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96화 (196/198)

커튼 사이로 새어드는 빛을 보니 평소보다 늦게 일어난 게 틀림없었다.

‘어제 분위기에 취해서 그만…….’

이불 안으로 더 파고들려던 에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대공이 그의 몸을 가볍게 풀어 주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주물러 준 후 에드가 씻고 나오자 대공은 수건으로 젖은 그의 머리를 말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재단사와 시종들이 바람을 일으키듯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대공 전하, 대공비 전하. 간밤에 좋은 꿈 꾸셨습니까?”

그들의 손에는 오늘 있을 큰 행사에 쓰일 장신구와 소품들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에드를 어떻게 단장시킬지 눈에 열정도 불태우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다른 방에서 착장 하셔야 합니다. 북부의 관례상 대공 전하와 대공비 마마의 예복은 다른 방에서 입어야 하니까요!”

씩씩한 재단사의 말에 대공은 이마를 긁적이며 당부했다.

“결혼식을 하기도 전에 대공비를 지치게 하지 말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힘이 넘치는 재단사와 시종들의 대답에 대공은 마지못해 방을 나섰다. 그 후 에드는 여러 손에 의해서 오늘 결혼식의 주인공으로 단장 되었다.

“자, 보십시오.”

거울을 가져다주며 재단사가 에드를 속속히 살폈다. 옷을 만드는 것에만 아니라 예복에 티끌 하나 묻지 않게 진두지휘한 재단사가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고 확인했다.

“혹시 불편하시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없으신가요?”

부드럽게 넘어간 앞머리, 흰색과 금실이 어우러진 예복, 목에서 살짝 보이는 목걸이 줄, 북부의 상징이 수놓아진 표식…… 모든 게 기가 막힐 정도로 잘 어우러졌다.

에드는 재단사와 시종들의 시선을 하나하나 맞추며 고마움을 표했다.

“너무 멋져요. 감사합니다.”

“에드님께서 저희 의견에 귀 기울여 주셔서 이렇게 멋진 예복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럼 준비를 마쳤으니 나가 볼까요?”

에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방문이 열렸다.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르텔이 자연스럽게 지어지는 미소를 숨기지 못하다가 흠흠, 가볍게 목청을 가다듬었다.

“모시겠습니다, 대공비 전하.”

“고마워요, 이르텔 경.”

결혼식은 북부 성의 중앙 정원에서 이루어졌다.

이르텔의 안내에 따라 계단을 내려와 밖으로 나오자 결혼식 무대를 오고 가며 꽃을 꾸미고 있는 지오와 제이논이 보였다.

먼저 나와 있던 대공은 키가 큰 검은 머리의 여성과 인사를 하고 있었다.

“황태녀가 도착했군요.”

“아, 그렇네요.”

‘아직까지는 황태후가 제국을 수습하고 있었지만, 오늘 북부의 결혼식을 기점으로 황태녀가 본격적으로 움직일 모양이구나.’

에드가 생각하는 사이 그를 발견한 대공이 빠르게 다가왔다.

“정말 멋있는데, 에드?”

에드는 밝은 햇살 아래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대공을 바라보며 그 말을 돌려주었다.

“대공 전하야 말로요.”

오늘 대공이 입은 예복은 검은색의 아름다움을 정점에서 뿜어내는 것 같았다. 대공의 하얀 얼굴과 붉은 눈동자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그리고 붉은 색 브로치…… 시선을 내린 에드는 대공의 가슴 부근에 달린 브로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건.”

“에드가 내게 선물한 건데 오늘 당연히 함께해야지.”

야시장에 갔던 날, 고심하여 고른 붉은색 루비 브로치를 보노라니 에드는 볼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대공 전하, 대공비 전하. 준비되셨으면 식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때 제이논이 주의를 환기시키며 예식이 준비되었음을 알렸다.

대공은 에드에게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에드, 준비 됐어?”

“네, 전하.”

대공이 제이논을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잔잔한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식이 시작하니 모두 자리에 착석해 달라는 말이 이곳저곳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에드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야외 정원에 만들어진 무대 옆으로는 초청된 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대공과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오늘의 결혼식을 축하하며 환호하고 있었다.

에드는 이렇게 반겨 주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느끼며 대공과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형!”

야외 식장의 무대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로넨이 서 있었다. 꽃잎이 잔뜩 든 바구니를 든 그가 손을 흔들며 웃었다.

대공과 에드는 환히 웃으며 로넨과 시선을 마주쳤고, 무대 끝자락에는 대신전에서 온 대신관이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에드는 꽃향기로 가득한 야외 결혼식장, 진정으로 대공과 자신의 결혼을 축하해 주는 하객들, 어느새 훌쩍 자란 로넨의 키, 여전히 무대 뒤에서 티격태격하는 제이논과 텐스, 무대 위에 검을 높게 쳐들고 있는 기사단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렇게 보니 빙의한 지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났구나.’

새삼 느껴지는 자각에 에드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자 대공이 부드러우면서도 결속력이 느껴지게 손을 잡아 왔다.

“앞으로도 이전처럼 행복한 일만 가득하겠죠?”

에드의 물음에 당연하다는 듯이 대공이 고개를 끄덕이자 음악이 바뀌었다. 결혼 행진곡이었다.

“대공 전하와 대공비 전하의 입장이 있겠습니다!”

사회자 텐스의 외침과 함께 로넨이 하얗고 붉은 꽃잎들을 뿌리며 계단을 올라 야외 식장으로 올라섰다.

성대한 결혼식의 시작이었다.

* * *

에드는 흩날리는 꽃잎을 보며 옅게 웃다가 대공과 함께 꽃길을 나아갔다. 로넨의 머리 위에도 나풀나풀 꽃잎이 내려앉았다.

하객들의 박수 소리와 함께 휘이익, 어디선가 휘파람이 부는 소리도 들렸다.

에드와 대공이 지나갈 때마다 기사들이 씨익 웃었고, 대신관도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자신의 앞에 다다른 두 사람을 바라보며 혼인 서약을 시작했다.

“아스넬 린든과 그의 동반자 에드는 누군가의 속박이나 강압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로 혼인을 결정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네.”

지위도, 직위도 다 떼어 내고 동등한 위치의 이름으로 불린 두 사람이 거침없이 대답하자 중앙 정원은 함성과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스스로의 의지로 혼인을 결정한 아스넬 린든과 에드는 언제나 서로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킬 것을 맹세합니까?”

“네, 맹세합니다.”

“네, 저 또한 맹세합니다.”

이번에도 힘찬 두 사람의 대답에 야외 식장은 유쾌한 웃음소리와 환성이 따랐다.

그 후에는 결혼 서약서에 서약했다.

사제의 축복을 받은 거룩한 서약서에 대공이 ‘아스넬 린든’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쓰고 에드에게 깃펜을 넘겼다.

종이에 단정히 적힌 대공의 이름을 보며 에드는 술렁거리는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그 옆에 제 이름을 새겨 넣었다.

곧이어 두 사람이 이름이 적힌 종이가 화르륵 불이 붙으며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사라졌다.

그를 지켜보던 대공이 불쑥 고개를 숙여 에드의 머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이내 환호를 지르며 아우성쳤다.

대신관도 웃다가 장내의 소란을 잠재우고 몇 가지 절차를 더 진행했다.

“신의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아스넬 린든과 에드 이 두 사람은 이제 약속의 증표인 반지를 교환하겠습니다.”

대공이 에드의 손을 잡아 올리자 박수 소리는 더 커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보려고 목을 빼는 하객들도 있었다.

에드는 왼손에 끼워지는 붉은색 반지에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대공이 손을 내밀자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 넣었다,

똑같은 손가락인 왼손 약지에 반지를 낀 두 사람이 손을 잡은 그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꽃가루와 색색의 종이 가루가 하늘에 휘날렸다.

“대공 전하! 대공비 전하! 축하드려요!”

“제국에 무한한 영광을! 북부에 무궁한 행복을!”

들썩이는 함성 사이로 입을 맞추라는 소리도 울려 퍼졌다.

대공과 에드는 웃으며 입술을 맞댔고 짓궂은 누군가는 더 진하게 하라며 목청을 높였다. 무대 아래로 내려갔던 로넨도 둘을 바라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밝고 따뜻한 결혼식을 지켜보던 대신관이 좌중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오늘 결혼식에는 한 가지 절차가 더 남았습니다.”

식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환호를 하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또 뭐가 더 남아 있는 거지? 하는 눈길로 대공과 에드를 주시했다.

대신관이 단 아래에 두었던 커다란 보석함을 에드에게 건넸다. 대공 역시 처음 보는 물건인지라 시선에 의아함이 비쳤다.

에드는 보석함에서 왕관을 꺼내 들었다.

“제가 전에 제 손으로 만든 것을 전하의 머리에 씌워드리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죠?”

은색의 둥그런 관에 붉은 루비와 푸른 사파이어가 아름답게 장식된 왕관이었다.

제국에서 왕관은 황제만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전쟁이나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승자의 머리에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황좌에 앉은 페즈는 왕관을 오로지 황제만이 쓸 수 있도록 명했다. 대공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것을 불만스러워하는 속내를 숨기지도 않은 치졸한 짓이었다.

에드는 페즈가 짓밟은 제국의 정통성을 되살리는 동시에 대공이 그동안 보답받지 못한 영광을 제대로 돌려받는 방법이 없을지 생각하다가 결혼식을 기회로 삼았다.

“황태후 폐하께서 제게 혹시 필요한 게 없냐고 물으셨을 때, 전하께 승리자에게 걸맞은 왕관을 씌워드리고 싶다고 했거든요.”

에드는 대공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그런데 흔쾌히 허락해 주셔서 이렇게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대공이 결혼식을 준비하며 북부를 다스리는 동안 에드는 그가 쟁취한 승리의 순간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왕관을 만들었다.

이를 설계하는 동안 대공의 눈을 피하기 위해 제이논과 텐스를 핑곗거리로 내세운 채 각고의 노력을 해야 했다.

언제나 나의 영웅이자 영원한 운명의 동반자인 아스넬 린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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