술이나 잔뜩 사 가서 혼자 죽도록 퍼 마셔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막 골목에서 빠져나올 그때였다.
골목 너머에 다윤이 보였다. 아까 서이호 그 자식이(이미 시영에게 이호는 미운털이 콕콕 박힌 채였다.) 얼렁뚱땅 데리고 나가는 것까지만 봤는데.
시영도 대충은 알고 있다. 서이호도 다윤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그걸 시영이 모를 리가 없었다. 저를 보는 이호의 시선이 질투로 가득했으니까.
너도 참 힘들겠다. 다윤이 애인 있다는데 어떡하냐. 고개를 저으며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있는 게 보였다. 시영은 순간 우뚝 멈춰 섰다.
설마, 설마? 그 설마가 사람을 잡듯, 이호가 다윤의 머리카락 위에 입을 맞추는 듯 고개를 내리는 게 보였다. 그에 다윤이 타박하며 이호를 툭 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쾌해하는 기색이 아닌, 활짝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시영으로서는 저렇게 웃고 있는 다윤의 얼굴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미친.”
두 사람이 사라지고, 시영은 한숨과 함께 욕을 내뱉었다. 그래, 세상에 좀 괜찮다 하는 놈들은 다 게이지. 이 와중에도 방금 그 억울한 기분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그래, 서이호 정도라면 어디 비벼 볼 수도 없게 완벽한 인간이었으니까. 돈도 잘 벌고, 자기 일도 잘하고, 무엇보다 잘생겼고. ‘내가 뭐가 못나서!’ 하는 생각은 어느새 싹 가라앉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차인 상실감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 법이다. 오늘은 강소주를 들이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시영이 골목을 빠져나갔다.
“또, 또 훈련복 그대로 입고 오지. 그러면 춥잖아, 이 뭉청아.”
“빨리 보고 싶은데 어떡해.”
하여간, 말은 잘한다고 생각하면서 다윤이 밉지 않게 이호를 노려봤다. 다윤의 안전벨트를 매 주기 위해 몸을 가까이 한 이호가 덥석 다윤을 끌어안고 다윤의 어깨에 얼굴을 부비며 말했다.
“그리고, 나 추우면 네가 이렇게 안아 주면 되잖아.”
원래도 애교가 많긴 했지만 점점 더 애교가 많아지는 것 같았다. 다윤은 피식 웃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래, 그래, 하고 이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손가락 사이로 서이호의 곱슬거리면서도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스쳐 지나갔다. 마치 강아지를 쓰다듬는 느낌이었다. 항상 너무 ‘개’처럼 생각해서 그런가. 그냥 서이호는 다윤에게 있어 인간 강아지 같은 느낌이 늘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우스워서 다윤은 피식 웃었다.
“무슨 생각 해?”
이호가 슬쩍 고개만 옆으로 돌려 다윤의 볼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네 생각. 그런 말을 하기에는 아직 서이호만큼의 뻔뻔함은 없어서 다윤은 그저 웃으며 이호의 볼에 똑같이 입을 맞추어 주었다.
“오늘도 1군 훈련장 있다가 온 거야?”
“응.”
“여기랑 너무 멀지 않아?”
이호의 원래 집과 훈련장은 고속도로를 타면 금방이긴 했지만, 다윤이 아르바이트 하는 곳은 조금 구석진 곳에 있었기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다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운전을 하고 있는 이호를 봤다. 물론 자신은 이호를 보니까 좋지만, 막상 이호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야 뭐.”
“피곤하잖아. 그냥 집에 가서 쉬어도 돼.”
“나한텐 너 만나는 게 쉬는 거야.”
이호가 그렇게 말하고 다윤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오래 운전을 하고 달려왔는데도 피곤하지도 않은지 싱글벙글 웃고 있는 게 참 귀엽고, 또 사랑스러워서 다윤은 더 타박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윤아, 우리 집 갈래?”
“어?”
“라면 먹고 가.”
……지금, 그거 꼬시는 건가? 아주 옛날, 연애하기 직전 두 사람이 헤어지기 아쉬워 밤길에서 하던 말을 지금 자신한테 하는 건가.
서이호는 진짜…… 대체 어디까지 귀여울 작정이지. 하루하루 콩깍지가 더 두꺼워지는 느낌이었다. 매일매일 더 좋아지는 기분. 이러다가 언젠가 완전히 바닥으로 내리찍는 것 아닐까 싶게 불안할 정도로 말이다.
“아니.”
“어?”
“라면 말고, 다른 거 먹을래.”
다윤의 웃으며 하는 말에 이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라면은 몸에 안 좋으니까 건강한 음식을 먹겠다는 말이었는데 이호가 부끄러워하는 걸 보니 완전히 다른 쪽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너 왜 부끄러워 해. 뭐라고 해석한 거야, 내 말을.”
“윤이가 지금…….”
아무래도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때문에 제가 더 부끄러워진 다윤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그게 아니라, 그! 라면은 나트륨도 많고! 그러니까! 건강식을 먹자는 말이지! 운동선수가, 어? 라면 같은 걸 먹어서 되겠냐? 무슨 이상한-!”
“그러니까, 건강식, 서이호가 먹고 싶다?”
“이 미친놈아!”
이번에 얼굴이 달아오른 건 다윤 쪽이었다. 다윤이 씩씩거리자 이호가 크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놀리는 건 잊지 않고 계속 깐죽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윤이는 라면보다는 내가 더 먹고 싶다는 거, 그 말이지? 맞지?”
“너 안 닥치면 너네 집 안 가.”
“네에. 잘못했습니다.”
안 가겠다는 말에 정말로 입을 꾹 다문 이호가 얌전히 운전했다. 다윤은 물끄러미 그런 이호를 봤다. 옆모습이 참 잘생겼다, 싶다가도 웃음을 참고 있는 얼굴을 보자니 얄미웠다. 결국 이호는 다윤에게 팔뚝을 한 대 얻어맞고서야 소동이 가라앉을 수 있었다.
이호의 집에 도착해 두 사람은 먼저 샤워를 했다. 다윤의 몸에서는 술집에서 묻은 듯한 담배 냄새와 술 냄새가 진동을 했으니까. 씻고 나와서 이호가 꺼내 놓은 옷으로 갈아입는데 작게 탄식이 흘렀다. 역시, 서이호 옷은 제가 입기엔 컸다.
“이거 너무 큰데…….”
다윤이 거실로 나오면서 중얼거렸다. 전에 이호 집에 와서 빌려 입었던 옷은 그나마 이호가 중학생 때 입었던 옷이라 크기가 적당했는데, 하필 그 옷은 지금 세탁기에 들어가 있기에 입을 수 있는 게 지금 이 옷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체격 차이를 실감하다니. 물론 서이호는 운동선수고, 저는 일반인이니까 이 정도 차이는 날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걸 보니 다윤은 꽤나 심란했다. 저도 몸을 키워야 하나 생각할 정도로.
씻고 나온 다윤을 이호가 멍하니 봤다. 서이호도 다른 욕실에서 씻고 있을 줄 알았는데 금방 씻은 건지 어느새 야식까지 준비해 놓고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를 멍하니 바라보던 이호가 다윤 쪽으로 다가와 그를 꼭 끌어안고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아, 귀여워. 귀여워, 윤아. 어떡하지? 내 애인 너무 귀여워서 어디다가 내놓고 싶지가 않네.”
“끌어안지 마. 기껏 씻어 놓고 다 젖잖아.”
“상관없어.”
다윤이 괜히 부끄러워져서 머리를 마구 이호의 가슴팍에 치댔다. 어디 상관없다는 말이 계속 나오나 보자, 하고 심술 맞게 한 행동인데 오히려 서이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제 온통 티셔츠가 물로 축축해졌는데도 기분도 안 나쁜 모양이었다.
그렇게 끌어안고 있다가 이제 좀 떨어지라는 말에도 이호는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등 뒤에 서이호를 매달고 거실에 앉은 다윤이 서이호가 간단하게 만들어 놓은 수프를 홀짝였다.
“맛있어?”
“응, 맛있는데 넌 왜 안 먹어.”
“난 이게 더 맛있어서.”
이로 다윤의 귀를 잘근잘근 물면서 서이호가 뻔뻔하게도 그런 얘기를 했다. 다윤은 피식 웃었다. 하여간, 선수. 이런 말을 하면 또 아니라며 투덜거리겠지만. 다윤은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선 이호를 온전히 믿을 순 없었다. 제가 보고 들은 것만 몇 사람인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나간 일에 질투하는 애인만큼 추접한 애인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추잡해지고 싶진 않았다.
“살이 더 빠진 것 같아.”
“…….”
“시험 때문인가?”
제 배 위로 올라온 서이호의 단단하고 거칠한 손이 부드럽게 피부 결을 스치고 지나갔다. 걱정 가득한 이호의 말에 문득 부모님이 생각났다. 시험 기간이면 피곤에 전 다윤을 보며 항상 살이 빠진 것 같다며 걱정하셨던 아빠와 엄마가.
지금도 이렇게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 조금이라도 피곤하면 피곤하냐고 물어 주는 사람이 있고, 가장 먼저 제 기분을 걱정해 주기도 하고, 배려해 주는 사람이 바로 여기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이상하게 눈시울이 따끈따끈해졌다. 갑작스럽게 올라오는 눈물을 누르고 다윤이 애써 장난스럽게 이호의 어깨에 제 뒤통수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뒤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감촉이 좋았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인가 싶을 정도로.
“최다윤이 세상에서 단 1그램이라도 사라지는 건 싫은데.”
“……너 지금 한 말 여태 들은 말 중에 최고로 닭살이었어.”
“진짜?”
닭살이라고 말하는데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이호는 웃었다. 그 웃음에 다윤도 어쩔 수 없이 피식 웃었다. 낮게 들리는 웃음소리가 그 어떤 소리보다 따듯하고 기분 좋게 만드는 듯했다. 벌써 배가 부른 건지 수저를 내려놓은 다윤의 손을 이호가 가볍게 문지르며 다윤의 머리 위에 얼굴을 묻고 물었다.
“하고 싶은 거 있어?”
“어?”
“이제 학기 다 끝났잖아.”
하고 싶은 거라. 학기가 다 끝났다고 해서 다윤의 일이 줄어들거나 하진 않았다. 지금 하는 아르바이트도 계속하게 될 거고, 평소였다면 계절 학기를 들었겠지만 이번 방학에는 교수님이 소개시켜 주신 감독님과 만나 작업에 들어갈 것 같아서 계획에서 지우게 되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병원 가는 시간을 추가하면 학기 중이나 그다지 다를 건 없을 거였다.
“글쎄. 학기 끝나도 바쁘긴 할 것 같은데. 아르바이트도 하고, 병원도 지금보다 더 자주 가고, 영화 일도 시작하고.”
“윤아.”
서이호가 부르는 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윤아,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왜 그렇게 달콤하고 좋은지. 다윤은 살짝 고개만 돌려 이호를 쳐다봤다.
“좀 이상하네.”
“응?”
“하고 싶은 거 없냐고 물어봤는데, 왜 해야 하는 일들만 얘기해 주지, 내 애인?”
이호의 말에 다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그랬다. 그런데 막상 하고 싶은 일을 말하자면…… 당장 뭘 하고 싶은지 다윤도 몰랐기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너는 늘 너한테 너무 무심해.”
다윤은 그 말에 부정할 수 없었다. 이호는 그런 다윤을 더욱 꽉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나는 다윤이 네가 너에게 더 다정해졌으면 좋겠어.”
다정해졌으면 좋겠다라. 스스로에게 다정한 건 어떤 걸까. 남한테 다정한 건 어렵지 않은데 그건 어쩐지 어렵게 느껴졌다. 진지해진 이호의 목소리에 다윤이 이호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이호는 그런 다윤의 눈가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나한테 다정해진다는 건 어떻게 하는 거야?”
결국 참지 못하고 다윤이 물었다. 이호는 그런 다윤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
“네가 나한테 해 주는 말들 같은 걸, 스스로한테 해 주는 거?”
잘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들 같은 걸 얘기하는 건가. 다윤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하게 그런 말을 스스로에게 한다는 거 자체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당장은 힘들어도 괜찮아. 내가 해 주면 되지. 그렇지? 내가 최다윤 애인이니까.”
이호의 말에 다윤이 피식 웃었다. 그래, 네가 내 애인이지. 어쩐지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이호가 웃는 다윤의 입술에 조금 더 깊이 입을 맞췄다. 두 혀가 부드럽게 섞였다. 아, 이런 게 다정하다는 거 같았다. 혀끝과 혀끝이 만나 서로를 쓰다듬는 거. 그런 느낌처럼 스스로를 아껴 주는 것.
한참을 입을 맞추던 두 사람이 입술을 떼어 냈다. 이호가 빙긋 웃는 얼굴로 다윤에게 말했다.
“차근차근히 하자, 우리. 내가 너한테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게 너라는 사람을 나한테 더 알려 줘.”
말이 따듯할 수 있다는 건 이런 거겠구나 싶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모든 문장들이 따듯했다. 추운 겨울인데도 마치 봄처럼 느껴지는 말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다윤은 꾹 참았다. 한 번도 저런 얘기를 해 준 사람이 없었는데, 제가 누구보다 사랑했던 서이호가 제게 그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다윤의 울컥하는 마음을 읽은 건지 이호가 다윤의 얼굴을 더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얘기해 봐. 어디 가고 싶어? 뭐 하고 싶어? 좋아하는 건 뭐야? 싫어하는 건 뭐고?”
“차근차근히 하자면서 왜 그렇게 다급해.”
“미안, 그냥 다 궁금해서.”
다윤이 웃자 이호도 따라 웃었다. 다윤은 이호의 말에 하나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단, 좋아하는 거 서이호.”
그 대답을 듣자 이호의 눈동자가 조금 더 진해지는 게 보였다. 그의 손바닥이 다윤의 옷자락 안으로 들어왔다. 다윤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하고 싶은 건, 서이호랑 못 해 본 것들 다.”
그 대답에 이호의 얼굴이 한층 가까워졌다. 시선이 길게 마주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다윤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잡아먹힐 것 같다. 그런데 웃긴 건 잡아먹히고 싶다는 생각도 같이 든다는 거였다. 두 사람의 온도가 뜨거워진 이상 멈추고 싶지 않았다.
다윤은 시선을 잠시 아래로 내렸다가, 눈을 다시 들어 올려 서이호를 봤다. 이호가 그런 다윤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럼 지금 하고 싶은 건, 윤아?”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다윤은 제 얼굴이 붉어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훅, 하고 숨을 들이쉰 다윤이 조심스럽게 이호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지금 하고 싶은 건…….”
“뭐야, 불이 왜 켜져 있…… 서이호 있었네? 다윤이도?”
현관문 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 때문에 다윤이 급하게 이호를 밀어냈다. 순식간에 달아올랐던 공기가 다시 순식간에 식어 가고 있었다.
“누, 누나, 안녕하세요.”
다윤이 벌떡 일어나 시호에게 인사했다. 시호가 그런 다윤과 뒤에 엎어져 있는 이호를 번갈아 봤다. 이호의 눈에서 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왜 왔어.”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한다는 말이 저거였다. 저 개놈의 새끼. 새벽 비행기를 타고 온다고 말했건만, 하여간 저 둘 중 누가 친동생인지 모를 일이었다. 시호가 이호를 보며 인상을 잔뜩 찌푸리다가 얼굴이 잔뜩 빨개져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다윤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표정을 풀었다.
“죄송해요, 오늘 오시는 줄 모르고……. 쉬셔야 하실 텐데.”
“어? 아니야, 아니야. 괜찮아. 어차피 시차 때문에 정신도 없는데, 얘기나 하지 뭐. 앉아 앉아.”
“누나가 윤이랑 뭔 얘기를 해.”
“시끄럽다 동생아. 부엌에 가서 맥주나 좀 꺼내 와.”
이호가 툴툴거리면서도 시호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외국으로 출장을 다녀온 날이면 그래도 꽤나 말을 잘 듣는 게 하여간 이러니저러니 해도 귀여운 동생이었다.
다윤도 시호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조금만 늦었으면 또 스킨십하고 있는 걸 들킬 뻔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심지어 분위기가 정말 야릇하게 흐르고 있었다.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내려는 순간 이호가 달려들 기세였고, 다윤이 뒤로 엎어지기 직전이었다. 정말 한 발만 늦게 왔더라면…… 다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호는 살벌한 얼굴로 거실 탁자 위에 맥주를 내려놓았다. 맥주가 탁자 위에서 큰 소리를 내며 놓였다. 시호가 그런 이호를 노려보며 맥주 캔을 땄다.
“이 새끼가 왜 이렇게 삐딱하게 굴어. 일하고 온 누나한테. 죽고 싶어? 얼굴 풀어.”
“나도 지금 기분 더러우니까 말 시키지 마.”
“뭐, 이 새끼야?”
이호와 시호가 금방이라도 싸울 듯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 다윤이 불쑥 끼어들었다. 서로 덤벼들 것처럼 노려보던 두 사람이 다윤을 보자마자 표정을 풀었다.
“내가 다윤이 때문에 참는다. 다윤아, 이리 와. 누나랑 맥주 마시자아?”
“네, 네. 누나.”
다윤이 시호와 앉아 맥주를 들이켜기 시작했다. 이호는 다윤의 뒤에서 다윤의 뒤통수를 보며 길게 한숨을 쉴 뿐이었다.
진짜, 서시호. 도움 되는 거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아하하, 그니까. 그놈이 처음에는 여자라고 무시하더니 내가 대표라니까 아주 설설 기는데 웃겨 가지고. 진짜 내가 거기서 박장대소하고 싶은 거 꾹꾹 누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맥주 캔 몇 개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다윤은 시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호는 시호와 다윤을 번갈아 봤다. 술 몇 잔이 들어가니 출장의 피로를 싹 잊은 듯, 서시호는 신이 나서 아까부터 계속 제 얘기만 반복하고 있었다. 다윤도 시호를 따라 몇 잔 마시더니 얼굴이 잔뜩 빨개져서는 시호의 말에 고개만 끄덕이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적잖이 취한 것 같아서 이호가 시호의 앞에 있던 술을 뺏어 바닥으로 내리고 말했다.
“적당히 마시고 들어가서 자.”
“아, 우리 동생 말 진짜 예쁘게 해. 진짜 한 대 때려 주고 싶어.”
“뭐?”
“예쁘다고요, 응?”
시호가 이호의 머리를 툭툭 쳤다. 평소라면 가볍게 할 장난인데 술을 마셔서 그런지 힘이 좀 세게 들어가고 있었다.
“누나, 누나! 그러다가 이호 머리 다쳐요.”
“얼씨구?”
술에 취한 다윤이 보기 드물게 큰 소리를 내며 이호의 머리를 휙 제 쪽으로 끌어안았다. 사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다윤이 먼저 안아 주고 걱정해 주니 기분이 좋아서 이호가 괜히 아픈 척을 하며 다윤을 마주 끌어안았다.
“아, 아파. 윤아, 서시호 때문에 머리 아파.”
“괜찮아? 아파?”
“아파, 윤아. 깨질 것 같아.”
시호가 우웩 하는 시늉을 하며 이호를 노려봤다. 그리고 남은 맥주를 입 안으로 털어 넣으며 투덜거렸다.
“하여간, 서이호. 엄살에 어리광에…… 저 새끼 저거 저렇게 푹 빠질 줄이야. 정작 지는 옛날 일은 기억도 못 하면서…….”
“무슨 소리야, 그게.”
“너 말이야! 애기 때는 아주 좋다고…… 아니다, 됐다. 얘기 안 할 거다. 치사해서 얘기 안 한다, 치사해서. 다윤이가 말하지 말라 그랬으니까 말하면 안 되지. 암, 그럼. 나 들어갈 거니까 윤이 데리고 들어가서 조용히 잠이나 자. 내일 아침에 깨우지 마. 기절할 거니까.”
알 수 없는 얘기를 남겨 두고, 시호가 툴툴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말하지 말라 그랬다고? 의아한 눈을 하던 이호가 일단 다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윤은 여전히 이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얼굴은 잔뜩 달아올라 가지고, 하여간 사람이 이렇게 귀여워도 되나 싶었다. 이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방해꾼 서시호가 들어갔으니 이제 온전히 저와 다윤의 시간이었다.
휙, 이호가 다윤을 둘러업고 제 방 쪽으로 향했다. 어깨에 업힌 다윤이 잔뜩 술에 취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어? 뭐지? 나 지금 물구나무서고 있는 건가? 와, 멋있다. 서이호, 나 좀 봐. 나 거꾸로 서 있어. 서이호, 야 어딨어?”
“윤아.”
“이상하네. 목소리는 들리는데 얼굴이 안 보여. 야, 서이호! 서이호!”
점점 목청이 커지고 있었다. 이러다간 서시호가 나오겠다 싶어서 이호가 재빠르게 방으로 가서 문을 잠그고 다윤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다윤이 그제야 이호를 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와, 이호다.”
탁, 하고 술에 취해 뜨거워진 두 손이 차가운 이호의 얼굴에 닿았다. 최다윤은 생각보다 술이 약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아까 서시호가 주는 대로 모두 받아먹더니만…….
“왜 그렇게 예쁘게 웃어, 윤아?”
그러다가 나한테 잡아먹히려고. 다윤은 이호의 말에도 계속 피식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살짝 봉긋한 두 뺨이, 사람의 마음 한구석을 자극하는 힘이 있어서 이호는 참지 못하고 다윤의 볼 위로 제 잇자국을 만들었다. 간지러운지 다윤이 손을 들어 미약하게 이호를 밀쳐 냈지만 더 가까워질 뿐, 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제가 뭐, 진짜 술 취한 애를 데리고 뭘 하겠다는 건 아니다. 어쨌든 다윤은 내일 또 병문안을 갈 거고, 그러면 피곤할 테니까. 일주일 내내 시험공부 하느라 힘든 애를 더 힘들게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고.
이호가 다시 다윤을 번쩍 안아 올렸다. 이번에도 덜렁, 하고 가볍게 이호의 몸 위로 다윤이 들렸다. 아무리 제가 운동선수라서 힘이 세다고 해도 그렇지, 다윤은 성인 남성치고, 그리고 다윤의 키치고 꽤나 마른 편이었고 최근 더 그런 듯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내일부터 최다윤 살찌우기 작전에 돌입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이호가 다윤을 데리고 방 안에 딸려 있는 샤워실 쪽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야아, 이호야아, 나 할 말 있는데에.”
술에 취해 잠이 든 줄 알았는데 이호에게 들려 있던 다윤이 몸을 휙 뒤로 젖혔다. 갑작스러운 다윤의 행동에 이호가 급하게 다윤을 잡았고, 넘어질 뻔한 걸 간신히 바로 뒤에 있는 책상을 붙잡고 지탱했다.
얼떨결에 책상 위로 올라간 듯한 다윤이 이호와 눈을 맞추며 씩 웃었다. 이호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호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다윤은 조심스럽게 이호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축축한 입술을 이호의 얼굴에 조심스럽게 가져다 댔다.
“아까 하던 거 마저 하면 안 돼?”
이호는 머리 한 대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한쪽 입꼬리는 살짝 올라간 상태로 눈은 살며시 치켜뜬 채 말하는 최다윤이 너무나 섹시했다. 순간 이성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려는 걸 이호는 정말 온 힘을 다해 참았다.
“……다윤아, 너 지금 너무 술 취했…….”
“안 돼? 하고 싶은데. 너랑 하면…… 좋아. 아무 생각 안 나서. 너밖에 생각 안 나서, 너무 좋아.”
취중 진담이라는 게 이런 건가. 다윤이 그렇게 말하고 평소 이호가 하는 것처럼 머리를 이호의 어깨에 마구 비볐다. 제가 할 때는 몰랐는데 이 모든 행동이 이렇게 자극적인 일이라니.
“아까 시호 누나가 갑자기 와서…… 쪼끔 섭섭했는데…….”
이호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걸 느꼈다. 평소보다 더 애교 가득한 목소리. 이걸 어떻게 참지. 대체 어떻게?! 하지만 참아야 한다. 서이호 너는 인간이다.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다. 술 취한 애인을 잡아먹을 만큼 미친놈은 아닌.
“이호야아, 싫어?”
“…….”
“내가 못해서, 싫어?”
다윤의 눈가가 눈물로 글썽글썽해졌다. 이호의 머릿속에서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게임 아웃.
커다란 손바닥이 최다윤의 뒤통수에 닿았다. 다윤이 무어라 말을 하고 입을 열기도 전에 서이호가 먼저였다. 축축한 두 사람의 혀가 맞닿았다. 술 냄새가 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윤은 그냥 이호의 머리카락을 끌어당겼다.
정신이 흐릿했다. 다윤은 눈을 한 번 깜박였다. 아까부터 제대로 신음도 하지 못하고 있어서 숨도 막히는 것 같았다. 시선을 내리자 그 아래 서이호가 있었다. 손을 들어 다윤의 입을 틀어막은 서이호가 제 성기를 마치 사탕인 양 빨아 대고 있었다.
“으읍…… 으응…….”
“윤아, 시발, 윤아. 넌 왜 여기도 이렇게 귀여워?”
눈물이 살며시 삐져나온 다윤이 고개를 이리저리 저었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자극 때문에 머릿속이 저릿저릿했다. 평소보다 쾌감이 배가 되는 느낌. 다윤은 아까의 서이호를 떠올렸다. 그를 끌어안고 제가 못하냐며 술기운이 섞인 채 칭얼대던 순간, 퓨즈가 나간 것처럼 멍한 시선의 서이호를. 완전히 불이 붙은 두 사람은 서로를 애절하게 탐했다.
“소리 내면 안 되지, 윤아.”
서이호의 이성 잃은 숨이 최다윤의 목덜미에 닿고, 그 때문에 숨을 헐떡이며 저도 모르게 자꾸 앓는 듯한 신음이 입 밖으로 나올 때, 이호가 귀를 잘근잘근 물면서 그렇게 말했다.
“옆방에 들리면 어쩌려고.”
“으으…… 읏.”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다윤이 제 손을 올려 꽉 깨물어 가며 소리를 참았다. 그래, 맞다. 조심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제 입에 있는 손을 물었다. 잇자국이 잔뜩 나도록 물어 대자 이호가 저지하고 제 손바닥으로 다윤의 얼굴을 감쌌다.
“물어도 돼, 마음껏.”
제 얼굴 바로 앞에 있는 손을 두고 다윤은 마구 고개를 저었다. 야구 선수 손인데 내가 어떻게 그러냐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말에 서이호가 피식 웃었던 것 같다.
“윤이 네가 손에 자국 남겨 주면 더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해도 다윤은 이호의 손에 잇자국 하나 낼 수 없었다. 단호한 다윤에 이호가 이번엔 다윤의 뒤쪽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움직였다. 안쪽 깊숙한 곳까지 단번에 찔러 내고 문질러 내는 그 손동작에 결국 또 이성을 잃은 다윤이 이호의 손을 꽉꽉 물어 댔다.
그 이후로 몇 번의 사정을 했고, 정신이 완전히 혼미해진 지금, 다윤은 제 것을 물고 있는 이호를 숨을 최대한 고르며 내려다봤다.
“아읏……!”
사탕 빨리듯 이호의 입 안에서 잔뜩 자극을 당한 다윤의 성기에서 정액이 나왔다. 여전히 입을 떼지 않은 이호가 다윤의 입 안으로 제 손가락을 집어넣고는 이리저리 움직였다. 사정의 여운으로 눈만 껌벅이고 있던 다윤이 그 손가락을 따라 혀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하아…….”
그러고 보니 지금 저는 서이호 방 안에 있는 책상 위였고, 서이호는 그 아래 살짝 무릎을 꿇고 있는 상태였다. 아까 그 상태 그대로. 다윤이 이제 그만하자고, 진짜 피곤하다고 말하려 하는 순간이었다.
휙, 하고 다윤이 책상 위로 엎어졌다. 서이호가 몸을 뒤집은 탓이었다. 넓은 책상 위로 다윤이 팔을 허우적거리며 겨우 지탱했다. 그때 이호가 다윤의 얼굴 옆으로 제 얼굴을 댔다. 제 뒤 바로 뒤에 느껴지는 묵직한 것에 아연실색할 틈도 없이, 이호가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아읏…… 야, 너…… 으읏, 왜 이렇게 흥분했어, 왜애.”
아까 제가 한 말을 깡그리 잊어버린 다윤은 울고 싶은 마음이었다. 술기운에 머리도 어질하고, 그 와중에 몇 번을 사정했는지. 이제는 신음을 참을 수도 없게 안쪽으로 느릿하게 파고드는 성기도 다 미칠 것 같았다.
그래, 소리 내면 안 된다. 이 집엔 저와 서이호만 있는 게 아니다. 다윤은 옆방에 있을 시호를 생각하면서 이번에도 제 팔을 콱 물었다.
“네 팔 말고, 나 물어.”
“으읏……!”
이호가 제 팔을 가져다 댐과 동시에 안쪽 깊숙이 파고들었다. 불 몽둥이 같은 성기가 완전히 삽입되어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다행히 내내 풀어 준 덕인지 아프거나 하진 않았고, 다만 자극이 너무 심해 이러다가 머리가 터져 죽는 게 아닐까 싶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나랑, 하면, 응? 내 생각밖에 안 나서 좋아? 윤아, 응?”
다윤이 대답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걸 알면서도 이호는 계속 허리를 느릿하게 뺐다가 쳐올리며 물었다. 서이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필터링이 안 되고 있었다. 바로 뒤에서 목덜미를 콱 물어 오는 거며, 제 고개를 돌리게 해 놓고 깊이 입을 맞추는 거며, 모두 다 제 정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행위였다.
물론 이호도 다윤과 마찬가지로 흥분해 있었다. 처음 몸을 맞댔을 때보다 더, 더 머리가 절절히 울렸다. 최다윤이 그런 얘기를 한 것도 있었지만 제 책상 위에 엎드려서 허리만 쭉 빼고 제 팔을 물고는 신음을 참는 그 모습이 중학교 시절의 다윤을 떠올리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발, 내가, 너를 어떻게 그냥 친구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 이렇게 섹시하고 예쁜데. 그런 널 옆에 두고 내가.
“……읍, 으읍, 응……!”
서이호의 팔에 막혀 막힌 듯한 신음이 연속 터져 나왔다. 안쪽을 깊이 찌르고 다시 빠져나가고, 그게 빠르게 반복되고 있었다. 귀 옆에서는 계속해서 달콤한 말들이 다윤의 머리를 절절하게 만들었다.
“아무도 모르는 데 그냥 가둬 버리고 싶어. 나만 보고 싶어, 윤아.”
“으응……!”
“하아, 윤아…….”
사정을 하는 듯 서이호의 것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언제 발기했는지도 몰랐던 다윤의 것에서도 묽다 못해 물이 된 정액이 흘러나와 뚝뚝, 책상 아래로 떨어졌다.
콱, 콱, 다시 몇 번을 뒷목이 물리고 물렸다. 하여간……. 진짜 개 같은 놈이라고, 이번엔 살짝 욕도 섞은 그 말을 다시 떠올렸다. 그 와중에도 뒤에 달라붙어 뒷목에, 뒤통수에, 어깨 위에 입술이 내려앉는 게 귀엽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 이 정도면 완전히 중증이었다.
“넌 진짜 개야……. 개자식.”
“윤아, 화났어?”
“개새끼……. 다신 너네 집 안 와…….”
안에 있는 걸 빼 준답시고 샤워실에 들어서서 한 번 더 하고 나서야 다윤의 입과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이호가 결국 사죄의 의미로 축 늘어진 다윤을 씻기고, 이까지 손수 닦아 준 후에야 두 사람은 나란히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허리가 천근만근이었다. 내일…… 아니 오늘 몇 시간 후면 병원에 가야 하는데 일어날 수나 있을는지 모르겠다.
“내가 또 너네 집 오면 최다윤이 아니라 개다윤이다.”
“그럼 내가 윤이 네 집에 가면 되지.”
“문 안 열어 줄 건데.”
“올 때까지 계속 기다리면?”
“……그래도 안 열어 줄 건데. 나 혼자 들어갈 거야.”
“나 추운데, 그냥 계속 서 있게 둘 거야?”
마지막 말을 하며 서이호가 애교 부리듯 쪽쪽, 다윤의 이마 위로 입술을 내렸다. 하여간, 잔꾀만 늘어 가지고. 제가 그러면 못 이기는 척 봐준다는 걸 다 아는 거다.
다윤이 작게 한숨을 쉬며 웃었다. 그러자 서이호의 입가에도 활짝 웃음이 피었다. 그렇게 웃는 걸 보자니 더 툴툴거릴 힘도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피곤해 죽겠어. 술도 다 깼잖아.”
“다른 데선 술 취하지 마, 윤아. 너무 귀엽더라.”
“……뭔 개소리야.”
“진짜, 너무 귀여워서 나만 보고 싶어, 윤아.”
뒷말이 나지막하면서도 낮은 음성이라 이상하게 오싹하면서도 섹시했다. 고개를 다윤의 어깨에 박고 있는 터라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 그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다, 제가 정신 줄을 잡아야지. 이제 진짜로 자야 했다. 어느새 푸른 새벽빛이 방 안으로 새어 들고 있었다. 다윤은 고개를 이호의 어깨에 묻고 눈을 감았다. 이호가 그런 다윤이 편하도록 몸을 조금 뒤로 젖히면서도 허리에 얹은 손은 더욱 끌어당겼다.
완전히 하나가 된 기분. 잘 때 이렇게 누군가랑 끌어안고 자 본 적이 있었던가. 워낙 공간이 좁아 다닥다닥 아이들과 붙어 자던 그때에도 누군가와 이렇게 끌어안고 자 본 기억은 없었다. 입양 되고 나서도 부모님께 어리광 부리듯 안겨 자 본 적도 없었고. 그러니까, 다윤에겐 이호가 유일했다. 그런데도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더 품에 안기고 싶을 정도의 포근함.
“윤아, 자?”
“……잘 거야. 말 걸지 마.”
“하고 싶은 거 말이야. 더 없어? 나랑 섹스 하는 거 말고.”
다윤이 쿵, 하고 이호의 가슴팍에 아프지 않게 머리를 박았다. 낮게 웃는 소리가 위쪽에서 들렸다. 요즘 들어 서이호는 저 놀리는 재미가 제대로 붙은 듯했다.
“……몰라.”
“그러지 말고 더 얘기해 봐. 아무거나 다 좋으니까.”
“……너는?”
“응?”
“너는 나랑 뭐가 하고 싶은데?”
다윤의 말에 이호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하나 읊었다. 같이 해외여행도 가고 싶고, 제주도도 가고 싶어. 또 테마파크도 한번 가 보고 싶어. 윤이 너는 어떤 놀이기구를 좋아하고, 또 어떤 놀이기구를 싫어하는지도 궁금해. 또 동물원도 가고 싶어. 너랑 닮은 동물이랑 사진 찍고, 그거 인화해서 우리 집 벽에 크게 붙여 놔야지. 그리고 또…….
그렇게 하나하나 말하다가 하루가 다 갈 기세였다. 다윤은 이호의 말에 고개를 찬찬히 끄덕였다. 그래, 다 해 보자. 다 하자. 다윤의 말에 이호가 기분 좋은 듯 그의 머리 위에 턱을 괴고 좌우로 움직였다. 강아지가 애교 부릴 때 주인에게 와서 몸을 부비는 것처럼. 예전 서이호 별명이 또 떠올랐다. 개죽이. 나랑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사랑스러운 개죽이 서이호.
“너는? 이제 너 말해 봐.”
“……음, 지금 당장 생각나는 건 너 경기하는 데 가서 응원하고 싶은 거.”
“그게 다야?”
“그게 다라니. 그거 얼마나 하고 싶은데. 요즘 못 봐서 아주 몸이 근질근질하다. 야구장 분위기도 진짜 좋아. 네가 점수 내면 다른 사람들 다 같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 분위기.”
“…….”
“그렇게 너 응원하고 있으면, 나는 아무것도 못 했어도 너랑 같이 경기를 뛴 기분이야. 네가 기분 좋으면 나도 기분 좋아지고, 네가 활약하면 나도 활약한 기분이고.”
다윤에게 제 경기 하나가 그런 큰 의미를 주고 있었다니. 하나하나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두려움에 떨며 경기에 임했던 이호는 그 시절이 아쉽다고 생각했다. 그때 다윤을 알았더라면 더 즐겁게 야구 할 수 있었을 텐데. 내게 주어진 것들을 있는 힘껏 사랑할 수 있었을 텐데.
이호는 다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짐했다. 훈련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 최다윤이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 못 할까 싶었다.
“……그리고, 또 있어.”
“뭔데?”
“……듣고 비웃지 마.”
“안 비웃어.”
다윤은 그렇게 말하고 잠시 망설였다. 너무 해묵은 기억을 꺼내는 것 같아서 좀 그런데…… 어차피 서이호는 기억도 못 할 거고…….
“……돌고래 보러 가고 싶어. 엄마랑, 너랑. 셋이서.”
“돌고래?”
다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아원에 있을 때, 서이호가 돌고래 인형을 가져와서는 말했었다. 아주 큰 돌고래를 봤다고. 그런데 네 생각이 났었다고. 나중에 꼭 함께 가자고 약속해 놓고, 다 잊어버렸었지.
“그래, 가자. 돌고래 보러.”
이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넌 기억이나 해? 우리 예전을. 다윤은 문득 물어보고 싶었다. 혹시 정말 다 잊어버린 거야? 너무 예전이라서, 완전히 까먹어 버린 거야?
이호에게서 그게 무슨 소리냐는 대답이 나올까 봐, 무서워서 물어보지 못하고, 얘기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 그럴 법도 했다. 자신에게는 절대 잊지 못할 유일한 기억이었어도 이호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일 중 하나일 뿐일 테니까.
그래,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온전히 모두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너는 그냥, 지금 이대로 오래도록 나를 좋아해 줘. 그것만 바랄게, 나는.
최다윤의 마음이 서이호에게도 전해진 건지 서이호의 심장 박동 소리가 커졌다. 그 빠른 심장 소리를 들으며 다윤은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 * *
서이호에게 돌고래를 보러 가고 싶다고 얘기했던 건 그냥 투정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냥 마음속에 있던 것을 털어놓는 어리광에 가까운 말. 그가 지나가듯 넘겨 버리기를 바랐던 말. 그래서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저를 데리러 온 서이호가 아무렇지 않게 아쿠아리움에 가자고 했을 때, 다윤은 제가 말해 놓고 놀라서 되물어야만 했다.
“보고 싶다며?”
“……그렇긴 한데.”
“그런데?”
“……아르바이트도 해야 하고, 그, 아무래도 시간이…….”
다윤이 망설이는 걸 보며 이호가 살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주말에는 아르바이트 안 하고, 어머님 병원 가잖아. 어머님도 모시고 같이 가고 싶다며? 병원에 외출 허락받아서 가면 되지.”
“……음.”
“윤아.”
그래도 되나? 다윤은 그런 생각을 하며 망설이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방학 때도 계절 학기를 찾아 들을 만큼 최대한 바쁘게 지냈었다. 여가 생활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이. 심지어 그렇게 좋아하는 영화를 보는 시간마저 스스로 공부하는 시간처럼 되어 버려 더 이상 휴식이 아니었다.
그런 다윤에게 어쩌면 처음으로 주어지는 휴식 같은 일이었다. 망설이고 있는 다윤의 손을 이호가 따듯하게 붙잡았다.
“가고 싶고, 보고 싶다며. 다 해 줄게. 넌 아무 걱정 하지 마.”
제 손을 살짝 흔들며 한쪽 입꼬리를 올려 근사하게 웃으며 ‘갈 거지?’라고 묻는 듯한 눈빛을 보면서 다윤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서이호가 저렇게 얘기하면 정말로 모두 다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으니까.
다윤은 피식 웃었다. 가겠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하면서도 동시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런 다윤을 눈치챈 건지, 아니면 서이호도 덩달아 설레는 건지 손안에서 느껴지는 서이호의 맥박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두 사람에게 있어서 공식적인 첫 데이트였다.
연자는 이호와 아쿠아리움에 가자는 말에 아이같이 웃으며 기뻐했다. 특히 이호가 옆에서 ‘다윤이가 가고 싶다고 해서요. 어머님이랑 셋이.’라고 말했을 때는 눈물을 살짝 글썽이기도 했다.
외출 허락을 미리 받아 놓고, 다윤은 목도리에 모자에 두꺼운 외투까지 걸쳤다. 언젠가 지혜가 선물해 주었던 목걸이까지 차고, 엄마가 아이처럼 좋아하시는 걸 보며 다윤은 조금 후회했다. 병원에만 계시게 하지 말고 다른 곳도 더 자주 모시고 갈걸, 하는 후회.
혹시 몰라 휠체어까지 챙긴다는 걸 연자가 말렸다. 요즘 컨디션이 좋다고, 가서 절대 쓰러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서 말이다. 그래도 들고 갈까 고민은 했지만, 만약 힘에 부치신다 싶으면 제가 업어도 되니까, 그런 생각에 휠체어는 집어넣었다.
“뒤에 타도 돼.”
조수석에 탈지 연자가 앉은 뒷좌석에 앉을지 고민하고 있는 다윤의 한쪽 손을 살짝 잡았다가 놓은 이호가 웃으며 말했다. 엄마 앞에서는 조금 부끄러워하는 다윤 때문에 스킨십은 자제하고 있지만 이렇게 슬쩍슬쩍 닿았다 떨어지는 것까지는 뭐라고 할 수 없었다. 물론 저도 싫진 않았고.
“그래도 돼?”
다윤이 미안한 눈치로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물었다. 뒷좌석에 앉으면 서이호가 혹시나 섭섭해할까 싶었고, 그렇다고 조수석에 앉자니 혼자 뒤에 앉을 엄마가 걱정됐으니까. 다윤의 속내를 눈치채고 있던 건지 서이호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윤이 들어갈 수 있게 문을 열어 주었다.
“당연하지. 뒤에서 최다윤이 내 뒤통수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기분 좋아.”
다윤은 이호의 말에 피식 웃었다. 미안하지 않게 그렇게 말해 주는 것도 참 고마웠다. 저렇게 말하는 건 언제나 제 쪽이었는데. 미안하지 않게 예쁘게 말해 주는 것. 그런 걸 자신이 받으니 마음까지 따듯해지는 것 같았다.
주말 아쿠아리움은 가족 단위 관광객들로 꽤나 붐볐다. 다윤은 엄마의 손을 잡고, 아주 느릿하게 아쿠아리움을 구경했다. 머리 위로 푸른 물과 함께 처음 보는 물고기들이 돌아다니는 게 마치 바다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처음 와 보는 곳에 다윤의 눈이 아이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다윤과 어머님이 조금 더 시간을 함께 즐길 수 있게 이호는 두 사람보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걸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다윤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주변을 구경했다. 막상 가자고 말했을 때는 망설이더니, 오니까 누구보다 좋아하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다. 그 모습을 보느라 자신이 사람 많은 장소를 싫어한다는 것도 잊고 이호는 내내 웃으며 두 사람을 따라 걸었다.
그나저나, 왜 한 번도 와 보지 못한 걸까. 들어 보니 아쿠아리움도 처음이고, 테마파크나 놀이공원도 학교 소풍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어린 다윤이 가고 싶다고만 했어도 다윤의 어머님은 그를 이곳저곳에 데려다주었을 텐데.
“어릴 때의 다윤이는, 한 번도 떼를 쓰지 않는 착한 아이였어. 그게 내 마음에 내심 걸렸지. 좋은 게 있으면 사 달라고 땡강도 부려 봤으면 했고, 하기 싫은 게 있으면 하기 싫다고 투정도 부렸으면 했는데.”
전에 어머님 병실에 다윤 몰래 몇 번 찾아갔을 때 다윤의 어머니가 들려주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다윤이 무척이나 방어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는데 실제로 이토록이나 제 감정을 숨기는 사람이라는 건 몰랐다.
왜 그런 걸까. 그런 근본적인 물음과 함께 이호는 동시에 그런 생각을 했다. 어머님에게조차 편하게 대하지 못하는 네가, 나에게만큼은 마음을 툭 털어놓으면 좋겠다는 생각. 지금은 어렵더라도, 언젠가는 완전히 그러기를 이호는 바랐다.
“서이호, 이거 봐.”
뒤에서 걷던 이호를 다윤이 끌어당겼다. 그리고 수족관 안을 가리켰다. 수족관 안에서는 주황색의 하얀 줄무늬가 있는 물고기와 파란 물고기들이 엉켜 돌아다니고 있었다.
“애니메이션에 나온 물고기랑 진짜 똑같아. 신기해. 엄마, 그쵸? 예전에 엄마가 보여 줬던 그 애니메이션 말이에요.”
“그러네. 신기해라.”
다윤이 말하는 애니메이션이 뭔지 몰라서 이호는 그저 물끄러미 물고기만 봤다. 무슨 애니메이션이지? 자신도 다윤의 말에 공감하며 웃고 싶었다. 나중에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호는 수족관 바로 앞에 있는 물고기의 이름을 봤다. 크라운 피쉬, 블루탕 피쉬……. 마치 공부하는 학생처럼 그 이름을 외우고는 고개를 돌려 다윤을 봤다.
문득 수족관 앞에 서서 웃고 있는 다윤의 모습이 이상하게 무언가를 떠올리게 만들고 있었다. 아주 먼 옛날, 어디선가……. 그런데 그게 뭔지 영 떠오르지 않아서 이호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기억이 날 듯 안 날 듯하는 감정을 뒤로하고 휴대폰을 들어 찰칵, 하고 이호가 다윤의 사진을 찍었다. 다윤이 그제야 고개를 돌려 이호를 봤다. 그리고 한번, 씩 웃었다. 그 얼굴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워서 이호는 한 번 더 셔터 버튼을 눌렀다. 찰칵, 하는 소리가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크게 울리는 듯했다.
“뭐 찍었어?”
“너.”
“나?”
“응. 볼래? 잘 나왔어.”
이호가 살짝 휴대폰을 기울여 다윤에게 보여 주었다. 다윤이 화면 속에 있는 제 얼굴이 영 어색한지 얼굴을 찌푸렸다.
“지우면 안 돼? 이상하게 나온 것 같은데.”
“예쁜데?”
다윤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예쁜데. 살짝 시선을 제 쪽으로 하고 고개를 든 다윤의 얼굴. 어두운 조명에서도 환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그럼 다시 찍을까?”
지운다는 말은 안 하고, 이호가 다시 한번 카메라를 들었다. 다윤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사진 찍는 게 영 어색한 건지 찍는 사진마다 어딘지 모르게 경직된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 하나하나가 다 귀여워서 이호는 만족스러웠다.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연자가 말했다.
“다윤아, 이호야. 엄마가 사진 찍어 줄까?”
“네?”
“두 사람 여기 서 봐.”
괜찮다고 할 틈도 없이 연자가 조금 멀리 떨어졌다. 이호는 이때다 싶게 재빠르게 다윤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고 연자를 보며 웃었다. 다윤은 그런 저를 어색하게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웃었다.
“너무 예쁘게 잘 나왔네, 둘 다. 원래 인물이 좋아서 그런가?”
“윤이가 어머님 닮아서 인물이 좋잖아요.”
“하긴, 그렇지.”
연자는 그렇게 대꾸하며 후후 웃었다. 그런 연자와 다윤의 사진을 이호는 몇 장 더 찍었다. 사실 저도 사진 찍는 거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는데. 누군가 제 연습 영상이나 사진을 찍어 주면 확인용으로만 봤을 뿐. 이렇게 사진을 찍고 있자니 너무나 재밌었다. 평소엔 별생각 없던 스마트폰 카메라 화질도 아쉽게만 느껴졌다. 아예 커다란 카메라를 살까. 사서 최다윤 찍어서 인화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누군가 이호의 팔을 잡았다.
“혹시…… 야구 선수 아니에요? 유니콘즈?”
야구 모자도 안 쓰고 있어서 그런지 저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팬의 얼굴이 발그레했다. 예전이었다면 짜증을 드러내면서 아니라고 말하고 자리를 피했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어머, 서이호 선수 맞구나. 아니, 아까부터 긴가민가했는데 물어보길 잘했네. 혹시 사진 한 장만 찍어 주실 수 있어요? 딸이 엄청 팬이라…….”
“네, 그럼요.”
이호는 아무렇지 않게 팬들과 사진을 찍어 주고 사인까지 해 주었다. 그런 이호를 옆에서 보는 다윤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저런 표정을 짓는 게 이해가 됐다. 저는 야구팬들 사이에서 소문이 났을 만큼 팬들한테 예의가 없었으니까.
갑자기 이렇게 태도가 바뀐 이유는 모두 다윤 때문이었다. 예전엔 팬들도 저라는 사람이 언젠가 쓸모가 없어지면 떠날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다. 앞에서는 이렇게 웃고 있어도 뒤에서는 뭐라고 제 욕을 하며 칼을 꽂을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윤처럼 정말 저를 순수하게 좋아해 주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어쩌면 그 사람들 덕분에 지금까지 야구를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런 생각을 하자니 저 좋다고 다가오는 팬들을 모두 매몰차게 무시할 수가 없어졌다.
다정도 옮는 건가. 최다윤의 다정이 나한테도 옮은 걸까? 좋았다. 다윤과 아주 조금이라도 닮을 수 있다면. 다윤처럼 완벽한 사람과 저처럼 나약하고 부족한 사람이 조금이라도 비슷해질 수 있다면.
사진도 찍고, 사인까지 마치고서 이제 다윤과 어머님에게로 가려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들어 이호가 자신의 팬을 붙들었다.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네! 네! 뭐든지요!”
“저희 사진 한 장만 찍어 주세요.”
이호가 사진을 찍어 준 팬들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 부탁하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오히려 영광이라는 듯이 팬들이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갑자기 왜.”
“셋이서 사진 찍으면 좋잖아. 그쵸, 어머님?”
“좋지. 이호가 센스가 좋네.”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한 다윤과는 달리 이호와 다윤의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서서 포즈를 잡고 있었다.
엄마를 가운데 두고, 양옆에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다. 엄마의 어깨에 얹어진 다윤의 팔을, 서이호가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모양새였다. 다윤은 이번엔 활짝 웃으며 카메라 쪽을 봤다.
“친구분이신가 봐요. 같이 놀러 오신 거예요?”
사진을 다 찍어 준 여자가 휴대폰을 건네며 다윤을 향해 말했다. 다윤이 그저 웃기만 하자 옆에서 이호가 덧붙였다.
“세상에서 가장 친한 사람이에요, 저랑.”
어머, 서이호 선수 엄청 다정하시다. 여자가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이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다윤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이고 덧붙였다.
“나한테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이고.”
다윤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그렇게 말하고 이호가 다윤과 눈을 마주치며 싱긋 웃었다. 애인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꾹 참은 거였다. 애인이라고, 이렇게 완벽하고 멋지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내 애인이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면 다윤이가 곤란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제 마음을 꾹꾹 참았다. 다윤은 그런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를 올려다보며 웃을 뿐이었다. 요즘 다윤의 웃음이 는 것 같았다. 좋은 변화였다.
오늘따라 더 사랑스러운 애인의 뒤로 푸른 물결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예쁘다는 말보다 더 좋은 수식어가 없을까. 예쁘다, 사랑스럽다, 귀엽다, 멋있다. 아마 세상에 있는 모든 좋은 수식어를 다 합쳐도 최다윤에게는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쿠아리움을 다 구경하고, 바다 콘셉트를 한 카페에 세 사람이 들어왔다. 정말 아쉽게도 돌고래는 보지 못했다. 돌고래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다윤보다 더 실망한 이호가 한숨을 쉬자 오히려 다윤이 위로해 주며 웃었다.
“엄마, 오늘 피곤하진 않으셨어요?”
“응, 그럼. 우리 다윤이랑 놀러 오니까 너무 좋던걸.”
이호가 잠시 카운터에 간 사이에 다윤이 엄마에게 물었다. 그러면서도 내심 피곤하거나 아픈 곳은 없는지 살피는 그 시선에 연자는 씩 웃으며 아들의 손을 붙잡았다.
“……다음에 또 가요. 엄마 가고 싶은 곳, 있으면 언제든 얘기해서 가요.”
“그래, 그러자, 다윤아.”
애써 두 사람에게 시간이 많이 남은 것처럼 얘기하는 다윤에게 연자는 부정적인 대답을 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다윤의 손이 까칠까칠했다. 예전엔 부드럽고 따듯하기만 한 손바닥이었는데. 다윤이는 힘든 거, 슬픈 거 모르고 자랐으면 했는데. 힘든 소망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속상해서 연자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엄마, 나 괜찮아요.”
연자의 한숨을 들은 다윤이 말했다. 저를 향해 애써 웃는 자신의 아들을 보면서 연자도 속상한 표정을 지우고 이내 웃었다. 한참을 마주 보고 웃다가, 연자가 다윤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고모한테서 연락 왔었니, 다윤아?”
그 말에 다윤은 웃던 것을 멈추고 긴장한 듯 엄마를 바라봤다. 고모가 혹시 병원에 와서 무슨 얘기를 했었나 싶어서 긴장하는 그 얼굴에 엄마가 손을 들어 다윤의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얼마 전에 찾아 왔길래 물어보는 거야. 고모가 너에게 또 나쁜 소리를 했나 해서.”
“……아뇨. 그런 건 없었어요. 엄마는…… 고모랑 얘기 잘 나눴어요?”
“엄마는 다윤아.”
다윤이 애써 웃으며 물어보자 연자가 그 말을 끊고 말했다.
“다윤이 너를 싫어하는 사람은 그게 누구든 좋아할 수 없어.”
“…….”
“너도 그래도 돼. 이유 없이 너를 싫어하는 사람은 싫어해도 괜찮아.”
그게 고모든, 누가 됐든. 다윤은 애써 고개를 끄덕였지만 온전히 수긍할 수는 없었다. 고모 입장에서는 저라는 존재를 싫어하는 게 납득이 가지만, 제가 고모를 싫어하는 마음을 표현해도 되는지는 납득할 수 없었으니까. 아니, 그래선 안 될 것 같았으니까.
좋았던 다윤의 기분을 괜한 얘기로 망쳐 놓은 것 같아서 연자는 말을 돌렸다. 아까 찍었던 사진을 보여 달라고 말하자 다윤도 애써 방금 얘기는 잊고 휴대폰을 들어 엄마에게 자랑하듯 사진을 하나하나 보여 주었다.
그사이 이호가 와서 두 사람 앞에 음료를 내려놓고 물었다.
“뭐 보고 있어?”
“응? 아무것도 아니야.”
차마 네 사진 엄마한테 자랑하고 있었다고 말하기는 부끄러워서 다윤이 재빠르게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그런 제 마음을 다 아는 건지 엄마가 저를 쳐다보며 웃었다. 다윤이 민망해서 얼굴이 붉어져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먼저 마시고 있어.”
다윤이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뭘 보고 있었길래 저러지. 그냥 평범한 사진이 아니겠다, 싶어서 급하게 도망치는 다윤의 뒤통수를 보며 이호는 나중에 꼭, 무슨 일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고맙다, 이호야.”
다윤이 자리를 비우자 다윤의 엄마가 이호에게 말했다. 이호는 정말 행복하게 웃고 있는 그녀를 향해 마주 웃으며 말했다.
“제가 뭘 했나요. 그냥 같이 오고 싶어서 모시고 온 것뿐인데요.”
“아니야. 너 아니었으면 다윤이랑 이런 곳 와 볼 생각도 못 했을 거야. 전에도 말했듯이 다윤이가 통 제 속내를 말을 안 하니까……. 저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같이 왔어야 하는 건데 말이야.”
연자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떨구고 찻잔을 바라봤다. 지나간 세월을 그저 그렇게 보낸 것이 슬펐다. 조금 더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시간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들을 앞에 두고 하고 싶은 것은 없냐고, 더 물어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앞으로 자주 더 같이 다니면 되죠.”
“……그래, 그럼.”
이호가 덧붙이는 말에 연자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를 더 당부하거나 하는 말은 하지 않고, 그저 미약하게 하는 긍정은 어딘지 모르게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듯했다.
“이호 네가 있으니까 이젠 안심이 돼. 고마워, 이호야.”
연자는 그렇게 말하고 이호의 손을 잡았다. 이호가 그런 연자를 보며 몇 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저와 아버지 사이를 걱정하다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마지막에 제 손을 잡고 설핏 웃던 모습이 지금의 연자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이호는 순간 걱정이 됐다. 이호는 얼마만큼 연자가 아픈지 모르지만, 이제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게 얼마 남지 않은 것만 같았다.
“다윤이랑 잘 지내 줘. 응? 싸우지 말고.”
“싸우긴요. 윤이가 나중에 저 싫다고 해도 제가 오히려 매달리고 빌걸요. 나 좀 다시 좋아해 달라고.”
이호의 말에 연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정말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편안한 웃음이었다.
“무슨 얘기 했어요?”
다윤이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와 의자를 끌어 앉았다. 그런 다윤 쪽으로 턱을 괴고 이호가 씩 웃으며 말했다.
“최다윤 얘기.”
“……내 얘기?”
“응, 내가 윤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어머님께 다 말씀드렸지.”
“……아, 진짜 닭살. 얘 좀 봐요. 엄청 닭살이야.”
다윤의 말에 연자가 보기 드물게 소리를 내며 웃었다. 엄마가 그렇게 크게 웃는 걸 최근 들어 본 적이 없는 다윤은 그녀의 그런 웃음에 기분이 좋은 듯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다윤아, 영화 제작은? 감독님은 만나 뵀어?”
“으응, 아직요. 그동안 학기 마무리하느라 바빠서 방학으로 미루기로 했거든요. 다음 주에 뵙기로 했어요.”
“첫 미팅인데 단정하게 입어야 할 텐데. 엄마가 미처 정장 같은 걸 못 사 줘서 어떡하지.”
“아냐, 괜찮아요. 그냥 가볍게 입고 가면 되고, 옷도 많은데.”
“아무리 그래도……. 백화점이라도 가. 엄마가 돈 줄게. 응?”
“엄마, 나 진짜 괜찮아요.”
다윤이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정작 연자의 마음은 편하지 못한지 시선을 아래로 두었다. 다윤은 정말 괜찮았는데. 괜찮다는 말을 해도 연자의 마음은 달래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을 가만히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호가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제가 같이 갈게요.”
“응?”
이호의 말에 연자도 다윤도 이호의 얼굴을 봤다. 이호의 그 특유의 능글맞은 얼굴에 연자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다윤은 괜찮다며 연자 몰래 이호에게 고개를 저었지만, 이호는 그런 다윤을 못 본 척했다.
“고마워, 이호야. 다윤이 꼭 좀 데려가. 혼자는 영 안 가려고 할 테니까.”
“저한테 맡기세요.”
역시, 저보다는 두 사람의 마음이 더 찰떡같이 맞는 듯했다. 서로 마주 보며 웃고 있는 이호와 엄마를 보며 다윤도 일단은 두 사람 옆에서 웃었다. 나른하고 한가로운 주말이 어느새 지나가고 있었다.
어느새 저녁이 다 된 시간, 병원까지 엄마를 모셔다 드리고 두 사람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조용히 붙잡은 두 손이 따듯했다. 다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을 다물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오늘 고마워.”
잠시 신호에 걸린 사이, 다윤이 말했다. 그렇게 말해 놓고 부끄러운지 제 쪽은 보지도 않고 있었다. 이호는 그런 다윤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어서 살며시 마주 잡고 있는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다윤이 고개를 돌려 이호를 봤다.
왜 다윤이 고개를 돌리고 있었는지, 저를 보지 않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 최다윤은 완전히 사랑에 빠진 얼굴이었다. 살짝 발그레해진 두 볼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 어색하게 웃고 있는 입술이, 저와 차마 눈도 마주치지 못한 눈이 그랬다. 이호는 저도 모르게 그런 다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신호가 바뀐 것도 모르고 뒤에 있는 차들의 클랙슨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왜 그렇게 정신이 빠져 있어.”
다윤의 가볍게 웃는 소리에도 이호는 마주 웃어 줄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도 방금 다윤이 짓고 있는 그 표정 그대로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그 표정을 보고 저 또한 한 번 더 반했다고,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말했겠지만 이상하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온몸이 간질거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머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왜 자꾸 고맙다고만 해. 난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인데.”
조금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서야 이호가 말했다. 여전히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을 것 같았지만 차 안이 어두우니까 다윤이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너 아니었으면 그렇게 어디 나갈 생각도 못 했을 테니까. 바보 같지. 그냥 한번쯤 엄마한테 같이 놀러 가자고, 외출하자고 그래도 됐을 텐데. 왜 그냥 가만히 있었지.”
“……바빴잖아.”
“그건 다 핑계지.”
다윤은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다윤이 속으로 자책하고 있을 게 보여서 이호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럴 때 해야 하는 말을 이호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앞으로는 자주 가자.”
“그래.”
“아쿠아리움 말고, 더 좋은 곳 가서. 직접 바다에 들어가서 돌고래 보자. 오늘 못 봤잖아.”
“그래, 그래.”
다윤이 그제야 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쩐지 정답을 맞힌 학생이 된 기분이 들어서 이호도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최다윤을 닮아서 정말 제가 변해 가는 모양이었다.
“근데 아까 엄마랑 얘기했던, 백화점은 안 가도 돼. 나 진짜 집에 옷도 많고…….”
“그건 안 돼. 어머님이랑 약속도 했고, 나도 너한테 이것저것 해 주고 싶은 거 많아.”
“……무슨, 뭘 또 해 주려고. 난 너만 있으면 되는데.”
제가 최다윤을 닮아 가는 것처럼, 다윤도 저를 닮아 가나. 다윤은 요즘 저런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예전엔 제가 하면 닭살이라고, 부끄럽다고 그러더니 요즘은 다윤이 더 적극적이었다. 그런 다윤의 변화가 좋기도 하고, 어쩐지 두 사람이 닮아 가고 있다는 사실이 짜릿해서 이호가 다윤의 손을 꾹 잡고 감동 받은 표정을 했다.
“윤아…….”
“아니, 그, 그러니까, 백화점은 괜찮다고. 진짜 안 가도…….”
“역시, 꼭 가야겠어.”
“청개구리…….”
다윤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이호가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생각해도 웃긴지 다윤도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차 안에 다윤의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내려앉았다.
어느새 다윤의 집이었다. 다윤의 집 근처에 다다라 이호가 차를 정차하고는 다윤에게 말했다.
“맞다, 윤아. 네 주머니에 내 휴대폰 있을 텐데.”
“내 주머니에?”
“응. 확인해 봐.”
다윤이 어리둥절해하며 자신의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무언가를 발견한 다윤이 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서이호.”
“잘 나왔지? 바로 앞에 인화해 주는 곳이 있길래. 더 크게 할까 하다가.”
아쿠아리움에서 찍은 사진들이었다. 엄마와 이호, 다윤 세 사람이 찍은 사진, 다윤과 이호가 나란히 서서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는 사진, 그리고 해맑게 웃고 있는 다윤의 사진들.
“아까 어머님한테도 드렸고, 나도 인화했어. 윤이 네 사진은 세 장씩. 하나는 보관용, 하나는 전시용, 하나는 잃어버릴 것 대비해서.”
다음엔 아예 벽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크게 사진을 뽑고 싶다고 이호가 중얼거렸다. 물론 그러려면 그만큼 화질 좋은 카메라가 필요했다. 비싼 카메라를 사서 최다윤을 마음껏 찍어야지. 모든 순간들을 기록해야지. 이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윤은 웃으며 이호의 목을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코끝이 맞닿았고, 아주 가까운 거리에 이호의 눈동자가 있었다. 맑고 부드러운 갈색의 눈동자가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올라가자.”
“기다렸어, 그 말.”
다윤은 이호의 말에 피식 웃었다. 다윤은 살짝 이호와 코끝을 부딪치다가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의 혀가 부드럽게 얽혔다. 다윤은 눈을 감고, 감각으로 이호를 느끼면서 생각했다. 어떻게 이런 행운이 자신에게 온 건지 모르겠다고.
다윤은 다시 손안에 만져지는 이 행운을, 온몸으로 느껴지는 이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행복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한구석에서 불안함을 증폭시키고 있었지만 외면했다. 그냥, 지금은 온전히 이 행복을 즐기고 싶었다.
* * *
어지러웠다. 백화점은 너무 컸고, 다윤은 정신이 없었다. 여기를 봐도, 또 저기를 봐도 듣도 보지도 못한 브랜드가 천지였다. 다윤은 이렇게 정신이 없는데, 이호는 지친 기색도 없었다. 또 다른 매장에 들어가는 이호의 한쪽 손에 들린 쇼핑백을 물끄러미 보면서 다윤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편하게 미팅하러 가는 첫 만남에 굳이 정장까지 입을 필요는 없다고 해도 엄마가 영 마음을 불편하게 여기시니 사긴 해야 할 것 같아서 오긴 했지만, 이렇게 비싼 정장을, 더군다나 제 돈도 아니고 서이호 돈으로 살 마음도 없었는데 말이다.
“이거도 입어 봐, 윤아.”
“……서이호.”
“윤아, 이거 귀엽다. 딱 지금 입으면 좋을 것 같은데. 이것도 입어 볼래?”
“야, 서이호.”
“응?”
몇 번의 부름 끝에 그제야 이호가 고개를 들어 다윤을 쳐다봤다. 신난 얼굴을 보며 아까까지만 해도 그냥 지켜봤지만 더 이상 봐줄 순 없었다. 다윤은 이호가 내민 옷들의 가격표를 물끄러미 봤다. 제 수준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옷들이었다. 지금 서이호가 들고 있는 정장도 제 두 달 치 아르바이트 비를 모아도 약간은 못 미칠 가격이었는데.
아무리 서이호가 연봉을 많이 받는 프로 야구 선수라고 해도 다윤의 마음은 편하지 못했다. 다윤은 고개를 저으며 이호의 손에 들린 것들을 뺏어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다.
“나 정장이면 돼, 진짜. 그것도 네 돈으로 샀는데, 또 이것까지 사 주려고?”
“왜? 그러면 안 돼?”
너무 당연하다는 듯한 이호의 물음에 다윤은 한숨 쉬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 난 후 다시 표정을 굳히고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불편해서 안 돼.”
“윤아.”
“다 네 돈인데 내 마음이 편하겠어? 이제 내 거 말고 네 거 봐, 네 거. 네가 정장 사 줬으니까 내가 다른 거 사 줄게.”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안 돼.”
다윤의 단호한 거절에 이호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봐줄 수가 없어서 다윤이 단호한 표정을 하자 이호가 결국 들고 있던 옷을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
“마음 같아선 여기 백화점을 통째로 사 줘도 모자란데.”
“헛소리 좀 하지 마.”
다윤이 헛소리라고 일축했다. 진심이라고, 뭐든 다 주고 싶은 마음을 왜 모르냐고 이호가 툴툴거렸다. 제가 이러려고 돈 벌지 왜 그 돈을 벌겠냐고. 듣기에 좋은 말이긴 했지만 부담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이호가 다윤을 이길 일은 아마 앞으로 평생 없을 것이다. 결국 다윤에게 어울릴 것 같아서 골라 놓은 옷들은 다 모두 제자리로 갔다. 다윤은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한 이호에게 옷 하나를 골라 대보았다.
“이거 어때? 색깔 너랑 잘 어울린다. 이런 남방 편하게 입기도 좋고, 정장 안에 입기도 좋을 텐데.”
“……그럼.”
“응?”
“……너도 같이 사. 커플 룩 하게.”
커플룩을 생각하며 금세 환해진 얼굴의 서이호에 다윤은 또다시 한숨 쉬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간, 진짜 단순한 놈이었다. 다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호가 다시 신나서 옷을 골라 다윤에게 내밀었다.
다윤이 억지로 뜯어 말려 쇼핑이 끝나고, 결국 이호가 옷을 모두 두 개씩 사는 바람에 다윤의 마음만 더 무거워지고 말았다. 워낙 제가 계산할 수 없는 숫자라서 옆에서 선뜻 카드도 내밀지 못하고, 다윤은 다른 쪽 근처를 둘러봤다. 혹시라도 제가 서이호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있을까 싶어서였다.
계산을 하고 있는 이호를 두고 다윤은 바로 옆에 액세서리가 전시되어 있는 것을 물끄러미 봤다. 심플하고 예쁜 반지와 목걸이, 시계까지 전시되어 있었다.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아, 딱히 찾는 건 없어요…….”
다윤이 고개를 저어도 점원은 그를 놓치지 않으려 다윤의 시선을 따라 안쪽에 있는 제품을 꺼냈다. 진열장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고급스럽고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디자인이 깔끔하고 섬세해서 예쁘죠. 남자 친구 선물로 주로 여성분들이 많이 찾으시는 제품이에요. 가격대는 이렇게 되어 있는데 어떠세요?”
확실히 비싸긴 했지만 오늘 서이호가 쓴 돈을 생각하면 비싸게 느껴지지 않는 가격대였다. 아무래도 가격대가 높을 수 있다며 다른 제품을 권하려는 직원에게 다윤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 서이호가 계산을 끝마치고 다윤 쪽으로 오고 있었다. 다윤은 일단 나중에 오겠다는 말을 하고는 이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제가 이걸 보고 있었다는 걸 알면 무작정 사 주려고 들 놈이었기에, 일단 이걸 눈여겨봤다는 사실을 숨겨야 했다.
“어디 갔었어. 찾았잖아.”
“잠깐 화장실 좀. 그거 줘. 내가 들게.”
“아냐, 내가 들게.”
“무겁잖아. 나눠 들기라도…….”
“나 무시해?”
운동선수인 저를 무시하냐는 말에 다윤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길고 긴 쇼핑이 드디어 끝이 났다. 최다윤 것 잔뜩, 서이호 것 몇 개. 아무래도 다음에 혼자 와서 서이호 선물을 사든지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윤은 빌딩 바로 아래에 보이는 까마득한 서울의 야경에 아연실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호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은 이름도 모르는 메뉴도 시키고, 평소처럼 행동하는데 저만 얼떨떨한 것 같아서 부러 티를 내지 않으려고는 했지만 표정으로 드러나는 당황스러움을 숨길 수는 없는 모양이다.
“왜? 싫어? 별로면 나갈까?”
“아니, 아니 됐어. 주문했잖아. 먹고 나가야지.”
이호의 말에 다윤이 손을 내저으며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제 앞에 있는 고기를 썰어 입에 넣었다. 고기가 부드럽게 다윤의 입 안으로 퍼졌다. 맛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그런 맛이었다.
“난 너한테 다 해 주고 싶어.”
이호의 말에 다윤이 고개를 들었다. 제 앞에 있는 음식은 먹지도 않고 턱을 괴고 싱긋 웃으며 저를 빤히 보고 있었다.
“나한테는 다 과분한 거 같은데.”
일단 이 상황이, 뭔가를 잔뜩 받고 있는 이 상황 자체가 어색하기도 했다. 아무리 애인 사이라지만, 이런 건 좀 불편하지 않은가. 상대에게 줄 수 있는 만큼만 받고 싶었다. 이렇게 과분한 것들은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서이호에게 줄 수 없는 것들이다.
“네가 이런 거에도 아무렇지 않아 하고, 그냥 주는 대로 다 받고 되돌려 줄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
이호의 말에 다윤은 피식 웃었다. 글쎄. 그게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신기해. 다른 사람들은 다 오히려 달라고 애걸복걸했는데, 지금은 내가 너한테 주고 싶어서 안달 났잖아.”
이호는 그게 불만이라는 듯이 표정을 살짝 찡그리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다윤은 그런 이호를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너는 이런 게 아무렇지 않은가 봐.”
“응?”
이호가 반으로 잘라서 구운 관자를 다윤의 입가에 가져다 대자 다윤이 어색하게 받아먹으며 중얼거렸다.
“그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랑도 이런 식으로 연애해 왔나 싶어서.”
아, 말하지 말걸. 다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멍청이. 속으로만 생각했어야지. 서이호가 저를 어떻게 보고 있을지 몰라 부끄러웠다. 치졸하게 질투라도 한다고 질색하는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았다.
“윤아, 너 혹시…….”
“…….”
“질투해?”
다윤이 이호의 말에 얼굴이 빨개진 채로 급하게 부정했다.
“지, 질투가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거지. 바, 방금 네가 그랬잖아. 네가 만난 사람들은 다 나랑 달랐다고.”
“사귀었던 사람들 생각한 게 아니라, 그냥 일반적인 관계에서도 그랬단 얘기야.”
이호는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아까보다 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다윤이 질투했다는 게 아무래도 좋은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질투 나, 윤아? 기억도 안 나는 내 애인들한테?”
“아, 아니야. 안 해. 안 해. 그런 거로 왜 질투하냐? 나는 그런 사람 아니야. 어? 네가 누굴 만났든 전혀 상관 안 한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네가 중학교 때 애인을 한 달에 한 번씩 갈아 치웠든, 저번에 주말 드라마 나온 톱 배우랑 스캔들이 났든, 스포츠 기자랑 스캔들이 났든 나는 전~혀 신경 안 써. 진짜로.”
말하고 보니 완전히 신경 쓰고 있다는 게 티가 날 게 분명했다. 아, 그냥 입을 다물자, 최다윤. 진짜 치졸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윤이 물을 들이켰다. 부글부글 끓었던 몸속으로 차가운 물이 들어가니 조금 나았다.
“그렇구나. 넌 내가 누굴 만났든 전혀 신경 안 쓰는구나.”
이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럴 수 있지, 하고.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걸 보아하니 전혀 믿지 않는 눈치인데 괜히 제가 부끄러워 하니 넘어가 주려는 것 같았다.
“나는 신경 쓰일 것 같은데. 그리고 지금도 그래. 네가 다른 사람이랑 얘기하는 거 보면 막 달려가서 떼어 놓고 싶고, 내 애인이라고 동네방네 소문내서 아무도 최다윤한테 접근 못 하게 접근 금지령 내리고 싶어.”
이호의 말에 다윤이 쿨럭, 하고 마시던 물을 뿜었다. 이호가 그런 다윤을 보며 능글맞게 웃으며 냅킨을 건넸다.
“……객관적으로 봐도 내가 질투를 해야지, 네가 질투할 상황은 아닌데.”
“왜? 최다윤만큼 완벽하고 멋있는 인간이 어딨다고. 세상 모든 사람이 최다윤한테 빠질 수 있는데? 난 누구든 경계해야 해. 지나가는 사람 다 모조리.”
다윤은 결국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객관적으로 봐도 잘난 것 없는 저라는 사람을 저렇게 생각해 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냥 저는 오래도록 서이호의 눈에 씐 저 콩깍지가 떨어지지 않기만을 바라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윤은 이호의 입에 고기를 넣어 주었다. 이호가 그것을 맛있게 받아먹으며 웃었다. 생긋 웃는 이호의 얼굴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 * *
눈을 뜨자마자 서이호가 보이는 삶은 얼마나 축복받은 삶일까. 꿈으로만 꿨던 일들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요즘 이호는 다시 다윤의 집에 살듯이 하고 있었다. 시호가 없을 때는 이호의 집에 가는 것이 가능했지만, 시호가 돌아와서부터는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시호나 이호나 다윤이 와도 상관없었지만 제가 불편해서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그 전처럼 거실에 이불을 깔고 누워 함께 잠을 잤고, 일어나면 이호가 해 주는 아침밥을 먹었고, 이를 함께 닦고 외출 준비를 했다.
“어떡하지.”
“뭐?”
현관 앞에서 평소와 똑같이 서이호가 제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고, 입을 맞추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다윤이 눈만 들어 이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자 장난스럽게 웃은 서이호가 다윤의 씩 올라간 입꼬리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추고 말했다.
“너무 귀여워서 오늘은 아무한테도 보여 주고 싶지가 않아.”
“…….”
이제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여간, 저놈의 입. 다윤은 밉지 않게 이호의 팔을 툭 치고 먼저 현관 밖으로 나왔다. 억울함을 가득 담은 얼굴이 진심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진짜야. 나 진심 아니면 말 잘 안 하잖아. 오늘은 유독 더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어떡해.”
“제발…… 조용히 좀 해, 미친놈아.”
“네에.”
내려오는 내내 그런 닭살 돋는 말을 하는 이호에게 다윤이 말했다. 차에 올라타서는 얌전히 대답한 서이호가 이제는 손을 꾹 붙들고 입을 맞춘다. 다윤은 그런 이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오늘 끝나면 연락해.”
“응, 너도.”
“잘할 거야.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알지?”
“응.”
늘 내가 말해 주는 말을 이번엔 서이호가 제게 해 주었다. 다윤은 그 말을 들으며 피식 웃었다. 누구보다 든든했고, 다윤도 이호의 응원을 들으니 힘이 솟는 것 같았다.
다윤이 가야 할 사무실 건물 앞에 내려 준 이호가 가볍게 손을 흔들고 어서 들어가라고 재촉했다. 들어가야만 갈 거라는 의지를 담은 그 눈빛에 다윤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끝끝내 출발하지 않는 차를 뒤로하고 다윤은 걸어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몇 분이 지나서야 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리고, 다윤은 작게 웃었다.
이렇게 같이 깨어나고, 함께 준비하고, 시작하는 삶……. 다윤은 점점 욕심이 났다. 조금 더 확실히 하고 싶었다. 같이 동거하자고.
정식으로 한번 말해 볼까. 다윤은 가방 안에 넣은, 얼마 전에 백화점에 다시 가서 산 이호의 선물을 보며 생각했다. 서이호가 어떻게 반응할까. 그런 것들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일단은 지금 당장 닥친 일을 해결하는 게 먼저였다.
자신의 시나리오를 한번 훑어보고 막 건물 안으로 들어서려는 찰나였다. 휴대폰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그새 또 보고 싶다고 연락한 서이호라고 짐작한 다윤이 가방에 있는 휴대폰을 꺼냈다.
하지만, 아니었다. ‘삼촌’이라고 적힌 휴대폰 화면을 보며 다윤은 자신도 모르게 쿵, 하고 마음 한구석이 떨어지는 걸 느꼈다. 삼촌이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애써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며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다윤아.
“네, 삼촌 무슨 일…….”
- 윤아, 지금 당장 병원으로 올 수 있니.
자신의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예감에 다윤은 눈을 깜박였다. 갑자기 산책을 하다가 쓰러졌어, 지금 의식 불명 상태야. 삼촌의 말들이 차마 닿지 못하고 흩어지고 있었다.
다윤은 급하게 도로로 나왔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일단은 미팅을 취소하고 가야 한다는 생각도 못 하고 정신없이 택시를 잡아타서 병원으로 향했다. 순식간에 다윤의 다리를 붙들고, 어둠이 그를 다시 불행 안으로 끌고 가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3권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