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CHAPTER 4. 좋은데 어떡해 (4/13)

CHAPTER 4. 좋은데 어떡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하나? 아니, 괜히 그런 말을 했다가 더 화만 부추기는 게 아닐까.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때는 그냥 화제를 돌리고 없던 일로 해 버렸고, 그게 가능했다. 지금도 그럴 수 있을까? 제가 몰래 도둑 키스한 걸 분명히 아는 상황에서? 울고 싶어졌다. 최다윤은 어째 중학교 때나 성인이 된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항상 저지르고, 후회하고.

“서이호…….”

“…….”

“미안해, 그러니까 방금 그건…….”

다윤이 그렇게 말하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술에 취했어, 실수였어. 정말 미안. 그런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달라붙어 어떤 말도 나오지가 않았다. 언제나 웃는 얼굴이던 서이호의 얼굴에서 어떤 웃음기도 찾아볼 수가 없었으니까.

순간 서이호가 제게로 성큼 다가왔다. 다윤은 뒷걸음질 치던 것도, 미안하다고 사과하던 것도 모두 멈추고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래, 때리면 얼마든지 맞아 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서이호의 화만 풀린다면.

얼굴 위로 날아들 주먹을 기다리고 있는데, 다윤에게 내려진 건 정반대의 것이었다. 서이호의 커다란 손바닥이 목덜미를 감싸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다윤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서이호의 입술이 아까처럼 최다윤의 입술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은 탓이었다.

바로 앞에 있었다. 서이호의 눈이. 예쁘고 긴 속눈썹이. 아까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제 입술 위로 닿는 부드럽고 통통한 입술이 이상하게 이질적이었다.

이게, 뭘까.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혹시나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손안에 닿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현실이라고 일깨워 주고 있었다.

손을 들어 밀어내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키스를 해 버리면, 둘의 사이는 걷잡을 수 없어진다. 서이호는 지금 취했다. 그러니까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저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거다.

그런데 최다윤은 밀어낼 수 없었다. 목 뒤로 와 닿은 커다란 손이 힘을 주었고, 입술 아래를 서이호의 이가 아프지 않게 깨물어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벌어진 틈 사이로 서이호의 혀가 온 마음을 가르고 들어오고 있었다.

달콤한 첫 키스에 다윤의 머릿속이 순간 또다시 술 취한 것처럼 흐릿해지고 아릿해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두려움에 덜덜 떨었던 다윤이 어느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이호는 취했다. 그리고, 최다윤도 취했다. 그러니까 오늘 잠깐 이런다고 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아예 돌아갈 수 없지 않은 건 아니다. 이건 실수니까. 간밤에 술김에 저지른 실수. 위험한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맞닿은 입술이 너무 부드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다윤은 용기 내서 서이호의 목덜미에 손을 둘렀다. 그리고 제 입 안을 능숙하게 돌아다니는 서이호의 혀를 따라 어색하게 움직였다. 부디 오늘 이 밤이 끝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환한 달빛이 두 사람의 야릇하고 느릿한 공기를 적시고 있었다. 그 달빛을 받으며 다윤은 어색하게 이호의 무릎 위에 앉아 서이호가 하는 대로 따라 하고만 있었다. 어떤 행동도 어색해 보이지 않도록. 그가 혹시나 마음을 바꾸어 몸을 돌려 저를 외면하지 않도록.

마치 잡아먹을 것처럼 입 안을 가득 훑던 서이호의 혀가 빠져나가고 다윤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서이호의 입술이 다윤의 입술 위에 몇 번 내려앉고, 온 얼굴 위에 가득 제 흔적을 남기려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다윤은 두 눈을 꽉 감고 있었다. 혹시나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윤아.”

눈을 감고 있던 다윤의 눈 위로 서이호가 입술을 꾹 내리누르면서 제 이름을 불렀다. 순간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서이호가 혹시라도 술기운에 다른 사람이랑 저를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불안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정신없는 와중에 또렷하게 들려오는 제 이름은 저를 안심시키고 있었다. 어쩌면 안심할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눈 떠 봐, 윤아.”

나긋나긋한 서이호의 말에 다윤은 명령을 잘 듣는 아이처럼 눈을 떴다. 두 눈 가득 서이호가 찼다. 이호가 씩,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근사한 웃음이었다. 세상 모든 빛이 서이호에게 가득 찬 것 같은, 그런 근사한 웃음.

“다시 말해 봐.”

“……뭘?”

“아까 했던 말 다시 해 봐.”

다윤은 부러 모르는 척 입을 꾹 다물었다. 느릿하게 눈만 깜박이는 다윤의 눈꺼풀 위에 이호가 부드럽게 입 맞추며 재촉하듯 말했다.

“응? 나 좋아한다고 했잖아.”

서이호가 다윤을 꽉 끌어안았다. 창피해서 미칠 것 같았다. 서이호가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도 모르겠고, 저는 또 왜 그렇게 저질러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부끄러움에 다윤이 고개를 푹 숙였다.

다윤이 말이 없자 이번엔 서이호가 안달이 나서 다윤의 허리를 부러뜨릴 듯 끌어안았다. 다윤이 손을 들어 이호의 어깨를 마구 쳤다.

“숨, 숨 막혀…….”

끝내 제게 다시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는 최다윤 때문에 서이호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다윤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물었다. 이호의 손이 다윤의 옷자락 안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손바닥이 안으로 들어오니 다윤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이호의 손바닥은 온통 굳은살로 가득했다. 중학교 때 이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는 이호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 손바닥이 지금 부드러운 최다윤의 몸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쓸고 있는 거였다.

또다시 그런 의혹이 떠올랐다. 혹시 이건 꿈이 아닐까? 제가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서이호를 짝사랑하면서 꾸었던 지독한 꿈. 현실감 없는 일들이 일어나니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제 귀를 잘근잘근 깨무는 서이호의 이가, 그 거칠거칠한 손바닥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꿈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이호가 다윤의 윗옷을 벗겨 내고 제 옷도 벗었다. 푸른 새벽빛이 서이호의 탄탄한 근육을 비추고 있었다. 다윤은 괜히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돌렸다. 저런 몸과 비교하면 제 몸이 한없이 초라해 보일 터였다.

어디론가 숨고 싶어서 다윤이 저도 모르게 서이호의 허벅지 위에서 내려가려 손을 뒤로 짚은 순간, 서이호가 그런 다윤을 저지하고 얼굴을 다시 제 쪽으로 돌려 깊숙이 제 입술에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의 피부가 온전히 맞붙는 느낌에 다윤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으…… 흣…….”

키스로 끝내야 한다. 정말로. 여기서 더 가선 안 된다. 안 되는데. 정말 그래선 안 되는데. 제 가슴 위로 올라온 서이호의 손바닥이, 제 손 아래에 닿는 서이호의 근육들이 멈추지 말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제 가슴 위 튀어나온 돌기를 꾹 누르고 살며시 문질렀다. 입 안은 지금 저를 정신없이 탐하면서도 아래로는 손쉽게 농락하는 거였다. 서이호에게는 지금 이 행위가 얼마나 쉽고 간단할까. 저는 정신도 못 차리겠는데.

두 사람의 아랫도리가 어느새 뻐근해졌다. 다윤은 서이호의 열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다시 입술이 떨어지고 다윤은 제 눈앞에 있는 서이호를 보며 숨을 고르고 말했다.

“……너, 섰어.”

자신도 잔뜩 부풀어 오른 상태면서 다윤은 이호가 신기했다. 지금 저를 상대로 발기한 건가. 물론 이 상황이라면 누구든 그럴 수 있다는 것 정도야 인정했다. 이미 키스는 저질러 버린 상태고, 옷을 벗고 몸을 만지고, 계속해서 혀를 섞고 있으니까.

“미치겠다, 진짜…….”

이호의 머리가 푹, 다윤의 어깨에 닿았다. 그리고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제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부드러운 이호의 머리카락이, 서이호의 날카로운 콧날이 목덜미 위로 가득 느껴졌다.

“윤아.”

“……어?”

“해도 돼?”

얼굴을 조금 떨어뜨린 서이호가 물었다. 다윤은 눈만 껌벅였다. 여기서, 거절을 해야 하는 거겠지. 그래, 최다윤. 그만하자. 더 이상 하면 정말 돌이킬 수 없다. 그러면 중학교 때 그렇게 충동적으로 고백하고 후회한 날보다 더 후회스러운 날이 될 터였다.

하지만 그런 이성적인 머리와는 다르게 다윤의 몸은 이미 완전히 다른 쪽으로 넘어와 있었다. 모르겠다. 그냥…… 술 취했다는 핑계로, 조금만 더 하자.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니까. 이 정도야 서이호에게는 아무 일도 아닐 테니까. 그러니까 괜찮을 거다. 술 취한 머리는 내일 마주할 일보다는 지금 당장의 쾌락에 집중하고 있었다.

“……응.”

이미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다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일 후회하더라도, 지금은 그냥 이 순간에 충실하고 싶어졌다.

순간 서이호의 눈썹 끝이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다윤을 집요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다윤은 혹시나 부끄러워하는 걸 들킬까 봐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이호의 눈을 마주했다. 그 순간 갑자기 이호가 저를 뒤로 훅 밀었다.

“야, 갑자기……!”

놀란 다윤이 소리쳤다. 서이호가 불쑥 저를 밀어내서 뒤로 넘어질 뻔한 최다윤의 머리를 서이호의 손이 받쳤다. 큰 충격은 없었지만 어느새 제 위로 올라온 서이호의 두 눈이 너무나 강렬해서, 다윤은 상황 파악을 하려 눈을 들어 서이호를 봤다.

“네가 하고 싶다고 한 거야.”

서이호의 얼굴이 최다윤의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다윤은 이호가 또 제게 키스를 하려는 줄 알고 눈을 꾹 감고 입술을 기다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주먹이 날아와도 모자라다 생각해 놓고. 제가 생각해도 순식간에 바뀐 제 태도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왜 웃어?”

“……어, 그냥.”

다윤이 그렇게 말하고 다시 실없이 웃었다. 이호가 웃고 있는 최다윤의 입술 아래 생긴 보조개 위를 잘근잘근 물었다. 모든 게 서이호에게 다 씹어 먹히는 기분이었다.

“너 웃을 때 아니야.”

휙, 하고 바지가 순식간에 벗겨졌다. 다윤이 눈 깜박한 사이, 드로어즈까지 벗겨졌다. 그러니까, 순식간에 알몸이 된 거였다. 불이 안 켜진 거실이어서 다행이지, 불까지 켜져 있었으면 다윤은 진작 내빼고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그, 그, 그, 지금…… 어, 그러니까…… 아읏……! 야, 자, 잠깐……!”

다윤이 당황한 사이, 서이호가 커다란 손으로 발기한 다윤의 것을 손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얼굴이 터질 지경이었다. 단어가 문장이 되지 못하고 마구 쏟아져 나왔다. 10년 짝사랑이 제 성기를 부드럽게 문지르고 있다니. 정신이 아예 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으, 으……! 으응……!”

“잘 느낀다, 윤아.”

기둥을 부드럽게 매만지고 끝을 툭툭, 손으로 치고 빠르게 흔들기까지 하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려 최다윤의 어깨 부근을 봤다.

이호의 시선이 그 위를 진득하게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윤은 어디를 보는 건가 싶어서 덩달아 제 어깨를 내려다보려는데, 이호가 고개를 숙였다.

“아읏…….”

키스를 하는 것처럼 이호가 제 어깨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더 힘을 주어 피부를 빨아들이는 게 느껴졌다. 다윤은 간지러워서 어깨를 움츠리며 저도 모르게 나온 이상한 신음에 얼굴을 잔뜩 붉혔다. 아무래도, 능숙해도 너무 능숙했다. 역시 서이호는 지금 그냥 잠깐의 유희로, 잠깐의 호기심 때문에 새벽의 불장난 같은 짓을 벌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깨와 목덜미 부근에서 느껴지는 그의 혀에 아래로는 까칠하면서도 부드러운 손바닥이 제 성기를 문지르며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었다. 다윤은 눈을 꾹 감았다.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런 감각은 모두 처음이었다.

“자, 잠깐만……! 으읏, 잠깐만 서이호……! 앗……!”

제발 잠깐만 놓으라는 말을 서이호는 끝내 무시했고, 결국 최다윤은 서이호의 손 위에 그대로 사정했다. 서이호가 손을 들어 올렸다. 서이호의 커다란 손아래에서 하얀 제 정액이 야하게 뚝뚝 흐르고 있었다. 다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제가 방금 쏟아 낸 흔적이 부끄럽기만 했다.

더러울 텐데. 다윤은 몸을 일으켜 휴지를 찾으려 했다. 그런데 그런 다윤의 어깨를 꾹 눌러 다시 눕힌 서이호가 혀를 내밀어 제 손을 핥았다.

“미친놈…….”

다윤이 놀라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서이호는 아랑곳 않고 혀를 내밀어 손바닥 위에 있는 다윤의 정액을 핥아 먹었다. 빨간 혓바닥이 눈앞에 선명했다. 다윤은 그런 서이호를 눈만 깜박이며 바라봤다. 이 와중에 진짜, 더럽게 섹시했다.

“맛있는데.”

“허…….”

어이가 없어서 한숨이 다 나왔다. 아직 서이호의 손엔 제 흔적이 묻어 있었다. 이제 진짜 닦아 주려고 다윤이 다시 한번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서이호가 휙, 하고 다윤의 허벅지를 위로 들어올렸다. 다윤의 몸이 접힌 것처럼 서이호의 아래에 깔렸다. 이호가 바지 버클을 풀고 제 드로어즈를 벗었다. 허벅지 아래로 단단하고 커다란 서이호의 성기가 느껴졌다.

다윤은 고개를 내려 그의 것을 봤다. 크기가 굉장했다. 순간 덜컥 겁이 났다. 맞다, 서이호는 아직 시작도 안 했지. 설마, 설마 삽입까지 가는 건가. 저렇게 큰 걸? 정말로?

거기까지는 솔직히 얘기하면 조금 무서웠다. 다윤은 이런 일이 처음일뿐더러 진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은 여러 번 건넜지만, 이건 그 마지막 강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 마, 안 할게.”

다윤의 걱정을 읽기라도 한 건지, 서이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 몸을 놓아 주지 않았다. 뜨겁게 발기된 성기가 느껴지는데 안 한다니. 하지만 이호는 정말로 다윤의 아래엔 손을 대지 않았다. 다만 아까 이호가 핥았던 다윤의 정액을 조심스럽게 허벅지 사이에 문질렀다.

“아읏…….”

왜 입에서 신음 소리가 나오는 건지. 허벅지 사이로 부드럽게 밀려오는 커다란 성기가 저를 그렇게 만들었다. 서이호의 눈가가 살며시 찌푸려졌다. 그조차도 섹시해서 다윤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이호의 목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퍽, 퍽. 소리를 내며 이호가 제 허벅지 사이에 성기를 끼워 넣고 마치 삽입하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너무 커서 안으로 들어오면 저를 모조리 망가트릴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것이 제 허벅지 사이에서 들락날락했다.

“하, 시발…….”

서이호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진짜 미치게 좋았다. 이런 쾌감, 다시 맛보지 못할 정도로. 실제로 삽입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머리가 핑 돌 정도의 쾌감이라니. 아래에서 눈만 깜박이며 저를 보고 있는 최다윤도, 최다윤의 허벅지 사이도,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매만지는 손길도, 다 미치게 좋았다.

“윤아, 내 이름 불러 줘.”

“……서이호.”

“그거 말고.”

그거 말고? 다윤은 멍하니 이호를 보다가 문득 아까 술에 취해 나눈 대화가 얼핏 기억났다. 얼굴이 훅 달아오른 채로 다윤이 이호의 이름을 불렀다.

“……이호야.”

다윤의 입에서 ‘이호야.’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이호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그와 동시에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안쪽이 쓰라렸다. 그런데도 살갗에 닿는 그의 성기의 느낌이 지금 이 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할 정도로 좋았다.

“이호야…….”

“하아…….”

다윤의 부름과 함께 서이호가 다윤에게로 툭 몸을 내렸다. 허벅지 안에 서이호의 정액이 묻고 있었다. 다윤은 손을 들어 이호를 끌어안았다. 좋아, 너무 좋아.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고 해도 좋아.

“좋아해, 윤아.”

다윤은 이호의 말에 피식 웃었다. 진짜 많이 취했구나, 서이호. 살짝 붉어진 채 웃고 있는 그 얼굴을 보자니 그가 지금 취한 상태라는 게 실감이 났다. 이호의 입술이 다윤의 귓가를 마구 문지르며 계속해서 그 말을 중얼거렸다.

“너무 좋아…….”

서이호가 그냥 내뱉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냥 하룻밤 지나가는 사람에게 하는 립 서비스 같은 거라는 걸 알면서도, 다윤은 그냥 웃었다. 나도 좋아한다는 말은 뒤로 삼키기로 했다. 서이호와 최다윤의 마음은 어차피 같을 수 없으니까.

그 무게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다윤은 그냥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좋아해, 나도 좋아. 네가 너무 좋아서, 가끔 미칠 것 같아.

*

학교 벤치에 앉은 이호와 다윤을 따듯한 햇살이 감싸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서이호가 훈련을 가기 전 두 사람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단골 장소였다. 서이호는 그 부슬부슬한 머리카락을 최다윤의 어깨 위에 대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오늘 너네 집 갈까?”

“훈련은?”

“오늘 훈련 일찍 끝나.”

“그래, 그럼.”

“부모님 계셔?”

다윤은 고개를 저었다. 이호가 웃으며 그럼 오래도록 게임을 할 수 있겠다면서 좋아했다. 최다윤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다른 곳을 보았다. 오늘은 학교 수업이 다 끝나고서도 서이호를 볼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 때문에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혹시나 서이호에게 이 두근거리는 심장의 속도를 들킬까 봐 무서워서 다윤은 손을 조금씩 폈다 쥐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서이호.”

그때, 두 사람 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다윤과 이호가 동시에 눈을 들어 앞에 있는 아이를 봤다. 10반의 진현주였다. 서이호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귀었던. 다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호와 현주를 번갈아 봤다. 분명 얼마 전에 헤어졌다고 얘기했던 것 같은데.

현주의 커다란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이호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제 손바닥을 보고 있었다. 괜히 중간에 낀 최다윤만 어색했다. 다윤은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나, 아니면 그냥 이대로 있어야 하나를 한참 고민하고 있었다.

“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뭐가.”

이호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짜증 난다는 표정을 하고 머리를 잔뜩 흩트리면서. 다윤은 그런 이호와 현주를 번갈아 봤다. 현주의 두 눈이 울기 직전처럼 그렁거렸다.

“우리가 사귀는 게 맞긴 해? 연락해도 무시하고, 맨날 바쁘다고 하고. 그럴 거면 대체 왜 받아 준 거야. 연락하지 말라는 것도, 그냥 해 본 말이었어. 네가 그렇게 하면 연락이라도 해 줄까 해서.”

“하…….”

이호의 한숨에 결국 현주의 눈에서 눈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다윤은 저도 모르게 일어서서 울음을 터트린 현주를 위로해 주려다가 서이호의 저지에 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냥 네가 해 달라는 대로 한 것뿐이야. 사귀자고 해서 사귀었고, 헤어지자고 해서 헤어졌잖아. 이제 그만 좀 귀찮게 굴어.”

정말 매정한 서이호였다. 이호는 항상 인연이 끝나면 그렇게 모질어지곤 했다. 물론 사귄다고 해서 엄청나게 사랑꾼처럼 변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아예 찬 바람이 쌩쌩 분다고 할까. 자신의 앞에서는 언제나 웃고 있는 서이호였으니까 저렇게 무표정한 모습을 보는 건 정말 드물었다.

“가자, 윤아. 나 훈련 가야 해.”

“어…….”

“얼른.”

서이호가 다윤의 한쪽 팔을 잡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여전히 뒤에서는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매정하네, 서이호.”

“그래야 해. 그래야 괜히 귀찮은 일 없지.”

서이호는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다윤의 손에 들린 쓰레기를 뺏어 들더니 제 쓰레기와 함께 운동장 근처에 있는 쓰레기통에 넣었다. 툭툭, 손을 털고 이호가 다윤에게 씩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나 갈게. 끝나고 봐. 반으로 갈 테니까 기다려야 해.”

그렇게 말하고 사라지는 서이호의 뒷모습과 여전히 울고 있는 여자아이의 뒷모습을 번갈아 바라봤다. 오지랖이라는 걸 알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저 매정하고 가벼운 서이호를 좋아하는 마음이 그 아이와 같기 때문이었다.

다윤은 그날 쉬는 시간에 현주를 찾아갔다. 저를 찾아온 다윤을 보고 현주는 또다시 울었다. 펑펑 눈물을 쏟는 현주를, 가져온 초코 우유를 주며 열심히 달랬다.

“걘 진짜, 야구밖에 모르는 애야.”

눈물을 멈춘 현주가 복도 창문을 바라보며 우유를 들이켰다. 다윤은 그런 현주를 물끄러미 봤다.

다윤은 사실 현주를 기억하고 있었다. 언젠가 이호에게 찾아와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그때를 기억하니까. 자신은 참고 참다가 한 말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공중으로 날아가 버렸는데, 현주는 이호와 쉽게 사귀었다. 그런 현주를 보며 부럽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저도 여자였다면 서이호와 한번쯤 사귀어 볼 수 있는, 그런 영광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다 부질없는 얘기지만.

“어이없어. 연애하면서 데이트 한 번 안 해 본 게 말이 돼? 내가 맨날 훈련장 찾아가야 볼까 말까였어. 맨날 훈련, 훈련……. 대체 그럴 거면 고백은 왜 받아 준 거야?”

갑자기 화가 나는지 현주가 다 마신 우유갑을 구겼다. 다윤이 그런 현주에게서 우유갑을 뺏어서 분리수거 하기 좋게 정리했다.

“진짜, 걔는 10반 담임이 좋다고 고백해도 사귈걸?”

“10반 담임? 그 수학 선생님?”

“응.”

“푸핫.”

다윤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10반 담임은 수학을 담당하는 늙은 중년 남성 선생님이었다. 현주가 웃는 다윤을 보며 기분이 좋아졌는지 씩 웃었다.

“고마워, 위로해 줘서.”

“…….”

“너 정말 소문대로 엄청 착하고 다정하구나. 서이호랑 달리.”

다윤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너한테 자꾸 마음이 갔어. 내 일처럼 마음이 아파서. 다윤은 창밖으로 보이는 야구부를 봤다. 그 사이에 있는 서이호는 굳이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친구라서 좋은 건가, 아니면 안 좋은 건가. 다윤은 그런 생각을 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렇게 친구로 남을 수 있었던 게 행운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때 저는 그 행운이 싫다며 발로 뻥 차 버렸지만 말이다.

* * *

몸이 갑갑했다. 다윤은 애써 몸을 뒤척이며 갑갑한 것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히려 저를 끌어당겨서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결국 끙, 하는 소리와 함께 다윤이 눈을 떴다. 바로 눈앞에 탄탄한 가슴팍이 보였다.

순간 머리가 느리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지금, 뭐지? 이 상황. 머리 위에는 서이호의 머리가 얹혀 있고, 팔을 제 허리에 감고 끌어당긴 채 아무렇지 않게 자고 있는 서이호와 똑같이 태평하게 자고 있던 최다윤.

“미친…….”

순식간에 어제 했던 짓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니, 어제도 아니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술에 취한 머리가 판단을 잘못 내려 저지른 엄청난 짓거리들.

다윤이 혼돈에 빠져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제를 회상하고 있는 사이, 서이호는 여전히 태평하게 눈을 감은 채로 다윤을 더욱 끌어당기고는 다윤의 머리칼 위에 코를 묻고 말했다.

“더 자…….”

그러고는 잠에 빠져드는지 점점 숨소리가 고르게 변했다. 다윤은 아주 조심스럽게 그런 이호의 품에서 벗어났다. 허벅지 사이가 빨갛게 쓸려 있었다. 그것뿐일까. 상체와 하체 둘 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붉은 흔적투성이였다. 아무래도 어제 어깨 부근을 키스하듯 빨아 대더니, 그 과정에서 생긴 것 같았다.

사실 어제 그러고 나서도 몇 차례 더 사정을 했던 것 같다. 서이호나 최다윤이나 둘 다. 미쳤어, 미쳤냐, 최다윤. 진짜 미친 거냐. 다윤은 어제의 저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몰래 도둑 키스를 해 버린 자신과 다가오는 서이호를 밀어내지 못하고 호응했던 제 자신을. 애초에 서이호는 술 취해서 제대로 판단도 못 하는 상황이었을 텐데.

서이호는 눈을 감고 아주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다윤은 그 와중에도 꼼꼼히 이호의 몸에 이불을 덮어 주고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서이호를 아무렇지 않게 마주할 자신이, 솔직히 말하면 없었다.

“최다윤, 이 배신자.”

휴게실에 고민 가득한 얼굴로 앉아 있는 다윤을 발견한 준구가 다가와 쏘아붙이곤 다윤의 앞에 놓인 음료수를 들이켰다. 숙취 해소 음료였다. 다윤은 그가 제 음료수를 마시는데도 머리를 감싼 채 심각한 표정으로 아무 말이 없었다.

어제 정신을 차려 보니 이호와 다윤 두 사람 다 어디로 가 버렸는지 사라져 있었다. 결국 그나마 조금 더 정신이 있던 준구가 병규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나서야 집으로 올 수 있었다. 다음 날 최다윤을 만나면 욕이라도 실컷 해 주려고 했는데 다윤의 표정이 무척이나 심각했다.

“최다윤?”

“어? 어?”

준구가 다윤의 어깨를 살짝 흔들자 그제야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앉아 있는 준구를 봤다.

“너도 어제 많이 마셔서 정신없냐?”

“어……. 진짜 많이 마시긴 했지. 나 얼마나 마셨어?”

“소주 두 병은 너 혼자 마신 것 같긴 한데.”

“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다윤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좋은 일이 있다고 과음한 탓이다. 제 이성을 너무 과대평가했다.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것을.

애초에 어제 술 마시자고 하지만 않았어도……! 다윤은 괜히 준구 탓으로 돌리려다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술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멍청한 최다윤 문제다. 인간은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전화가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무음으로 해 둔 상태였지만 신경은 쓰였다. 분명 서이호일 터였다. 그러고 그냥 도망치듯 나와 버렸으니. 하지만 지금은 받을 수가 없었다. 생각 정리가 도통 되지 않았으니까.

그나저나, 서이호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해도 제 이름을 부른 걸 보니 저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을 텐데. 역시 예전처럼 키스한다고 다 받아 준 것일까. 서이호는 원래 그런 놈이었으니까. 다윤은 이호가 말한 좋아한다는 말은 믿지 않았다. 그는 원래 그렇게 가벼운 사람이니까, 그 가벼움의 무게를 다윤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감정의 온도는 확연히 다르기에 어제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됐는데…….

다윤은 한숨이 푹푹 나왔다. 이 와중에 어제 그토록 섹시했던 서이호의 얼굴이 자꾸 잔상처럼 남아 아른거려서 더욱 사람을 미치게 했다.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왜 그렇게 하루 사이에 피폐해졌냐.”

“무, 무슨 일은. 그냥 집 가서 바로 뻗었지.”

“하긴, 너도 어제 많이 마셨으니까. 어제 걔랑 나랑 둘이 남겨 놓고 그렇게 튀어서 솔직히 오늘 욕 퍼부어 주려고 했는데, 됐어. 너도 똑같이 꽐라 됐는데 뭐. 점심에 해장이나 하러 가자.”

“……그래.”

사실 해장이고 뭐고 뭘 먹을 정신도 없었지만, 다윤은 일단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잠시 준구를 바라봤다. 아무리 제가 고민은 속으로 묵히는 스타일이라지만, 그래도 이건 좀 고민의 스케일이 달랐다. 연애 알못인 최다윤 혼자 고민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결국 고민 끝에 다윤이 조심스럽게 준구에게 물었다.

“야, 김준구.”

“왜.”

“……그, 어제 내 친구가 갑자기 전화 걸어서 고민 상담을 해서 그런데……. 나는 이런 문제는 좀…… 젬병이라…….”

“친구? 누구?”

“어…… 고등학교 때 친구.”

“그래? 뭔데?”

뻔한 레퍼토리였지만 누구나 늘 그렇듯 자신이 아닌 친구를 가져다 대며 다윤은 조심스레 제 얘기를 꺼냈다.

“걔가…… 술을 마시고…… 어쩌다가 보니 친구랑 잤대…….”

“와 대박, 그거 네 얘기야?”

“아니, 아니. 친구 얘기라니까.”

“아, 그래 친구. 더 얘기해 봐.”

흥미로운 얘기가 나오니 준구의 눈이 반짝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숙취 때문에 생선이 와서 친구 하자고 할 만큼 흐리멍덩한 눈이더니. 다윤은 그런 준구를 잠시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다가 진지하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둘 다 술이 많이 취해서…… 어쩌다 보니까 자게 됐는데. 음, 그 친구는 상대를 원래부터 좋아하긴 했는데 상대는 그냥 친구로만 생각하나 봐.”

“근데 그럴 수가 있나? 그 상대도 친구를 원래 좋아했던 거 아냐?”

“어…… 그건 아닐걸. 그 상대가 뭐랄까, 그런 거에 딱히 선을 두지는 않는…… 음,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 그런 스타일이라, 그런 거에 딱히 신경 쓰지는 않을 것 같다나 봐. 심지어 친구가 그 상대한테 애인이 있다고 거짓말을 했는데도…….”

“와, 잠깐, 그럼 그 새끼는 애인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그 짓 한 거네. 그런 새끼랑 잔 거야? 완전 쓰레기네! 그 새끼 그거 처음 아닐 거다 분명. 전에도 그런 적 분명 있을 거야.”

쓰레기 중에 쓰레기라며, 준구가 마구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 미친놈은 음식물 쓰레기도 안 된다고, 타는 쓰레기로 분류해서 태워 버려야 한다면서 살벌하게 욕하는 준구 앞에서 다윤만이 안절부절못했다.

“여하튼! 그런 쓰레기 새끼랑은 정리하든지! 아님 친구로 지내고 싶으면 그냥 없었던 일로 치고 지내자고 얘기하든지! 그렇게 하라 그래. 이상한 놈한테 괜히 잘못 걸리면 어? 인생 망친다. 그 친구 조심하라 그래.”

다윤이 준구의 말에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도움은 안 되지만, 얘기를 해 보라는 건 조금 위안이 됐다. 그래, 피하기만 할 수는 없다. 얘기를 해 보자. 어차피 어제 서이호도 술에 많이 취했으니 어제 일은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을 테니까.

“야, 수업이나 들어가자. 늦겠다. 어, 근데 너 목에 뭐냐 그거.”

준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윤의 목 부근에 손을 댔다. 다윤이 놀라 목도리를 끌어당겼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다윤에게 준구는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나 이제 술 다신 안 마셔. 내가 또 술을 마시면 최다윤이 아니라 개다윤이다.”

다윤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다시 한번 한숨이 쉬어졌다. 오늘만 대체 몇 번을 쉬고 있는지 모를 탄식이었다.

버스를 타고 아파트 단지 앞에 내렸다. 벌써 시간이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부러 늦게 온 거였다. 원래는 길어지지 않았을 팀플 과제도 시간을 일부러 길게 끌었다. 서이호를 마주할 시간을 최대한 늦추고 싶었으니까.

이호를 만나면, 사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아직도 정리가 안 된 상태였다. 미안하다는 말부터 꺼내는 게 우선이겠지. 솔직히 어제 일은 최다윤의 잘못이었으니까. 그렇게 잠든 서이호의 얼굴에 몰래 키스만 안 했어도.

그리고 어제 있었던 일을 잊어 달라고 말할 셈이었다. 그런데 혹시나 둘 사이가 전처럼 좋지 않고 점점 멀어지면 어떡하나 고민이 됐다. 다윤은 그게 가장 무서웠다. 간밤에 꾼 꿈에서 나온 서이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미 끝난 인연을 쳐다보는 서이호의 매정한 얼굴. 그게 예지몽이 될까 봐 겁이 났다.

서이호와 다시 친구가 되고 나서 다윤은 행복했다. 서이호라는 사람이 다시 인생에 나타나 줘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 행운을 뻥뻥 차 버릴 만큼 제가 바보라는 걸 이번 기회에 또다시 깨달았다. 중학생 때도 그렇게 충동적으로 굴어 놓고 평생 후회했으면서. 하여간 최다윤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최다윤.”

걷다 보니 벌써 다윤의 아파트 동까지 다다라 있었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서이호가 다윤의 아파트 동 앞에 서 있었다. 제가 나타날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기세로 말이다.

다윤은 흠칫 몸을 떨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 순간 서이호가 성큼성큼 다가와 팔을 붙들었다. 가까이 다가온 서이호가 고개를 내려 최다윤의 얼굴 가까이 제 얼굴을 가져갔다. 다윤이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런 다윤의 방어적인 행동에 서이호가 눈을 찌푸렸다.

“밖, 밖이잖아…….”

“…….”

“그, 일단은 안에 들어가서…….”

다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호가 이번엔 다윤의 팔을 끌고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이호가 저를 때리면 맞아 줄 수야 있었지만 혹시나 사람들이 보고 괜히 소란스러워질까 봐 한 말이었다.

이호의 탄탄한 등이 어쩐지 화가 잔뜩 난 듯싶었다. 다윤은 생각했다. 진짜 죽었다고.

* * *

아침에 눈을 떠서 다윤이 없다는 걸 확인한 순간부터 이호는 미칠 것 같았다. 일어나자마자 바로 전화를 걸었지만 다윤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설마 어제는 모두 환상이었나? 그 새벽에 제게 좋아한다고 말하고 부끄럽다는 얼굴로 제 아래에 있었던 다윤은 모두 제 착각에 불과한 걸까? 꿈일까?

하지만 너무나 선명했다. 손안에 닿았던 감각, 제 아래에서 부끄러운 듯 눈을 느리게 깜박이던 최다윤의 얼굴. 이호야, 하고 불러 주던 그 순간들.

그런데 왜 도망쳐 버렸을까. 왜 한마디 얘기도 없이 아침에 저를 혼자 두고 나가 버렸을까. 왜 지금도 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 걸까.

언젠가 다윤이 도망쳤던 그때가 떠올라 불안했다. 전화도 받지 않고, 찾아가도 만나 주지 않고, 그렇게 연락이 끊겼었다. 이번엔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놔두고 싶지도 않았다.

일단 오전에 가겠다고 해 두었던 훈련도 취소하고, 이호는 내내 다윤이 오기를 기다리며 아파트 단지 앞에 서 있었다. 언젠가 다윤을 기다리던 그때처럼.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결국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면, 이번엔 몇 시간이 흘러도 움직이지 않을 각오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학교에 가 볼까 하다가 괜히 동선이 꼬여 못 만나게 되면 그게 더 낭패였으니, 그냥 계속 서 있기로 했다. 다윤이 올 때까지 계속. 그게 하루가 됐든, 이틀이 됐든, 일주일이 됐든.

다행히 저녁때쯤 되자 아파트 단지 입구로 들어오는 다윤을 볼 수 있었다. 이호는 일단 다윤의 팔을 먼저 붙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막상 눈앞에 나타나니 정리가 안 됐다.

다윤이 겁먹은 얼굴로 올라가서 얘기하자고 했다. 이호는 수긍하며 다윤을 끌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제 죄를 알기는 하는 건지 다윤은 얌전하게 이호를 따랐다.

솔직히 기다리는 내내 화도 났는데 다윤을 보고 있자니 그 화는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일단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눈앞에 나타났으니까 됐다고.

집 안으로 들어오고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다윤은 팔을 들어 올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치 이호가 때리기라도 할 것처럼. 이호는 그런 다윤을 내려다보다가 다윤을 기다리는 내내 하고 싶었던 것을 했다.

품 안에 다윤을 안는 일. 내내 바깥에 서 있느라 차가운 이호의 품으로 다윤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제야 좀 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이호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제 품 안에서 다윤이 작게 중얼거렸다.

“……화난 거 아니야?”

“화난 거 맞아.”

“……근데 왜 안 때려?”

눈만 땡그랗게 뜬 채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다윤을 보며 이호는 속으로 탄식했다. 어제 그런 일이 있고 나서도 최다윤의 마음에 서이호는 그냥 거기서 거기인 모양이었다. 진심을 다해 전했던 좋아한다는 말은 대체 어디로 가 버린 건지.

이호가 다윤의 얼굴 가까이로 제 얼굴을 가져다 댔다. 다윤은 또다시 겁먹은 것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 이호는 그런 다윤을 한참을 본 뒤 조심스럽게 아랫입술을 물었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한 다윤이 처음엔 가만히 있다가 이내 손을 들어 이호를 밀어냈다. 이호는 그런 다윤의 팔을 잡고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가만히 있어.”

“…….”

“오늘 하루 종일 내 연락 무시했잖아.”

할 말 없는 얼굴로 다윤이 슬쩍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다윤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게 싫어서 이호가 커다란 손으로 다윤의 얼굴을 붙들었다. 살짝 찌푸린 얼굴도 사랑스러워 미치겠다.

“내가 오늘 하루 종일 얼마나 초조했는지 알아?”

“…….”

“보고 싶어 죽겠는데 연락도 안 받고, 갑자기 사라져 버리기나 하고.”

다윤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이호를 봤다. 이호는 그런 다윤을 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어제 했던 좋아한다는 고백, 그 말들은 역시 모조리 사라져 버렸나 보다.

문득 이호는 혹시 정말 어제 일이 착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급하게 다윤의 목도리를 풀었다. 목도리 아래에 있는 제 흔적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다행히 다윤의 피부 위에 붉게 제가 만든 흔적이 증거처럼 남아 있었다. 이호는 그것을 보며 그제야 안도의 웃음을 지었다.

“서이호.”

“…….”

“야, 서이호.”

어제 그렇게 예쁘게 이호야, 라고 불러 줘 놓고. 또 서이호. 이호는 심통 난 얼굴로 다윤을 내려다봤다. 유치해지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만 유치해지는 것 같았다.

“이호라고 안 부르면 대답 안 할 거야.”

“미친…… 뭐라는 거야.”

“어제 그랬잖아. 이호라고 불러 준다며?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는 아무한테도 친절하게 굴지 않기로 했잖아.”

“…야, 그건…… 아니 근데 내가 그런 약속을 했다고?”

뒤의 말은 솔직히 제가 좀 비약을 한 거긴 했지만, 뭐, 비슷한 말이긴 했으니까. 이호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코끝으로 최다윤의 향이 스며들었다. 기분 좋은 향이었다.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향. 이호는 그런 다윤을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아무리 당기고 당겨도, 더 닿지 못해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닿고 있는데도 멀어질 것 같아 초조한 기분. 어디론가 갑자기 멀어질 것 같아서 불안했다. 중학생 때, 그렇게 말도 없이 연락을 끊어 버린 게 엄청난 트라우마로 남았던 건가.

이호가 불안하다는 듯이 계속해서 다윤에게 몸을 치대 오니 다윤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겠어, 이호야. 좀 떨어져 봐. 얘기 좀 하자.”

“그래.”

이호야, 라고 부르니 그제야 서이호가 다윤의 목덜미에서 얼굴을 떨어뜨렸다. 이호는 다윤을 내려다보며 쪽, 쪽, 얼굴 위에 제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다윤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면서 중얼거렸다.

“그만 좀 해…….”

“싫어?”

“아니, 그, 싫다는 게 아니라. 얘기 좀 하자고.”

“해.”

이호가 다윤을 보며 씩 웃었다. 다윤은 그런 이호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어제는…… 일단 미안.”

“뭐?”

미안하다는 얘기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터라, 이호는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제 표정에 다윤이 또다시 겁을 먹은 듯 뒤로 살짝 물러나려는 게 보여서 이호는 다윤의 한쪽 팔을 아프지 않게 붙들고, 일단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물었다.

“뭐가 미안한데.”

“그, 너한테 술 취해서…… 그런 거.”

“나 좋아한다고 한 거?”

다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 얼굴을 보자니 방금 전에 느꼈던 화는 풀렸지만 여전히 이해는 되지 않아서 되물었다.

“그게 미안해, 지금?”

“……갑자기 그런 얘기 들어서 당황스러웠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난 좋았는데. 최다윤이 나 좋다고 해 줘서.”

“…….”

“없었던 일로 하자고, 그 얘기가 하고 싶은 거야, 지금?”

다윤은 이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부터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던 얼굴도 그제야 고개를 들고 똑바로 쳐다봤다. 이호가 후, 하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숨결을 따라 이마 위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여자 친구 때문에 그래?”

생각하기조차 싫어서 말이 끊어지듯 흘러나왔다. 그런 제 말에 최다윤은 놀란 얼굴로 저를 올려다봤다.

외면했던 사실이다. 다윤에게 애인이 있다는 사실. 잘 안 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고, 또 다윤이 직접 제 입으로 저를 좋아한다고도 말했으니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어제 그런 일까지 있었는데 저를 밀어내는 거 보면.

비참한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다윤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편이 알싸하게 아프기도 했다.

“헤어지면 되잖아. 나 좋다며. 근데 못 헤어질 건 뭐야.”

그래서 칭얼거리듯 말했다. 다급하게 튀어나오는 제 말에 시선을 피한 다윤은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초조해졌다. 고개를 돌려 제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싶었다. 나만 봐 주면 안 되냐고, 태어나서 한 번도 부려 본 적이 없는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리고 너한테 그동안 거짓말해서 미안한데, 나 여자 친구 없어.”

다윤의 말에 이호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아니, 진짜라니까. 그때는 내가…….”

“전화 통화하는 거 다 들었어.”

“……무슨 전화 통화.”

“어제 술 취해서 통화했잖아.”

다윤은 무슨 소리인 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다정한 최다윤이 누구보다 다정한 목소리로 애인과 통화하는 걸 어젯밤 다 들었다. 서이호는 그걸 알면서도 다윤을 어제 그렇게 밀어붙인 거고.

쓰레기라는 거 잘 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니, 후회는 하지 않는다.

이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윤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다윤은 곤란하다는 듯이 입술을 짓이기며 말했다. 곤란한 목소리가 이호에게는 상처였다. 네가 널 곤란하게 만들었어? 내 마음이 널 불편하게 하는 거야?

“하여튼,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는 앞으로도 너랑 친구로 지내고 싶어, 서이호.”

다윤의 말에 이호는 고개를 저었다. 목덜미에 얼굴을 밀착시켜 두었던 상태라 거의 얼굴을 부비는 꼴이었다. 그리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싫어.”

더 이상 최다윤과 서이호는 친구가 될 수 없다. 그건 어제 새벽 명확해졌다. 다윤은 제게 푹 얼굴을 묻고 있는 이호를 한 번 더 밀어내면서 말했다.

“왜, 너 나랑 친구 해서 좋다며. 평생 친구 하기로 했잖아.”

“그런 약속 한 적 없는데.”

“……그, 그런 뉘앙스로 얘기했잖아.”

“그건 내가 너 좋아하는지 몰랐을 때 얘기지.”

순간 다윤의 동작이 멈췄다. 뭐? 다윤이 저도 모르게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서이호를 봤다. 몰랐단 말인가? 어제 그렇게 얘기했는데. 물론 눈을 크게 뜨고 당황한 최다윤도 귀여웠으니 다시 한번 말해 줄 수 있다. 최다윤이라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말해 줄 수 있다.

“너 좋아한다고, 최다윤. 어제도 말했잖아.”

“어제는 취해서 그런 거…….”

“하나도 안 취했어.”

이호의 단호한 말에 다윤의 얼굴이 당황과 함께 붉게 물들었다. 이호는 그런 다윤의 얼굴을 붙잡았다. 지금 다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두 알고 싶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샅샅이 살피고 싶었다.

타자는 타석에 서서 투수와 심리전을 한다. 어떤 공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태로, 그가 저를 상대로 어떤 공을 던질지 예측한다. 그럴 때 이호는 투수의 눈을 본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위해서. 마치 그런 것처럼 이호는 다윤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눈 안에 어떤 공을 던질지 몰라 당황스러워하는 다윤의 감정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투수가 당황하면 타자가 유리하다. 이호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좋아해, 최다윤. 그러니까 너랑 친구 못 해.”

“…….”

“난 너랑 연애하고 싶어.”

혼란스러운 눈으로 최다윤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던진 공을 멋지게 받아쳤을 때, 투수의 눈을 보는 듯했다. 서이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최다윤을 흔들었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 * *

다윤이 5살이었을 때, 최다윤이 아닌 ‘윤’이란 이름으로 희망 고아원에서 살고 있었을 때, 다윤은 그때 서이호를 처음으로 만났다.

윤은 이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비슷비슷한 수준의 아이들과는 달리 이호는 번듯하고 안정적인 가정이 있는 아이였고, 가끔 부모를 따라 놀러 와 적선하듯 아이들과 함께 놀고는 사라져 버렸으니까. 윤은 그 단어가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적선’. 그들은 단지 불쌍한 아이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것뿐이다. 그런 사람들과 저 같은 사람들의 거리는 너무 커서, 다윤은 스스로가 더욱 비참하게 느껴졌다.

다른 아이들은 다 좋아했지만, 윤만은 이호를 싫어했다. 이호는 그런 윤이 안쓰러워 보였던 모양이었다. 그 조막만 한 손으로 매주 주말마다 와서는 건넸던 캐러멜과 동화책들이 아직도 눈에 선연했다.

“너 이거 좋아하지? 맨날 혼자 구석에서 책 읽으면서 먹었잖아.”

“…….”

“걱정 마. 우리 집에 이런 거 많아. 다음 주에 또 가지고 올게.”

아무리 무시해도 멀어지지 않는 이호를 보면서 윤이 마음을 열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결국 언젠가 한번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그가 건넨 것을 받았을 때 이호가 그런 윤을 보며 활짝 웃었다. 그때 이호는 저보다 키가 작았는데 활짝 웃고 있는 그 얼굴이 사랑스럽다고 느껴졌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는 저렇게 사랑을 주는 거에 거리낌이 없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윤도 이호처럼 되고 싶었다. 이호를 싫어하는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처럼 되고 싶다는 동경심이 남았다. 언젠가부터 그가 오는 주말만 매일같이 기다리게 되었다. 그 애는 결국 적선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결국 언젠가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윤아, 나는 네가 좋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은 이호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에게 버려지고 보잘것없는 윤에게 그렇게 말해 주는 이호를 사랑하지 않을 방법은 없었으니까. 윤은 그때를 기억한다. 그날 이후로 더 이상 그 고아원을 찾아오지 않았던 이호를, 최다윤이 된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중학교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때, 이호가 저를 기억하지 못해도 좋았다. 좋아한다는 그 말은 여전히 다윤의 마음 한편에 따스하게 남아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저는 행복하니 억울하거나 슬프지도 않았다. 오히려 고마웠다. 다시 나타나 자신에게 다시 한번 사랑을 느끼게 해 준 서이호에게.

“최다윤, 어디 아프냐?”

“응?”

“교수님이 과제 내주셨는데 뭐가 좋아서 그렇게 실실 웃냐.”

준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다윤을 보고 있었다. 옛 생각에 사로잡혀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나 보다. 다윤은 고개를 저었다.

어제 저를 좋아한다고 말했던 서이호를 떠올리자니 그때의 어린 서이호도 동시에 떠올랐다. 물론 다윤은 알고 있다. 이호의 마음을 받아 주면 언젠가 후회할 사람이 저라는 것을. 그 전에도 늘 생각했듯, 이호와 저의 관계는 평행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다윤은 어제 이호에게 한 말을 후회하지 않았다.

“안 돼.”

공이 날아왔다. 그 순간에 맞추어 배트를 휘둘렀다. 배트를 맞고 공은 느리게 땅 쪽으로 흘렀다. 전형적인 땅볼이었다. 이호는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다시 한번, 타격 폼을 잡고 앞을 바라봤다.

야구를 다시 시작한 지도 거의 2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코치님과 2군 감독님은 마음을 급하게 먹지 말고 천천히 예전 기량을 되찾으라 얘기했지만 이호는 마냥 기다리고 안도할 수가 없었다. 예전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타격 폼이 흐트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야구뿐만 아니라 어제 최다윤과 했던 얘기도 머릿속에서 자꾸 아른거렸다. 다시 한번 공이 날아오고, 이호는 있는 힘껏 스윙을 했다. 공과 배트가 맞닿지 못하고 헛스윙으로 이어졌다. 이호는 배트를 내려놓고 숨을 몰아쉬었다.

좋아한다는 말에 최다윤은 놀란 눈동자를 했다. 다윤을 흔들었다는 생각에 기뻐할 무렵이었다. 다시 한번 꼭 끌어안고 입을 맞추려는 서이호를, 최다윤이 막았다.

“안 된다고. 네가 나 좋아해도, 그래도 안 돼.”

안 된다니? 그래도 안 된다니. 이호가 인상을 찡그리며 한쪽 눈썹을 올렸다. 다윤은 그런 이호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설마 어제 했던, 자신을 좋아한다는 얘기는 다 거짓말이었단 말인가.

“너도 나 좋다며.”

“…….”

“거짓말이었어?”

이호가 애절한 얼굴로 다윤에게 물었다. 다윤은 난처한 듯 눈만 들어 서이호를 봤다가 이내 그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서이호도 알고 있었다. 최다윤은 제가 이런 표정만 지으면 어쩔 줄 몰라 하며 제 마음을 모두 털어놓고 만다는 것을.

어쨌든, 좋아한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면 대체 왜 저랑 연인은 할 수 없다는 건가. 서이호는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이미 볼 거 다 본 사이였다. 술김이긴 했지만, 저는 사실 술도 취하지 않았고 말이다. 그런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게 대체 뭐란 말인가.

역시, 여자 친구 때문일까. 서이호는 있지도 않은 최다윤의 여자 친구가 질투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데이트만 하고 오면 그렇게 울상을 지으면서 뭐가 좋다고 대체. 다윤을 그렇게 만드는 여자 친구란 존재도 싫었고, 이 와중에 다윤이 저를 받아 주지도 못할 만큼 그 여자 친구를 생각하고 있는 것도 싫었다.

“제발, 이번 한 번만 내가 하자는 대로 해 주면 안 되냐, 서이호.”

이호는 물끄러미 다윤을 내려다봤다. 다윤은 애절한 눈빛으로 이호를 보고 있었다. 그런 표정을 지으면 제가 다 넘어갈 줄 아는 듯했다. 사실 반쯤 넘어간 것 같지만.

하지만 이호도 이 부분은 양보할 수 없었다. 서이호는 다윤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쓸며 씩 웃었다. 언젠가 언론에서 살인 미소라고 불리던 그런 웃음을.

“싫어, 난 너랑 애인 아니면 안 해.”

“…….”

“내가 다 봐줘도, 이건 봐주기 싫어. 너 포기 안 해.”

다윤은 그런 저를 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었다. 그게 마음이 찌릿하니 아파서 서이호는 다윤을 끌어안고 애써 모르는 척했다.

“이호야, 훈련 잘되어 가냐.”

“네, 감독님.”

어제의 생각에 빠져 있던 이호가 벌떡 몸을 일으켜 감독을 향해 인사했다. 감독이 이호에게 다가와 아까부터 보고 있었던 타격 폼에 대해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보는데 내 마음이 다 급해지더라. 너무 조급해하는 것 같은데. 그것 때문에 배트가 너무 빨리 나가잖아. 마음 편히 먹어. 급할 거 없으니까. 아직 훈련 기간이고, 또 넌 남들보다 감각이 있어서 오히려 의식하지 않을 때 좋은 공이 나와.”

“……네.”

“워낙 잘하는 놈이니까. 나도 그렇고 1군 감독님도 그렇고, 너만 믿고 있다.”

이호는 그렇게 말하는 감독을 향해 웃을 수가 없었다. 감독의 얼굴과 아버지의 얼굴이 겹쳐졌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네가 야구를 할 수 있겠냐?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정신 차려. 눈앞에서 까만 재가 되어 사라진, 제가 가장 아끼던 글러브가 아른거렸다.

다시 돌아왔는데도 예전 트라우마에 아직 묶여 있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긴, 너무 오래도록 저를 옭아맸던 감정이라 한순간에 떨쳐 버리기도 쉽지가 않았다.

“일단, 1군 전지훈련 끝나고 나면 그쪽으로 복귀해. 다음 달 정도.”

“네?”

이호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무얼 그렇게 놀라냐는 듯, 감독이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1군 복귀라고 해도 지금은 비시즌이니까 다른 팀이랑 연습 경기 정도밖에 뛰지 않을 거야. 그 정도는 해야지 경기 감각을 다시 확실히 익히지. 다른 선수들이랑 호흡도 맞추고. 오랫동안 쉬었으니 그런 것도 필요해. 1군 감독님 말씀이니 그렇게 해라.”

“……하지만 전.”

뒷얘기를 차마 하지 못하고 이호는 목 뒤로 삼켰다. 저는 아직 부족한 게 많습니다. 그 전에 비해서는 실력도 터무니없습니다. 생각하고 있는 얘기를 밖으로 꺼내기는 쉽지 않았다. 감독이 모두 이해한다는 듯 이호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렸다.

“괜찮아, 너 정도면 1군 바로 적응할 수 있을 거다. 최근에 좀 2군에 오래 있긴 했지만, 원래는 거기서 뛰던 놈 아니었냐. 남은 기간 동안 서두르지 말고 굳었던 타격 폼 되찾는 거에만 집중해.”

이호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심한 놈이었다. 하여간, 야구나 연애나 제대로 하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호는 훈련이 끝나자마자 바로 다윤이 일하는 곳으로 왔다. 근처에 차를 세워 두고, 바로 건너편에서 물끄러미 그 술집을 쳐다봤다.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서 바깥에서 안이 훤히 보였다. 그 안에서 바쁘게 돌아다니는 최다윤이 보였다.

이호의 눈이 계속해서 그런 다윤을 좇았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바쁘게 서빙하고 있는 최다윤은 역시 너무나 귀여웠다. 가끔 무뚝뚝한 얼굴을 할 때면 잘생기기도 했지. 심지어 잠자리에서는 미치도록 섹시하다. 대체 최다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매력이란 뭘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이호는 계속해서 다윤을 봤다. 한번 의식하니 그 전에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다윤에 대한 생각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애초에 다윤은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사람인데.

그때, 다윤이 누군가와 함께 뒷문 쪽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다윤보다 키가 훨씬 작고 왜소한 거로 보아 친구 병규는 아닌, 같이 일을 하는 다른 아르바이트생 같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무언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서로를 보며 웃기도 했다.

“……!”

저도 모르게 손이 차 문 쪽으로 향했다. 무의식적으로 뛰쳐나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최다윤을 제 뒤로 감추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진정해라, 서이호.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리려 노력했다.

두 사람은 밖에서 한참을 얘기를 나누는지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다가 한참 후에야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불같은 서이호의 눈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지금만 해도 이렇게 질투 나서 미치겠는데 제 마음을 숨기고 친구나 하자니. 절대 못 할 일이었다. 다윤의 말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고 싶어도 그것만은 들어줄 수가 없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모두 지친 얼굴로 밖으로 나왔다. 병규의 얼굴은 더욱 심했다. 오늘 하루 종일 파김치가 되어 일을 하더니 끝나고 나서 더 지친 듯 기운이 없어 보였다.

“나 진짜 다신 술 안 마셔……. 우웩.”

“……나도.”

“그나저나 네 친구가 나 소개팅 해 준다 그랬는데, 얘기 없었어?”

이호랑 친해지게 하려고 그 자리에 부른 건데 정작 친해진 건 병규와 준구였다. 병규의 눈이 반짝였다. 다윤은 모르겠다며 어깨만 으쓱하자 병규가 시무룩해진 눈치였다. 괜히 술 마시고 순진한 애 바람 넣은 것 같아서 제가 더 미안해졌다.

“다음 주에 보자.”

“응, 먼저 들어가.”

병규가 손을 흔들며 사라지고, 다윤도 건너편으로 건넜다. 그런 다윤의 옆으로 아까 잠깐 다윤이 일을 도와주었던 시영이 다가왔다.

“이쪽으로 가, 다윤아?”

“어? 응. 시영이 너도?”

“음, 난 아니. 그냥 저기 건너편 편의점 들렀다 가려고.”

“아…… 그렇구나.”

다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걸었다. 그러다 순간 저 멀리 익숙한 차가 보였다. 서이호의 차인가 싶어서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살며시 찌푸렸을 무렵, 시영이 다윤의 한쪽 팔을 잡고는 말했다.

“……그, 아까 했던 얘기 말이야. 다윤이 너도 연극 좋아한다 그랬지?”

“응? 응.”

쓰레기를 버리러 같이 나가면서 했던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시영도 연극 영화과라는 얘기를 들어서 그 얘기를 했던 건데, 시영은 꽤나 들뜬 얼굴로 자기가 요즘에 하는 연극에 대해 장황하게 얘기를 했었다.

“대학로 가면 아는 선배가 있어서 연극 꽤 싸게 볼 수 있거든. 음, 나는…… 매주 공부할 겸 연극 보러 다니는데, 그, 이번 주에는 같이 다니는 친구가 일이 있다고 못 올 것 같다고 해서 말이야……. 너만 괜찮으면 같이…….”

“안 돼.”

제가 한 말이 아니었다.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바로 알았다. 누가 들어도 서이호 목소리였으니까.

툭, 하고 어깨에 손이 얹혔다. 언제부터 왔던 건지 찬 기운이 물씬 나고 있었다.

“아, 이호야, 안녕. 근데 난 다윤이한테 물어본 건데.”

“그러니까, 다윤이는 안 된다고.”

두 사람의 목소리가 낮고 까칠했다. 시영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이호를 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웃고 있던 시영의 얼굴이 차게 굳었다. 그건 이호도 마찬가지였다. 시영을 주시하는 와중에도 제 옷자락을 뒤에서 마구 끌어당기고 있었다.

“미안, 난 주말에 일이 있어서 안 될 것 같아. 대신에 학기 끝나고 평일에 가자.”

“응. 그래 좋아.”

일단 이야기는 마무리해야 할 듯싶어서 시영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이호를 노려봤던 얼굴을 풀고 시영이 활짝 웃었다. 먼저 가 보겠다며, 시영은 가겠다던 편의점도 뒤로하고 즐거운 듯 팔랑팔랑 걸어갔다. 목적 하나를 달성해서 기쁜 모양이었다.

“왜 그렇게 삐져 있어, 얼굴이.”

다윤이 뒤를 돌아 서이호를 봤다. 시영을 달래서 보냈더니 이젠 서이호가 잔뜩 심통이 나 있었다.

“삐진 거 아니야. 화난 거지.”

서이호가 그 말을 하고는 고개를 팩 옆으로 돌려 버렸다. 서이호의 목덜미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다윤은 그런 서이호의 목 위에 제 목도리를 둘러 주었다.

“……그런 식으로 해도, 안 봐줘.”

“봐 달라고 하는 거 아닌데.”

“왜 아닌데? 이거 나 꼬시는 거였잖아. 최다윤 다른 사람한테도 그래? 어?”

“……나 간다.”

다윤이 이상한 땡깡을 부리는 서이호를 뒤로하고 앞서 걸으려고 했다. 이호가 다윤의 손을 붙잡으며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까칠하고 차가운 손이 다윤의 따듯한 손과 맞닿아 있는 게 꽤 기분 좋았다.

“차 가지고 왔어. 타고 가자.”

다윤은 피식 웃었다. 불퉁한 얼굴도, 입술도 다 귀여웠다. 이게 바로 답도 없는 콩깍지인가. 하긴,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단단하게 끼어 있는 콩깍지였다.

결국 이호를 따라 차 쪽으로 걸었다. 이호는 다윤이 저를 따라와 주니 기분 좋은 듯 어느새 웃고 있었다.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 같았다. 역시 서이호는 전생에 개였던 걸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웃었다.

“훈련 끝나고 온 거야?”

“응.”

“피곤하지 않아?”

다윤은 물끄러미 서이호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두운 차 안에서는 자세히 보이지 않지만 분명 피곤할 터였다. 아무리 여기서 2군 훈련장이 그나마 가까운 거리라고는 해도 한 시간은 걸렸으니, 훈련하고 그렇게 왔다 갔다 하면 분명히 힘들겠지 싶었다. 그러면서도 오지 말라는 말은 하고 싶지가 않았다.

“피곤해.”

“어, 은근슬쩍 스킨십 하지 마.”

“너 엉큼하다. 안전벨트 매 주려는 거야, 안전벨트.”

제 쪽으로 훅 다가오길래 부러 밀어냈는데 장난기 가득한 말에 다윤은 괜히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벨트 정도야 제가 맬 수 있는데. 부끄러워 중얼거리는 소리를 서이호가 들은 것 같았다. 머리 위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서이호의 몸이 붙었다. 차가운 겨울바람 냄새와 서이호에게서 나는 특유의 향이 물씬 풍겨 왔다.

“……역시 은근슬쩍 스킨십 하는 거 맞잖아.”

제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벨트를 다 매 주고 나서도 서이호는 제 자리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 저를 끌어안았다. 어깨와 목덜미로 서이호가 웃고 있는 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 부드럽고 나른한 웃음이 새삼 좋아서 다윤은 더 밀어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좀만 봐줘.”

“……오늘 뭐 힘든 일 있었어?”

다윤의 물음에 이호가 깊게 한숨을 쉬던 것을 멈추고 씩 웃었다. 다윤은 그 웃음을 알고 있었다. 서이호가 지쳤을 때 짓는 미소. 허, 하고 낮게 들리는 그 작은 웃음소리. 그 소리를 들으며 다윤은 이호의 등 뒤로 제 팔을 가볍게 둘렀다. 스킨십을 자제해야 하는 건 알지만 그래도 위로해 주고 싶었다.

“응, 힘든 일 있었어.”

“무슨 일인데.”

“최다윤이 나를 안 봐 주잖아. 보고 싶어서 끝나자마자 달려왔더니 다른 여자애랑 데이트 약속이나 잡고.”

“뭐?”

“방금 걔랑, 진짜 연극 보러 갈 거야?”

제게서 몸을 떨어트린 이호가 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게 예쁘게 웃으면서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 하지 마. 진짜 연극 보러 갈 거냐고.”

“뭔 소리야, 이 뭉청아. 시영이 걘 친구거든. 약속했으니까 시간 되면 보러 가야지.”

“시영이? 왜 그렇게 다정하게 불러? 이름은 어떻게 알아?”

“……같이 아르바이트 하는데 이름 몰라서 되겠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다윤의 차가운 시선에 이호가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이상한 땡깡과 투정은 받아 줄 수 없었다. 다윤의 단호한 태도에 이호가 길게 한숨을 쉬고 포기하듯 알았다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다윤은 운전하는 이호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봤다. 역시, 조금 피곤해 보였다. 훈련이 고된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 다윤은 이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가 피곤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봤다. 어떻게 하면 위로를 해 줄 수 있을지도.

“어제 한 말 계속 생각해 봤는데.”

다윤이 이호의 기색을 열심히 살피고 있을 무렵이었다. 정적을 깨고 이호의 목소리가 다윤의 생각을 침범하고 들어왔다.

“역시, 나는 너랑 애인 아니면 못 하겠어.”

“아…….”

단호한 목소리였다. 다윤은 저도 모르게 푹, 한숨을 쉬었다. 이호가 그런 다윤의 한숨 소리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너도 나 좋다며. 나도 너 좋고. 그런데 뭐가 문제인데?”

“……좋은 거랑 사귀는 건 다르잖아.”

“뭐가 달라. 난 이유를 들어야겠어, 윤아. 네 여자 친구 문제인지, 아니면 아까 본 걔한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내가 싫은 건지.”

“확실하게 말하는데, 셋 다 아니야. 괜히 이상한 거 가지고 혼자 상상하지 마.”

그사이에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다윤이 어이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지금의 저는 연애를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무엇보다…… 제가 겁이 많다는 걸. 누군가를 떠나보낼 자신이 없어서 그 자리조차 만들고 싶지 않다는 걸. 그게 서이호라면 특히 더.

잠시 생각한 끝에 다윤은 입을 열었다. 시선은 이호에게서 뗀 채 바깥에 반짝거리며 제 빛을 뽐내는 네온사인 쪽으로 돌렸다. 도저히 이호의 눈을 바라보며 말할 수가 없었다.

“너 그때…… 그 새벽에 있었던 일 때문에 아주 잠깐 마음이 흔들리는 것뿐이야.”

다윤의 말에 이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다윤은 그런 이호를 미처 알아차리진 못하고 계속해서 말했다.

“넌 항상 그랬잖아. 누가 좋아한다 그러면 그냥 받아 주고 봤잖아. 그때 내가 했던 말이 아무래도 네 마음에 걸려서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난 진짜 너랑 사귀려고 그런 얘기 한 거 아니야. 그때 일은…… 내가 정말 미안해. 그러니까 이제 그 얘기는 그만 없었던 일로…….”

“왜…….”

제 말을 가로막는 이호를 향해 다윤이 고개를 돌렸다. 눈앞의 이호가 괴로운 듯 눈살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다윤은 저도 모르게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그런 이호를 바라봤다. 저런 표정을 하는 서이호는 처음이었다.

그가 그토록 좋아하는 야구가 잘 안 될 때도, 그는 그런 얼굴을 하지 않았다. 이호의 얼굴엔 늘 그의 안에서 나오는 근본적인 자신감 같은 게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 자신감이 완전히 사라진 얼굴. 그렇게 주눅 든 얼굴로 이호는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듯 시선을 내리고 괴롭게 눈가를 찡그렸다. 당장이라도 안아 주고 싶은 애절함이었다. 제가 잘못했다고,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아 달라고 다독이고 싶은 안타까움이었다.

“……왜 그렇게 얘기해, 윤아.”

“…….”

“……내 마음이 그렇게 가벼워 보여?”

다윤은 손을 뻗어 이호의 어깨를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았다. 미안하다고 다독이면서 어깨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알 것 같았다. 서이호는 그날 밤, 절대 아무 생각 없이 일을 저질렀던 것이 아니다. 저를 사랑한다고 말하던 애절한 얼굴이 결코 거짓이 아니었던 거다.

“……미안해.”

“갑자기 또 뭐가 미안해.”

이호가 다윤의 손길을 조심스럽게 밀어내고 고개를 숙여 그렇게 말했다. 완전히 주눅 든 모습이 사고를 치고 혼나는 강아지 같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저는 쳐다도 못 보고. 그래서, 이 상황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윤은 저도 모르게 웃다가 표정을 굳히려 노력했다.

“내가 예전에 네 마음 가볍게 여기고 넘겼던 거.”

“그건…….”

“너도 이랬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미안해서 미치겠어. 당장 그때로 돌아가서 그때의 나를 패고 싶어.”

말도 참 과격하게 했다. 다윤은 최대한 웃음을 갈무리하려 헛기침을 했다. 이호가 슬쩍 눈만 들어 올려 다윤을 봤다. 그러니까 진짜로 혼나는 강아지 같아서 애써 참았던 웃음이 다시 터져 나왔다. 서이호는 저렇게 주눅 들어 있는데 저는 웃고 있다니.

“그때 일이 왜 네 잘못이야. 나도 그때 겁쟁이였던 거지.”

정말 그랬다. 참기 힘들어 당장 저질러 놓고 막상 서이호의 거부의 얼굴이 두려워 피했던 건 최다윤이다. 최다윤은 무서워서 피하기만 했는데, 서이호는 아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서이호는 불도저처럼 다가왔다.

그런 서이호가 고마워서 다윤은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이호에게 얘기를 확실히 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동안 얘기할 수 없었던 길고 긴 이야기들을. 제가 왜 그토록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걸 무서워하는지. 왜 서이호를 자꾸만 밀어내야 하는지를.

“서이호, 너 내일 훈련 있어?”

“……없어.”

“그럼 내일 나랑 어디 좀 가자.”

뜬금없는 다윤의 말에 이호가 의아한 얼굴로 다윤을 쳐다봤다. 다윤은 단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디 가는데?”

“따라와 보면 알아.”

다윤의 다부진 얼굴에 이호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귀여운 놈. 다윤이 웃으며 그런 이호의 머리카락 위에 손을 올리려다가 멈칫했다. 언젠가 이호가 머리를 쓰다듬는 제 행동에 기분 나빠했던 것 같은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막 만져. 만져도 돼.”

뒤로 물리려는 다윤의 손을 이호가 끌어당겨 제 머리 위에 얹었다. 그러고는 더 쓰다듬어 달라는 듯이 고개를 살며시 기울이기까지 했다. 손가락 아래로 느껴지는 이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다윤은 그저 웃었다. 강아지가 사람으로 환생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개 같은 모습이었다.

“막 이렇게 만지게 두면 어떻게 해.”

“뭐 어때, 최다윤인데.”

“…….”

“넌 나한테 뭐든 해도 돼. 죽어 달라 그러면 죽는 시늉도 해 줄게.”

뭔 미친 소리냐고, 다윤이 이호의 팔을 툭 쳤다. 이호가 그제야 웃었다. 개죽이 같은 그 웃음을.

내일 제 얘기를 들어도 저런 반응일까. 제 상황을 듣고 이호의 고백을 거부한 이유를 수긍하고 알겠다고, 이제 마음을 접겠다고 할지도 모를 그의 모습을 떠올리니 조금 슬펐지만, 어쨌든 그게 최다윤이 원하는 반응이었다.

두 사람은 친구여야만 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 한편이 욱신거렸지만 다윤은 애써 그것을 무시했다.

* * *

다음 날 오전, 두 사람은 차를 타고 H대학 병원으로 가고 있었다. 다윤이 자신과 가자고 한 곳이 병원이라는 말에 이호는 의아했지만 일단 다윤이 하자는 대로 차를 운전했다.

다윤은 어딘지 모르게 긴장한 눈치였다. 자꾸 흘끔흘끔 창밖을 보는 것도 그렇고, 불안한 듯 손을 마주 잡는 것도 그렇고.

“서이호, 있잖아.”

“…….”

다윤이 긴장한 듯 입을 열었다. 제가 이름을 부르면 늘 응, 하고 대답하며 제 눈을 쳐다보곤 하는 서이호가 살짝 웃음기 있는 눈동자로 저를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걸 보며 다윤은 잠시 의아한 눈을 했다가 그 웃음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알겠어. 이호야.”

“응.”

다윤은 서이호의 반응 때문에 저도 모르게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다윤의 웃음을 듣고 나서 이호의 입술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오늘 너한테 얘기하려는 거, 진짜 아무에게도 말 못 했던 일들이야. 그러니까, 약속 하나만 하자.”

“무슨 약속?”

다윤은 잠시 말을 멈췄다. 이호도 다윤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얘기를 듣고 무슨 상황을 보든 나한테 화내지 말기야. 그리고,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고집 부리지 말고 그러자고 해 줘.”

“앞에 얘기는 들어줄 수 있는데 뒤에는 그러기 싫은데.”

“……왜.”

“몇 번 얘기했잖아. 너 좋아하는 것만큼은 포기 못 한다고.”

그러니까 그거 하나는 고집을 부리겠다는 소리였다. 다윤은 그 고집에 살며시 인상을 찡그렸다가 다시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풀었다. 어차피 서이호도 제 사정을 확실히 보고 나면 저를 이해해 줄 것이다. 제가 지금 연애고 뭐고 할 때가 아니라는 걸.

다윤은 눈을 깜박였다. 다시 긴장이 됐다. 조금은 떨리고 또 무서웠다. 현실을 말하는 순간, 바로 눈앞에 일어날 일들이. 그래서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못했던 것이다. 세아야 어쩔 수 없이 알게 된 케이스였으니 제가 직접 말을 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어떤 반응을 보일까. 불쌍하다고 생각할까. 연민할까. 서이호가 그런 표정을 지으면 저는 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괜찮다고 웃어야 할까. 아무것도 예상이 되지 않았다. 다윤은 눈을 깜박이며 창문을 바라봤다. 바깥으로 휙휙 지나가는 여러 건물들이 다윤의 마음을 심란하게 하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두 사람은 병원 로비에 들어섰다. 대체 누굴 만나려고 그러는 건지, 다윤은 아까 차에서 잠깐 얘기를 나누며 웃을 때 빼고는 계속 긴장 상태였다.

“다윤 오빠!”

로비에 서 있던 키 작은 여자애 하나가 다윤을 보자마자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윤도 웃으며 그 여자애를 향해 다가갔다. 이호는 본능적으로 다윤의 앞에 있는 사람을 경계하고 있었다. 혹시, 저 사람이 최다윤 여자 친구인가 싶어서. 저도 모르게 경계의 시선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다윤이 슬쩍 제 쪽을 쳐다봤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나도 금방 왔지. 오빠도 오늘 일찍 온 거 같은데?”

“친구 차 타고 와서.”

“친구?”

다윤의 말에 그제야 그의 앞에 있던 여자가 저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호는 여전히 불안하고 초조해서 여자에게 웃어 줄 수도, 사람 좋게 인사를 건넬 수도 없었다.

여자 친구 보여 주려고 데려온 건가? 내 마음 단념시키려고? 조금 속이 상하긴 했다. 저 여자와 최다윤은 정말 잘 어울려 보였으니까. 그런데 그런다고 제가 마음을 접을 줄 알았다면 그건 다윤의 착각이었다. 오히려 더 마음이 단단해졌다. 제 마음은 최다윤이 애인이 있다고 해도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다윤이 혹시나 애인과 헤어질 수 없다면 그가 헤어질 때까지 옆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절대로 마음을 접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서이호, 인사해. 내 사촌 동생 지혜야.”

“……뭐?”

속으로 다윤에 대한 마음을 확고하게 다지고 있을 무렵 다윤의 말에 이호는 순간 삐끗했다. 얼굴도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졌을 게 분명했다. 다윤은 그런 이호를 보며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여자 친구 없다니까 제 말 안 믿더니, 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안녕하세요, 박지혜예요. 무척 잘생기셨네요!”

지혜가 웃으며 붙임성 좋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여전히 얼이 빠져 있던 이호도 그제야 웃으며 지혜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서이호입니다.”

“와, 목소리도 무척 좋으시다.”

지혜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다윤의 뒤로 숨었다. 지금 보니 정말 어려 보이긴 했다. 다윤의 시선도 마치 친동생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고. 의식하고 나니까 그제야 보였다.

이호가 허탈하게 웃었다. 다윤은 그런 이호를 한 번, 지혜를 한 번 보며 지혜에게 말했다.

“너 남자 친구 있다면서.”

“아, 남자 친구는 남자 친구고 잘생긴 건 잘생긴 거지! 나 다윤 오빠 제외하고 이렇게 잘생기신 분 실물로 처음 본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면서 헤헤, 웃는 지혜는 딱 그 나이 또래처럼 순진하고 귀여웠다. 다윤이 웃으며 그런 지혜의 머리를 한번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올라가자. 기다리실 거야.”

“응.”

세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탔다. 지혜가 괜히 부끄러운 듯 먼저 앞서 걷고, 이호와 다윤이 그런 지혜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이호가 다윤에게 물었다.

“얘기한다는 게 이거야? 네 사촌 동생?”

“더 있어.”

석연치 않은 얼굴로 다윤이 한 번 씩 웃었다. 다윤은 뒷얘기는 해 주지 않고 먼저 걸었다. 더 얘기할 게 대체 뭘까. 저렇게 불안해하고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웃으면서. 덩달아 긴장한 이호가 다윤의 뒤를 따라 한 병실 앞에 도착했다. 도착한 병실 앞에서 이호는 한참을 말없이 병실에 있는 사람을 바라봤다.

“윤아.”

다윤의 어머님 연자가 환자복을 입고 병실 침대에 누워 다윤의 이름을 불렀다. 다윤은 아무렇지 않게 씩씩하게 웃으며 제 어머니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이호를 한 번 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아무 말 없는 서이호를.

“이게 누구야. 이호 아니니.”

“엄마, 잠깐, 잠깐만. 너무 무리해서 갑자기 일어나지 마요.”

이호를 보고 반가움에 몸을 일으키려던 다윤의 어머니가 현기증 때문에 몸을 휘청거리자 다윤이 급하게 몸을 잡아 주었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어머니를 간호하는 뒷모습. 이호는 인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도 잊고 다윤과 그의 어머니를 한참을 봤다.

짐작은 대충 하고 있긴 했는데 막상 눈앞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니 당황스럽긴 했다. 늘 다윤에게 안 좋은 일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가 말해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이렇게까지 심각한 일일 줄은 몰랐다. 이호는 물끄러미 다윤을 봤다. 그동안 내색 하나 안 하면서 속으로 얼마나 힘들었을지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먼저 물어봐 줄 것을. 그랬으면 다윤도 얘기해 왔을지도 모르는데. 이호는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그리고 이내 감정을 추스르고 고개를 들어 다윤을 쳐다봤다. 다윤의 시선이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런 그를 보며 이호는 안심하라는 듯 씩 웃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이호가 그제야 웃으며 어머니 옆으로 다가갔다. 몇 년 전, 다윤의 집에 가면 늘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반겨 주던 어머니의 얼굴이 아프다는 것을 증명하듯 많이 야위어 있었다.

“더 훤칠해졌네. 너무 잘생겨졌어.”

“하하.”

“저 진짜 놀랐어요, 고모! 다윤 오빠한테 이렇게 잘생긴 친구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거든요.”

다윤이 침대 옆에 놓여 있는 도구들과 수건들을 정리하는 사이, 세 사람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처음엔 당황한 듯 보이던 서이호도 꽤나 아무렇지 않게 앉아서 능글맞게 엄마와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였다.

“지혜야, 이 오빠가 야구 선수야. 엄청 유명한. 그건 알아?”

“헐, 아니요. 몰랐어요. 어쩐지! 몸도 엄청 좋으시더라. 제가 야구를 잘 몰라서……. 혹시 저 사인 좀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이호 그런 거 싫어해.”

다윤이 철벽 치듯 말하자 지혜가 입을 불룩 내밀었다. 다윤은 그런 지혜의 얼굴에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해 줄게.”

그런 다윤을 보며 이호가 씩 웃었다. 물론 원래는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최다윤 가족들에게 잘 보이려면 그 정도야 해 줄 수 있었다. 지혜가 신이 나서 다윤의 옆에 앉아 꼬물꼬물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이호에게 내밀었다. 이호는 내친 김에 사인에 사진까지 찍어 주었다.

원래 팬 서비스를 딱히 좋아하진 않았다. 야구만 하기에도 신경이 뾰족뾰족 날카로운 상태였으니 다른 사람을 돌볼 생각도 못 하던 나날들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기도 했고, 무엇보다 다윤의 가족이었으니까. 사인을 100장 해 달라고 해도 지금 당장 해 줄 수 있을 정도였다.

“단톡에 자랑해야겠다.”

이호가 건네준 사인을 받고 지혜는 기분 좋은 듯 입꼬리가 잔뜩 올라가 있었다. 다윤은 그런 지혜를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다윤이 웃는 걸 보니 이호의 마음도 덩달아 따듯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지혜야, 남자 친구는?”

“응, 조금 있다가 만나러 가려고요. 만나기 전에 잠깐 고모 보려고.”

“자꾸 안 와도 돼. 꽃다운 나이에 자꾸 병원에만 들락거려서 어떻게 해.”

“고모오-. 그런 말 하면 섭섭하단 말이야.”

지혜가 눈꼬리를 내리며 울상을 짓는 사이에 이호는 옆에 서 있는 다윤을 봤다. 다윤은 엄마를, 그리고 지혜를 번갈아서 보다가 복잡한 얼굴로 웃었다. 그런 다윤과 이호의 눈이 마주쳤다. 다윤은 이호를 보고도 웃었다. ‘이제 다 알았지?’ 하고 물어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호는 그런 다윤에게 웃어 보일 수 없었다. 지금 이 복합적인 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느새 완전한 밤이 되었다. 그제야 병실에서 나온 두 사람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한적한 병원 산책로에 나란히 마주 앉았다. 어색한 얼굴로 다윤이 두 손가락만 마주 잡았다.

“뭐 마실래?”

“아니.”

“따듯한 음료라도……. 춥잖아.”

제가 더 춥게 입고서는 또 다른 사람 걱정이었다. 최다윤은 항상 그랬다. 그게 저든 아니면 다른 사람이든. 중학교 때도 다정하고 친절한 성격으로 유명한 아이였지만 그 더 정도가 심해졌다는 걸 대충은 눈치챘어야 했는데.

이호는 당장이라도 다윤을 안아 주고 싶었다. 그런데 일단은 꾹 참았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다윤을 보며 말했다.

“나한테 거짓말한 거 두 개 있지?”

“……어.”

“여자 친구 있다고 해서 내 속 썩인 거랑.”

“야, 내가 언제 네 속을…….”

“어머님 아프셔서 매번 병간호하느라 힘든 거 나한테 말 안 해서 또 속 썩인 거.”

다윤은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애잔하고 사랑스러운 얼굴이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린 다윤이 작게 중얼거렸다.

“화 안 내겠다고 했잖아.”

“화내는 거 아니야. 속상한 거지.”

그래, 그 감정이 맞았다. 병실에서 다윤의 어머니와 얘기하는 내내, 다윤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마다 생각했다. 제 마음이 왜 이렇게 복잡한지에 대해서. 속이 상한 거였다. 다윤에게, 그리고 저에게.

“너랑 내가 그런 얘기도 못 할 사이인가 싶어서. 최다윤이 서이호를 그 정도로밖에 생각 안 하는구나 싶어서.”

제 말에 다윤은 아무 말이 없었다. 밤공기가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다윤은 한참 뒤에야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무서워서 그랬어.”

“…….”

“몇 년 안 된 일이야. 아버지 돌아가시고, 그 이후에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지셨거든. 예전에 완치됐던 암도 재발하고……. 다 최근 1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야. 나한테도 너무 갑작스러워서…… 모든 게 사실이 아닌 것 같아. 가끔 눈을 뜨고 일어나면 다시 예전처럼 부모님이 나를 보고 웃어 주실 것 같아서…….”

“…….”

“입 밖으로 내면 그 환상조차 사라질 것 같아서 무서웠어.”

다윤은 눈을 감았다. 마치 눈앞에 닥친 현실을 보기 싫다는 듯이. 이호는 그런 다윤을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바라봤다. 그가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두었다.

“그 집도 그래서 그렇게 둔 거야. 나만 살기엔 큰 집이긴 하지. 근데…… 그렇다고 팔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고 싶진 않더라. 곧 엄마가 돌아오실지도 모르는데.”

다윤이 그렇게 말하고 애써 웃었다. 애써 웃는 다윤의 눈가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오히려 서이호가 인상을 찡그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울어야 할 건 최다윤인데. 최다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고 있어서 더 마음이 아팠다.

“안아 줄까?”

언젠가 그렇게 물었던 최다윤의 얼굴을 기억한다. 제 아픔을 꺼냈을 때 다윤은 여전히 그 따듯한 얼굴로 그렇게 물었었다.

“……뭐야, 왜 이래.”

“가만히 있어.”

이호는 그때의 다윤처럼 물어보지 않고 다윤을 안았다. 아까부터 내내 이러고 싶었다. 안아 주고 싶었고, 위로하고 싶었다. 얼마나 아팠어? 얼마나 힘들었어? 그렇게 물어 주며 그의 슬픔을 알아주고 싶었다. 다윤은 서이호의 말대로 얌전히 있었다. 한 평도 안 되는 제 품에서 다윤은 고개를 푹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그런 다윤의 머리카락 위에 제 입술을 꾹 눌렀다. 다윤은 스킨십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 정도는 위로로 받아 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해했지? 나는 연애할 마음도 없고, 할 처지도 아니고…….”

한참을 안겨 있던 다윤이 중얼거렸다. 다윤의 잠긴 목소리를 들으며 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어.”

이번엔 서이호가 순순히 대답했다. 서운하다는 듯한 표정이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게 보였다. 이호는 그런 다윤을 더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꾹꾹 참았다.

“너 힘들게 안 할게. 계속 애인 하자고 조르면, 안 그래도 심란한데 더 심란하겠지.”

다윤을 힘들게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다윤이 힘들다면 제 마음 정도야 접어 둘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호가 다윤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두 사람의 눈높이가 같아지자 이호가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기다릴게. 네가 괜찮아질 때까지.”

“……뭐?”

생각지도 못 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다윤이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살짝 벌렸다. 허, 하고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다윤이 이호에게 되물었다.

“……너 내 말 이해 못 했어?”

“이해 다 했어. 그러니까, 여러 사정 때문에 지금은 받아 줄 수 없다는 거잖아.”

“그래.”

“그러니까 기다리겠다고.”

다윤은 그런 제 단호한 대답에도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이호가 그런 다윤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물었다. 애절하게, 봐 달라는 강아지 같은 눈빛으로, 최다윤이 가장 약한 제 눈빛으로.

“내가 이젠 싫어?”

“아니, 네가 싫은 게 아니라……!”

“그럼, 언제든 난 좋아. 네가 다시 마음이 편해질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 내가 싫어진 것만 아니면.”

다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곤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네가 퍽도 그러겠다. 맨날 수시로 사귀는 사람 바뀌는 놈이.”

“너한테는 내가 진짜 신뢰도가 0인가 보다. 알겠어, 이번 기회에 네 인식도 좀 바꿔 보지 뭐.”

모두 다 내 업보니까. 이호가 그렇게 중얼거리니 다윤은 그제야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대체 왜 좋은데.”

“그게 중요해?”

“……어. 중요해.”

다윤의 말을 듣고 이호는 곰곰이 생각했다. 왜 좋으냐고 물어본다면…… 그냥 좋으니까. 최다윤만큼 제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저를 편안하게 해 주는 사람도 없으니까. 잘 때 입술이 살짝 벌어지는 것도 귀엽고, 씻고 나오면 밤톨 같은 머리가 위로 잔뜩 뻗쳐 있는 것도 섹시하고, 어깨 부근에 있는 점은 또 어찌나 매력적인지.

정말 하나부터 끝까지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을 때, 다윤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연애하자고 말하는 것보다 네 마음이 식는 게 훨씬 빠를걸.”

하, 하고 이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최다윤은 모른다. 서이호의 마음 크기를. 그래, 그러면 짐작하게 해 주는 수밖에. 사실 저조차도 처음 느껴 보는 마음이라 얼마만큼의 크기인지 본인조차 확신할 수 없었으니.

최다윤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옆에서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있었다. 괜찮다. 그 정도 기다리고 구애하는 것쯤이야. 최다윤이 지금 당장 힘들다고 한다면 서이호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이호가 피식 웃었다. 어떡하지, 너무 좋다. 이렇게 좋아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최다윤이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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