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CHAPTER 1. 다정한 최다윤 (1/13)

CHAPTER 1. 다정한 최다윤 

다윤은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부터 찾아 들었다. 환한 휴대폰 불빛이 다윤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위를 비췄다. 휴대폰 불빛 때문에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어 반쯤 눈을 감은 상태였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다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세수하기도, 눈곱 떼기도, 이 닦기도, 그렇다고 몸을 일으키는 일도 아니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뜨고 다윤은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스포츠난을 눌렀다. 그리고 열심히 찾았다. 서이호, 서이호, 서이호……. 그 이름 세 글자를.

“끙…….”

하지만 그런 노력을 배신하듯 오늘도 서이호의 소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며칠 전 올라온 ‘서이호 선수, 부상 이후 계속되는 침체…….’, ‘와이 유니콘즈, 이대로 쇠퇴의 길을 걷나…….’ 같은 짜증 나는 기사만 떠 있을 뿐이었다. 다윤은 스포츠난을 벗어나 이번엔 구단 공식 인스타 계정에 들어갔다.

11월은 프로 야구 비시즌이긴 했지만 공식 인스타그램에는 팬들을 위한 연습 영상이나 사진 같은 것이 종종 올라오곤 했다. 이번에도 다윤은 업데이트된 사진 속에서 서이호를 찾으려고 했으나 실패였다.

대체 왜지. 평소라면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하고 있을 서이호를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다니. 아침부터 우울해져서 작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른 소식이라도 없을까 싶어서 이번엔 포털 사이트에서 서이호 이름을 검색했다.

[와이 유니콘즈의 핵심 같은 4번 타자, 서이호. 앞으로의 행보.]

구단 팬이 서이호에 대해서 조목조목 자신의 팬심을 섞어 쓴 글이었다. 지금은 부상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지만, 최연소 사이클링 히트 보유자로 앞으로 꾸준히 지켜봐야 한다고. 도박과 음주 운전 논란으로 와이 유니콘즈 핵심 선수들이 빠져나간 가운데 서이호 선수가 유일한 희망이 될 거라고.

서이호만큼 나이도 어리고 무엇보다 저력까지 있는 야구 선수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다는 이야기. 어서 부상을 회복하고 다시 예전 기량을 찾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까지. 다윤은 글을 읽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면서 공감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 글을 프린트해야지 싶었다. 직접적으로 좋은 소식은 없었지만, 그래도 좋은 글을 봐서 기분이 좋아진 다윤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몇 년이 되었는지 모른다. 야구 선수 서이호의 팬이 되어 버린 건. 아마 정확히 말하면 중학교 때부터이지만 그와 인연을 완전히 끊고 나서부터로 계산하면 약 7년 정도였다.

“……서이호, 오늘도 힘내라.”

다윤은 책상 앞에 붙여 놓은 서이호의 사진을 보며 중얼거렸다. 중학교 때처럼 절친 포지션은 아니더라도, 멀리서 이렇게 응원하며 지켜볼 수 있다는 것도 다윤에게는 행운이었다. 그때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했으니까.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고 친구로 지내는 건 힘든 일이었으니, 차라리 아예 멀리 떨어져서 팬이 되어 버리는 게 나았다.

다윤은 날카로운 눈매를 한 서이호의 사진을 보며 웃었다. 매일 아침을 이호의 소식으로 시작하는 다윤은 서이호를 짝사랑해 온 지 이제 거의 9년 가까이 되어 간다.

최다윤은 그토록 질기게도 서이호를 좋아해 왔다.

* * *

“무슨 리포트를 수기로 쓰냐고.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준구가 툴툴거리며 도서관 책상에 엎어졌다. 다윤은 그런 준구의 머리 위를 쿡, 찔렀다. 그러자 동태가 와서 인사할 만큼 게슴츠레한 준구의 눈이 다윤에게로 향했다. 눈 아래에 다크서클이 심하게 져 있는 게 아무래도 어제 또 술을 마신 모양이었다.

“너 또 어제 술 마셨냐.”

“역시 예리해, 최다윤.”

“딱 보면 알지.”

“하……. 새벽 3시까지 마셨더니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으윽.”

쓰던 리포트를 잠시 내려 두고 다윤은 턱을 괴고 준구를 봤다. 준구는 끙끙거리며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그러게 수업 있는 날은 적당히 마시라니까.”

“지금 나 꼬시는 거냐, 최다정. 안 통한다.”

“죽고 싶어?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다윤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엎어진 상태로 준구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다윤이 ‘다정이’라는 별명을 엄청나게 싫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놀릴 의도로 그러는 거였다. 그런 준구를 보며 다윤은 괜히 걱정해 줬다며 혀를 찼다.

“하여간 최다정, 습관성 다정이라니까.”

그 말이 불만이면서도 딱히 반박할 수는 없었다. 다윤은 그러고 싶지 않으면서도 꽤 남을 잘 챙기는 편이니까. 준구의 말대로 ‘습관성 다정’이 맞았다. 그것은 배려심 넘치고 언제나 다정하신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었다. 언제나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자랐으니 몸에 밴 거였다. 몇 년 전 일 때문에 더욱 그랬고…….

우울한 생각이 들려는 것을 피하려 다윤은 다시 리포트에 시선을 두고 말했다.

“시끄러워. 과제나 해라.”

“네에, 네에. 최다정 님.”

준구가 그제야 몸을 일으켜 제 과제를 마저 하기 시작했다. 다윤은 부러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저와는 어울리지 않는 별명과 성격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날카롭고 무뚝뚝한 인상이어서 다윤은 그 별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정이라니. 뭔가 간지러운 느낌도 들고.

“어, 이거 뭐냐.”

집중력이 5분도 채 안 가는 준구가 다윤의 리포트 아래에 삐죽 튀어나온 종이를 순식간에 채 갔다. 다윤이 급하게 그것을 도로 뺏으려고 해도 막무가내로 몸을 뒤로 쭉 빼고는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헐, 최다윤. 너 와이 유니콘즈 팬이었냐? 야구 좋아하는지는 몰랐는데.”

“얘기 안 했으니까. 줘.”

“근데 서이호 글이네? 서이호 팬이냐? 그렇게 인쇄까지 하면서 가지고 다닐 정도면…….”

“내놓으라고.”

확, 하고 다윤이 준구의 손에 있던 것을 채 갔다. 종이가 조금 구겨져서 서이호의 얼굴에 살짝 실금이 갔다. 그 때문에 다윤도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보다 훨씬 예민하게 반응하는 다윤의 행동에 준구의 얼굴에 장난기가 올라왔다.

“진짜 팬인가 본데? 그나저나 요즘 그렇게 인쇄하면서 스크랩하는 사람들이 어딨냐? 다 패드나 휴대폰에 저장하지.”

“난 이게 좋아서.”

다윤은 손을 펴서 종이의 결을 다시 살리고 있었다. 참 정성이네……. 그런 생각을 하며 준구는 다윤을 물끄러미 봤다. 그나저나 준구는 다윤이 야구에 관심이 있는지 전혀 몰랐다. 그래도 명색이 대학교 동기 중 가장 친한 놈인데 이토록 무심했다니. 준구가 신이 나서 야구 얘기를 했다. 안 그래도 리포트 쓰느라 지루했는데 잘됐다 싶었다.

“그 팀 저번 한국 시리즈에서 아쉽게 탈락했지? 매번 우승하더니. 갑자기 훅 떨어져서 아쉽긴 했지. 그때 서이호 부상만 아니었어도.”

“……그러게.”

“난 엑스 로얄즈 팬이거든. 다음에 경기하면 같이 가자. 내가 양보해서 너네 팀 가 줄게.”

“그러든가.”

“아, 맞다! 나 아는 사람이 와이 유니콘즈 선수인데 너 서이호 선수 좋아하면 한번 부탁해 볼까? 만날 수 있게?”

“아니, 됐어.”

“왜? 좋아하잖아.”

“……됐어. 별로 만나고 싶진 않아.”

다윤은 그렇게 말하며 ‘이제 리포트 쓰자’, 하고 이야기를 끝냈다. 아까 서이호 글을 펼 때까지만 해도 엄청나게 공을 들이길래 그런 얘기를 하면 좋아할 줄 알았더니 영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야구 선수는 그냥 구단 속 선수로서만 좋아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니, 현실 에서는 만나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윤은 그 후에도 야구에 관한 얘기로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혼자만 떠들던 준구도 흥미를 잃어 말을 멈추고 리포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종종 머리가 아파 눈가를 찌푸리며 리포트를 쓰고 있는데 다윤이 제 옆에 있던 물을 준구에게 내밀었다. 이번에도 준구의 눈빛이 장난기 가득하게 변해 무언가 말을 하려는 찰나, 다윤이 급하게 내밀었던 물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조용히 해라. 됐어, 먹지 마.”

“아!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눈빛이 더러웠어. 기분 더러워졌어.”

“아아아아, 최다윤 님. 물 주십쇼.”

하여간 최다윤. 저렇게 놀림 받아도 어떻게 매번 그러니. 정말 준구는 다윤의 몸에 밴 다정이 재밌었다. 아마 최다윤은 자신이 싫다고 해도 평생 최다정으로 살 팔자였다.

오후 수업이 다 끝나고 다윤은 오후 늦게 아르바이트에 왔다. 사장인 세준은 뮤직 바라고 주장을 하는 술집이었다. 술을 제조하는 긴 테이블이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리 봐도 그냥 술집이었는데 세준은 곧 죽어도 자신의 가게는 바라며 우겼다. 어차피 바든 술집이든 돈만 벌면 장땡이었기에 다윤은 그러려니 했다.

“다윤! 오늘 일찍 왔네.”

“다윤이 왔어?”

가게 안에 들어서자마자 사장인 세준을 비롯해서 직원 몇 명이 다윤에게 인사를 건넸다. 꽤 규모가 큰 술집이어서 아르바이트생이 꽤 많은 편이었다. 다윤은 그들의 인사를 받아 주고는 유니폼이나 마찬가지인 앞치마를 둘러멨다.

“자, 자. 잠깐 주목. 저번에 재빈이 아르바이트 그만뒀잖아? 공백 좀 메우려고 오늘만 잠깐 아는 동생 불렀는데, 곧 올 거야. 다들 오면 편히 맞아 주고. 아, 쫌 유명한 놈인데 괜히 아는 척해서 귀찮게 하지는 말고.”

“네.”

사장인 세준의 말에 다들 누구지? 하면서 호기심을 드러냈다. 다윤도 내심 궁금하긴 했지만 곧 누가 오든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관심을 껐다. 다윤의 옆에서 물컵을 닦고 있던 병규만이 엄청난 호기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누구지? 최다윤, 넌 안 궁금하냐?”

“별로.”

“여자였음 좋겠다.”

“적당히 좀 해라, 병규야.”

“뭘! 내가 뭘!”

다윤이 살짝 병규를 노려보자 병규가 억울하다는 듯 다윤에게 소리쳤다. 병규는 참 여자를 밝히는 편이었다. 그 와중에 한 번도 여자 친구를 사귀어 본 적 없는 모태 솔로라서 더 안타까웠다.

“최다윤 넌 몰라……. 인기 많은 넌 내 슬픔을 모른다고.”

병규가 시무룩해진 어깨를 하고는 중얼거렸다. 인기가 많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윤은 헛소리하지 말라며 일축했지만 병규는 침까지 튀겨 가며 열변했다.

“저번에 그만뒀던 유미도 너 좋아했고! 그 누구냐! 내가 좋아했던 선주도 너 좋아하고! 솔직히 이 바 아르바이트생 중에 너 안 좋아한 애가 없다! 그래 놓고도 모른다고 발뺌할 거냐?”

“병규야, 침 튀긴다.”

옆에 지나가던 윤지가 웃으며 말하자 병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여자만 다가오면 저렇게 얼굴이 붉어져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놈이 무슨. 다윤은 병규를 무시하고 병규가 닦던 유리컵을 다시 닦아 내기 시작했다.

“어, 왔다. 서이호! 간만이네!”

“형, 오랜만이네요.”

“자식, 프로 선수 되더니 더 멋있어져 가지고. 자, 소개할게. 이쪽은 서이호. 오늘만 잠깐 일 도와줄 거야.”

“안녕하세요.”

“헐! 혹시 야구 선수 아니에요?”

“맞는 거 같은데? 대박! 여긴 무슨 일이에요?”

순간 가게 문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많은 알바생들이 문 쪽으로 향했다. 병규의 시선도 문 쪽으로 향했다. 실망스러운 듯 아쉬워하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기대했던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아닌 남자라는 사실에 실망한 모양이었다.

그런 병규를 위안할 정신이 다윤은 없었다. 낯설지 않은 이름에 낯설지 않은 목소리까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다윤은 급하게 바 아래쪽으로 몸을 감추었다. 병규가 의아한 얼굴로 그런 다윤을 내려다봤다.

“뭐야, 최다윤, 왜 그러냐.”

저를 미친놈 쳐다보듯이 보고 있는 병규를 무시하고 다윤은 눈만 흘끔 들어 문 쪽을 봤다. 설마, 설마. 혹시나 했다. 제가 아는 그는 이 시간에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니까. 다윤은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들어 소란스러운 쪽을 바라봤다.

서이호, 자신이 알고 있던 서이호가 맞았다. 최다윤의 중학교 동창이자 지고지순한 짝사랑 상대, 와이 유니콘즈의 핵심 타자, 서이호. 사람들 사이에 가린 상태임에도 키가 무척 커서 그가 제가 알고 있던 서이호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미친…….”

다윤이 저도 모르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대체 왜 네가 여기 있어?

당장이라도 달려가 멱살을 붙들고 물어보고 싶을 만큼 궁금해서 미칠 것 같으면서도, 다윤은 최대한 이호가 저를 볼 수 없게 몸을 아래로 내렸다. 서이호가 저를 발견해서는 안 된다. 절대로.

*

그 일은 서이호가 프로 야구 선수로 데뷔하기 몇 년 전 일어났다.

다윤과 이호가 단짝 친구였을 시절. 두 사람은 증학교 시절 같은 반이었고, 다윤은 야구부도 아니었지만 그저 그와 옆자리였다는 이유만으로도 꽤나 친하게 지냈다. 점심시간에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가끔 다윤의 집에서 함께 게임도 하는, 그런 사이. 누군가 다윤에게 단짝 친구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서이호라고 대답할 수 있을 정도.

그날도 평범한 날 중에 하루였다. 서이호의 기분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은 날이었고, 드물게 훈련을 땡땡이치고 다윤의 집으로 와서 함께 게임을 하던 그때. 옆에서 느껴지는 이호의 온도 때문에 마음이 두근거려서 미칠 지경의 평범한 어느 날이었다.

“아, 이제 진짜 못 하겠다.”

서이호가 바닥으로 벌렁 드러누웠다. 게임기는 한쪽으로 치워 둔 채였다. 다윤도 그런 이호를 따라 누웠다. 바로 옆에서 고른 이호의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피곤해.”

이호가 그렇게 말하고 다른 쪽으로 몸을 돌렸다. 피곤에 전 이호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윤은 말없이 천장을 봤다. 목구멍 위로 무언가 자꾸 치솟아 올랐다. 아까부터 그랬다. 서이호가 오늘 훈련 안 하고 담을 몰래 넘어 최다윤과 함께 집으로 와 게임을 했을 때부터. 아니, 담장 아래에서 저를 올려다보던 서이호를 쳐다볼 때부터. 아마 알지 못하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바로 옆에 서이호가 있었다. 피곤한 듯 눈을 살짝 감고 있는 이호가. 그 주변에 떠도는 먼지가 마치 반짝거리는 효과처럼 보이게 만드는, 세상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

다윤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참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서이호의 숨소리는 느리게 흘러갔고, 다윤은 슬쩍 그런 그의 머리꼭지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서이호.”

“…….”

“나 너 좋아해.”

“…….”

“……아마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다윤은 그렇게 말하고 공중 위에 떠도는 먼지를 가만히 눈으로 좇았다. 이호가 잠을 자고 있다고 생각했다. 둘 다 오래도록 게임을 하고 지친 상태였으니까. 대답도 없었고. 한참의 침묵 끝에 다윤은 거실 내에 부유하는 먼지를 잡으려는 것처럼 손을 들었다.

말하자마자 후회가 됐다. 듣지 않았기를 바랐다. 서이호가 그냥 자고 있기를. 그러면서 다윤은 생각했다. 먼 훗날, 자신이 지금 이 순간을 오래도록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을. 바로 앞에 마치 눈처럼 흩어지는 먼지와 오후의 햇살, 아무 대화 없는 두 사람의 온도를 떠올리며 평생을 후회할 거라고.

“무슨 뜻이야?”

서이호는 자고 있지 않았다. 순간 들려온 이호의 목소리에 다윤은 당황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눈을 깜박이며 가만히 있었다. 서이호가 옆으로 했던 몸을 뒤집어 턱을 괴고 물끄러미 다윤을 봤다. 다윤도 빙글 몸을 돌려 서이호 쪽으로 턱을 괴고 누웠다. 서이호는 웃고 있지 않았다. 선생님이나 어른들이 매번 너는 뭐가 그렇게 좋아서 실실 웃고 다니냐고 물어보는, 그 웃음은 없었다.

대신 다윤이 웃었다. 다윤은 잘 웃는 편이 아니었다. 친구들 앞에서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심지어 부모님 앞에서도. 근데 지금만큼은 웃었다. 어쩐지 그렇게 웃으니까 지금 이 상황이 웃기다고 생각했다.

“별 뜻 없어.”

서이호가 굳었던 표정을 풀고 싱겁다는 듯 웃었다. 다윤이 ‘개죽이’라고 부르는 그 웃음이었다. 다윤이 좋아하는 웃음. 얼굴에 인디언 보조개가 예쁘게 볼 위로 패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행복해지게 하는 웃음.

그 웃음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다윤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말했다.

“게임 하자.”

“또 질 거잖아.”

“얼른 일어나.”

게임 해야지. 다윤은 억지로 서이호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손에 게임기를 쥐여 주었다. 이호가 툴툴거리며 일어나면서도 즐거운 듯 웃었다.

“또 지고 싶어서 그러네, 최다윤.”

그렇게 웃으며 이호가 게임에 집중했다. 다윤도 그런 이호를 따라 시선을 화면 위에 오래도록 고정시켰다. 다윤의 고백은 시시하게 부유하는 거실의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윤의 부모님이 올 때까지 내리 게임만 했다. 다윤은 2번 이기고 12번을 졌다. 서이호가 넌 왜 이렇게 못하면서 계속 게임을 하자고 하는 거냐며 웃었다.

그냥, 이길 때 네가 짓는 웃음이 좋으니까. 하지만 다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환한 서이호의 얼굴에서 웃음을 앗아 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마음속에만 묻어 두자.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묻다 보면 언젠가는 이 감정도 사라질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다고 먼지가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서이호를 좋아하는 다윤의 마음도 늘 공기 속에 부유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최다윤이 서이호를 좋아하는 일은.

그래서 다윤은 결심했다. 서이호와 고등학교는 다른 곳으로 가기로. 야구부가 있는 학교는 절대 가지 않기로. 그다음에 그와의 연락을 서서히 줄이기로. 최대한 서이호와 멀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몸이라도 멀어지는 것이 다윤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 * *

홀이 꽤나 시끄러웠다. 다윤은 주방에서 홀 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붐비는 사람들 가운데에 서이호가 있었다.

대체 왜? 서이호가 여기에 있는 거지. 아무리 비시즌이라지만 지금이라면 당연히 내년을 위해 훈련을 받고 있어야 할 때였다. 심지어 이호는 저번 시즌 마지막엔 부상 때문에 제대로 경기에 나오지 못했으니까. 매일 아침마다 서이호의 소식을 찾으려고 인터넷을 그렇게 뒤졌지만, 이런 식으로 이호의 소식을 알고 싶은 건 아니었다.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카락도 그대로, 잘생긴 얼굴도 그대로였지만 선이 조금 날카로워졌고, 그때보다 키도 훨씬 더 컸다는 것은 분명했다. 예전과는 달리 표정도 딱딱했다. 인터뷰에서 자주 봤던, 그런 무표정한 얼굴. 다윤은 몰래 서이호를 관찰했다.

오랜만에 짝사랑 상대를 보는 것은 좋았지만 그렇다고 또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졸업과 동시에 다윤은 이호의 연락을 모두 무시했다. 심지어 고등학교조차 알려 주지 않았다. 매일같이 오던 연락이 서서히 끊기고, 다윤과 이호는 그렇게 남남이 됐다. 그게 이호에게 좋은 방식이 아니었다는 걸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관계는 끊기지 않을 것 같았고, 다윤은 계속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이 마음을 가지고 아슬아슬하게 서이호를 평생 대할 것 같았다. 그건 너무나 불안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고 싶진 않았다는 말이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더 나이를 먹고 서이호가 해외에서까지 활동하는 멋진 야구 선수가 되면 그때 혹시나 동창회 같은 곳에서 가볍게 소식을 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어도 절대 이렇게는 아니었는데.

“……!”

순간 이호의 고개가 주방 쪽으로 돌아갔다. 다윤은 급하게 몸을 옆으로 숨겼다. 혹시나 저를 봤나 싶어서 잠시 숨까지 참았다가 한참 후 몸을 옆으로 다시 돌리니 이호는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이 모든 행동은 모두 최다윤의 자의식 과잉일지도 모른다. 서이호는 최다윤 따위, 이미 기억 속에서 지워 버렸을 것이다. 원래 옛 친구란 그런 법이니까. 심지어 최다윤이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던 것이니 더욱 저를 괘씸하게 생각하고 완전히 머릿속에서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윤은 자신이 없었다. 이호를 다시 마주하면 마음을 숨길 자신이. 그때도 참지 못하고 그렇게 고백해 버렸는데. 다윤이 한숨을 쉬었다. 그때 설거지하는 다윤의 옆에서 그릇을 닦던 시영이 다윤의 옆을 툭 치며 물었다.

“다윤이 너 원래 홀 서빙 쪽 아니야? 오늘은 왜 여기 있어?”

“아, 오늘은 병규랑 잠깐 바꿨어.”

“진짜? 맨날 너랑 같이 했으면 좋겠다. 병규 걔 설거지 너무 못해.”

투덜거리는 시영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윤은 묵묵히 설거지를 했다. 옆에서 곁눈질로 쳐다보고 있는 걸 보아하니 말을 걸고 싶은 눈치였지만 다윤에게는 그것을 받아 줄 정신이 없었다.

“다윤이 너도 서이호 선수 알아?”

“……어, 아니. 나 야구 관심 없어서.”

거짓말이었다. 관심 없기는 개뿔. 매일같이 찾아본다. 기사로 안 뜨면 커뮤니티 사이트를 뒤져서라도. 하지만 모르는 사람 앞에서 그런 얘기를 꺼낼 만큼 뻔뻔하지는 못했다. 관심 없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시영이 계속해서 서이호 얘기를 꺼냈다.

“아, 그렇구나. 나도 관심 없긴 한데 다들 유명한 선수라길래 찾아봤더니 정말 유명한 사람 같더라. 나 아는 언니가 진짜 팬이거든. 오늘 가게에 서이호 왔다니까 온다고 난리야. 근데 실물로 보니까 진짜 잘생긴 것 같아. 아! 물론 다윤이 너도 잘생겼어.”

“야, 김시영, 다윤이한테 작업 걸지 말고 일해.”

“아, 뭔 작업이에요.”

옆에 지나가던 매니저의 타박에 얼굴이 빨개진 시영이 그릇을 마저 닦으며 입을 다물었다. 정곡이 찔려 더 이상 말을 걸기가 어려워진 탓이었다. 거기다 다윤은 딱히 관심도 없고……. 시영이 물기를 닦고 있던 그릇을 친절하게 차곡차곡 옮겨 주면서도 다윤은 영 저한테는 말을 걸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랜만에 옆에서 일해서 좋았는데……. 시영이 속으로만 중얼거리고 있을 때, 다윤이 살짝 몸을 낮춰 시영에게 작게 물었다. 순간 시영의 얼굴이 훅 달아올랐지만 애써 침착한 얼굴로 다윤을 봤다.

“……근데, 여기는 왜 온 거래? 야구 선수잖아.”

“응? 아, 그건 모르겠어. 정확히 얘기를 안 한대. 사장님 말로는 갑자기 연락이 왔다고는 하는데…… 다른 애들이 물어봐도 그건 얘기를 안 한다더라고. 아마 그냥 비시즌이라 심심해서 온 거 아닐까?”

비시즌이라고 해도 서이호는 매일같이 연습, 또 연습하는 사람이었다. 야구밖에 모르는 인간처럼 느껴질 만큼. 원래 재능도 있는 사람이 노력까지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시기하는 걸, 누구보다 그의 팬인 다윤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얘기는 하지 않았다. 관심 없다고 해 놓고, 엄청나게 관심 많은 걸 티 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그 이유가 제일 궁금했는데……. 다윤은 최대한 대수롭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홀로 시선을 두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어딘가 삐딱한 표정의 서이호.

궁금한 것투성이였지만 마주할 용기는 없기에 그냥 꾹 참고 있었다. 일단 일이 끝나면 얼른 집으로 가서 인터넷에 검색이라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였다. 그런 다윤의 생각에 초를 치듯, 매니저가 주방으로 들어와 소리쳤다.

“오늘 마감 시간 당겨졌다. 대신 회식. 사장님 왈, 한 명도 빠지는 사람 없이 참석하란다.”

“아아, 저 내일 오전 수업 있는데요.”

“사장님 고집 알잖아. 내가 적당히 끝낼 테니까 꼭 참석해.”

주방 안의 아르바이트생들이 모두 탄식했다. 그러나 다윤만큼 탄식한 사람도 없을 터였다. 최대한 서이호를 마주치지 않고 일 끝나면 바로 집으로 가려고 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워낙 술 마시는 걸 좋아하는 세준은 화합이랍시고 직원들을 대동하고 가게에서 회식을 하는 걸 좋아했다. 그런 날은 꼼짝없이 한두 시간은 자리에 붙어 있어야만 했다. 도망이라도 가면 그다음 날 엄청난 면박을 들어야만 했으니까.

면박이고 뭐고 오늘은 도망가자. 다윤은 그 생각을 하며 아르바이트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사이에 서이호와 최대한 마주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자, 다들 잔 들고! 오랜만에 건배하자!”

“건배!”

맥주잔을 들고 공중으로 치켜든 직원들의 입에서 한꺼번에 건배 소리가 터져 나오자 가게 안이 쩌렁쩌렁 울리는 것 같았다. 그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다윤은 울상을 지은 채 가장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다.

분명 도망치려고 했다. 일이 끝나자마자 앞치마부터 벗고, 가방을 챙겨 튀려는 찰나 하필이면 그때 세준을 마주친 거였다. 세준에게 질질 끌려 안에 다시 들어오고 나서야 다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서이호와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서이호는 중심에 앉아 있었다. 여전히 사람들은 그의 옆에서 한마디라도 더 말을 붙여 보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하긴, 유명한 야구 선수니까, 그런 선수가 이런 곳에 있는 게 신기할 만도 했다. 저만 해도 그렇고.

“여기 말고, 저기로 자리 옮기자.”

다윤 쪽으로 고개를 숙인 병규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끄트머리 쪽에는 여자 애들이 별로 없어서 싫은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병규의 말을 그냥 들어줬겠지만 오늘은 안 된다. 다윤이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병규가 시무룩해졌다.

“나 두고 가도 돼.”

“너 없으면 나 여자애들이랑 얘기도 못 하는 거 알잖아.”

병규가 축 처진 얼굴로 최대한 불쌍하게 말했다. 다윤은 옆에 있는 맥주를 병규의 앞에 따라 주며 힘내라고 위로했다. 여자를 그렇게 좋아하는 놈이 여자 공포증이라니, 참 불쌍한 친구였다.

“그나저나 서이호 선수 진짜 잘생겼다. 저렇게 생기면 나도 애인 사귈 수 있을 텐데.”

“…….”

“저번에 보니까 아나운서랑 사귄다더라. 저런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랑 연애도 하고. 진짜 부러워. 역시 끼리끼리라니까.”

병규의 질투 섞인 말에 다윤은 슬쩍 눈만 돌려 이호를 쳐다봤다. 전에는 정말 부드러운 강아지 같은 인상이었는데 좀 컸다고 저렇게 날카로워지다니. 그때도 참 인기가 많은 서이호였는데, 아마 지금은 더할 것이다. 다윤은 속으로만 한숨을 쉬며 시계를 봤다. 이제 곧 여기 온 지 한 시간. 슬슬 눈치를 봐서 도망쳐야지 싶었다.

“다윤아, 옆에 앉아도 돼?”

시영이 다윤 쪽으로 다가와 물었다. 다윤이 슬쩍 자리를 비켜 옆자리를 만들어 주자 얼굴이 빨개진 시영이 다윤의 옆에 앉았다. 반사적으로 앞에 앉은 병규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빨갛게 변했다. 무언가 말을 걸고 싶은 눈치였는데, 앞에 놓인 포크나 젓가락 같은 것만 들었다 올리며 병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참, 숙맥이었다.

“저기 너무 시끄러워서. 그나저나 다윤이 너 이 근처 J대학교 영상학과 다닌다고 그랬지? 내 친구 거기 다니는데, 은지라고 알아?”

“응, 아, 알아. 동기야. 아, 이거.”

다윤이 평소처럼 살뜰하게 젓가락과 컵까지 챙겨 주자 시영이 생긋 웃었다. 그 와중에 앞에 있던 병규도 무언가 버벅거리면서 말을 꺼내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그, 그! 나 아는 친구도 은지야! 하하! 신기하다! 이름이 똑같네!”

“그래? 흔한 이름인데…….”

시영의 반응이 시답지 않자 병규가 할 말을 잃은 듯 눈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다윤은 그런 병규를 최대한 도와주며 두 사람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대화 주제를 최대한 이끌어 가려고 노력했다.

이제 시간이 지날 대로 지났으니 자리에서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며 가방을 멘 순간이었다. 누군가 다윤의 등을 두 번 두드렸다. 순간 주위가 고요해졌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뒤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 싸한 분위기와 제 뒤에서 느껴지는 오라 같은 것들이 뒤돌아보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고 있었다. 제발, 제 뒤에 있는 사람이 서이호만은 아니길. 그렇게 바라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윤아?”

젠장, 다윤은 속으로 욕을 곱씹었다. 서이호였다. 아까 먼발치에서 봤던 날카로운 인상의 서이호가 아닌, 제가 개죽이라고 부르곤 했던 활짝 웃는 얼굴의 서이호. 아주 오래전, 저를 불렀던 그 방식으로 제 이름을 부르는 서이호.

“최다윤, 맞지?”

다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할지, 전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최다윤?”

“어, 어?”

이호가 다시 한번 툭, 다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다윤이 잠시 당황했다가 웃었다. 뭐라고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멍청한 얼굴로 다른 곳에 시선을 두자 이호의 얼굴이 슬쩍 다윤의 시선을 따라 기울어졌다.

“나 기억 안 나?”

이호가 그렇게 말하고 씩 웃었다. 개죽이 같은 서이호는 그때나 지금이나 웃는 게 참 해맑았다. 다윤이 애써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당연히…… 당연히 기억하지. 오랜만이네.”

“뭐야? 둘이 무슨 사이야?”

병규와 시영이 다윤과 이호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이호가 뒤에 있던 의자를 끌고 와서는 다윤의 옆에 앉더니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친구, 중학교 동창이야.”

“진짜? 최다윤!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병규의 섭섭하다는 목소리에도 다윤은 할 말이 없었다. 이호는 빙글빙글 웃으며 턱을 괴고 다윤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호가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어 다윤은 앞에 놓인 음료수만 홀짝거렸다.

“나도.”

“…….”

“나도 주라, 윤아.”

이호가 내민 맥주잔을 보며 다윤은 이호를 빤히 바라봤다. 정말 갑작스럽게 이곳에 나타난 서이호는 저에게 말을 거는 방식도, 또 여전히 저를 윤아, 라고 부르는 그 목소리도 모두 그대로였다. 마치 둘 사이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몇 년간의 공백이 모두 무색하도록.

다윤은 이호가 저를 다시 마주한대도, 저렇게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마주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제가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고, 그 방식이 이호를 화나게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어쨌든 지금 당장 분위기를 망치고 싶진 않았기에 다윤은 애써 웃으며 옆에 있던 맥주를 따라 이호에게 건넸다. 이호가 큰 손으로 다윤이 내민 맥주를 받아 들었다. 이호는 다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채였다. 맥주를 마시면서도, 다른 애들이 말을 걸어 와도. 그 길고 진득한 시선이 다윤의 온몸을 따끔따끔하게 만들었다. 다윤은 애써 그를 쳐다보지 않으려 고개를 푹 숙였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가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나저나 진짜 최다윤, 서이호 선수랑 아는 사이였으면서 왜 말 안 했어?”

이번엔 병규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옆에 있던 시영도 궁금한지 다윤과 이호를 번갈아 봤다. 이 뜬금없는 조합이 웅성거리는 술집 안을 순식간에 주목시키고 있었다. 그 중심에 있는 다윤은 할 말이 없어 그저 앞에 놓인 음료만 들이켜고 있는데 이호가 말했다.

“한동안 연락이 끊겼거든. 그래서 윤이가 어색해서 말을 못 했나 봐.”

“…….”

“친했잖아, 윤아. 그렇지?”

이호가 싱긋 웃으며 다윤에게 물었다. 다윤은 억지로 한쪽 입꼬리를 올려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예전 얘기를 주고받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자 병규도 다른 아이들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하긴, 연락이 끊긴 어색한 친구들이랑 아는 척하거나 마주치기 쉽지 않으니까.

다시 테이블이 소란스러워졌다. 이 조용한 끄트머리 자리가 순식간에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몇몇 아이들이 아예 테이블과 의자를 끌고 와 자리를 붙인 탓이었다.

그런 소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다윤은 속이 타고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대체 야구 선수 서이호가 왜 여기에서 저러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오래전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 버린 제게 저렇게 아는 척을 해 오는지도, 그의 의도를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이 자리도 너무나 불편했다. 도망치고 싶은 생각만이 간절했다.

“나 잠깐 화장실 좀.”

애들끼리 소란스러운 틈을 타서 다윤이 의자를 뒤로 밀어 남자 화장실이 있는 뒤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11월의 찬 바람이 얼굴 위를 가볍게 치고 지나갔다. 추운 바람이었지만 다윤의 숨통을 트이게 만들어 주는 고마운 공기였다.

손만 씻고 나온 다윤은 가게 안으로 다시 들어갈 생각은 않고 벽에 기대섰다. 또다시 서이호의 숨 막히는 눈빛 세례를 받고 싶지가 않았다.

집에 가고 싶다. 최근 몇 년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다윤은 벽에 기대서서 내내 그 생각을 곱씹었다. 오늘 일어난 일을 다시 생각하고 있으려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서이호를 다시 만났고, 또 서이호가 다시 제게 아는 척을 해 왔다. 하루 만에, 아니 심지어 그 모든 게 몇 시간 안에 벌어진 일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작게 한숨을 쉬며 위를 올려다봤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깜박거리는 불빛이 다윤의 눈을 찌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려고 일부러 얼굴을 찰싹찰싹 때렸다. 찬 바람과 방금 손으로 친 탓에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삼촌과 친구 세아에게서 각각 연락이 와 있었다.

삼촌

이번 주에 오는 거 맞지, 다윤아? 삼촌도 이번에 지혜랑 같이 가려고 하는데.

바쁜가 보구나. 그럼 주말에 연락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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