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92화 (192/198)
  • “공을 임신했을 때는 이야기가 다르다는 것이야.”

    “저를 말입니까?”

    “그래, 멜라가 이야기하지 않은 모양이군. 그녀가 자네를 임신한 초기부터 며칠씩 잠드는 일이 많아 선황께서 얼마나 걱정이 많았는지 모르네.”

    황태후가 대공에게 비망록을 넘기며 말을 이어 나갔다.

    “여기에 선황께서 작성하신 기록이 남아 있는데, 날짜에 붉게 표시해 둔 부분들은 모두 멜라가 공을 가진 후 잠든 날들이었네.”

    대공이 책장을 넘기자 날짜 부분에 시간까지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짧게는 하루 반, 길게는 5일까지 기록된 부분을 대공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어머니께서 이렇게 잠이 드셨던 날들이 많으셨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런 멜라도 항상 편안하게 깨어났고, 나도 기절한 듯이 잠이 들었다가 일어날 때가 있었으니.”

    “…….”

    “그나저나 나도 어쩔 수 없이 황실의 물이 든 모양이야. 황금 용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은 아이를 가지면 깊은 잠에 빠지는 날들이 많고 길어진다는 속설이 황실에 돌거든. 그러다 보니 공의 아이가 어떤 아이일지 벌써 기대가 된다네.”

    찻잔을 내려놓은 황태후가 아쉽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더 일찍 알려 주었으면 선물을 준비하는데 이리 바쁘지 않았을 것을…… 에드가, 아니 대공비가 잠들지 않았다면 나는 임신 사실을 아직도 몰랐을 수도 있겠다 싶어. 만약 그랬다면 언제 알려 줄 생각이었나?”

    “……글쎄요, 그건 에드와 상의해 보고 알려 드리지 않았을지요.”

    “하하.”

    황태후가 이제는 걱정이 좀 풀렸냐는 듯이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에드가 빨리 일어났으면 좋겠군요.”

    “나 역시 그렇다네. 그러나 생각보다 늦게 일어나도 괜찮을 거야.”

    “음, 그 말씀은 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아이가 황금 용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았다는 증거가 되니 하시는 건지요?”

    “아니, 그런 이유가 아니라 그렇게 잠이 든 동안에는.”

    황태후가 대공을 바라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즐거운 일이 많거든.”

    “즐거운 일이라면…….”

    “글쎄, 그걸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이렇게 운만 떼시고 말씀을 더 하지 않으시는 걸 보니 어떤 일인지 답해 주지 않으실 생각이시군요.”

    황태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옅게 미소 지었다.

    “그건 나중에 대공비가 깨어났을 때 물어보면 더 재미있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테니, 그에게 넘기겠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기대가 됩니다.”

    대공이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찻잔을 들자 황태후가 다른 주제로 방향을 돌렸다.

    “그런데 설마 페즈가 제국에서 금지한 흑마법에까지 손을 댔을 줄은 몰랐네.”

    “사실 이전부터 그런 낌새는 보이긴 했습니다. 혹시 사냥대회 때 일어난 지진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기억하네, 자칫 잘못했다가 큰 인명피해가 일어날 뻔했으니까. 혹시 그럼 그때 일어난 지진이 페즈와 관련이 있던 건가?”

    “그때 사고에 휘말린 에드를 찾으러 갔을 때 지하에서 음모를 꾸미는 일당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음모라니?”

    “네, 그래서 혹시 주모자에 대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바로 제압하지 않았었습니다. 그 후, 연구에 대한 지원을 페즈가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랬군.”

    “그리고 얼마 전 동부에서 우물이 끓어 넘친 곳을 살펴보았을 때, 그 당시 에드와 함께 본 것과 유사한 흔적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페즈가 술수를 부리겠다고 예상했습니다.”

    “그런가? 그걸 알게 된 것도 에드로부터 시작되었다니……역시 운명으로 엮인 상대로군, 대공과 대공비는.”

    * * *

    부드럽게 올라가는 눈꺼풀을 들어 올린 에드는 의아함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멍하니 깜빡이던 눈을 손으로 비벼 보아도 주위의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뭐지, 이거? 분명히 전하와 함께 있었는데 여기가 어디지?’

    온통 새하얀 세상이 시선에 들어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도, 높다란 자작나무에도, 영원처럼 이어져 있는 땅도 깨끗한 흰색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이상했다. 황궁의 침대에서 그에게 입을 맞추고 잠이 들었던 것까지 기억이 났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 번도 보지 못한 곳에 와 있었다.

    에드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시리도록 차갑고 깨끗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뽀득뽀득, 발아래에서 기분 좋게 뭔가가 뭉쳐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를 내려다보던 에드는 자리에 앉아 손을 내밀었다.

    ‘……눈이 맞구나.’

    손끝에 닿은 차가운 감촉을 쓸어보다 눈임을 확인하고 꾹꾹 뭉쳐본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지금, 이 시기에 눈이 내릴 만한 지역이 있던가?’

    의아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렇게 밝고 환한 태양 아래에서 빛나는 따스한 대낮인데 눈이 하나도 녹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캬아.”

    크게 울리는 울음소리와 함께 에드의 머리 위로 길게 그림자가 늘어졌다.

    에드가 고개를 젖히자 새끼 용이 자신의 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모든 게 비현실적이고 묘한 일이었다.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정리해보기 위해 에드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또다시 놀라운 일이 생겼다. 이번에는 그가 차가운 눈을 밟고 있는 게 아니라 커다란 황금 용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갑자기 높아진 시선에 깜짝 놀란 에드의 몸을 바람이 휙휙 스치고 지나갔다. 몹시 빠른 속도감에 주변의 풍경도 확확 바뀌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그렇게 용이 설원을 빠르게 날아가자 눈에 익숙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북부였다. 익숙하고 정겨운 겨울의 북부 모습이 눈으로 들어왔다.

    눈으로 뒤덮인 작은 숲과 깊은 호수, 높은 산과 커다란 강줄기를 따라 용이 날개를 퍼덕이며 높게 날고 있었다.

    용이 날개를 움직일 때마다 하얀 북부 아래로 황금색 가루가 북부를 축복하듯이 내리 떨어졌다.

    그 모습이 신기해 씨익 웃은 에드는 귓가를 웅웅 울리는 바람결에 입을 벌렸다. 바람을 입에 머금어 보았다가 내뿜자 뽀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뭔가를 잡고 있는 것도 아닌데 용을 타고 있는 몸이 흔들리거나 아래로 떨어질 것 같다는 걱정은 없었다.

    “이거 꿈이구나. 그렇지?”

    “캬아!”

    에드의 깨달음에 용이 대답하듯이 길게 울었다. 에드는 황금색 등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꿈이라서 그런지 황금색 거죽이 몹시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꺄아아.”

    어디선가 들리는 목청 높은 아이 웃음소리가 들렸다. 에드는 눈을 크게 뜨며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두텁게 입고 있던 외투 안에서 꼬물거리는 뭔가가 느껴지자 혹시, 하고 옷 안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어?”

    손가락에 만져지는 느낌은 영락없는 사람의 피부였다.

    설마 하면서도 에드가 외투 단추를 두어 개 풀자 작은 머리통이 통, 튀어나오더니 아이가 시선을 빤히 맞춰왔다.

    “검은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

    에드 또한 아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꼼지락꼼지락, 품에서 바르작거리는 아이의 입이 동그랗게 오므려지더니 앞으로 톡, 튀어나왔다.

    ‘뭐가 마음에 안 드나?’

    신생아보다 조금 큰 남자아이는 볼을 둥글고 빵빵하게 부풀리며 미간을 작게 찌푸렸다.

    그 모습이 대공이 고심에 빠져 있을 때와 똑 닮아서 에드는 아이의 미간을 살살 문지르며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아이가 에드를 보며 방긋 웃음을 터트렸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 에드는 가슴 속에서 퐁, 피어오르는 벅찬 감정을 느꼈다.

    오뚝한 콧대,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 마치 새하얀 눈같이 흰 피부…… 이 모든 것이 말해 주고 있었는데.

    왜 처음 보자마자 눈치채지 못했을까.

    “……안녕.”

    먹먹한 감정을 채 숨기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는 그저 그를 만난 게 기쁘다는 듯 품 안에 안긴 팔다리를 흔들며 즐거움을 표했다.

    “정말 반가워.”

    그런데 어째서인지 아이는 해맑게 웃으면서도 미간에 꽉 들어간 힘을 풀지 않고 있었다.

    “뭐가 불편해서 그러지?”

    아이를 살펴보던 에드는 꼬물꼬물 움직이는 팔다리 사이로 제 옷이 끼어 있는 걸 발견했다.

    “옷 때문에 불편했구나.”

    고개를 숙여 옷을 정리해 주자 한결 편해진 표정의 아이가 조그마한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왔다.

    따스함이 느껴지는 작고 귀여운 손이었다.

    기분 좋은 감촉에 에드의 얼굴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웃음은 전염성이 강하다더니 에드의 입가에 맺힌 호선을 손으로 따라오던 아이도 싱그럽게 미소 지었다.

    푸르른 하늘에 산뜻한 웃음소리가 번져나갔다. 아이의 왼손이 입에 닿자 에드는 쪽 소리가 나도록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또 해 달라고?”

    그러자 아이가 오른손도 에드의 입으로 가져다 댔다. 이번에 쪽, 쪽 소리가 나도록 손바닥에 입술을 맞댔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꿈인데.’

    꿈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아이와 생생하게 교감을 나눌 수 있다니…….

    입술에 닿은 이 놀랍도록 선명한 감각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에드는 작은 손바닥에 입술을 한참이나 묻고 있었다.

    “이것도 다 대공 전하의 힘과 관련이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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