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그냥, 친구?
최다윤은 모르겠지만 서이호는 어젯밤 몇 년 동안 웃지 못한 걸 한꺼번에 웃은 기분이었다. 평소에는 웃을 일이라고는 전혀 없던 서이호는 최다윤을 다시 만난 것만으로도 실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최근 이호는 더 이상 야구를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어깨 부상을 겪고 나서 계속되는 슬럼프 때문이었다. 분명히 좋아서 시작한 야구는 제 어깨 위의 커다란 짐이 되고 있었다. 야구공이 날아오면, 이호는 도망치고 싶었다. 그토록 사랑하던 야구 배트를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한심한 자식.”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그만둬.”
그렇게 말하며 아버지의 얼굴에 희미하게 퍼진 웃음을 이호는 보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제가 조금 더 잘하면 그런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상황에서 그토록 바라던 아버지의 미소라니. 이호는 허탈함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아쉬운 기색을 내비치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잘됐다는 얼굴이었다. 모든 게 허무해졌다. 이호는 제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렸는지 이유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아버지는 고리타분한 남자였다. 여자는 얌전히 좋은 집안에 시집을 가야 했고, 아들은 자신이 일구어 낸 사업을 이끌어야 한다고 믿는. 그런 아버지에게 사업을 하고자 하는 야망을 가진 자신의 누나 시호와 아버지가 바라는 일이 아닌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자 운동을 하는 이호가 눈엣가시 같았다는 걸 인정한다.
그런 아버지를 설득하려면 제가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열심히 하고, 더 잘하면 그땐 인정해 주실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모두 제 착각이었다. 제가 아무리 잘해도 아버지 눈에 제가 하는 건 쓸데없는 공놀이에 불과했다. 정해진 탄탄대로의 길을 포기하고 어리석게 다른 길을 걷는 멍청한 아들. 최연소 사이클링 히트 보유자가 돼도, 신인 MVP를 받아도, 아버지의 태도는 항상 같았다.
이호는 지금까지 쌓아 올렸던 것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애초에 제가 왜 야구를 시작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자 했던 모든 노력들이 모두 헛수고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니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서이호, 이거 안 받을 테니까 도로 가져가.”
“……감독님.”
“너 가능성 충분한 놈이고, 우리는 너 놓아줄 생각 없다. 부상 슬럼프 때문에 힘든 거 알고 있어. 정 그러면, 쉬다가 와. 두 달 시간 줄게.”
“저 못 합니다.”
“서이호.”
이호를 다그치는 시선과 말투에도 이호는 눈 하나 껌벅하지 않았다. 이미 이호의 마음은 굳어 있었다. 야구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는 것에 더 가까웠다.
“내가 너에게서 본 가능성, 가볍게 보고 말한 거 아니고, 갑자기 못 한다는 너 이렇게 해서라도 붙잡고 싶은 건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
“마음잡고, 돌아와라.”
제 단호한 태도에도 감독은 그렇게 말하고 이호를 돌려보냈다. 원치 않은 휴가를 받고 나서 이호는 그 누구의 연락도 받지 않았다. 약 10년간 야구를 하면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모두 야구와 관련된 이들뿐이었으니까. 그 누구와도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야구라면 이제 토 나올 정도로 지긋지긋했다. 그렇게 사랑하고 집착하던 것이 저를 아프게 갉아먹었다.
야구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온 나날들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저는 아버지 말대로 쓸데없는 짓을 하다 시간을 낭비해 버린 한심한 인간일지도 몰랐다. 점점 고립됐다. 이호는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세준에게서 우연히 연락을 받게 되었다. 세준은 고등학교 시절 야구에는 절대 어떤 지원도 해 주지 않겠다는 아버지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알게 된 형이었다. 유일하게 야구와 관련되지 않은 인물. 그라면 만나도 괜찮지 않을까, 아르바이트 일을 하다 보면 조금이나마 기분이 나아질까 싶어서 가게 된 거였다. 사실 그대로 있다가 정말로 죽을 것 같기도 했고. 동아줄 잡는 심정으로 그렇게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서이호 선수 맞죠? 대박, 저 유니콘즈 팬인데!”
“저번 한국 시리즈 때는 아쉽게 패했지만, 그래도 쭉 응원하고 있어요! 왜 연습 안 하고 여기 온 거예요?”
보는 사람마다 잡고 한국 시리즈, 야구, 슬럼프 얘기를 물어 오니 이호의 얼굴에서 점점 웃음이 사라졌다. 잊고 싶은 기억을 자꾸 끄집어내니 좋을 리가 없었다. 야구를 피해 달아난 곳에서 또다시 야구라니.
괜히 왔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이 회식 자리에까지 앉아 있게 됐지만, 이호는 돌아가면 다시 오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 가겠다는 핑계를 대고 뒷문으로 도망치려는 속셈으로 걸어가던 그때였다.
“그, 그럼! 나랑 최다윤이랑 엄청 친하지……!”
최다윤. 저도 모르게 그 이름 하나에 우뚝 멈춰 섰다. 이호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글동글 밤톨 같은 뒷모습. 이호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최다윤이라는 그 세 글자를 듣자마자 이호의 기억이 아주 오래전으로 돌아갔다. 중학교 시절, 밤톨같이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얼굴의 최다윤. 반 아이들 누구나 좋아했던, 친절하고 다정한 최다윤.
중학생 시절 이호는 친화력이 좋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제가 야구부 활동을 하면서 일반계 학생들을 무시한다는 이상한 소문까지 돌아 반 아이들 사이에서 겉돌았던 자신에게 다윤은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 주었던 아이였다. 서이호가 기억하는 최초의 친구.
다른 사람들의 시선 따위 아랑곳 않고 이호는 웃으며 다윤의 이름이 들린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에 까맣고 뒤쪽 머리가 이리저리 뻗쳐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제가 기억하는 최다윤이 맞았다. 거의 7년이나 못 본 사이였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툭, 하고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까이 오니까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제가 알고 있던 그 최다윤이 맞았다.
“윤아?”
다윤이 뒤를 돌아봤다. 까만 밤톨 같은 머리가 조금 길었다. 젖살이 빠진 건지 선이 갸름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제가 기억하는 다윤의 모습은 얼굴 안에 남아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이호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했다.
“최다윤, 맞지?”
하지만 다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자신과 달리 무척 난처하다는 얼굴이었다. 이호는 혹시나 싶어서 물었다.
“나 기억 안 나?”
자신은 이토록 선명하게 기억하는데. 거의 9년 만이었다. 중학교 졸업 이후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으니까. 중학교 때의 즐거운 기억들이 이호의 머릿속으로 갑작스럽게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다윤이 난처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당연히…… 당연히 기억하지. 오랜만이네.”
이호는 그에 활짝 웃었다. 최다윤, 맞구나.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도망치려던 것을 취소하고 이호는 다윤의 옆에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다윤은 그런 이호가 불편한 듯했지만, 이호는 다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오랜만에 만난 다윤은 조금 더 날카로워진 인상이었지만 그때처럼 밤톨 같은 귀여움은 여전했다. 이호는 제 시선을 피하는 다윤을 물끄러미 계속해서 바라봤다.
“나도.”
“…….”
“나도 주라, 윤아.”
부러 다윤 쪽에 있는 맥주를 달라며 손을 뻗어 말을 걸기도 하면서 이호는 다윤에게 계속해서 제가 있다는 걸 상기시켰다. 다윤은 여전히 이호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불편한 티를 내고 있었다.
다윤이 따라 준 맥주를 마시며 이호는 내내 다윤을 쳐다봤다. 저렇게 불편한 티를 내는 건,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던 일과 관련이 있는 거겠지. 어떻게든 연락을 해 보겠다며 집 앞까지 찾아갔을 때, 오지 않는 다윤을 보며 느꼈다. 제가 보고 싶지 않은 거구나, 하고.
다윤이 왜 그랬는지 대충 짐작만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때, 최다윤이 고백했던 것을 이호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장난이라고 말하고 넘기려 했지만 그의 태도가 그날 이후로 분명히 변했다는 건 서이호가 더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윤이 그때 그 고백을 후회하는 것처럼, 서이호도 그랬다. 다윤과 멀어지고 나서, 그때 그 고백 얘기를 다시 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 다윤은 그 얘기만 나오면 무조건 피하고 봤는데, 그런 다윤을 억지로라도 붙들고 얘기했어야 했다고 매번 후회했다. 그것 때문에 다윤과 멀어지게 된 거였으니까. 이호에게 다윤은 무척 특별한 친구였다.
다윤은 주변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와 함께 있으면 온 마음과 몸이 편해졌다. 아버지와 다투고 나서도 다윤과 있으면 그 기분이 싹 사라지곤 했다. 그 누구 하나도 싫어하는 사람 없는, 그런 사람. 그런 다윤과 친구라는 게 자랑스럽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두 번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저를 피해 도망간 최다윤의 뒤통수를 쫓았다. 뒷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얼굴 위로 쏟아지고 당황한 듯한 최다윤의 얼굴도 보였다. 이호는 저를 피해 도망가려는 다윤의 앞을 가로막았다.
“최다윤.”
“어, 어?”
“나한테 할 말 없어?”
다윤은 다른 쪽을 바라보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지만, 이호는 여기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너와 다시 친해지고 싶었다. 너는 내게 가장 소중한 친구니까.
* * *
고마워, 서이호. 도착하면 연락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