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91화 (191/198)

“또한, 항상 기대 이상으로 일을 해낸다는 것도. 그러니 이제 이 뒤는 내가 맡을게.”

“……하지만 전하께서는 하실 일이 있잖아요?”

에드가 대공에게서 눈을 떼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정화된 사람들이 기사들의 지시에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 정도는 기사들이 충분히 막을 수 있으니까.”

대공은 에드의 손을 붙잡으며 손끝에 불을 피워 올렸다. 에드는 동그랗게 모여든 불꽃에 일렁이는 대공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검은 용이 진 안으로 모두 들어온 순간, 루안과 새끼 용이 뒤로 빠져 빠르게 날아갔다.

대공이 에드의 손에 깍지를 끼고선 손가락을 튕겼다. 탁, 소리와 함께 붉은 불꽃이 일며 에드가 뿌려 놓은 피에 불이 붙었다.

첫 불씨가 닿은 부분을 시작으로 순식간에 번진 불길이 진의 모양을 따라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정원은 그 즉시 낮보다 뜨거운 밤이 되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검은 용이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

그르릉 거리는 검은 용을 주시하던 에드는 문득 주변에서 흐르는 마력의 흐름이 바뀐 걸 눈치챘다.

시선을 내리자 깍지를 낀 손에 대공이 다시 마법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에드는 어떠한 가능성을 떠올렸다.

“전하, 검은 용을 움직이게 하는 핵을 찾고 계신 건가요?”

“에드 덕분에 계획보다 빠르게 녀석의 안을 파헤쳐 볼 수 있었어. 에드의 물기둥을 피하려고 몸을 뒤틀 때마다 볼록하게 솟는 부분들이 보였거든. 치유의 힘을 피하려고 핵을 안쪽으로 밀어 넣으려는 것처럼.”

눈썰미가 좋은 대공은 그를 놓치지 않고 집중적으로 살펴본 모양이었다.

“그 부분들을 체인에 걸어 둔 마법으로 다시 한번 확인해 보니 틀림없어.”

에드의 머릿속에는 제가 피를 더 흘리면 진 안의 불이 더 활활 타올라 재가 되는 검은 용이 떠올랐었는데, 대공은 다른 방법을 찾은 것이었다.

에드는 대공의 손을 더 꽉 잡았다. 그 감촉에 대공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이제까지 자신은 대공에게, 대공은 자신에게 부담을 짐 지우지 않고 이 상황을 끝냈으면 했다.

그것이 무모하다고 생각되더라도.

하지만 에드는 알아챘다. 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보다 대공이 찾은 방법이 검은 용을 더 빠르고 완벽하게 해치울 수 있을 것이라고.

이제까지 에드는 자신이 대공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면이 없잖아 있었다. 대공도 그 마음을 알았기에 자신을 지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닌,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고 그에 동화할 때 서로의 안위를 위할 때보다 더 좋은 방법과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다는 걸 에드는 깨달았다.

대공의 손끝으로 금색 빛줄기가 떠오르자 에드도 손에 힘을 주었다.

이번엔 자신의 힘이나 어떠한 결과를 보여 주겠다는 사심을 내려놓고 대공이 쓰려는 마법에 힘을 보탰다. 그와 발걸음을 맞춰 합심하겠다는 마음으로.

대공이 웃었다.

그도 자신과 똑같이 생각한다는 게 느껴졌다. 완연한 화합, 그 마음이 전해지자 손이 더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서로의 뜻이 일치되자 마법의 힘도 더 강력해지는 듯했다.

앞으로 훅 뻗쳐 나간 세 개의 금색 빛줄기에 에드의 힘인 푸른 빛이 담쟁이덩굴처럼 휘어 감겼다.

공격성을 가진 금빛과 치유의 힘인 푸른 빛이 맞물리며 검은 용을 향해 질주했다.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빛줄기가 용의 목과 가슴, 무릎을 꿰뚫었다.

콱, 콱, 콰아악,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핵의 위치를 간파해 파고든 빛줄기가 핵을 돌돌 감았다. 그대로 몸 밖으로 끄집어내려고 하는 사이, 치유의 힘을 가진 에드의 푸른 빛은 검붉은 핵을 정화했다.

시간이 길게 느껴지면서도 빠르게 지나갔다. 대공과 에드, 검은 용의 힘이 맞물리면서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러나 두 사람은 미동도 없이 서로의 손을 잡은 채 검은 용을 주시했다.

곧이어 검은 용의 몸 밖으로 핵이 빠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모든 기운을 잃어버렸는지 용이 진 위로 그 거대한 몸을 눕히더니 그 이후로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금색과 푸른색의 빛줄기에 감싸인 채 용과 분리된 핵은 점차 색이 옅어지더니 결국 하얗게 변했다. 그와 동시에 파사삭 부서지며 하늘로 튀어 올랐다.

마치 신호탄같이 허공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이었으나 그 밝기와 신비로움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 빛을 따라 고개를 젖혀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의 눈동자에 경탄과 경외가 깃들었다.

어느새 쏟아지던 비뿐만 아니라 우중충하게 밤하늘을 덮었던 먹구름도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을 대신 채우기라도 하듯 대공과 에드의 힘이 스며든 빛 조각들이 하늘에 걸린 별처럼 색색의 빛을 내뿜으며 빛났다.

누군가는 그 조각들이 몇 개나 되는지 헤아려 보려고도 했지만, 하늘을 빼곡히 뒤덮은 빛의 산란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 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늘에 떠 있던 조각들이 일제히 땅으로 내리 떨어졌다. 마치 꽃잎이라도 된 듯 나풀나풀 떨어지던 빛무리는 천천히 제국 전역을 뒤덮었다.

그 빛 세례는 비바람에 시달린 황도뿐만 아니라 맑은 하늘에 달이 높게 떠오른 북부에도, 안개가 잔뜩 끼었던 남부에도, 세찬 돌풍이 불던 동부에도 내려앉았다.

일순 제국이 환한 빛의 물결에 물들었다. 그건 어두운 밤에 깊은 잠에 빠진 사람들을 깨울 만큼 환했고, 아름다웠으며, 황홀했다.

그 빛 조각들이 땅으로 스며들기까지 몇 초에서 몇 분까지 제각각이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날 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잊지 못했다.

자신들이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제국의 신화의 한 장면을 보았음을.

* * *

대공은 잠든 에드의 앞머리를 넘겨주었다. 곤히 잠든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그의 배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새끼 용을 집어 들었다.

페즈와 검은 용이 난동을 부린 이후 3일이 지난 오전이었다.

볕이 따뜻하게 들어차는 곳에 만들어 둔 작은 둥지에 새끼 용을 옮긴 대공은 창가를 내다보았다.

황궁의 특실이었다.

황궁의 별채를 선보였던 페즈와는 전혀 다른 대접에 그의 위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수 있었다.

대공의 지위뿐만이 아니었다.

황실의 주인 또한 바뀌었다.

검은 용에게 생기를 빼앗겨 말라비틀어진 페즈는 숨만 간신히 내쉬다가 결국 이틀째 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가냘픈 숨을 이어가는 동안 아무도 찾지 않은 외로운 죽음이었다.

근위부대장과 자리를 피했던 황후는 아무런 미련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 후 황궁의 어른으로서 황태후가 소란스러운 황실을 수습했고, 어수선한 제국을 정돈했다.

물론, 그 구심점에는 ‘아스넬 린든 대공’이라는 이름이 함께 하고 있었다. 그날 제국에 일어난 신비로운 일은 현재만이 아니라 대대로 기록에 남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대공이 관심 있는 건 에드의 상태뿐이었다.

검은 용을 물리친 후, 환희에 물든 얼굴을 숨기지 못했던 에드는 자신을 확 끌어안았다.

품에 가득히 느껴지는 연인의 온기와 두 사람 중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는 안심, 그리고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이 혼재된 얼굴을 숨기며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텐스가 데리고 온 황태후에게 뒤를 맡기고 대공이 그와 함께 방으로 돌아왔을 때, 에드는 침대에 늘어지듯이 누워 눈을 감았다.

대공이 그를 안아 침대에 제대로 눕혀 주자 에드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일은 평생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정말이지…….〉

손을 더듬거리며 대공을 이리저리 만지기도 했다.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려 곁에 있는 사람이 대공이 맞다는 걸 확인하더니 입술에 입을 가볍게 맞춰왔다. 그러곤 이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다는 듯이 잠이 들었다.

“…….”

그 후로 수면은 계속되고 있었다. 황궁 주치의의 말로는 생명에는 전혀 이상이 없으며 아이 또한 전혀 문제가 없는 상태라고 했다.

긴장이 풀어지고 피로가 겹치면서 숙면에 빠진 거라고 했다. 몸이 회복되면 금세 정신을 차릴 거라는 진단을 내리면서.

“그래서 언제 돌아올 거야, 에드?”

에드에게 다가와 이불을 끌어 올려 준 대공은 그의 코를 가볍게 콕콕 찍었다.

“나는 빨리 보고 싶은데.”

에드의 곁에서 잠시도 떨어지기 싫었지만, 아직 어수선한 황궁과 제국 때문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에드의 이마에 짧게 입맞춤을 한 대공이 방을 나섰다. 매끈한 대리석 바닥을 울리며 밖으로 나가자 아직 얼굴이 익숙하지 않은 근위대장과 시종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바뀐 만큼 태도도 바뀌었다. 이전과 달리 그 누구도 자신을 채근하거나 독촉하지 않았다.

시종장을 따라 알현실에 들어가자 황태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어서 오게, 공.”

대공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손을 내밀어 자리를 가리킨 그녀가 소파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페즈가 매번 공의 얼굴을 보기가 어렵다며 난색 표하는 게 보기 싫었는데, 요 며칠 그 마음이 이해되지 않았겠나. 나도 공을 보지 못해 괴로운 날들이었네.”

“황태후 폐하께서 처리하실 일들이 많으실 텐데, 신은 더 나중에 천천히 찾아뵈어도 되지 않았을지요.”

옅게 웃은 그녀가 대공과 눈길을 마주쳤다.

“제국에 평온을 드리운 공인데 그리 말하면 내가 몹시 섭섭하지 않겠나.”

“…….”

“하지만 지금 공이 이 자리에 온 것도 아쉬워하는 나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궁금한 점이 있어서란 걸 잘 알고 있네. 제국을 맡아 달라는 내 요청을 거듭 거부한 공이 발걸음을 한 걸 보면.”

황태후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마시자 대공도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천천히 입을 뗐다.

“황태후 폐하, 에드가 단순한 피로 때문에 잠이 든 게 맞습니까?”

에드가 잠이 든 후 대공은 크게 티를 내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함으로 물드는 낯빛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자신을 바로 잡으며 빠르게 침착해져 갔다. 자신이 불안해한다고 해서 에드가 빨리 정신을 차리는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또한, 로넨을 어머니가 가졌을 때 본 것도 있었고…… 대공은 에드가 푹 쉬듯이 잠이 들었다가 개운하게 일어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대공의 나직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던 황태후는 그가 무언가 생각에 잠기자 차를 한 모금 더 마신 뒤 입을 뗐다.

“공, 이전엔 페즈 때문에 자세히 확인하기 어려웠던 선황제께서 남긴 기록을 들여보다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볼 수 있었다네.”

“그게 무엇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에드와 관련 있는 이야기인지 궁금합니다.”

황태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도 알다시피 황금 용의 피를 이은 존재들을 잉태했을 때 기력을 회복하느라 한동안 잠에 빠지는 일이 있지 않은가? 멜라가 공뿐만 아니라 로넨을 가졌을 때도 그랬고…… 그때는 공도 제법 자라서 봤을 테니 알고 있겠지.”

“하지만 어머니께서 로넨을 가졌을 때 사흘씩이나 계속해서 잠을 잔 적은 없어서 말입니다. 그리고 잠이 든 것도 로넨이 활발하게 태동하던 막달일 때였고요.”

황태후가 조금 소리를 내서 웃었다.

“로넨을 가졌을 때야 그랬었겠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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