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가 왕관 안쪽에 써놓은 글귀를 확인한 후 손을 뻗었다.
예상치 못한 일에 감격을 한 것인지 대공이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조금만 숙여 주시겠어요?”
대공은 에드의 요청에 부응했다.
그런데 너무 잘 응해서 문제였다. 대공의 몸이 아래로 쑤욱 내려가나 싶더니 한쪽 무릎을 굽히는 것 아니겠는가.
일순 주위가 조용해지더니 놀란 에드가 그에게 일어나라고 할 새도 없이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퍼져 나갔다.
“대공 전하께서 대공비님을 평생의 반려로 모시겠다고 맹약하는 것과 다름없는데요?”
“절도 있으면서도 로맨틱하네요.”
에드는 주위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귀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살짝 시선을 든 대공이 웃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에드는 정신을 가다듬은 뒤 대공의 머리에 왕관을 조심스레 씌워 주었다. 서툰 솜씨로 왕관을 디자인하고 제작한 게 무색하게 검은 머리 색과 백금의 왕관이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에드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환하게 미소 지었다.
대공은 머리에 올려진 왕관의 무게를 가늠해 보듯이 손으로 짚어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고마워, 에드.”
그리고 자신에게 무한한 기쁨과 영광을 선사한 에드의 입술에 깊게 입을 맞췄다.
* * *
결혼식이 끝나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 에드는 배를 쓰다듬었다.
오늘 결혼식이 피로할 수도 있었을 텐데 태아는 배 안에서 조용히 모든 걸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린 듯이 조용히 있었다.
〈오늘 결혼식에 와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전하며, 한 가지 더 알릴 좋은 소식이 있는데 대공비인 에드에게…….〉
그러다 대공이 주위를 둘러보며 제 존재를 알리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배를 퐁, 퐁 차오기도 했다.
에드는 식이 끝났다는 홀가분함과 아이의 기분 좋음과 사람들의 놀라워하는 기색을 한꺼번에 느끼며 빠르게 성 안으로 들어왔었다.
“아이의 존재를 너무 이르게 알린 게 아닐까요? 결혼식에서는 우리의 결합에만 집중하는 게 좋지 않았을지요.”
“이미 눈치채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을 테니까 그리 빠른 것도 아니었을 거야. 그리고 에드에게 아이가 있다는 것으로 우리의 결합을 더 든든하게 느끼는 이들도 있을 테고.”
“하지만 이상하게 생각한다면…….”
대공은 에드의 몸에서 예복을 벗겨 내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에드가 멋진 대공비라는 걸 제국에서 모르는 사람들은 없으니까.”
간편해진 차림의 에드를 침대에 앉힌 대공이 그의 몸을 가볍게 주물러 주었다.
대공의 손이 지나갈 때마다 풀리는 몸에 에드는 아, 하고 작게 신음을 토했다.
“오늘 대신관님을 보고 났더니 기억이 났어요.”
“어떤 기억이?”
“중상을 입은 용을 치료해 줬다는 치료사의 이야기를요.”
“…….”
“그 이야기를 들을 때는 자신의 생명을 갉아서 용을 치료해 준 그의 선택이 너무 감동적이었는데요.”
“그랬는데?”
“제가 전하를 사랑한다는 걸 깨달은 순간 알 수 있었어요. 전하께서 위험에 처했을 때 제가 곁에 있었던 게 정말 다행이었다는 것을요. 전하를 구할 수 있었던 게 저였기에 정말 값지고 행복한 일이었다는 것도요.”
대공은 에드를 껴안으며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앞으로는 에드가 그런 일에 휘말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거야.“
에드는 대공의 목에 팔을 걸며 대공에게 입을 맞췄다.
“저 또한 전하께서 가시는 길을 응원하고 함께 하겠습니다.”
북적북적하고 성스러웠던 결혼식이 끝나고 대공과 긴 밤을 보낸 이후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며 흘러갔다.
푸릇푸릇한 봄은 새파란 여름으로 진해졌고, 로넨의 키도 쑥쑥 자랐다.
북부 성은 따뜻한 계절을 만끽하면서도 다가올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 창고 문을 여닫았고, 에드는 침대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다른 불편한 곳은 없으신가요, 대공비 전하?”
막 진료를 마친 주치의가 에드를 유심히 살폈다. 에드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침대 헤드에 등을 깊게 기댔다.
“네, 괜찮아요.”
“공자님을 만날 날이 얼마 남지 않으셨으니 조금이라도 몸에 평소와 다른 증상이 나타나면 알려 주세요. 그리고 항상 말씀드렸듯이 마음 편하게 가지시고요.”
“주치의 선생님께서 잘 봐주시니 든든해요.”
이제는 타인에게 대공비라고 불리는 것이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여전히 발갛게 물들곤 하는 에드의 귀를 보며 주치의가 인자하게 웃었다.
“네, 옌과 함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에드는 침대 곁에 서서 주치의의 말에 집중하던 대공이 자신도 아이도 건강하다는 말에 표정이 풀리는 걸 보았다.
에드가 대공의 손을 잡자 주치의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대공은 에드의 등에 베개를 덧대 주며 물었다.
“조금 더 잘래?”
에드는 고개를 저으며 침대 밖으로 발을 뻗었다. 발끝을 까딱여보다가 침대에 놓아 둔 양말을 집어 들었다.
“아뇨, 주치의 선생님도 큰 무리만 하지 않으면 괜찮다고 하셨으니까 오늘은 주변을 조금 산책하고 싶어요.”
최근에 계속 누워만 있었더니 몸을 움직이고 싶어졌다. 마침 대공도 정무를 일찍 끝내고 왔으니 이참에 함께 나가서 느긋하게 바람을 쐬면 좋을 듯했다.
“…….”
그런데 양말을 신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침대에 발을 올려 양말을 신으려던 에드는 팔을 뻗은 채 끙끙거렸다. 몸이 제대로 구부러지지 않아 양말과 씨름을 했다.
“이게 왜 이렇게…….”
에드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대공은 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고는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러고는 에드의 발을 자신의 허벅지에 올려놓았다.
“어, 괜찮은데요. 제가 할 수 있어요.”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에드 대신 내 배가 불렀으면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이런 일이라도 도울 수 있게 해 줘.”
대공이 에드의 발을 가볍게 주무르다 양말을 신겨 주고는 발을 들어 신발에 쏘옥 넣어 주었다.
신발 끈을 적당히 조이며 대공이 에드를 올려다보았다.
“불편하진 않아?”
대공이 직접 만들어 준 신발 안에서 발을 꼼지락거리던 에드는 그를 보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네.”
“그럼 산책하러 갈까요? 대공비?”
그를 부축해 일으킨 대공이 자신의 허리에 손을 올려 동그란 공간을 만들자 에드가 소리 없이 웃으며 팔짱을 꼈다.
“네, 대공 전하.”
북부 성을 나와 후원으로 발길을 옮기자 하늘에는 보름달이 밝게 떠 있었다. 에드는 검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대공에게 시선을 옮겼다.
“전하께서는 우리 아이가 전하와 저 중 누구를 닮았으면 좋겠어요?”
꿈속에서 본 하얀 얼굴, 검은 머리카락, 푸른색 눈동자…… 이 모습 그대로 아이가 태어난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에드는 아이의 눈동자 색이 마음에 걸렸다.
‘제국을 수호하는 용의 피를 진하게 받을수록 눈동자 색이 붉다고 했는데 혹시라도 아이가 푸른 눈동자로 태어나면 전하께서 실망하실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도 상관없어. 나와 에드의 모든 것이 온전히 합쳐져 우리를 찾아온 뿌뿌니까.”
마치 에드의 걱정을 알고 어루만져 주는 듯한 대답이었다.
‘무척 다정한 아버지가 될 거야.’
에드는 대공의 따뜻한 대답에 황궁에서 꾸었던 꿈속의 모습들을 그려 보며 배를 쓰다듬었다.
“그럼 전하께선 어떤 아버지가 되고 싶으세요?”
“에드는?”
“저는 부모님과 일찍 떨어져 자라서 그런지 아이가 그늘 없이 자랐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아마도 조금 물렁물렁한 아빠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대공은 에드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지. 뿌뿌가 구김 없이 자라는 것이 좋으니까. 하지만 나는 에드와 달리 조금 엄격한 아버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방금 들었는데, 우리 모두 아이를 너무 예뻐하기만 하면 버릇없이 자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북부를 수호하는 군주의 아이로 태어났을 때는 응당 어깨에 짊어져야 할 무게가 있으니…….”
하고 말을 이어 나가던 대공은 옆에서 에드가 소리를 참지 못하고 웃자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였다.
“왜 웃어, 에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치곤 전하께서 우리가 고심해 지었던 태명 대신 뿌뿌라고 바로 부르셨던 게 기억이 나서요.”
에드가 대공에게 꿈을 꿨던 일을 말한 이후로 태명은 아이가 입에 많이 담았던 것으로 바뀌다시피 했다.
아, 하고 짧게 침음성을 낸 대공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온통 신경이 쏠렸고, 또 휘둘리고 있음을 인정했다.
“그럼 아이를 엄격하게 훈육할 역할은 로넨에게 맡기도록 할까?”
에드는 장난기가 섞인 대공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팔에 얼굴을 기댔다.
“네,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해요.”
그렇게 날이 가고 가을 향이 완연해지는 계절, 북부에 큰 기쁨이 번졌다.
대공과 대공비의 아이가 태어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