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날 좋아해 줘
다리에 중심을 둔다. 손안에 땀이 잔뜩 차오른다. 눈앞에 있는 공만 바라보고, 그 공을 칠 타이밍만을 기다려라. 어떤 공이 올지 판단은 던져지는 순간, 그 짧은 순간에만 가능하다. 그리고 내가 어떤 공을 쳐 낼지에 대한 것도. 오로지 그 짧은 순간의 판단이 결정한다.
연습 투수가 준비 끝에 공을 던졌다. 빠른 직구. 이호는 방금까지 했던 생각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공은 빠르게 서이호의 스트라이크 존을 훑고 지나갔다. 고개를 숙였다. 오늘 한 타격 훈련을 실제 경기로 치자면 타석에서 한 번도 제대로 공을 쳐 보지도 못하고 물러나는 형편없는 상황이었다.
다시 배트를 꾹 쥐었다. 이호의 손바닥 안이 땀으로 가득 찼다. 이번엔 공이 날아오는 타이밍보다 훨씬 빨라 헛스윙을 했다. 이호는 배트를 집어 던지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자신이 하지 못한 걸 배트에 화풀이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다.
“한심한 자식.”
“저 자식한테 바람을 넣은 게 당신이지? 야구는 무슨. 그따위 공놀이를 한다고. 분명 후회하게 될 거야.”
아버지의 말과 싸늘한 비수에 배트가 한 번씩 더 돌아가고,
“이호야, 더 잘해야지. 그래야 아버지도 인정해 주실 거야.”
“지금 하는 거로 안 돼. 더, 더 잘해야 해.”
어머니의 말과 자신의 다짐으로 또다시 헛스윙이 반복됐다. 숨이 차올랐다. 이호는 결국 배트를 내려놓았다.
“조금만 뛰고 오겠습니다.”
연습 투수 상대를 해 주었던 선배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이호가 훈련장 바깥으로 나갔다. 몸을 풀기 위해 마련된 작은 운동장 위에 선 이호가 방금 머릿속에 맴돌았던 목소리들을 내쫓기 위해 애써 눈을 감고 다윤을 생각했다.
이상하게 다윤을 생각하면 분노나 우울함, 혹은 얽매인 것들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기분이 들었다. 그 맑은 눈동자나, 아무것도 못 하는 저를 보고도 웃어 주던 그 얼굴을 생각하면. 저를 생각해 주고 응원해 주는 소중한 사람.
어디서 봤더라. 이상하게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했다. 운동장 몇 바퀴를 내리뛰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입구 쪽에 낯익은 누군가가 보였다.
“서이호!”
추운 날씨에도 땀이 맺힌 이마를 슥 닦으며 남자를 봤다. 제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고 있는 남자는 박민우였다. 그를 본 이호가 모자를 벗고 훈련장 바깥으로 나갔다. 문득 손안이 쓰라렸다. 아까는 느끼지 못했는데 안쪽에서 물집이 잡히고 터져 있었다.
“여긴 무슨 일인데.”
“아, 오랜만에 보는 친구한테 또 섭섭하게.”
섭섭하다고 툴툴거리는 민우를 옆에 두고서도 이호는 신경도 안 쓰고 옆에 있던 붕대로 대충 손을 감쌌다. 민우가 선배와 몇몇 후배들과 인사를 나누고, 이호의 앞에 서서 가만히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할 말 없으면 가.”
“할 말이 없긴 왜 없어! 섭섭하게. 너 곧 1군 복귀한다며?”
이호가 민우의 말에 인상을 찡그렸다. 지금 페이스대로라면 1군은커녕 2군도 아슬아슬했다. 아마 다들 제 예전 페이스만 생각하고 있을 텐데……. 야구를 다시 시작한 게 실수였나 싶을 정도로 후회가 되고 있었다.
“네가 프로 선수? 참 나, 아주 겉멋만 들었군.”
“서이호, 너 재능 없다. 언젠가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고 후회할 날이 꼭 올 거다.”
아버지는 항상 그런 말을 했었다. 프로 선수가 되고 나서는 거의 만나지 않았지만 누나 시호의 부탁 때문에 몇 번 저녁 식사 자리에 간 적은 있으니까. 그때마다 마주하곤 했던 싸늘한 얼굴과 말투는 여전히 제 마음에 남아 비수처럼 꽂히고 있었다. 다시 시작하고 나서도 사라지지 않는 잔상이었다. 평생을 저를 쫓아다니며 괴롭혀 왔으니 한순간에 사라질 리 만무했다.
불행한 것은 제가 정말로 제 아버지의 말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상 이후로 좀처럼 회복할 수 없는 컨디션이 결국 제가 재능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윤이 보고 싶었다. 최다윤이라면 이런 얘기를 하는 제게 무슨 말을 할까. 잘할 필요 없다고 얘기해 줄 수도.
“……보고 싶다.”
“뭐?”
이호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중얼거렸다. 앞에 서 있던 민우가 그런 이호를 쳐다봤다. 뭐가 보고 싶다고 한 거지, 지금. 서이호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어서 의아했다.
이호의 얼굴에 피식 하고 작게 웃음이 서렸을 때, 민우는 그제야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방금 손에 붕대를 감을 때 만해도 얼굴이 누구 하나 죽일 것처럼 바람이 쌩쌩 불더니 지금은 무척이나 온화한 봄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서이호, 너 뭐…… 잘못 먹은 건 아니지?”
“뭐?”
“아니…… 어제 먹은 음식이 상했다거나…… 혹은 간밤에 꿈을 잘못 꿨다거나.”
민우가 횡설수설하자 이호가 어이없다는 듯이 그를 올려다봤다. 지금만 해도 냉기가 쌩쌩 부는데, 대체 아까 그 웃음과 보고 싶다는 말은 뭐냔 말인가.
“너, 너 혹시…….”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서이호가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조, 좋아하는 사람 생겼냐?”
민우의 말에 서이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팀 내에서 최장신인 이호가 민우를 한번 내려다보고는 몸을 돌려 훈련장 바깥 로커 룸으로 향했다. 들어가기 전, 청천벽력 같은 말을 남기고는.
“어.”
“와! 미친!”
저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옆에서 훈련하던 선수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이호와 민우 쪽을 봤다. 두 사람에게 시선이 쏠리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민우가 호들갑을 마구 떨었다.
“와, 대박. 서이호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미쳤네. 누군데? 왜 나한텐 소개 안 시켜 줘?”
“네? 이호 선배 연애하세요?”
“누굽니까?”
로커 룸에 있던 놈들도 민우의 호들갑에 전염되어 같이 호들갑을 떨어 대기 시작했다. 시끄러워, 그런 생각을 하며 이호가 신발을 벗고 있을 때였다.
“그때 2군 처음 내려왔을 때 찾아왔던 그 아나운서분 맞습니까? 진짜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야. 그건 꽤 오래전 일이고, 그 후에 치어리더 한 분 찾아왔었잖아. 그분 아니야? 대체 누구예요, 선배?”
“다들 시끄러워.”
이호의 흉흉한 기색에 다들 입을 꾹 다물었다. 민우만이 여전히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누군데, 누군데, 서이호! 왜 말을 안 해 주는데!”
“……좋아하는 건 맞는데, 차였거든.”
아주 대차게 차였지. 좋아하는 마음이 식는 게 더 빠를 거라고? 그런 얘기를 할 정도니 다윤에게 제가 얼마나 믿음이 안 가는 인간인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한편 다른 이들은 이호의 말에 모두가 얼어 있었다. 차였다고? 서이호가? 서이호가 누군가를 싫다고 거부한 적은 여러 번이어도, 서이호 싫다고 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 그러니까, 차였…….”
“나 간다.”
이호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빨리 가야지 최다윤을 볼 수 있다. 오늘 아마 학교에 있을 테니까, 서둘러 가면 만날 수 있을지도.
저렇게 사랑에 빠진 뒷모습이라니……! 민우는 감격스러웠다. 매번 제대로 된 연애라곤 못 해 볼 놈이라고 속으로 저주 아닌 저주를 퍼붓긴 했지만 그런 이호가 내심 걱정스러웠으니까 말이다. 전지훈련을 다녀온 다음에 달달 볶아서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든 알아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서이호가 저를 좋아한다고 세상이 갑자기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늘 그런 날이 오면 저는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은 늘 똑같았다. 똑같은 학교, 동기들, 수업. 어째 오래도록 짝사랑한 사람에게 고백을 받은 사람치고는 덤덤했다. 아마 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일 것이다. 어차피 금방 사라질 호기심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최다윤은 누구보다 서이호를 잘 알고 있으니까.
“너네 어디 가냐? 같이 저녁 먹고 갈래?”
전공 수업이 끝난 오후 시간, 동기 중 한 명이 저녁을 먹자며 손짓했다. 다들 곧 시험 기간이기도 했고, 먹고 도서관이나 가야겠다며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다윤도 그런 그들을 따라 걸었다. 어머니나 삼촌의 걱정을 덜려면 장학금을 받아야 하고, 그럼 지금부터라도 공부를 해 두어야 한다. 그러니까 저는 연애고 뭐고 할 시간이 없었다.
아이들을 따라 학교를 걷던 무렵, 다윤은 문득 익숙한 실루엣이 보여 걸음을 멈추었다. 설마, 서이호인가? 키도 그렇고 머리카락도 그렇고, 저 숨길 수 없는 훈련복까지. 아무리 봐도 서이호가 맞았다. 쟤가 왜 여기에 있지, 그런 생각을 하며 상황 파악을 할 무렵 이호가 다윤을 보며 먼저 손을 흔들었다.
“뭐야, 다윤아. 아는 사람이야?”
주변 동기들이 저희들 쪽으로 다가오는 이호를 보며 다윤에게 물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 서이호가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윤은 급하게 동기들에게 인사를 하고 이호를 향해 걸었다.
“윤아, 깜짝 놀랐…….”
해맑게 인사하는 이호를 낚아채서 동기들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최대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다행히 이호도 다윤을 순순히 따라왔다. 멀어졌다고 생각할 무렵에서야 다윤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어 이호를 봤다.
“깜짝 놀랐지? 서프라이즈.”
서이호가 눈치도 없이 싱긋 웃었다. 입꼬리가 예쁜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다윤은 그런 이호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오늘 하루 종일 아무 느낌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막상 눈앞에 서이호가 있으니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정작 서이호는 평소와 다름없는데, 저만 이렇게 두근거리고 휘둘리는 것 같았다. 서이호의 감정과 다윤의 감정이 다르다는 것이 확연히 느껴지는 차이였다.
다윤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시선을 최대한 다른 곳으로 두고 이호에게 말했다.
“너 여기 무슨 일이야? 심지어 훈련복 그대로 입고.”
“나 보고 얘기하면 안 돼, 윤아?”
이호가 다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푹 눌러쓴 모자 아래로 이호의 눈빛이 느껴졌다. 반짝반짝한 강아지 같은 눈빛. 다윤이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이호가 씩 웃었다. 다윤은 그런 이호의 능글맞은 행동에 괜히 심술이 나서 그를 노려봤다. 하여간, 선수였다.
“옷 갈아입고 오는 거 깜박했어.”
“뭐?”
“저녁 같이 먹으려고 빨리 오느라. 갈아입고 올걸 그랬나? 별로야?”
이호가 눈치를 보며 다윤에게 물었다. 다윤은 그런 이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같이 저녁을 먹겠다고 옷도 안 갈아입고 온, 눈앞의 남자는 사랑스러웠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서이호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애초에 가능한 일인가 싶어서. 눈만 마주쳐도 좋고, 더 빠질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매일 빠져드는 느낌인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다윤은 흠, 하고 헛기침을 하고 이호에게 말했다.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엇갈려서 못 마주쳤으면 어떻게 해.”
“그냥 놀라게 해 주고 싶어서. 그리고 이렇게 만났잖아. 그런 거 보면 우린 운명인가 봐, 그렇지 윤아.”
“끼워 맞추지 마.”
다윤이 단호하게 말해도 이호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었다. 보아하니 훈련하고 바로 달려온 모양인데 그럼 꽤 배가 고플 터였다. 다윤은 일단 차에 타자고 말했다. 다윤의 말에 서이호도 고분고분 차에 올라탔다.
어두운 차 안, 두 사람이 들어서자마자 불이 탁, 하고 켜졌다. 그 순간 다윤이 눈앞에 들어온 서이호의 손에 감긴 붕대가 보였다. 무례라는 걸 알면서도 다윤이 급하게 서이호의 손을 끌어당겼다.
“……손 왜 이래?”
붕대에 살며시 피도 비치고 있었다. 그를 본 다윤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마치 제가 아픈 것처럼. 정작 서이호는 덤덤하게 말했다.
“물집 때문에.”
“연고 안 발랐어? 하여간, 뭉청이. 연고 발랐어야지. 이런 거 그냥 두면 흉 진다고.”
제 말에도 이호는 웃고 있었다. 손에 잔뜩 물집이 잡혀 터지고 피가 나는데도 웃음이 나오냐고 타박하니 이호가 중얼거렸다.
“……신기해서.”
“……뭐가 신기해?”
“야구 하다가 다치면 내 탓이지, 그건 다 내가 감수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그렇게 걱정해 주는 거 보니까 신기하네.”
다윤은 그런 이호를 물끄러미 봤다. 아버지가 엄하다고 들었다. 워낙 이호가 야구 하는 걸 싫어한다고. 열정적인 이호를 단념시키겠다고 그를 아프게 하는 말들을 하고 상처 줬을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야구가 중요하냐? 몸이 더 중요하지. 좀 적당히 해, 적당히. 아플 땐 쉬어 가면서 하라고 바보야.”
내가 너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오래도록 함께했다면, 그랬다면 이런 얘기를 좀 더 가까이에서 해 줄 수 있었을 테고, 그랬으면 이호의 아버지로부터 이호를 지킬 수 있었겠지. 제 탓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죄책감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윤이 이호의 손바닥을 가볍게 문질렀다. 차라리 제가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그 순간 이호가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던 제 손을 꽉 붙잡았다.
“……뭐야.”
“그냥, 너무 좋아서.”
서이호가 그렇게 말하고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갑작스럽게 훅 치고 들어오는 서이호의 웃음과 그 말에 다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착각하지 마. 이건 그냥 친구로서 걱정해 주는 거야, 난 네 친구고 팬이니까. 어? 알겠지?”
“그래, 알았어. 알았어.”
능글맞게 알았다고 대답하는 서이호가 얄미워서 다윤이 이호를 노려봤다. 그러면서도 손에 감긴 붕대가 여전히 안쓰러워서 작게 한숨이 나왔다. 아까보다 훨씬 즐겁게 싱글벙글 웃고 있는 얼굴이 어이가 없기도 했고.
“저녁 뭐 먹으러 갈까, 윤아. 내가 사 줄게.”
이호의 말에 그제야 다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까는 갑자기 만난 이호를 보고 당황스러워서 덥석 차에 탔지만 사실 다윤에겐 오늘 약속이 있었다.
“……미안한데, 나 오늘 약속 있어.”
“약속?”
방금까지만 해도 산책 가기 직전 개처럼 웃고 있더니 순식간에 얼굴이 축 처졌다. 그런 이호를 보며 다윤이 난처한 얼굴로 고민하다가 결국 이호와 같이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어차피 서이호도 아는 사람이고.
“그럼 일단 여기 식당으로 가자. 너랑 같이 가면 좋아하실 거야.”
누구랑 만나는지도 모르면서 서이호는 알겠다고 말하고 다윤이 말한 레스토랑의 주소를 찍었다.
운전하는 내내 이호가 다윤을 흘끔거렸다. 차가 멈춰 설 때마다 시선을 다윤에게 고정하기도 했다.
“뭘 그렇게 봐.”
“좋아서.”
“……너 그런 말 진짜 잘한다. 많이 해 봤지?”
다윤의 말에 이호가 푸핫, 하고 웃었다.
“잘해? 그냥 생각나는 말 하는 건데.”
그게 잘하는 거라고, 다윤은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저는 속에 있는 말을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부끄럽고, 제 마음을 들으면 서이호가 뭐라고 생각할지 그의 반응이 무서워서.
그런 제 생각을 읽었는지 이호가 말했다.
“나도 처음 해 보는 거라, 무섭긴 해. 다윤이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그렇게 말하는 이호의 표정이 꽤나 진지했다. 다윤은 앞을 바라보고 있는 이호를 빤히 바라봤다. 능글맞게 말도 잘하길래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근데, 지금 안 하면 기회가 영영 없을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무서워도 그냥 하는 거야. 그게 맞는 것 같아서.
다윤은 피식 웃었다. 그 말이 너무나 서이호다워서. 두려움을 떨치고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제가 사랑하는 서이호의 모습.
벌써 자신이 없었다. 제가 언제까지 받아 주지 않고 버틸 수 있을지, 솔직히 모르겠다.
이호는 제 앞에 있는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딘지 모르게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한 서이호를 보며 앞에 앉아 메뉴판을 보던 여자가 말했다.
“서이호, 이 자식이 오랜만에 누나 보고도 얼굴을 찌푸려? 안 웃어? 안 웃지?”
시호의 그 말에 이호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시호와는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거였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는 아버지 문제로 다투었고, 그 이후에 이호가 집에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연락을 하긴 했지만 아직 만나고 싶지는 않았는데.
사실 그런 문제보다 이호는 다윤이 왜 서시호와 연락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시선을 돌려 옆에 앉은 다윤을 쳐다보자 다윤이 제 눈치를 한 번, 그리고 시호 눈치를 한 번 보고 저를 향해 씩 웃었다. 저 웃음엔 이젠 당할 도리가 없나 보다. 바로 마음이 풀리는 걸 보면.
“윤이랑 연락하지 마.”
“뭐 인마?”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은 해야겠어서 시호에게 말했더니 시호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예전부터 그랬다. 이호는 시호와 다윤이 친한 게 불편했다. 다윤은 제 누나라 챙긴다며 섭섭해했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서시호는 저와 무척 닮은 인간이었으니 저와 똑같은 마음일 거라는 불안과 질투 때문이었다.
완전히 개와 고양이…… 아니 두 대형견의 싸움이었다. 옆에 있는 다윤만 중간에 끼여 등 터지는 꼴이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더니, 서가네 싸움에 애꿎은 최다윤 속만 터지고 있었다.
다윤이 미안하다는 얼굴로 시호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그냥 혼자 올걸 그랬나 봐요.”
“윤아.”
다윤의 말에 이호가 불퉁한 시선을 다윤에게로 돌렸다. 다윤은 그런 이호의 시선을 무시했다.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냐고 서운한 눈빛을 보내도 다윤은 꿈쩍도 안 했다. 평소라면 미안하다며 벌써 제 기분을 풀어 줄 다윤이.
후, 하고 이호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괜히 다윤이 있는 데서 날 세울 필요는 없었다. 불편한 건 다윤일 테니까. 시호도 그런 생각을 하는 건지 생긋 웃으며 다윤을 보고 있었다. 역시 두 사람은 괜히 남매가 아니었다.
“이거 먹어 봐, 다윤아. 여기 진짜 맛있거든. 내가 엄청 좋아하는 곳이야.”
“고마워요, 누나.”
“어휴, 어쩜 이렇게 귀엽고 똘똘할까. 내가 막 보쌈해 버리고 싶어.”
“서시호.”
“저 새끼 저거 봐. 이름 부르는 거 보라고. 내가 저러니까…… 어휴.”
다윤을 볼 때와는 완전 다른 얼굴로 시호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호가 그런 시호를 한번 노려보고는 다윤의 수저 위 시호가 올려 준 바닷가재 살 위로 한 덩이를 더 올렸다.
다윤이 난처한 얼굴로 제 수저를 봤다. 수저 위에 시호가 올린 것과 이호가 올린 것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다윤은 최대한 입을 크게 벌려 가재 살들을 모두 입 안으로 넣었다. 다윤의 두 볼이 빵빵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게 너무 귀여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서이호, 너는 왜 안 먹어?”
어쨌든 아까보다는 조금 누그러진 상태에서 시호가 이호에게 물었다. 이러니저러니 하며 아웅다웅 싸워도 시호는 이호를 꽤나 살뜰히 챙기는 편이었다. 이호는 테이블 아래에 오른손을 감추느라 아까부터 제대로 식사도 하지 않고 있었다.
“별로 배 안 고파.”
이호가 그렇게 말하고는 손으로 턱을 괴고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다윤은 물끄러미 테이블 아래에 있는 서이호의 붕대 감긴 손을 봤다. 시호는 이호가 손 때문에 식사를 하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타박했다.
“운동할 때 잘 먹어야지, 짜식아. 오늘도 훈련 끝나고 바로 온 모양인데 안 먹으면 운동도 안 되는 거 알지? 너도 얼른 먹어. 괜히 속상하게 하지 말고.”
“……배 안 고프다니까.”
“자.”
옆에서 다윤이 이호의 입 근처로 바닷가재를 내밀었다. 이호가 제 앞에 있는 바닷가재를 한 번, 그리고 최다윤을 한 번 봤다. 거부할 것도 없이 이호가 다윤이 내민 것을 한입에 받아먹었다.
그 후로도 다윤은 계속 이호에게 음식을 먹여 주었다. 시호가 기겁을 하며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다윤이 괜찮다며 웃었다.
아마 아는 거겠지. 자신이 누나 앞에서 아픈 손을 들키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다윤은 누구보다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이니까. 아까까지만 해도 가라앉았던 기분이 다시 순식간에 붕 떴다. 최다윤이 주는 바닷가재는 세상 어떤 산해진미보다 부드럽고 맛있었다.
시호가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다윤은 잠시 어딘가를 다녀오겠다며 사라진 상태였고, 레스토랑 넓은 정원에 이호와 시호가 나란히 서 있었다. 두 사람 다 키가 무척이나 커서 주변에 있는 사물들이 모두 작아 보이는 느낌이 들고 있었다.
“그래도 걱정 많이 했는데, 다윤이랑 잘 지내는 것 같네.”
시호가 가방 안에서 담배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이호에게서 한 걸음 떨어져서 담배 위에 불을 붙였다.
“어릴 때도 그러더니. 넌 진짜 다윤이라면 끔벅 죽었지.”
“내가?”
“중학생 때부터 그랬어. 그때는 그래도 재잘재잘 곧잘 나한테 와서 학교 얘기하고 그랬잖아. 친구도 못 사귀는 것 같았는데 다윤이, 다윤이, 어찌나 노래를 부르던지. 엄마도 그때 다행이라 그랬어. 네가 좀 마음 붙일 만한 좋은 친구 만난 것 같다고. 뭐, 또 너는 기억도 못 하겠지만. 예전부터…….”
시호가 말을 하다 말고 멈칫했다. 이호가 그런 시호를 보며 물었다.
“예전부터 뭐?”
“아니다, 됐어.”
시호가 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왜 말을 하다가 마는 거지. 이호가 삐딱한 얼굴로 시호를 봤다. 시호의 입에서 담배 연기가 천천히 뿜어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까, 왜 윤이라고 불러?”
“뭐?”
“너 말이야. 다윤이를 왜 윤이라고 부르냐고. 원래 그렇게 다정한 성격도 아니잖아? 나한테는 누나라고도 잘 안 부르면서.”
갑작스러운 시호의 말에 이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이유였다. 그냥……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 어느 순간부터 다윤을 윤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잘 어울려서? 다윤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윤이라고 부르는 게 더 친근해 보이니까.
저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이호를 보며 시호가 피식 웃었다. 좀 떠보려고 했더니 역시 기억을 못 하는 모양이었다. 멍청한 자식. 그런 생각을 하며 시호가 담뱃재를 툭툭 털었다.
“다윤이 귀찮게 하지 말고, 그만 집에 좀 들어와.”
“싫어.”
“싫기는. 너 평생 아버지 안 볼 거야?”
시호의 입에서 담배 연기가 다시 한번 흩어졌다. 그 흐릿한 연기 사이로 이호의 굳은 얼굴도 보였다. 그 두 눈에 담긴 단호한 거부의 뜻에 시호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하여간, 아무리 싫다 싫다 해도 이호는 제 아버지를 닮은 부분이 꽤 있었다. 이호가 들으면 기함을 하고 질색을 하겠지만.
“누나는…… 어떻게 그렇게 쉽게 아버지가 용서가 돼?”
“…….”
“누나도 그 사람 때문에 많이 힘들었잖아. 많이 억눌리고. 난 아직도 야구 배트만 잡으면 그 얼굴이 떠올라. 그 인간이 했던 짓들 다 떠오른다고. 상이라도 받아 오면 이게 뭐냐고 자존감 누르고,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내 훈련복이랑 아끼던 글러브도 다 불태우고. 그런데도 내가 용서해야 해? 그 인간을?”
이호의 말에 시호가 한숨을 쉬었다. 그때 제가 했던 얘기가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는 듯했다.
“그래.”
“…….”
“그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널 위해서 그래야 해.”
분명 시호와 이호에게 있어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 시호 역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했던 이야기가 계속해서 머릿속에 남았으니까. 여자라서 안 될 거라는 얘기. 제가 스타트업을 처음 시작했을 당시 잘될 것 같냐고 비웃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초반 거래처와 업체 쪽도 막아 버리는 바람에 꽤나 힘들었던 것도. 아버지는 이호뿐만 아니라 시호의 자존감도 그런 식으로 갉아먹었다.
증명해 보이려고 했다. 아버지가 했던 말들이 잘못되었다는 걸. 그러기 위해서 시호는 어떻게든 제가 만든 스타트업을 그럴싸한 기업으로 성장시켜야만 했다. 처음엔 좋아서 했던 일들이 짐이 됐고, 머릿속에서는 계속 아버지의 말이 울렸다.
나중 가서야 알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마음속에 그 얘기를 담아 두고 깨트리려고 하지 말고 그냥 무시하는 게 답이라는 걸. 그러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용서였다. 당신이 했던 말을 용서할 테니 더 이상 내게 아픔을 주지 마라 선언하는 것. 그것은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저를 위한 일이었다.
동생 이호가 자신이 걸었던 그 길을 걷게 되는 건 싫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야구를 좋아하는 마음 그대로를 즐길 수 있기를. 그래서 그런 얘기를 했던 건데, 이호는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그게 안 돼.”
“…….”
“아직도 그 사람 때문에 미칠 것 같아. 나 몇 년 동안 어떻게든 인정받으려고 노력했어.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지만.”
“……서이호.”
“누나는 되겠지만, 나는 못 하겠어.”
시호가 한숨을 쉬며 바닥에 담배를 떨어트렸다. 구둣발이 담배를 짓이겼다. 아직은 너무나 어린 동생이었다. 키도 크고 이제는 어른이 된 동생이지만 제 눈엔 아직 어리기만 했다.
“야구 다시 해도 힘들지? 어떻게든 다시 벗어나 보려 해도 힘든 거 알아.”
“…….”
“그러니까 만나 봐야 한다는 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아버지 위해서가 아니라…….”
“그 얘기 할 거면 갈게.”
이호가 시호에게서 몸을 돌렸다. 시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 얘기를 하려고 하면 꼭 회피하려고 해서 문제였다. 그때, 두 사람 앞으로 다윤이 나타났다. 어디를 다녀온 건지 추운 날씨에도 숨을 헉헉 몰아쉬고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가자, 윤아.”
“어, 어? 어, 누나. 다음에 또 봬요. 오늘 식사 감사했습니다.”
“응, 먼저 가, 다윤아. 또 보자.”
“윤이한테 연락하지 마.”
이호가 단호하게 그렇게 말하고 다윤의 손을 붙들고 사라졌다. 저 자식이, 하고 시호가 그런 이호를 노려보다가 문득 어떤 생각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친구라고 하기엔 너무 좀……. 아까 계속 음식을 먹여 주던 다윤도 그렇고 저를 볼 때와는 달리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 낯선 이호도 그렇고.
에이, 두 사람 다 서로에게 애틋해서 그렇겠지. 시호는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차 쪽으로 향했다. 하여간, 둘 다 귀엽다니까. 시호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생각보다 이호도 괜찮아 보이는 것 같았고 말이다. 제 말을 들을 준비가 언젠가는 되겠지. 급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시호는 돌아서서 제 차로 향했다. 시호에게 중요한 건 사업, 그리고 이호뿐이었다.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이호 저 자식이 제 이런 마음을 알아줄 리 없다고 생각하며 시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너 또 누나랑 싸운 거 아니지?”
이호의 표정이 좋지가 않아 다윤이 슬쩍 이호를 보며 물었다. 이호가 푹 고개를 숙이고는 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누나와 이 주제로 말다툼을 하고 싶진 않았다. 어쨌든 누나도 아버지에게 피해를 입은 건 사실이니까. 그런데 자꾸 이 주제만 나오면 날카로워졌다. 시호는 너무 쉽게 용서를 했고, 그걸 이호에게도 강요했다. 이호는 그럴 수 없었다. 가끔 그럴 수 없는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고.
“잠깐만, 잠깐 앉아 봐.”
복잡한 마음을 뒤로하고 차를 타려고 하는데 다윤이 이호의 왼팔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차 근처에 있는 벤치로 저를 끌고 갔다.
“……뭐야?”
다윤이 손에 들고 있는 봉투를 부스럭거리며 무언가를 꺼냈다. 어두워서 자세히 보이지 않아 물었는데 다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부끄러움 때문이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다윤이 꺼낸 건 연고와 붕대였다. 아무렇게나 감아 놓은 붕대를 푼 다윤이 이호의 손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연고를 발라 주었다.
아무래도 계속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최다윤은 다정하니까 이런 사소한 것 하나도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호가 피식 웃었다.
“아프지도 않냐. 웃고 있게.”
다윤이 심드렁하게 말하며 다시 이호의 손에 집중했다. 조심스럽게 손끝에 연고를 발라 제 손바닥 위를 살살 문질렀다. 그러면서 마치 제가 더 아픈 것처럼 인상을 마구 찡그리고 있었다.
“이런 거 있으면 바로바로 좀 치료받아. 의무실 있잖아. 대충 대충 하지 말고. 운동선수는 몸이 제일 중요한데, 이게 뭐냐?”
가볍게 타박하는 말도 기분 좋게만 들렸다. 코끝과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도, 저 때문에 식사를 다 마치자마자 급하게 약국으로 뛰쳐나간 것도 다 사랑스러웠다.
“윤아.”
“왜.”
“넌 왜 이렇게 완벽해.”
제 말을 들은 다윤이 부끄러움에 인상을 찡그려도 이호는 싱글벙글 웃었다. 이상했다. 원래 이렇게 닭살 돋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닌데. 최다윤 앞에서는 시키지도 않아도 마구 흘러나왔다.
“왜 좋아하냐고 물어봤지? 나는 네가 이래서 좋아. 너무 사랑스러워.”
“……뭐라는 거야.”
“어, 그렇게 말하면서 눈 찡그릴 때 눈 아래 애교 살 올라오는 것도 좋아. 너무 섹시해.”
“미친놈아.”
다윤이 결국 피식 웃었다. 장난이 아닌데 장난처럼 들리나 보다. 진짠데. 다 섹시하고 사랑스러워서 서이호는 가끔 미칠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완벽한 사람이 세상에 있나, 그래도 되는 건가 싶어서 놀랍기만 한데.
이호가 푹, 다윤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다윤이 밀어내려는 듯 두 손을 이호의 어깨에 올리고 힘을 주었지만, 이호는 한쪽 팔을 다윤의 허리에 얹고는 중얼거렸다.
“조금만 이러고 있어 줘.”
“…….”
“미안한데, 조금만. 싫어도 참아.”
그렇게 말하고 이호가 작게 숨을 내뱉고 쉬었다. 찬 겨울바람 사이로도 따끈하고 부드러운 최다윤의 향기가 물씬 났다.
“……안 싫어.”
바람 사이로 최다윤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호의 입가로 피식 웃음이 샜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네가 있으니 나는 괜찮다. 너만 있으면 그 무엇도 두렵지 않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이호는 숨을 쉬었다. 아버지고, 누나고 모든 안 좋은 기억들이 저 멀리 흩어졌다. 최다윤의 향기를 맡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최다윤의 다정 안에서 숨 쉬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이 현실이었다.
* * *
이제는 서이호가 없는 생활은 다윤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텅 비어 있었던 집이 기억도 나지 않는 걸 보면. 이렇게 익숙해져서 혹시나 나중에 두 사람이 멀어지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과제를 하고 있는 제 앞에 앉아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고 앉아 있는 서이호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고개를 노트북으로 돌렸다.
“할 일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응?”
한참을 저를 바라보고 앉아 있다가 입을 연 이호에 다윤이 싱겁다는 듯 웃었다.
“원래 기말고사 시즌에는 바빠. 과제에 시험공부에 정신없지. 이 정도면 약과야.”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대답하는 다윤의 말에 이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나보다 더 바쁜 것 같아.”
다윤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그런 저를 보며 이호는 불만 가득한 얼굴이었다. 비시즌인 이호는 자기 재량으로 훈련을 하는 거였지만, 다윤은 아니었으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에 가고, 평일에 가끔 아르바이트, 아르바이트가 없는 날엔 도서관에 가거나 집에서 무조건 과제를 하고 시험공부도 한다. 그리고 주말엔 병원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고.
“뭘 그렇게 보냐.”
“좀 자.”
“뭔 소리야. 이거 다 끝내고 자야 해.”
다윤은 하품을 길게 하면서도 이호의 말을 들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어제도 과제 한다고 밤새웠으면서 오늘도 새벽을 넘기고 잠이 들 모양이었다. 이호가 슬쩍 다윤의 옆으로 가서는 다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다윤이 치우라며 손으로 얼굴을 밀어냈지만 늘 그랬듯이 이호는 다윤에게 딱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너나 가서 자. 나 방에 들어가서 할 테니까. 내일 또 훈련 가야 하잖아.”
“…….”
“서이호, 피곤한 거 아니…….”
“하나도 안 피곤해.”
“…….”
“너랑 있으면 하나도 안 피곤해. 그러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네 걱정 좀 해. 걱정이 가득 담긴 이호의 뒷말에 다윤이 피식 웃었다. 제 걱정할 게 대체 뭐가 있을까. 저는 정말 괜찮았는데.
“나 신경 쓰지 말고 과제 해.”
“어떻게 신경을 안 쓰냐?”
“어? 시간 간다. 이러다가 너 오늘 또 못 자. 얼른 해.”
“……참 나.”
다윤이 결국 찰싹 달라붙어 있는 이호를 무시하고 과제에 집중했다. 매주 내야 하는 팀 과제인데 팀원들이 자료를 제때 전해 주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나같이 일이 있었다는 핑계로. 그렇지 않으면 정리를 이상하게 한 뒤 제출해서 다윤이 처음부터 다시 뜯어 고쳐야 한다거나.
지금은 두 번째 케이스였다. 팀원 중 한 명이 보낸 자료에 링크와 설명이 엉망진창으로 붙어 있거나 아예 자료 출처가 안 적혀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노가다에 가까운 일을 다윤은 눈이 빠져라 하고 있었다. 제가 왜 이런 일까지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콜록.”
다윤이 들리지 않게 작은 소리로 기침했다. 이호가 그런 다윤을 흘끔 보고 물었다.
“감기 걸린 거 아니야?”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새벽만 되면 기침 심해지는 거지.”
이호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얼굴로 다윤을 노려봤다. 다윤은 정말 괜찮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애써 허리를 쭉 펴고 웃었다. 그런데도 이호는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정말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하니 그제야 이호가 시선을 돌렸다. 다윤은 그제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서이호 앞에서 기침도 함부로 못 할 판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몸이 조금 으슬으슬 떨리긴 했다. 자기 전에 몸살 약을 챙겨 먹고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릴 무렵이었다. 이호가 제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대고서는 화면 위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어떻게 하는 건데?”
“어?”
“그렇게 링크를 여기다가 옮기는 거야?”
“어, 응. 없는 건 직접 다시 찾아서 링크 걸고…….”
“급한 거야?”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내일 할 일도 있어서 미리 해 놓아야 마음이 편해서.”
다윤은 그렇게 말하고 자꾸 감기는 눈을 깜박거렸다. 옆에 서이호가 착 달라붙어서 그런가. 따끈따끈한 피부의 온도 때문에 자꾸 졸음이 밀려왔다. 그렇다고 다시 저리 가라고 할 수도 없고.
“윤아.”
제 귓가에 서이호의 목소리가 들려서 다윤이 퍼뜩 눈을 떴다. 아주 잠깐 존 것 같았다. 안 돼, 정신 차려야지. 이번 주까지 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였다. 거기다 저번에 교수님이 말씀하신 시나리오까지 수정하려니 정신이 없었다. 이런 거에 시간 뺏기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윤아.”
이호의 말에 다윤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제 얼굴 바로 옆에 서이호의 얼굴이 있었다. 두 사람의 코끝이 부딪혔다. 다윤이 당황해서 동공이 흔들리는 사이, 이호가 단호한 눈빛으로 다윤에게 말했다.
“천천히 해. 힘들잖아, 너 지금.”
“……무슨 소리야. 하나도 안 힘들어. 이 정도 가지고 무슨…….”
“힘든 거 다 보여.”
다윤은 이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는 애써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진짜 안 힘들어. 이 정도 가지고 힘들면 되냐.”
다윤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과제에 집중했다. 한편 이호는 그런 다윤을 물끄러미 보면서 다윤의 몸 온도를 느꼈다. 평소보다 더 따끈한 것이 역시 감기 기운이 있는 게 분명한데.
꾸벅, 하고 다윤이 고개를 앞으로 숙이다가 점점 넘어갔다. 이번에 이호는 다윤을 깨우는 대신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제 쪽으로 얹었다. 다윤은 새근새근 소리를 내면서 잠들었다. 역시, 어제도 그렇게 밤을 새우더니 오늘도 꼴딱 밤을 새우는 건 말이 안 됐다.
옆에서 본 다윤은 확실히 위태위태했다. 본인이 힘든 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고. 그런 다윤을 보는 이호는 불안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거나 힘들면 본인이 더 배로 힘들다고 하는 말을 믿지 않았는데 다윤을 보면서 몸소 느끼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다윤의 숨소리를 느끼다가 조금 더 편하게 재워야겠다는 생각에 이호가 다윤을 들어 올렸다. 180cm의 최다윤이 서이호에게는 너무나 가볍게 휙 들렸다. 그건 서이호가 힘이 세기 때문이기도 했고, 최다윤이 그만큼 말랐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그런 다윤이 더욱 안쓰럽게 느껴졌다.
방 안에 다윤을 눕힌 이호가 이불을 끝까지 덮어 주었다. 잠들어 있는 최다윤을 보고 있자니 그 어떤 것도 부럽지 않은 밤이었다. 언젠가 최다윤이 서이호의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때처럼, 서이호도 그렇게 했다. 한 시간이 지나도, 두 시간이 지나도 하나도 지루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 * *
일어났을 때 다윤은 어제 했어야 하는 일들을 다 끝내지 못하고 잠들었다는 사실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심지어 벌써 수업이 있는 오후 시간이었다. 오전 시간에라도 어제 못 한 것을 마무리했어야 하는데.
다윤이 급하게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갔다. 서이호는 벌써 나간 건지 집 안이 고요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윤이 노트북을 급하게 켜려던 그때였다.
[약 꼭 챙겨 먹어, 윤아.]
노트북 옆에 놓인 쪽지와 몸살 감기약. 다윤은 그것을 보다가 천천히 노트북을 켰다. 분명 어제 초반까지 정리했던 과제가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한편에는 혹시라도 제가 잘못했을까 봐 어제 제가 했던 과제 파일도 남겨 놓았다.
“……하.”
고맙고, 미안해서 다윤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안도의 한숨과 고마움이 담긴 숨이 뱉어졌다. 서이호는 늘 제게 다정하다고 말하지만, 저보다 다정한 건 서이호였다.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작게 웃기도 했다. 이러면 제가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그러는 건지, 참. 다윤은 서이호의 다정에 머리가 어질했다. 항상 다정을 베푸는 쪽이었던 최다윤에게는 이호의 마음이 더 따듯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숨 안에 옅은 열기가 느껴졌다. 다윤은 일단 이호가 사다 둔 몸살 감기약을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아프면 안 돼. 아프면……. 그런 생각을 하는 다윤의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기침이 자꾸만 터져 나왔다. 준구가 그런 다윤을 돌아보며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최다윤, 너 괜찮냐?”
“어, 응……. 괜찮아…….”
준구가 다윤의 시체 같은 얼굴에 눈을 크게 떴다. 아무리 봐도 괜찮아 보이지가 않는데 다윤은 애써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진짜 괜찮아, 약 먹었으니까 곧 괜찮아지겠지…….”
“별로 몰골은 안 괜찮아 보이는데, 아무래도 오늘 그냥 집에 가야 하는 거 아니냐.”
“수업 가야지……. 아직 하나 남았는데.”
“그냥 병원 진단서 내고 빨리 집에 가. 그 상태로 무슨 수업이야.”
다윤이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이럴 때보면 참 고집이 셌다. 집에 가라고 떠미는 준구에게 끝까지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며 노트북과 책들을 주섬주섬 가방 안에 넣었다.
“야, 최다윤. 같이 가 줘? 너 그대로 보냈다간 그냥 가다가 확 쓰러질 삘인데.”
“……너는 말을 무슨, 콜록, 콜록! 됐어. 너도 수업 가야지. 다음 주에 보자.”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야. 그렇게 시체 같아서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겠는데.”
“말 좀 예쁘게 해라, 예쁘- 콜록, 콜록!”
“역시, 데려다줘?”
“공부나 해. 간다.”
불안한 듯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는 준구를 뒤로하고 다윤은 목도리를 둘러매고 수업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온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정말 괜찮다고 믿었는데, 나아지려는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았다. 몸이 강하게 휴식을 요구하고 있다. 그걸 알면서도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다윤 앞에 놓인 일들이 산더미였으니까.
천근만근 같은 걸음으로 건물을 향해 걷는데 누군가와 어깨가 부딪혀 다윤이 뒤로 넘어졌다. 들고 있던 자료가 바닥으로 쏟아지고 희미한 눈으로 다윤이 고개를 들어 앞의 사람을 봤다.
“최다윤?”
목소리가 익숙했다. 그 목소리에 방금까지만 해도 천근만근이었던 몸이 순식간에 차게 굳었다. 아팠던 것도 잊고 다윤이 급하게 종이를 주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만나는 그 얼굴에 방금까지만 해도 어질했던 정신이 바짝 차려지는 기분이었다.
“……여기 학교 다녀?”
“아…… 응.”
다윤이 고개만 끄덕였다. 서리가 그런 다윤을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몇 년 만이었던가. 거의 2년이 다 지나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만나고 그게 끝이었으니까.
서리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조카였다. 아버지와 고모는 무척이나 사이가 좋았는데, 그만큼 고모는 저를 별로 좋아하진 않으셨다. 친조카도 아니니 정이 가지 않는 건 저도 이해했다. 오히려 삼촌이 이상할 정도로 제게 잘해 주고 있는 거였으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고모의 증오는 더욱 심해졌다. 친가 식구들은 아버지가 죽은 것이 저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들어와서는 안 되는 애가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그런 애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라고. 아버지가 저를 데리러 오다가 사고가 난 터라, 거기에 무어라 반박을 할 수도 없었다.
그들 말이 맞았다. 다 제 잘못이다. 그들 눈에 아무렇지 않게 잘 사는 제가 꼴 보기 싫은 건 당연한 거고. 다윤은 가끔도 꿈을 꾸곤 했다. 차가운 얼굴로 저를 보던 고모의 얼굴. 이젠 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하던 서리의 눈빛들.
“나는 친구가 이 학교 다녀서 잠깐 놀러 왔어.”
“…….”
“……잘 지내는 것 같아, 다윤아.”
그 말에 다윤은 손에 힘을 꾹 주었다. 아무런 가시가 박히지 않은 말임에도 다윤은 그 말이 왜 너 혼자서 행복하냐는 말로 들렸다. 순간 온몸에 있는 힘이 다 풀릴 것 같은 기분에 다윤이 급하게 고개를 들어 서리에게 인사했다.
“나 수업이 있어서, 미안. 먼저 가 볼게.”
“아, 응. 다음에 연락할게, 다윤아.”
연락, 하지 않아도 돼. 그 말을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서리의 연락을 받고 싶지 않았다. 서리만 보면 잊고 있던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서리가 손을 흔들었고 다윤은 그런 서리를 지나쳐 걸었다. 어린 시절 친척들 사이에서 정을 못 붙이고 있던 제게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서리와 이제 더 이상 맘 편히 얼굴을 보고 얘기할 수 없었다.
다윤은 손에 힘을 꾹 쥐고 걸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까보다 더한 기침이 나왔는데도 다윤은 꾹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제가 받는 고통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방금 만난 서리로 인해 다시 한번 상기됐다.
“다윤아, 이거 12번 테이블인데.”
“아, 미안…… 잠깐만, 내가 다시 가져갈게.”
“아니야, 괜찮아. 내가 다시 가져다 드릴게. 너 오늘 좀 피곤해 보인다.”
다윤은 순간 제 앞에 있는 사람이 시영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 헷갈려 두 눈을 깜박였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분간이 안 갈 만큼 머리가 어질했다. 그러면서도 최대한 괜찮아 보이려고 씩 웃었다. 그제야 고개를 갸웃하며 다윤의 상태를 살피던 시영이 그릇을 들고 홀로 향했다.
그냥 아주 가끔씩 오는 몸살일 뿐이다. 특히 이번이 증상이 조금 심할 뿐. 다윤은 쉬는 시간에 잠깐 쭈그려 앉아 괜찮다고 스스로 계속 중얼거렸다.
아파서 그런지 아까 서리를 만난 게 자꾸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예전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고모가 했던 날카로운 말들도. 그런 걸 떠올리고 있자니 더 몸이 아파 오는 기분이었다. 다윤은 서이호를 생각했다. 서이호의 웃음이나 다정한 목소리 같은 것들. 당장 보고 싶었다. 당장 얼굴을 봐야지만 편해질 것 같았다.
“다윤아, 잠깐 일어나 봐. 사장님이 그러는데, 오늘은 쉬고 들어가라신다.”
쉬는 시간 고개를 숙이고 쭈그려 앉은 다윤에게로 온 매니저가 말했다. 얼마나 기운이 없어 보였으면. 끝내 부정하던 다윤도 결국 수긍했다. 이러다가 가게에서 쓰러지면 그게 더 민폐일 것 같았다. 다윤은 가방과 옷가지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쌩쌩 부는 칼바람이 얼굴을 마구 때리고 있었다.
서이호에게 연락을 할까. 보고 싶은데. 아니다, 오늘은 훈련이 늦게까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요즘 이호의 귀가 시간이 늦어지고 있었다. 야구 훈련 때문일 거라고 짐작했기에 다윤은 일찍 들어오라거나 그런 얘기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호에게도 어떤 사정 같은 게 분명 있을 테니까.
그런데 오늘은, 조금 보고 싶네. 다윤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갈 무렵이었다. 끼익, 하고 차 한 대가 급하게 근처에 섰다. 다윤은 그 소름 끼치는 소리에 몸을 움찔하며 멈춰 섰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저런 소리가 아니었을까. 아버지가 사고가 났을 땐…….
다윤은 저도 모르게 주저앉아 덜덜 떨었다. 귀를 막았다. 자꾸 끼익, 하는 그 소름 끼치는 소리가 귀에 울리는 것 같았다.
“다윤아!”
그 순간 이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윤은 그제야 덜덜 떨던 몸을 진정하고 고개를 들었다. 이호였다. 다급한 얼굴의 서이호. 한 번도 본 적 없는, 정말로 화가 난 듯한 얼굴의 서이호.
그때 고백했을 때 네가 지었던 표정은 사실 화가 나서 지었던 게 아닌 걸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 이호의 표정은 그때와 비슷했다. 화가 난 게 아니라, 그저 당황스러웠던 거였나, 너는. 그냥 나 혼자서 겁을 먹었던 건가.
웃긴 건, 그 서늘한 얼굴을 보자마자 다윤의 몸에 있던 힘이 빠져나가 앞으로 고꾸라졌다는 것이다. 희미하게 서이호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천근만근 같은 두 눈을 떠서 괜찮다고,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이미 온몸은 일어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서이호를 첫 번째로 다시 만나게 되었던 날을 기억한다. 입학한 학교에서 처음으로 먼발치에서 서이호를 봤던 그날도. 다윤은 그때 사람의 심장이 이렇게 크게 뛰다가는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서이호를 알아본 것처럼, 그도 저를 알아볼 줄 알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짝꿍이 돼서 인사를 건넸을 때,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서이호의 얼굴이 제게는 상처였다. 어차피 오래전 일이니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는 걸 알면서도.
“윤아.”
하지만 서이호가 저를 예전처럼 ‘윤’이라고 불러 줄 때면 마음이 그때와 똑같이 미친 듯이 뛰었다. 너는 알고 그러는 걸까? 네가 윤이라고 부르면 속절없이 너에게로 풍덩 빠져 버린다는 것을. 이제는 더 좋아할 수 있는 마음이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도, 더 더 깊이 빠져들게 된다는 것을.
“좋아해.”
“…….”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그래서 사실 다윤은 그때 고백했던 것을 후회하면서도 또 동시에 후회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때 얘기를 안 했더라면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터져 버렸을 테니까. 네가 윤이라고 나를 불러 주는 순간순간마다 커다란 풍선에 억지로 바람을 넣는 것처럼 그렇게 내 마음은 팽팽해져 갔으니까.
어쩌면, 내 평생 너를 사랑하지 않은 순간은 없지 않을까. 너는 이렇게까지 깊은 내 마음을 받아 줄 수 있을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면서, 도망쳐 버리는 건 아닐까. 그러면 그때는 어떡하지.
다윤은 겁쟁이였다. 처음으로 손안에 있었던 작은 행복은 물속에 넣어 놨던 얼음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두 번째 행복도 허무하게 사라졌다. 다윤이 욕심낼 행복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행복이라는 게 언젠간 손안에서 녹는 설탕과자처럼 사라질 거라면, 손을 끈적하게 더럽히며 미련만 남기고 없어질 거라면, 그냥 손안에 올려 두지 않는 게 최선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꿈들을 반복해서 꾸다가 눈을 떴을 때, 사위는 어둑어둑했다. 집인가 싶다가도 집에서 풍기는 아늑한 느낌이 아닌 어딘가 차갑고 정적인 기시감이 들어 집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했다.
서이호를 보자마자 온몸의 힘이 풀려서 쓰러졌던 것 같다. 어딘지 모르게 굳은 표정의 이호가 제게로 다가오면서 제 이름을 불렀고, 괜찮다고 말을 하려다가 의식이 흩어졌던 것 같다.
그 생각을 하자니 한숨이 쉬어졌다. 괜히 걱정만 시킨 꼴이지 않은가. 다윤은 손목에 꽂혀 있는 주삿바늘을, 그리고 그 옆에 고개를 침대에만 둔 채 누워 있는 서이호를 봤다. 또 훈련하다가 바로 온 건지 훈련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다윤이 손을 뻗어 이호의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 주려고 했을 때였다. 그 인기척을 놓치지 않고 서이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다윤과 이호의 시선이 마주쳤고, 다윤이 굳은 서이호의 얼굴에 어색하게 웃었다.
“일어났어? 거기서 그러고 자면 안 피곤하냐.”
농담하듯 던진 말인데 서이호의 얼굴이 더욱 굳었다.
“내가 피곤한 게 지금 궁금해?”
“어?”
“너 영양실조에 과로래. 스트레스 때문에 더 심해져서 몸살 온 거고.”
스트레스라니. 다윤은 머리를 긁적였다. 최근에 그다지 엄청나게 스트레스 받을 만한 일을 하지는 않았는데. 그냥 평소 시험 기간에 하는 것처럼 했을 뿐. 다윤이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자 이호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너 먼저 챙겨. 다른 사람 챙기지 말고.”
“……나 잘 챙기는데.”
“하.”
서이호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제가 괜찮아진 걸 확인하고 나니 그래도 불안은 조금 가신 모양이었다.
“근데 아까는 어떻게 온 거야?”
“세준 형한테 물어봤거든. 너 언제 끝나는지.”
피곤해 보인다고 해서 데리러 가려고 했는데, 애가 너무 아파 보여서 이제 보낼 거라길래 급하게 온 거야.
다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호의 말을 듣다가 순간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걸 2군 훈련장에서 들었다면 그렇게까지 빨리 올 수는 없었을 텐데. 혹시 훈련장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다거나…… 그랬던 걸까.
아니, 뭐 그렇다고 해도 제가 물어볼 자격이나 있을까. 저는 제 말마따나 그냥 서이호의 친구인데. 다윤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애써 드는 마음을 모르는 척하려고 했다. 서이호가 누구를 어디서 만났든, 그런 건 신경 쓰지 말자. 그러면서도 생각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어쨌든 오늘 하루는 입원해.”
“어, 됐어. 괜찮아. 이거만 다 맞고 그냥 가지 뭐.”
“최다윤.”
낮은 목소리로 화내는 듯, 서이호가 제 이름을 불렀다. 이 와중에도 낮은 그 목소리가 섹시하다고 생각하면 미친 거겠지. 다윤은 피식 웃었다. 하여간 진짜 중증이었다.
“너는 거기서 자게?”
보호자용 좁은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이호를 보며 물었다. 이호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 가라고 해도 안 가.”
누가 가라고 그랬나. 다윤은 서이호에게 집으로 가라고 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다윤이 손을 뻗어 이호의 훈련복 끄트머리를 붙잡았다. 이호가 놀란 눈으로 다윤을 쳐다봤다. 아무래도 감기 기운이 있어 더 그런 것 같았다. 어리광을 부리고 싶고, 누군가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고. 어머니 아버지에게도 한 번도 부려 본 적 없는 어리광을 서이호에게 부리고 싶어졌다.
“올라와서, 같이 자.”
이호의 눈이 깜박였다. 그러다가 순식간에 귀가 새빨개지고 몸을 벌떡 일으켜서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게 정말 커다란 강아지가 신이 난 것처럼 느껴져서 다윤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서뭉청이라는 별명을 제가 정말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이침대보다 넓은 편이긴 했지만, 어쨌든 환자용 침대도 1인용이기 때문에 두 남자가 누워 있기에 그다지 편하지 않았다. 서로 꼭 끌어안아야만 떨어지지 않을 정도. 그런데 그게 이상하게 편해서 다윤은 이호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누워 있었다.
이호는 지금 심장이 이렇게 쿵쿵거리면서 뛰다가 어느새 터져 버리는 게 아닐까 고민하고 있었다. 다윤과 그런 짓을 안 해 본 것도 아니고, 또 제가 그렇다고 경험도 없는 풋내기도 아닌데, 마치 처음으로 누군가와 맞닿은 것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진정하자, 아픈 애한테 쓰레기 같은 마음을 먹지 말자. 안 그래도 가는 팔목에 영양제를 맞느라 주삿바늘이 꽂힌 게 안쓰러운 참이었다. 이호는 제 마음 한편에 솟아오르는 욕망을 꾹꾹 내리누르면서 다윤의 정수리 위에 입을 맞추었다.
꼭 끌어안는 스킨십에도, 정수리 위에 입을 맞추는 것에도 다윤은 얌전했다. 아파서 그런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이호는 기분이 좋아서 계속 머리 위에 입을 맞췄다. 팔을 들어 허리가 부러져라 제 쪽으로 끌어안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차피 다윤이 가지 말라고 한 거니까, 그러니까 괜찮겠지. 자기 스스로 변명을 하면서 제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모습이 쓰레기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사실을 모조리 외면하고 싶을 만큼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새벽의 병원은 고요했다. 병실 문 사이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불빛에 의지하며 이호는 다윤을 살폈다. 다윤의 얼굴이 제 가슴팍에 있었기에 차마 얼굴을 살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다윤의 숨소리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그가 아픈지, 어디가 불편한 곳 없는지 계속해서 살피고 있었다.
“아버지 말이야.”
“…….”
“……나 때문에 돌아가셨어.”
잠들었다고 생각할 만큼 고요했는데 갑작스럽게 다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보다 더 낮고 작은 목소리여서 한 번에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금세 그가 한 말을 이해한 이호가 인상을 찡그리며 살짝 몸을 뗐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터라 다윤의 얼굴은 보이지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윤아.”
“나 제대하던 날, 무리하게 데리러 오시다가 그런 거거든.”
“…….”
“그때 내가 억지로라도 오지 말라고 했으면, 지금쯤 살아 계셨을 텐데. 어머니도 저렇게 쓰러지지 않으셨을 거고…….”
“…….”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다 내 잘못인 것 같다고.”
그 말끝에 물기가 서려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호는 다윤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그런 말을 하는 네가 지금 얼마나 아플지 짐작을 할 수 없어 제 마음도 덩달아 아프고 쓰라렸으니까.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하는 일은 서이호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이호는 이기적이게도 제 아픔밖에 모르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언제나 제 슬픔을 감당하기에도 벅찼으니까. 그런 이호에게 다윤은 처음 느껴 보는 경험 같은 거였다. 좋아하는 마음도, 누군가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고 느끼는 것도 모두 처음이었으니까.
“너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
어떤 말을 해야 네가 슬프지 않을까. 이호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이런 말을 하면 네가 위로가 될까. 이호는 고개를 푹 숙여 다윤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었다. 네 슬픔이 내게로 왔으면 좋겠다.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것도 너무나 신기했다.
“야, 서이호.”
“…….”
“서이호.”
툭툭, 다윤이 고개로 제 어깨를 두 번 쳤다. 이호가 그제야 고개를 다윤에게서 떼고 눈을 마주쳤다. 어둠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다윤의 눈이 웃고 있다는 건 선명하게 보였다. 다만 눈가에 맺힌 눈물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건 다윤에게 다행인 일이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이호는 다윤의 눈동자에서 기색을 읽으려 노력했다. 그 순간, 다윤이 턱을 살짝 기울여 이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호가 얼떨떨한 얼굴로 눈만 깜박였다. 다윤은 웃고 있었다. 예쁘게, 조금은 슬프게.
“고마워.”
“…….”
“한 번도 그렇게 얘기해 준 사람이 없거든. 물론 이런 얘기를 털어놓은 사람도 없었지만.”
고모의 말도, 이호의 말도 맞다. 그때 일어난 일들은 모두 최다윤의 잘못이기도, 아니기도 했다. 다만 이호처럼 말해 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다윤은 온전히 제 몫으로 책임을 떠넘기는 방식을 택했다.
아주 오래전, 서이호는 그런 방식으로 저를 위로한 적이 있었다. 물론 이호는 기억하지 못할 일이었지만. 저를 버리고 간 부모를 생각하며 울고 있을 때, 이호가 말했다.
“그 사람들이 나쁜 거야. 네 잘못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손에 부드러운 간식을 쥐여 주던 이호가 다윤의 머릿속엔 아직도 생생했다. 그때 처음으로 먹어 본 솜사탕이 그토록 달콤했다는 것도. 그때나 지금이나 너는 여전히 나를 위로해 주는구나.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을 방법을 찾지 못하게.
휙, 하고 다윤의 고개가 위로 들렸다. 이호의 손 때문이었다. 다시 두 눈이 마주쳤고, 이호의 눈빛이 진한 빛을 띠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키스해도 돼?”
“…….”
“싫다고 하면 안 할게.”
무작정 몸을 치대고 다정하게 굴 때는 언제고, 이럴 땐 또 제 책임으로 떠넘기는 게 참 얄미웠다. 씩 웃고 있는 서이호의 입꼬리가 얄미우면서도 사랑스러워서 다윤은 다시 먼저 입을 맞추었다.
조심스럽게 입술만 대고 있다가 이호의 침입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깊은 입맞춤을 나누었다. 그날 밤 이후로 처음이었지만, 달고 익숙한 느낌이었다. 입맞춤이라는 게 이토록 달콤한 거였나. 이토록 누군가의 마음을 건드리는 거였나. 다윤은 어색하지만 이호의 혀를 용기 내서 훑었다. 그러자 이호도 어딘가 한 부분이 건드려진 것처럼 혀로 다윤의 입 속 구석구석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바깥에서 누군가가 걷는 소리가 들려도 두 사람은 멈추지 않았다.
“……사귀지도 않는데, 이런 거 해도 되나.”
한참을 입맞춤 끝에 잠시 떨어진 틈에 다윤이 잠시 숨을 고르며 말했다. 너무 뒤늦은 고민이어서 다윤은 제가 말하고도 웃음이 나왔다. 다윤의 그 바람 빠진 웃음에 이호도 따라 웃으며 그런 다윤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사귀면 되지.”
다윤이 그 말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물론 서이호가 좋고, 이렇게 몸을 맞대고 있는 순간이 행복하지만 아직은 모르겠다. 다윤은 아직까지 이호의 마음을 확신할 수 없었고, 제 마음조차 꺼내기가 두려웠으니까. 겁이 많고 어리석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다윤이 망설이듯 말이 없어도 이호는 모두 다 이해한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기다릴 수 있다고 했잖아. 재촉 안 해.”
“…….”
“내가 지금 기다리는 거, 그거 예전에 네가 했던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렇지?”
이호의 말에 다윤이 피식 웃었다. 중학생 시절 혼자 속 끓이고 있던 게 생각이 나서였다. 이호가 그런 다윤을 따라 웃으며 얼굴 곳곳에 부드럽게 입맞춤했다.
“대신 나랑만 해야 해. 다른 사람이랑 하면 안 돼.”
“……할 사람이 누가 있다고.”
“최다윤이라면 세상 누가 거부해. 그러니까 안 돼. 나하고만 해야 해. 기다릴 순 있지만 그건 못 참아.”
어리광을 부리듯 고개를 마구 파묻는 서이호를 끌어안았다. 서이호에게서 이상하게 익숙한 냄새가 났다. 평소와는 다른…… 조금 더 익숙하고 흐릿한 그런 냄새. 무슨 냄새일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몸을 떼고 다시 입술을 맞춰 오는 서이호 때문에 다윤은 생각을 멈추고 다시 이호와 진하게 입맞춤을 나눴다. 마치 위로하듯 그 새벽 내내 오래도록.
결국 그러다가 두 사람은 잠이 들었는데, 다윤은 언제 이호가 간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오랜만에 꿈도 없이 아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서이호의 냄새를 맡으며, 오래도록 말이다.
* * *
“내가 너 언젠간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아픈 친구한테 그게 할 소리야?”
“아니, 진짜 언젠간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렇게 힘든 줄도 모르고 지 몸 혹사하다가 쓰러질 줄이야.”
다윤은 세아의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잔소리가 계속해서 길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세아가 제 걱정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모르게 저를 많이 신경 써 주고 있다는 것도 잘 안다. 오늘 아침에 연락했다가 병원에 있다는 제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을지도 말이다. 세아는 툴툴대면서도 은근 정이 많은 성격이었으니까. 그래서 다 제쳐 두고 한걸음에 달려왔을 세아에게 다윤은 고마우면서도 그 잔소리만큼은 오래도록 들어 줄 수 없어 그렇게 노련하게 대처하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너 진짜 퇴원하게?”
“응. 이제 영양제도 다 맞았고, 어제 잠도 잘 자서 개운해. 아침에 의사 선생님도 괜찮아지면 퇴원해도 된다고 하셨잖아.”
“그렇긴 한데…… 이왕 쉬는 거 더 쉬지 그래. 서이호 걔도 그랬단 말이야.”
“뭐라고 했는데?”
자신은 자느라고 이호에게 제대로 배웅도 못 해서 아쉬웠는데, 세아는 병원에 오다가 이호와 마주친 모양이었다.
“너 웬만하면 하루는 입원하게 두라고. 안 그러면 그냥 퇴원할 것 같아서 불안하다나. 계속 불안해서 안 가려고 하는 눈치던데, 보니까 자꾸 전화 오는 것 같아서 내가 보냈어.”
“그랬어? 고마워.”
“그나저나 걔 이제 야구 다시 하는 거야? 내년엔 또 기대해 봐도 되나.”
세아가 들뜬 얼굴로 말했다. 세아도 유니콘즈 팬이었으니 이호가 계속 야구를 하기를 기대하고 있을 터였다. 다윤이 그런 세아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며 환자복을 접어 침대 위에 올렸다. 정말로 퇴원할 기세인 다윤을 보고 세아가 말했다.
“야, 안 돼. 서이호 걔가…….”
“됐다니까. 하루면 돼, 하루면. 이제 가자.”
하지만……. 서이호 걔가 분명 하루만 같이 병실에 있어 달라고 말했는데. 워낙 단호한 태도에 뒷얘기는 차마 하지 못하고 세아가 다윤을 따라나섰다. 병원비를 지불하려 안내 데스크 앞에 선 다윤의 뒤에 세아가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최다윤 씨? 이미 병원비는 모두 지불 완료되었으니, 그냥 퇴원하시면 됩니다.”
“네?”
다윤이 당황한 얼굴로 안내 데스크에 서서 혹시 잘못된 건 아닌지 물었지만 직원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이미 지불이 완료되었으니 그냥 퇴원하시면 된다는 말.
“걔가 다 내주고 간 거야? 진짜 지극정성이다. 보니까 일 인실이던데 비쌀 거 아니야. 하긴 뭐, 걔 연봉이 얼만데, 이 정도면 껌인가.”
“…….”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세아와는 달리 정작 다윤은 발걸음이 무거워져서 걸음이 자꾸 느려졌다. 서이호에게 자꾸 빚지는 게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이 모든 걸 다 갚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솔직히 막막했다. 병원비부터 시작해서 심리적인 위로까지.
“야, 뭘 그렇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어! 얼른 걸어, 얼른. 나 배고파. 점심 먹으러 가자.”
“어, 응. 그래. 너 병문안 와 줬으니까 내가 사 줄게. 뭐 먹고 싶어?”
“너 몸보신 좀 시켜야겠다. 요 앞에 삼계탕 집 있던데 거기나 가자. 내가 살게, 내가. 아픈 애한테 뭘 얻어먹겠니.”
세아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다윤의 등을 떠밀었다. 다윤이 아니라고, 이럴 땐 제가 사야 한다며 완곡히 고개를 저어도 막무가내였다. 하여간, 남에게 베푸는 건 한없는 놈이 제가 베풂을 받는 건 유독 어려워했다.
그러니까, 저라도 이럴 때 좀 사 주고 싶었고, 무언가를 받는 태도를 알려 주고 싶었다. 제 몸 아픈 줄도 모르고 혹사시켰던 친구에게.
“이 집 진짜 맛있다. 국물 이렇게 구수한 거 처음이야.”
“…….”
“다윤아.”
“…….”
“최다윤!”
“어?”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던 다윤이 그제야 눈을 들어 세아를 봤다. 다윤의 앞에 놓인 그릇 위 음식은 먹은 건지 만 건지, 하나도 비워져 있지가 않았다.
“뭐가 그렇게 심각해. 밥은 제대로 먹지도 않고.”
제가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나. 괜히 병문안까지 와 준 세아를 두고 딴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이 미안해 다윤이 멋쩍게 웃었다. 한편 세아는 그런 다윤의 생각을 들어야겠다는 듯, 턱을 괴고 다윤을 빤히 쳐다봤다.
“뭘, 얼른 먹어.”
“난 거의 다 먹어 가거든? 지금 안 먹은 건 너잖아, 너. 몸보신시키려고 온 건데 나만 아주 배 터지게 몸보신했네.”
다윤이 그에 피식 웃으며 앞에 놓인 고기를 젓가락으로 뜯었다. 그러다가도 또 한 생각에 머물러서 동작이 멈췄다. 다윤이 하고 있는 생각이란, 서이호에 관한 거였다.
최다윤은 서이호에게 줄 수 있는 게 없는데, 자꾸 받는 거만 늘어가고 있다는 게 가장 큰 고민이었고, 무엇보다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커져 가고 있는 최다윤의 마음이 두 번째 고민이었다. 욕심이 자꾸 늘어난다는 것. 서이호와 조금 더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다는 것. 친구를 넘어서, 어제 했던 키스를 정말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사이가 되고 싶다는 것.
“사귀면 되지.”
서이호는 그렇게 쉽게 말했는데 저는 모든 게 뭐가 이렇게 어려울까. 어쩌면 그건 살아온 환경 때문일 수도 있다. 부모라는 관계도, 고아원에서부터 시작한 친구라는 관계도 모두 다 다윤에게는 어떻게든 노력해서 얻어야 하는 결과물이었다.
그 무엇도 다윤에게 쉬운 게 없었다. 그러니까 어쩐지 최종 보스처럼 느껴지는 연인이라는 관계는 더욱 두렵게 느껴졌다. 두 사람의 무게는 얼마나 다를까. 그게 가늠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무서웠다.
“다윤아, 나 궁금한 거 하나만 물어봐도 돼?”
세아가 불쑥 다윤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다윤이 눈을 깜박이며 제 앞에 있는 세아를 봤다. 그녀는 아까보다는 진지해진 얼굴로 평소와 다르게 목소리를 조금 깔고는 물었다.
“……너 서이호, 걔 좋아하지.”
“……어, 어?”
당황해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세아는 다윤의 그런 반응에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뭐, 전부터 알고 있었어.”
“……언제부터.”
“너네 집에서 같이 술 마실 때부터.”
세아의 눈치가 빠른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다윤은 순간 온몸의 힘이 탁 풀리는 걸 느꼈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애한테 이제 와서 아니라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다윤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로 제가 서이호를 좋아하는 게 티가 났나 싶기도 했다.
“사실 물어보고 싶었던 건 이게 아니라…… 서이호 걔도 너 좋아해?”
이번에 다윤은 아까보다 더욱 놀란 듯 헛기침을 했다. 하마터면 마시던 물을 뿜을 뻔했다. 다행히 그런 참사는 피했고, 몇 번의 헛기침만 나올 뿐이었다. 완전히 홍당무가 된 다윤의 얼굴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세아의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나.”
“……그건 또 어떻게, 쿨럭, 알았어.”
“모를 리가 있냐? 걔도 눈에서 그렇게 꿀이 떨어지는데. 솔직히 보면 네가 걔 좋아하는 것보다 걔가 너 좋아하는 게 더 티 나더라. 둘이 그래서 사귀는 거야? 나 그런 데 편견 없어, 걱정 마. 말해 봐.”
어딘지 신나 보이는 세아가 다윤의 어깨를 툭툭 두어 번 쳤다. 다윤이 그런 세아에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뭐? 왜? 너도 걔 좋아하고, 걔도 너 좋아하는데 왜 안 사귀어? 아, 설마 넌 얘기 안 했어? 좋아한다고?”
“옛날에 얘기했어, 그건. 걔도 이미 알고 있고.”
이미 키스도, 이런저런 일을 하기도 했고. 뒷얘기를 꺼내진 않았지만 생각해 보니 저도 이 상황이 우스워서 얘기를 하다가 피식 웃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더 이상하게 보이려나 싶기도 하고.
“근데 왜 안 사귀는데?”
“……서이호, 나한테는 엄청 중요한 사람이라서.”
“……그래서?”
“음, 그래서…… 굳이 연인이 돼서 끝을 보는 것보다는 지금의 관계가 더 좋아서. 친구는 오래오래 평생 함께할 수 있잖아.”
다윤이 그렇게 말하고 세아를 쳐다봤다. 세아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윤의 앞으로 바짝 몸을 들이댔다.
“너 웃긴다. 너 오이한테 감자라고 이름 붙이면 그게 감자가 되는 줄 알아? 호박한테 수박이라고 이름 붙이면 그게 수박이겠냐고. 둘 다 좋아하면서 친구라고 이름 붙이면, 그게 진짜 우정이 될 거라고 생각해?”
“…….”
“다윤아, 네가 워낙 겁이 많은 건 알겠지만…… 시작도 안 해 보고 끝을 두려워하고 있으면 어떡해.”
“……네가 뭘 알아.”
세아의 말에 다윤이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한 번도 누군가에게 지어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화가 났고, 슬퍼졌다. 세아의 말대로 겁이 많은 건 맞지만 그건 세아가 제 상황을 겪어 보지 못했기에 하는 말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계속 지속되는 행복을 가져 본 적 없어. 처음으로 좋아했던 사람도, 가족도, 하나씩 그렇게 사라져 버리는데, 그러고 나면 혼자 힘든 건 나고. 날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그게 널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끝이 무섭다고, 아예 포기해 버리는 게?”
세아의 말에 다윤은 할 말을 잃어 시선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순간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의 분위기가 낮게 가라앉았다. 세아가 작게 한숨을 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나는 몰라. 아버지 갑자기 돌아가시고, 어머니 병상에 누워 계시는 거 보는 네 심정도 모르고,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네가 왜 그렇게 사람 만나는 거 두려워하는 건지, 누구에게든 버림받지 않으려고 안간힘 써 가면서 다정하게 구는 건지 아무것도 몰라.”
“…….”
“그런데 적어도, 이거 하나만은 알거든. 내가 몇 년간 본 너는 한 번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는 거. 요 근래 들어 그래도 자주 웃었다는 거 알아?”
세아의 말에 다윤이 결국 피식 웃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몇 년간 저는 한 번도 최근처럼 웃은 적도, 마음을 놓고 산 적도 없었다.
“누가 너더러 행복하지 말래? 누가 옆에서 멱살이라도 잡고, 지금 일어난 일들 다 네 탓이라고 욕하디? 그런 인간 있으면 나오라 그래. 내가 다리몽둥이 부러뜨려 버리게.”
세아의 격한 말에 다윤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푸핫, 하고 큰 소리로 웃는 다윤에 순간 힘이 빠진 세아도 진지한 얼굴을 풀고 웃었다.
“웃으라고 한 얘기 아니거든? 내 얘기 똑바로 새겨들어, 최다윤. 어? 좋아하면 좋아하는 대로 마음 숨기지 말고 그냥 가. 뭘 그렇게 고민이 많아. 그러다가 죽기 전에 후회하지 말고.”
“그래, 그래.”
“내 말 알아들은 거야? 어?”
“알았어. 알았다니까.”
여전히 의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는 세아에게 다윤은 안심시키듯 계속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상하게 세아의 그 울분 찬 말들이 다윤에게 오래도록 맴돌았다. 어느 한순간 얽매여 있었던 다윤의 족쇄를 세아의 말들이 툭, 하고 풀어 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역시, 밥은 내가 살게.”
“뭔 헛소리야. 내가 훨씬 많이 먹었는데, 내가 사야지.”
“너한테 고마워서 그래. 그냥 얻어먹어.”
다윤이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든 아등바등 노력해서 얻은 결과물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세아를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세아 또한 제게 언젠가 불쑥 다가왔던 행운 같은 사람이니까.
그런 행운을 제 발로 뻥 하고 차 버릴 셈인가. 중학생 때의 최다윤처럼? 내내 다윤은 이호에게 고백한 걸 후회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닌 것 같았다. 이호에게서 도망쳐 버린 게, 그때 다시 한번 정식으로 얘기하지 못했던 게 더 후회가 됐다.
또다시 후회하긴 싫었다. 세아의 말대로 그냥 마음껏 좋아해 보고 싶었다. 처음으로 욕심을 내고 싶어졌다.
세아는 오늘은 그냥 집에 가서 쉬라고 말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주말엔 다윤이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에게 가는 일.
혹시나 손목에 있는 주삿바늘 자국을 들킬까 봐 밴드도 붙이고, 옷으로 모두 꼼꼼히 가려 놓고 다윤이 병원으로 들어섰다. 병실로 들어서니 역시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문 쪽으로 몸을 향해 있던 연자가 다윤을 보고 활짝 웃었다.
“다윤아.”
“엄마.”
두 사람이 꼭 마주 안았다. 못 만난 시간이 일주일밖에 되지 않는데 이상하게 오래도록 떨어진 느낌이라 다윤은 애틋하게 연자를 끌어안았다. 일주일 사이 또 얼마만큼의 엄마가 사라졌을까. 그게 두 손 가득 느껴져서 다윤은 마음이 지끈하고 아팠다.
“다윤아, 왜 이렇게 말랐어.”
다윤은 연자의 말에 피식 웃었다. 저는 엄마가 점점 말라 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픈데, 엄마는 제 걱정을 하고 있었다.
“마르긴요. 방금까지만 해도 맛있는 거 먹고 왔어요.”
“잘했어. 잘 먹어야 건강하지.”
맛있는 걸 먹고 왔다는 말에 기분이 좋은 듯 엄마가 씩 웃었다. 그 웃음이 한없이 따듯해서, 그냥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웃음이라서 다윤은 저도 모르게 마주 웃었다.
“오늘은 이호랑 같이 안 왔어?”
“이호요?”
뜬금없는 말에 다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번 주에 한 번 같이 온 것 때문에 그러시나. 다윤이 고개를 저으려는 찰나, 다음에 나온 연자의 말에 순간 동작을 멈췄다.
“일주일 내내 혼자 오더니 주말에는 또 따로 오나 해서.”
“……네?”
“이호 말이야. 이번 주 내내 여기 왔었거든. 당연히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몰랐구나.”
정말 몰랐기에 두 눈만 멍청히 깜박였다. 그동안 귀가 시간이 늦어졌던 것도,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몸에서 희미하게 익숙한 냄새가 났던 것도 다 그것 때문이었을까.
얼마만큼의 무게인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연자의 얘기를 듣는 순간 대충 알 것 같았다. 서이호의 마음도 그렇게까지 가볍지는 않으리라는 것.
……아니, 어쩌면 최다윤과 비슷한 무게일지도 모른다는 것 말이다.
연자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바로 지금이었다. 아들 다윤과 함께 짧게 병원 산책을 하는 일. 다윤은 워낙 저를 챙기는 것에 도가 튼 아이니, 이런 얘기를 하면 더 책임감을 느낄 게 분명해 한 번도 얘기해 본 적은 없었지만, 연자에게 지금만큼 즐거운 순간은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은 나란히 팔짱을 끼고, 병원 한 바퀴를 돌았다. 그리고 병원 내 카페에 들어섰다. 조금 더 밖에 머무르고 싶다는 제 말에도 다윤은 추워서 안 된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자신에게 목도리와 장갑, 그리고 코트까지 양보해 준 아이가.
연자는 그런 다윤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아이답지 않고 어른 같던 이 아이가, 어느새 자라 이토록 큰 사람이 되어 있는 게 새삼 신기한 탓이었다.
연자가 마실 따듯한 캐모마일 티 한 잔과 다윤이 마실 커피를 주문하고 있는 다윤을 연자는 자리에 앉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말은 하지 않아도 요즘 다윤이 피곤해하고 있다는 것 정도야 잘 알고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다윤은 자신의 아들이니까.
연자는 다윤에게 두었던 시선을 떼고 창밖을 바라봤다. 앙상한 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몸으로 몇 번의 계절을 건너고, 또 건넜는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결국 끝에 닿는 생각은 하나였다. 자신의 마지막 계절은 겨울이 될 거라는 생각. 그것도 끝자락이 아닌 한복판에서 끝이 날 거라는 생각.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날이면, 억지로 독한 약을 삼켜야 하는 날이면 그런 생각은 어김없이 연자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제가 삶에 미련이 남았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자신은 꽤나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남자를 만났고, 자신에게는 너무나 큰 축복과 마찬가지인 다윤을 만났고, 하나뿐인 오빠 덕분에 부족하지 않게 요양도 받으며 마지막을 정리하고 있는 삶은 누가 본다면 호화로운 삶에 가까울 테니까.
다만 연자가 걱정하는 것은, 자신의 하나 남은 아들이었다. 약속한 것이 있었는데,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자꾸만 마음이 아리고, 밤중이면 다윤의 생각에 눈물이 흐르곤 했다.
“엄마라고 부르렴, 다윤아.”
“…….”
“이제 절대 너를 혼자 두지 않을게.”
그렇게 말하자 굳어 있던 어린 다윤의 얼굴이 희미하게 풀렸다. 그 얼굴이 새벽마다 반복되었다. 어쩌면 너를 혼자 두게 될지도 모른다. 앞으로 평생을. 아마도 지금도, 너를 혼자 두고 있는 걸지도.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아픈 몸 때문에 신을 원망하지 않았지만 다윤을 생각하면 신을 원망하고 싶어졌다. 왜 또 저 아이에게 가혹하게 구시냐고. 부디 행복하게 해 달라고 말이다.
직접 낳지 않으면 누군가는 그만큼의 애정을 품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연자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연자에게 다윤은 직접 배 아파 낳은 아들보다 더 소중한 아이였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아이였다.
“여기 드세요.”
다윤이 연자의 앞에 앉아 잔을 건넸다. 뜨거우니 조금만 더 식혔다가 드시라는 말과 옆에 놓인 담요를 집어 자연스럽게 연자의 어깨와 무릎 위를 덮는 행동이 모두 다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연자는 순간 제 무릎 위를 떠나는 다윤의 손을 붙잡았다. 그에 의아한 듯 다윤이 연자를 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연자는 씩 웃었다. 그에 다윤도 마주 웃었다. 사랑스러운 아들의 웃음은 우울했던 연자의 마음을 깨끗이 씻어 주었다.
“요즘 이호랑 같이 지내고 있다면서. 이호가 그러더라.”
“아…….”
연자의 말에 다윤이 잠시 부끄러운 듯 말이 없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내내 찾아온 이호에게서 연자는 어떤 감정 같은 것을 느꼈다. 그것은 엄마의 촉이기도, 혹은 바람 같은 거기도 했다. 혼자 남을 다윤이 쓸쓸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착각일지도. 그것만은 아니기를 바라면서 연자는 다윤의 얼굴에 잠시 스쳐 가는 어떤 감정 같은 것을 포착하려 애썼다.
“그냥…… 집이 조금 쓸쓸하기도 해서 제가 계속 있으라고 말했어요. 엄마 퇴원하시면 그때는 다시 돌아갈…….”
“아니야. 그러지 마, 다윤아.”
연자의 말에 다윤이 눈을 크게 떴다. 연자는 그 의문이 담긴 표정에 씩 웃었다.
“둘이 너무 좋아 보여. 중학교 때도 그랬지. 다윤이 너는 친구라고는 도통 데려오지 않아서 내심 걱정을 했는데, 친구라고 이호를 데려와서 엄마가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연자는 그때를 회상하듯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이다운 행동들과 칭얼거림이 전혀 없었던 다윤은 자신이 마치 이 가족의 진정한 일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런 다윤의 행동이 연자는 안타까우면서도 그런 다윤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몰랐던 때가 있었다. 그저 조건 없는 사랑을 주는 것밖에는 몰랐던 그때.
그런 연자에게 이호라는 존재는 다윤이 자신의 안에 뿌리내렸다는 걸 알려 주는 증명 같은 거였다.
“네가 온전히 마음을 내리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지만 다윤아, 그래도 엄마는 그때 네가 조금이라도 편해졌다는 생각에 무척 기뻤어.”
다정한 그 말에 다윤은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눈만 껌벅였다. 엄마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으니까. 항상 자신의 앞에서는 근심이나 걱정 같은 것을 떨치려고 노력한 그녀가 말이다.
“이제 엄마보다는, 이호가 더 윤이 너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순간 다윤은 놀라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엄마가, 서이호와 자신의 관계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다. 전혀 예상도 못 한 일이었다. 혹시 그 일주일 사이 서이호가 얘기를 꺼냈나 싶은 생각도 문득 들었지만, 그렇지는 않았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이호는 아픈 엄마에게 갑자기 그런 얘기를 상의도 없이 함부로 할 사람이 아니니까.
“엄마 얘기가 맞지?”
“……그게…….”
“걱정 마, 다윤아. 타박하는 게 아니야. 이호 좋은 아이야. 엄마가 사람 보는 눈이 있잖아.”
연자가 그렇게 말하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다윤은 저도 모르게 그런 엄마의 시선을 피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참았다. 저는 용기가 없어 제대로 먼저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데 엄마는 언제 제 마음을 알아차리고 먼저 따듯하게 다가와 주시는 걸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다윤은 그 고아원에서 가장 숫기가 없는 아이였다. 항상 구석에 앉아 있던 다윤에게 먼저 다가와 준 것도 연자였다. 엄마는 그때처럼 지금도 먼저 제게 다가와 손을 내밀고 계셨다. 늘 따듯한 그 웃음을 지으면서.
“……네, 맞아요.”
결국 다윤은 수긍했다. 저 이호가 좋아요.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어요.
다윤은 천천히 얘기했다. 아주 오래전에 이호를 만났던 이야기, 중학생 때 이야기, 그리고 겁이 많아 도망쳤던 이야기까지 전부 다. 차근차근 엄마는 그저 다윤의 말을 들어 주고 있었다. 끝까지 다 얘기를 하고 다윤이 꾹 입을 다문 채 연자를 보니 연자의 입가엔 활짝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정말 기쁘다.”
얘기를 다 듣고 나서 연자가 가장 먼저 꺼낸 말이 그거였다. 연자는 정말로,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아들의 커밍아웃을 맞는 부모의 일반적인 태도와는 완전히 달랐다.
“다윤아, 네가 그 얘기를 엄마한테 해 줘서 너무 고마워.”
“…….”
“항상 그랬잖아. 힘든 일이 있으면 너는 무조건 숨겼지. 어른스러운 아이라고 주변에선 그랬지만, 엄마는 그게 항상 마음에 걸렸어.”
엄마는 연신 말했다. 고맙다고. 얘기해 줘서 정말 고맙다고. 정작 고맙다고 백 번을 말해도 모자란 사람은 저인데.
다윤은 자리를 옮겨 엄마의 옆으로 갔다. 그리고 그녀의 앙상한 어깨를 끌어안고 고개를 묻었다. 그 언젠가 저를 먼저 안아 주었던 그녀를 이번엔 다윤이 끌어안았다. 연자는 손을 들어 다윤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음엔 둘이 와, 응?”
“……네.”
“어휴, 우리 아들.”
우리 아들, 그 두 단어가 얼마나 자신에게는 벅찬 말인지 그녀는 아마 모를 것이다. 이렇게 따듯한 품속조차. 저에게 주어진 이 모든 사랑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를.
다윤은 한참을 그렇게 연자의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꾹 참아 냈다. 빨갛게 달아오른 두 눈가가 그가 얼마나 울음을 참아 내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엄마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엄마도, 세아도, 어쩌면 다른 사람들 모두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저만 모르고 있었다. 한 발자국만 용기 내면 될 문제였다는 것을. 애초부터 이 마음은 숨길 것이 아니라 그냥 가는 대로 내버려 두면 될 일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늘 저라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주변에 이토록 따듯한 사람들이 있었다. 조금만 다가가면 다독이며 안아 주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제 곁에 있으니 그 무엇도 바랄 것이 없었다.
엄마가 잠이 든 것까지 보고 나서야 다윤은 다시 병원을 나왔다. 추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지만 이상하게 하나도 춥지가 않았다. 어느새 저녁이 다 된 바깥은 푸른 어스름을 머금고 있었다.
병원을 나오자마자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병원에 있는 사이에 서이호에게서 연락이 몇 통이 와 있었다. 다윤은 그것을 보고 웃으며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을 했다.
신호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전화 너머로 서이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윤아?
들뜬 목소리. 다윤은 그 목소리에 피식 웃었다. 아, 오랜 시간 주인과 떨어진 강아지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아. 그런 생각에 자꾸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 왜 하루 종일 연락이 없어. 걱정했는데. 몸 아픈 건 괜찮아? 병원에 전화해 봤는데 벌써 퇴원했다 그래서……. 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
“이호야.”
다윤의 목소리에 따발총 같은 서이호의 목소리가 순간 끊겼다. 전에는 이호라고 불러 달라며 조르더니, 정작 제가 먼저 다정하게 이호라고 부르니까 이렇게 아무 말이 없다니.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서이호의 얼굴이 머릿속에 선명했다.
- 어, 어? 어……. 윤아, 그 혹시 무슨 일…….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이호야.
다윤은 그 말을 하고 다정히 웃었다. 여전히 찬 바람이 얼굴 위를 아프게 때렸지만 이상하게 따듯했다. 휴대폰 너머로 당황하고 있을 서이호 때문에, 혹은 평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뛰고 있는 심장 때문에.
도망치지 않기로 했으니까. 감정을 숨기지 않기로 했으니까. 다윤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감정을 털어놓는 건 어려운 일이었지만, 다윤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첫 발자국이었다.
몇 분 정도가 지났을까. 병원 근처에서 멈춰 선 이호의 차가 보여 다윤은 그쪽을 향해 걸었다. 보고 싶다는 말에 다짜고짜 어디냐고 물어 오더니 금방 전화가 끊겼었다. 곧 오겠지 싶어 기다리고 있던 게 몇 분 되지도 않아서 근방으로 차 한 대가 급히 들어섰다.
병원 주차장에 아무렇게나 차를 세워 두고, 그 안에서 서이호가 나왔다. 제가 가고 있으니 굳이 나올 필요 없는데. 다윤이 그런 얘기를 하며 이호에게 다가섰을 때였다.
“왜 그렇게 급하게…….”
그런 다윤의 팔을 잡은 이호가 아프지 않게 다윤을 아무도 관심 없는 기둥 쪽으로 끌었다. 그리고 다윤을 훅 끌어안았다. 갑작스럽게 저를 안은 서이호의 온몸이 잘게 떨리고 있음을 다윤은 느낄 수 있었다.
“……네가 보고 싶다고 그러니까 심장이 막 터질 것 같았어.”
다윤이 작게 웃자 웃지 말라는 듯 이호가 다윤의 어깨와 볼에 대고 살며시 머리를 부볐다. 그 부드러운 감촉이 좋아서 다윤은 손을 뻗어 이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안으로 부드러운 서이호의 머리카락이 스치고 지나가는 감각이 좋았다.
“내가 그렇게 좋아?”
“응.”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서이호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윤은 살며시 몸을 뒤로 물렸다. 한 발자국 멀어지면 두 발자국 다가오던 서이호. 늘, 언제나 그랬듯이 같은 선 위에서 머무르고 있던 서이호.
어쩌면 최다윤이 조금만 더 용기를 냈다면, 겁을 먹지 않았더라면 더 금방 닿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아쉬움이 들어서 다윤은 조금 미안해진 얼굴로 이호의 볼을 쓰다듬었다. 서이호의 시선이 제 입가에 가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다윤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해도 돼.”
“……어?”
“어차피 안 보이잖아, 아무한테도.”
늦은 밤 병원엔 인적이 거의 없었고, 두 사람은 기둥 뒤에 숨었기 때문에 더더욱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을 터였다. 다윤의 말에 이호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런 이호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린 다윤이 먼저 입술을 가져다 댔다. 얼떨떨한 얼굴로 가만히 있던 이호도 조금 다급하게 다윤의 입 안을 먼저 헤집었다. 먼저 다가온 입술을 조금 다급하게 물고,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따듯하고 온전한 느낌. 키스 하나만으로도 이런 기분을 느낄 수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혀가 입천장을 훑고, 다윤의 혀를 부드럽게 감았다. 그 감각들이 온통 기분이 좋아서 다윤은 입술을 마주하고 있는 상태에서 웃었다. 그 때문에 약간은 여유로워졌던 입맞춤이 더 다급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 후에야 마치 한 사람의 것처럼 맞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그 와중에도 얼굴 곳곳에 서이호의 입술이 마치 도장처럼 떨어졌다. 마치 그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다는 동작이었다.
“아, 윤아…….”
이호가 다윤을 끌어안고 탄식하듯 제 이름을 뱉었다. 그에게서 나오는 제 이름이 좋았다.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신음처럼 나오는 목소리도 너무나 섹시했다. 다윤은 쿵쿵 뛰는 이호의 심장을, 그 속도와 비슷한 속도로 뛰는 제 심장을 온전히 느끼며 웃었다.
“미치겠네. 어떻게 이렇게 좋지…….”
이호가 중얼거리는 말에 다윤은 결국 소리 내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다윤의 웃음소리에 이호가 괜히 심통 난 목소리로 웃지 말라며 다윤의 머리 위에 제 턱을 올리고 부비적거렸다.
“운동할 때는 무엇보다 평정심이 중요해. 그래서 늘 모든 상황에서 덤덤하려는 훈련을 스스로 했는데, 요즘만큼 심장이 크게 날뛴 적이 없어.”
“그럼 그거 안 좋은 거 아냐?”
“음, 내가 좋으면 그만 아닌가?”
이호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참나, 이젠 대놓고 저렇게 귀엽게 구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윤이 이호의 볼을 꾹 잡았다가 놓았다가를 반복했다.
“나한텐 야구보다 최다윤이 더 중요하고 소중해.”
입에 발린 말이라고 해도, 그게 그냥 가볍게 하는 말이라고 해도 이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런 말을 하는 너를 사랑하면 되는 일 아닌가, 싶어서. 그런 말들을 고이고이 모아 간직하면 될 일이었으니까. 다윤은 그런 생각을 하며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나서 표정을 굳히고 이번엔 이호의 얼굴을 조금은 아프게 꼬집었다.
“그러고 보니까, 너…….”
“응?”
“누가 막 그렇게 운전하래.”
제 타박에도 이호는 웃었다. 웃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고, 그러다가 사고 날 수도 있다고 말해도 이호는 해맑게 웃으며 제 얼굴을 다윤의 얼굴에 마구 비볐다.
“네가 보고 싶다고 하는데, 그럼 어떡해.”
“아무리 그래도. 조심해.”
“네에.”
“흘려듣지 말고.”
다윤의 진지한 얼굴에 이호도 덩달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 사고를 무엇보다 무서워하는 다윤이었으니까. 앞으로 최다윤을 생각해서라도 더 안전 운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오늘 무슨 일 있어?”
이호의 물음에 다윤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이호를 올려다봤다.
“갑자기 보고 싶다고 그러니까.”
“……아.”
“아닌가? 최다윤은 항상 날 보고 싶어 했나?”
이호는 다윤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는 잔뜩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런 이호를 빤히 올려다보다가 다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이호의 얼굴에 있던 장난스러운 웃음이 사라졌다.
“응, 맞아.”
“…….”
“난 너 늘 보고 싶어 했어. 늘 그 상태야.”
다윤의 말에 이호가 바보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잔뜩 달아올라 가지고는 어디를 보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 서이호는 제 마음은 아무렇지 않게 잘도 말하더니, 다윤이 그러니까 완전히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눈에 확 보였다.
“……오, 오늘 무슨, 내 생일이야?”
말을 더듬는 이호를 보며 다윤이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다윤이 웃으면 늘 따라 웃던 이호는 이번엔 웃지 않았다.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너 생일 여름이잖아.”
“……그, 그렇지.”
“내가 이런 말 하는 거 싫어?”
좀 많이 당황스러운가? 다윤이 그런 생각을 하며 이호에게 물었다. 이호는 극구 부인하듯 고개를 마구 저었다. 얼마나 부인하고 싶은지 손까지 마구 휘젓고 있었다.
“아, 아니! 너무 좋아서…….”
너무 좋아서 이래도 되나 싶어서…….
이호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집에 가자. 얼른 집에 가야겠어.”
번쩍, 고개를 든 이호가 다윤의 손을 붙잡았다. 다급하게 제 손을 붙잡는 이호의 손을 다윤은 거부하지 않고 가만히 따랐다. 따듯하고 거칠한 손이 차가운 다윤의 손과 만나 부드러운 온기를 주고받았다.
“진짜 안 가도 되는데.”
“안 돼. 시호 누나가 부르시는데, 가야지.”
아까까지만 해도 세상 모든 행복을 다 끌어안은 것처럼 웃던 서이호가 불퉁한 얼굴로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다윤은 그런 이호를 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하여간, 서이호는 동갑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저보다 어린 것 같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두 사람이 잔뜩 불이 붙었을 무렵 이호에게 전화가 왔다. 잠깐 집으로 오라는 시호의 연락이었다. 물론 전화가 오지 않았다면 다윤도 이호에게 저희 집으로 가자고 얘기했을 것이었다. 하고 싶은 얘기는 많았고, 다윤도 이호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나는 안 가도 되잖아.”
“너 안 가면 나도 안 가.”
무슨 헛소리인가 싶어서 다윤이 피식 웃었다. 저는 그냥 가까운 지하철역에 내려 달라고 말해도, 이호는 막무가내로 차를 시호가 있을 이호의 집으로 돌렸다. 물론 안 가도 된다는 말은 예의상 한 말이었다. 다윤도 이호의 집이 궁금하긴 했으니까.
누나랑 산다고 그랬다. 고등학교 때부터 본가를 나와서 그렇게 산 지 거의 5년이 넘었고, 최근엔 독립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집을 알아보고 있었다고 했다. 서이호가 고등학교 시절에, 그리고 20살 무렵에 살던 그 집에 방문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들떴다.
“오늘 주말인데 훈련 다녀온 거야?”
이호의 집을 곧 보게 될 거라는 두근거림을 애써 감추면서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이호가 다윤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1군 감독님 뵙고 왔어.”
“아…….”
“다음 주부터는 1군으로 복귀야.”
“잘됐다.”
다윤은 진심으로 기뻐서 활짝 웃었다. 정말로 이제 이호가 야구에 완전히 마음을 다시 붙인 모양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너무나 기뻤다. 다가오는 다음 프로야구 시즌에 또다시 멋지게 그라운드에 서 있는 서이호를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과 기대감이 들었다.
“윤아, 근데 오늘 진짜 무슨 일 있었어?”
방금보다 진지해진 목소리로 이호가 물었다. 어린애 같을 거면 그냥 한결같이 그럴 것이지 저렇게 목소리를 깔고 진지하게 물어 올 때마다 다윤은 서이호가 저보다 훨씬 큰 사람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 차이 때문에 서이호가 좋은 거기도 했지만.
“별일 없었는데.”
다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이호는 신호에 걸린 사이 흘끔 다윤을 쳐다봤다.
“네가 나 몰래 우리 엄마 병원에 다녀갔다는 얘기 들은 거밖에.”
차 안이 어두워서 오로지 바깥 불빛으로만 서이호를 볼 수밖에 없었는데, 바깥 네온사인이 빨갛게 변했나 싶을 정도로 이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까부터 제 말에 자꾸만 얼굴이 빨개지는 게 너무나 귀여웠다. 제가 귀여운 걸 알고 일부러 저러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드, 들었어? 어머님한테?”
“응.”
뭘 또 저렇게 당황하고 그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뻔뻔하게 한 일이 아닌가. 다윤이 비스듬히 턱을 돌려 서이호를 보고 있었다. 들킬 줄 몰랐다는 듯이 서이호가 안절부절못하며 손을 핸들에서 뗐다 붙이기를 반복했다.
“별 뜻은 없었어. 그냥 오랜만에 뵈니까 좋기도 하고, 또…….”
아무래도 다른 뜻이 있었던 모양이다. 엄마가 말하지 않은 얘기. 다윤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이호를 보자, 이호가 흘끗 다윤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차는 멈춰 서고 이호가 먼저 내렸다.
“다 왔다.”
“왜 말 안 해. 또 뭐?”
토마토 서이호. 그 별명이 어울릴 만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귀 끝도 그렇고. 원래 저렇게 부끄러움이 많은 놈이었나. 그 변화가 솔직히 좀 재밌어서 다윤은 집요하게 물었다. 커다란 서이호의 등이 툭 하고 멈춰 섰다. 뒤를 따라가던 다윤이 그런 서이호의 등에 아프지 않게 머리를 부딪쳤다.
“그게…… 어머님이 네 예전 얘기 해 주시는 거 좋아서.”
“뭐?”
“어릴 때 얘기 해 주셨거든. 그 얘기 들으려고 매일 갔어.”
다윤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 와중에도 부끄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이는 서이호의 주변으로 사랑스러운 기운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게 가능한가? 거의 190cm에 가까운 운동선수가 이렇게 귀여워 보이는 게?
그러니까, 처음엔 그냥 오랜만에 만난 다윤의 엄마가 반가워서 다시 찾아가게 된 것이고, 엄마는 그런 이호를 붙잡고 제 어린 시절 얘기를 했으며, 그 얘기를 들으니 좋아서 계속 찾아가게 됐다. 그게 지금 부끄러워서 얘기하기 꺼렸던 거고.
귀여워, 귀여운 놈.
충동적이었다. 다윤이 확 이호의 목을 끌어당겼다. 어차피 이곳은 이호의 단독 주택 차고였고, 보는 사람도 없으니까. 물론 스킨십을 하기에는 위험한 공간이긴 했지만 그런 건 다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서이호와 닿고 싶었다. 여태까지 대체 어떻게 참았나 싶을 정도로.
처음엔 눈을 크게 뜨고 당황한 듯한 이호가 불이 붙어서는 더 다윤에게 다급하게 달라붙었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하게 다윤의 혀를 얽고, 제 입 안으로 질척하게 빨아들였다. 다윤은 어색하게 그런 이호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넣고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 작은 행동이 서이호의 마음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었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누나고 뭐고, 두 사람에게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아랫도리가 뻐근하게 달아오를 만큼 서로의 타액을 나누고 있을 때쯤이었다.
“……너네 뭐 하니.”
두 사람 근처에서 갑작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서이호가 온 소리를 듣고 나온 시호가 들고 왔던 카디건을 떨어뜨리는 소리였다. 그 소리에 다윤은 화들짝 놀라 이호를 밀어냈는데 이호는 시호 따위 안중에도 없이 다윤의 얼굴 곳곳에 아쉬운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차고의 겨울 공기가 서늘했다. 물론 그 공기에 서이호는 속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채 다윤을 끌어안고 얼굴을 부비적대고 있었다.
시호의 얼굴엔 황당하다는 표정이 어렸다. 저 미친놈은 대체……. 저걸 동생이라고 해야 할지, 긴 한숨을 쉬면서 한탄했다.
한마디로 이건 가시방석이었다. 그 어떤 가시방석보다 더 뾰족한. 넓다 못해 공허하기까지 한 거실에 고요하고 서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다윤은 먼저 말을 꺼내려다가 몇 번을 다시 삼키기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할 말이 없었다. 먼저 달려든 것도 저였으니까. 얼마나 놀라셨을까. 차마 가늠도 못 할 정도였다. 물론 다윤만이 속으로 끙끙 앓고 있을 뿐, 이호는 평온했다. 누나에게 딱히 숨길 생각도 없었고, 기왕 이렇게 된 거 잘됐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사귀고 나서 얘기를 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둘 사이는 거의 사귀는 것과 마찬가지기도 했고.
시호는 제 앞에 있는 두 사람을 봤다. 두 사람 다 생각하는 게 바로 눈앞에 보일 정도로 투명해서 웃음이 나오려 했다.
“서이호.”
“왜.”
“가서 저녁이나 만들어.”
“뭐?”
한참의 정적 끝에 시호가 꺼낸 말이었다. 다윤은 놀라서 눈만 굴려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그런 말을 하고 있는 시호는 화가 났다거나 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서이호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으니 시호가 당연한 걸 뭘 묻냐며 부엌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얼른. 나 두 시간 후면 회사 가 봐야 해. 오늘 네가 만든 저녁 먹으려고 부른 거 알지? 가. 재료는 있으니까 빨리 만들어.”
“부려 먹으려고 불렀어?”
“그럼 그거 아니면 내가 널 왜 불렀겠니. 다윤이도 지금 배고플 거 아냐. 얼른 안 가?”
“…….”
다윤을 엮으니 이호가 그제야 못 이기겠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발 가지 말라고, 다윤은 이호의 바지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다윤의 마음을 읽은 건지 이호가 다윤에게 말했다.
“가자, 윤아. 넌 식탁에 앉아 있어.”
“어, 어. 그래.”
“아니, 다윤이는 나랑 할 얘기가 있어.”
시호의 단호한 말에 다윤이 금세 울상이 되었다. 역시. 저에게 뭐라고 하실 게 분명했다. 이호가 시호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뭔 얘기인데, 나한테 해.”
“얼른 안 가?”
“단둘이 놓고 가기 싫어. 불안해.”
“이 미친놈이, 내가 윤이 잡아먹냐?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윤이라고 부르지 마. 누나가 뭔데 그렇게 친근하게 부르는데.”
다윤의 마음을 읽기는 개뿔. 서이호는 그냥 되도 않는 질투에 생떼를 부리고 있는 거였다. 서가네 싸움이 더 불붙기 전에 다윤이 중간에 껴서 말렸다. 어쩐지 미래가 훤히 보였다. 다윤이 괜찮다며 얼른 가는 게 도움이 되는 거라면서 이호를 밀자, 불안한지 발걸음을 못 떼던 서이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가까이서 얘기 금지야. 거리 유지해.”
다윤도 시호도 그런 이호의 반응에 황당하다는 얼굴로 쳐다봤지만, 이호는 당당했다. 뒷모습이 자신의 할 일을 끝낸 위풍당당한 개 같다고 해야 하나. 시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혀를 짧게 찼다.
“저 새끼는 대체 왜 저래? 내가 뭐 너한테 못 할 짓 했니? 진짜 의심할 사람을 의심해야지.”
“……그러게요.”
“어릴 때도 그랬어, 저놈은. 기억도 못 하지만 습관처럼 남아 있는 거지. 한심한 놈.”
시호가 혀를 쯧쯧 차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쌌다. 어릴 때도 다윤과 제가 붙어 있으면 그렇게 질투를 하더니만. 기억도 안 나는 어릴 때뿐만 아니라 중학생 때도 그랬다. 다시 만난 다윤이 반가워서 좋아하는 시호를 보고 이호는 한 번도 그날 이후로 다윤을 시호 앞에 보여 준 적이 없었다. 하여간, 야구 외에는 통 생각 없는 놈에 은근히 이상한 쪽으로 고집도 센 자식이었다. 정작 본인은 다윤을 기억도 못 하면서.
그 와중에 다윤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 희미한 다윤의 웃음에 시호가 물었다.
“윤아, 너는 저런 놈이 좋니? 왜?”
“……어, 귀여워서요.”
다윤이 쑥스러운 듯 웃었다. 시호가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걸 받아 줄 사람이 다윤이밖에 없을 거라는 걸. 하여간, 잘 어울리는 커플이다 싶었다. 내내 한심하게 보긴 했어도 지금 보니 그래도 이호가 사람 보는 눈은 있구나 싶어서 지끈거리는 머리가 조금 덜 아파 오는 듯도 했다.
“……죄송해요. 많이 놀라셨죠.”
분위기가 조금 느슨하게 풀린 틈을 타서 다윤이 먼저 말했다. 아까부터 계속 말을 하고 싶었는데, 괜히 눈치가 보여 못 했던 것이다. 시호가 고개를 저었다. 이 와중에 다윤의 그 상식적인 사과에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올 뻔했다. 서이호 저 새끼는 제정신이 아니더라도 그나마 다윤만큼은 제정신이라는 생각에 말이다.
“괜찮아.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거든. 친구 사이에 그렇게 각별한 경우는 없잖아? 너네가 보통 사이가 아니기도 해서 더는 의심을 안 하긴 했는데……. 그래도 예상은 하고 있어서 엄청 놀라지는 않았어.”
그렇게 티를 냈었나 싶어서 다윤이 머리를 긁적였다. 서이호가 너무 제게 앞뒤 안 가리고 달라붙어서 그런가. 정작 본인도 그다지 숨길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다윤 본인조차도 모르고 말이다.
“근데 혹시, 윤아.”
“네.”
“……서이호 쟤가 뭐 협박을 하고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네?”
시호는 진지하게 물어보고 있었다. 다윤이 이호를 좋아한다는 게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누나.”
“응?”
“제가 먼저 이호 좋아했어요.”
평소에는 조근조근하고 시호 앞에서 은근하게 낯을 가리는 다윤이 이번만큼은 다부지게 이야기했다. 시호는 순간 할 말을 잃어 벙 쪘다. 방금까지만 해도 혹시나 다윤이 억지로 이호와 만나 주고 있는 건 아닐지 하던 생각은 어느새 날아가 버렸다.
“……정말 뜻밖이긴 한데, 기분은 좋다. 그런 얘기 들으니까.”
“하하.”
“고마워, 윤아.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힘든 시기에 저놈 꽉 붙들어 줘서. 이호가 좋다고 진심으로 나한테 얘기해 줘서.”
다윤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별로 한 게 없다며 희미하게 웃었다. 정말 그랬다. 서이호가 자신에게 한 일들을 생각하면 자신은 딱히 한 게 없었다. 용기도 없고 겁도 많은 최다윤을 붙든 것도, 그런 다윤을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은 것도 다 서이호 쪽이었으니까.
“오늘 사실 이호한테 미국 가자고 얘기하려고 했거든.”
“……네?”
“아예 가자는 게 아니라 한 달 정도 얘기하는 거야. 참 나, 뭘 그렇게 사색이 됐어.”
“아…….”
시호의 말에 놀라서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 버렸다. 시호가 그런 다윤의 표정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봐도 어릴 때와 영 변한 게 없었다. 저렇게 귀여운 다윤에게 서이호는 아깝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호가 다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은 안 하지만 요즘 훈련하는 게 영 힘든 것 같아서. 미국 가서 조금 쉬면서 거기서 개인 훈련 받게 할 생각이었는데, 지금 보니까 그랬다가는 저놈 하루도 안 돼서 한국으로 들어오겠네. 뭐, 가지도 않겠지만.”
시호가 그 말을 하고 부엌 쪽을 한번 보고 웃었다. 지금도 쫑긋쫑긋 부엌 쪽에서 저와 다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듣고 싶어서 눈치를 보고 있을 게 뻔했다.
“여하튼, 고마워 다윤아. 이호 좀 잘 부탁할게. 가능하면 오래오래. 참, 그렇다고 쟤 다 받아 주라는 얘기는 아니야. 쓰레기같이 굴거나 등신 짓 하면 그냥 뻥 차 버려.”
시호의 말에 안 웃을 수가 없었다. 다윤의 웃음에 시호가 진심이라며 다시 한번 덧붙였다. 제 동생이긴 하지만 인성이 그렇게 착한 놈은 아니라면서 시호가 투덜거렸다.
“……제가 더 고마워요, 누나.”
어쩌다 보니 갑작스럽게 커밍아웃이 되어 버렸지만 나쁘게 반응해 주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고마웠다. 오늘 하루 종일 몇 번의 커밍아웃이 있었던 거지. 세 번의 커밍아웃 중 단 한 명도 나쁜 반응을 보인 사람이 없었다. 이런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걸 다윤도 잘 알고 있었다. 다윤은 제가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모두 제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으니까.
“어휴, 우리 귀여운 밤톨이.”
희미하게 웃는 다윤을 시호가 끌어안으려는 참이었다. 휙, 하고 다윤이 뒤로 끌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이호의 뒤쪽으로 돌아갔다.
“밥 다 됐어, 먹어.”
다윤의 시선에는 서이호의 등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서이호가 제 누나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다윤은 피식 웃었다. 시호가 말한 대로 아주 예전, 서이호가 저와 시호 누나 사이를 질투했던 때가 떠올랐으니까. 오로지 서이호만 기억 못 하는 그때 일들을.
“됐다, 됐어. 얼른 꺼지라는 그 눈빛으로 무슨. 둘이 먹어. 누나는 밥 안 먹고 회사 간다.”
“저녁에도 일하세요?”
“응, 내일이 미국 출장인데 확인하고 가야 할 게 많아서. 회사에서 일하다가 새벽에 바로 출발하려고. 이번 출장은 좀 길어질 것 같아서 서이호 저 자식 얼굴 좀 보려고 부른 건데, 잠깐 봤으니까 됐어.”
“너무 힘들지 않을까요?”
“괜찮아. 잠이야 뭐, 비행기에서 자면 되지. 고마워 다윤아. 내 걱정하는 건 너뿐이네.”
저 싸가지 없는 동생 새끼는 저러고 있는데 말이야. 시호가 아프지 않게 이호의 이마를 탁, 쳤다. 전혀 미동도 없는 이호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다윤은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데 피가 섞인 동생은 제가 간다는 말을 하자마자 표정이 훅 풀렸다. 시호는 저 새끼를 죽여야 할지 살려야 할지 속으로 고민했다.
“누나, 조심히 다녀오세요.”
다윤이 시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시호는 다윤의 머리를 다시 한번 쓰다듬어 주려다가 옆에 서 있는 동생을 보며 손을 내렸다. 그런 저를 본 이호가 말했다.
“……도착하면 연락하든지.”
“어이구, 그래그래. 지금 누나 걱정해 주는 거야~?”
“됐으니까 얼른 가기나 해.”
“그래, 됐다. 뭘 바라니. 간다.”
시호가 손을 흔들며 집 안에서 사라지고 다윤도 아쉬운 듯 문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시호가 나가고 이호는 그제야 다윤을 뒤에서 끌어안고 어깨 부근에 턱을 올렸다.
“누나한테 왜 그렇게 까칠해.”
“……내가?”
“응.”
다윤의 말에 이호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살며시 눈썹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엄청 착하게 군 건데, 방금.”
서시호와 저는 워낙 그렇게 투닥거리는 사이고, 또 저는 원래 기본적으로 사람한테 친절하거나 다정하지 않으니 방금 정도면 엄청 유한 분위기였다. 다윤이 없는 평소라면 거의 말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다윤은 이호의 말을 믿지 않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다정이 다 죽었네. 나한테 하는 거의 반만 해도 누나가 안 섭섭하시겠는데.”
다윤이 그렇게 말하고 어느새 고소한 냄새가 나는 부엌으로 향했다. 다윤에게 하는 것 반만 하라니.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애초에 다윤의 앞에서 나오는 행동들은 제 의식을 거치지 않고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들이었으니까.
“이걸 다 네가 한 거야? 방금?”
식탁을 보고 다윤이 입을 떡 벌렸다. 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리를 하는 일이야 뭐, 너무나 익숙했으니까. 그런데 다윤이 저렇게 놀란 얼굴로 쳐다보는 걸 보고 있으니 괜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다윤은 생각보다 제 끼니 챙기는 데에 관심이 없었다. 저번에 한 번 만들어 준 떡볶이를 먹어 봤던 결과, 심각하게 요리를 못하기도 했고. 물론 상관없었다. 이제 앞으로 서이호가 최다윤 옆에서 열심히 챙겨 줄 거였으니까.
“앉아, 얼른.”
“어, 응.”
“이거 먹어 봐. 전에 너네 집에서 해 줬던 건데 너 잘 먹길래. 마침 재료도 있어서 했는데.”
“응. 맛있다.”
“이것도.”
“……너도 얼른 먹어.”
“배 안 고파 난. 이거도 먹고.”
이호가 신이 나서 다윤의 앞에 앉아 파스타와 샐러드를 직접 덜어 주었다. 다윤은 제가 내민 것을 받아먹다가 물끄러미 제 손을 봤다. 아직 붕대가 감겨 있는 손을 보고 있는 다윤을 보며 이호는 웃었다.
“됐으니까, 너도 먹어. 내가 덜어 줄게.”
결국 다윤이 젓가락을 뺏어 음식을 덜어 이호의 앞에 놨다. 이호는 정말 배가 고프지 않았다. 애초에 이 음식들은 최다윤 먹이려고 만든 거기도 했고.
“난 진짜 배 안 고픈데.”
“저녁 먹고 왔어?”
“아니.”
“근데 배가 안 고프다고?”
“너 먹는 거만 봐도 배불러서 그런가.”
“……너 진짜 닭살이다.”
다윤이 소름 돋는다는 듯이 팔을 마구 쓰다듬었다. 이호는 제가 말해 놓고 부끄럽지도 않은지 피식 웃었다. 저도 제 입으로 이런 얘기를 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진심으로 튀어나온 말들이었다. 최다윤 앞에서는 그랬다. 애초에 온 신경이 다윤의 앞에서만 노곤노곤 풀리는 것만 해도 그렇고.
“그나저나 오늘만 해도 두 번째야.”
“어?”
다윤이 양상추를 집어서 이호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이호가 별생각 없이 받아먹자 다윤의 입가에 작게 웃음이 번졌다. 수채화 물감이 물속에 퍼지듯이 잔잔하게 떠오른 그 미소에 이호는 저도 모르게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봤다.
“엄마한테도 들켰거든.”
“아.”
“우리 사이 시호 누나도 아시고, 우리 엄마도 알고.”
“결혼해야겠네, 그럼.”
이미 양가에 다 까발려졌으니까 이제 결혼만 하면 된다고, 그냥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제 말에 다윤이 타박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러게, 결혼해야겠다.”
“……쿨럭.”
제가 말해 놓고, 정작 다윤의 입에서 나오니까 이상하게 놀라서 이호가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다윤이 그런 이호의 입가에 물컵을 대 주었다. 그걸 받아 든 이호가 급하게 물을 삼켰다. 그러고 나서도 벙찐 얼굴로 다윤을 보며 되물었다.
“뭐? 뭐라고 했어, 윤아?”
“네가 먼저 얘기해 놓고, 왜 내가 말하니까 놀라? 싫어?”
“아니, 싫을 리가! 그게 아니라-!”
이호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오늘 하루 종일 정말 예상치 못한 일들이 쉬지도 않고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다.
“아니다. 사귀기도 전에 결혼하는 건 좀 그렇지?”
“…….”
“그럼 우리 사귈까?”
가볍게, 그러나 전혀 쉽지는 않게 다윤이 말했다. 아까보다 훨씬 진지해진 얼굴로 다윤이 이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늦게 말해서 미안.”
“…….”
“사귀자, 이호야. 내가 잘해 줄게.”
역시, 오늘은 무슨 날인 게 분명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거나.그렇지 않고서야 서이호에게 이런 행운이 갑자기 눈앞에 놓일 리 없었다.
그래, 근 몇 년간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이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눈에 힘을 주었다. 한 번 눈을 깜박이는 순간, 꿈이라는 듯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최다윤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