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89화 (189/198)

“…….”

에드의 눈길을 따라 뒤를 돌아보자 황좌에 기어오르던 황제의 몸이 그대로 멈춰 있었다. 마치 동상이라도 된 듯 얼어붙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말라비틀어진 고목 같은 모습의 그는 어느새 모든 생기를 빼앗긴 채였다.

대공이 황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를 주의 깊게 살펴보자 목에 가늘게 연결된 검은 실을 찾을 수 있었다.

대공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용이 페즈의 눈에 들어간 마물 핵을 따라 생명력까지도 빨아들인 것이군.’

두 마리의 황금 용이 몰아붙이자 몸을 웅크리며 검은 연기를 쏴 시야를 가리고 그 뒤로는 검은 실을 떨어뜨려 황제의 몸을 노리고 있던 것이었다.

대공은 검으로 검은 실을 단숨에 베어 냈다. 그러나 깨끗하게 잘려 나갔던 실이 다시 재생되며 황제의 몸을 칭칭 감았다. 검은 용과 이어져 있는 가느다란 가락이었다.

그렇게 황제의 생명력을 흡수하고도 성에 차지 않은 검은 용이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북부 기사단과 근위대들이 막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검은 용이 울부짖었다. 대공은 그들을 향해 친 방어막에 힘을 실으며 일의 순서를 잡았다.

사람들을 안전하게 감싸 피해를 입지 않게 한 후 검은 용을 아래로 끌고 내려와 직접 처리하기로.

대공이 계획을 세우는 동안 그에게 집중하던 에드는 검은 용의 움직임을 분석하듯이 눈으로 따랐다.

대공과 황금 용들이 질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피해는 커지고 사람들은 지쳐 갈 터였다.

에드는 초조해지고 불안해지는 마음이 드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이러다 누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상처뿐인 승리는 피하고 싶었다.

그때였다. 툭, 툭, 툭 금빛 보호막으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어?”

잠시 멈췄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세찬 빗줄기였다.

그렇지 않아도 초조했던 에드는 점차 더 거세지는 빗발에 시야 확보가 어려워지자 마음이 급해졌다.

‘검은 용을 빠르게 해치우기 위해서는 움직임을 봉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에드가 두 마리의 황금 용을 살피며 그런 생각을 했을 때였다.

그의 눈으로 반짝이는 별이 들어왔다. 폭우가 쏟아지는 어두운 밤하늘에서 보인 빛이었다.

처음엔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옷소매로 눈을 비비고 보아도 다시 반짝이는 푸른 별이 눈에 잡히자 에드는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어떠한 장면들이 지나갔다. 그 장면들이 곱씹어 보기도 전에 에드는 깨달았다. 검은 용을 신속하고 완벽하게 없애는 방법이었다.

“저 빗방울들을 모아 감옥처럼 만든다면 검은 용을 막을 수 있겠구나.”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배 안에서 아이가 발을 작게 굴러왔다. 그게 맞다고 맞장구를 치는 것 같아 에드는 배에 손을 짚었다. 연기를 흡입한 사람들을 지키는 대공을 보며 밀어를 속삭이는 것처럼 물었다.

“버텨 줄 수 있지?”

그러자 아이가 걱정하지 말라고 답을 하듯이 발을 퐁, 차왔다.

기운 넘치는 아이의 대답에 에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내리는 밤하늘은 어두웠으나 불안이 사라진 그의 눈동자는 별보다 더 또렷하게 빛났다.

그는 대공이 둘러 준 금빛 보호막 밖으로 팔을 내밀었다. 정신을 일깨우듯 차가운 빗방울이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 정도 빗줄기라면 할 수 있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깨달은 에드는 손바닥을 적시는 빗줄기를 통제하기 위해 눈을 감고 온정신을 집중했다.

‘주변에 흐르는 물의 기운을 잡는 거야.’

어느덧 에드의 손바닥에 푸른 광채가 어른거렸다. 드넓은 바다를 닮은 색이었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빛은 서늘한 빗줄기를 원하는 형태로 빚어 나갔다. 처음엔 아지랑이처럼 뚜렷하지 않았던 모양은 점차 완벽한 밧줄의 형상으로 변했다.

곧 철썩, 어디선가 파도 소리가 들렸다.

‘……!’

에드가 눈을 뜨며 움켜쥐었던 주먹을 쫙 펼쳤다. 손바닥에서 떠오른 푸른 기가 맴도는 투명한 밧줄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좋아, 됐어!’

에드는 그 밧줄을 위로 던지듯 손을 휙 내저었다. 쏜살같이 솟구쳐 올라간 밧줄은 주저 없이 검은 용의 발을 휘감았다.

갑자기 잡아당기는 힘에 몸이 기우뚱한 검은 용이 짜증스레 울부짖었다. 줄을 끊어 내려 시도했으나 일반적인 밧줄과 달리 물로 만들어진 것이라 날카로운 발톱도 효과가 없었다.

방법을 찾지 못한 검은 용은 밧줄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날개를 퍼덕거렸다.

날개가 움직이자 사나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하지만 몸부림이 거세질수록 발목은 더 꽉 조여들 뿐이었다.

지상에서 올려다보던 에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은 괜찮지만, 계속 저렇게 공격을 가한다면 부서질지도 모르겠어.’

아직 자신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감을 잡지 못한 그에게 검은 용의 움직임은 너무 거칠어 보였다.

에드의 힘과 물이 섞여 만들어진 푸른 밧줄이 팽팽해졌다. 이대로 끊어지는 것은 아닐까 우려하던 그때, 쏟아지는 빗줄기가 에드의 힘에 이끌리듯 날아가 들러붙으며 밧줄을 더욱 튼튼하고 두껍게 만들었다.

“……다행이다.”

에드가 안도하는 사이, 버둥거리는 검은 용 때문에 잠시 멈칫한 루안과 새끼 용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세로로 긴 짐승의 동공에 에드의 모습이 선명하게 맺혔다. 이내 루안과 새끼 용은 에드가 자신들을 돕기 위해 힘을 썼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즉시 새끼 용이 아래로 활강할 준비를 했다. 에드가 신경을 써준 게 좋아 죽겠는 모양이었다.

북부에서 로넨을 앞세워 사고 치고 다니기 바빴던 새끼 용은 이런 상황에서도 용으로서의 위엄보다는 예쁨받고 싶은 티를 내지 못해 안달이었다.

신나서 내려가려는 새끼 용을 꼬리로 휘감아 저지한 루안이 엄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

‘…….’

두 짐승 사이에 말 없는 대화가 오갔다. 대공의 성격과 비슷한 루안에게 깨갱한 새끼 용은 저를 놓아 달라는 듯 몸을 흔들었다.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새끼 용의 모습에 루안이 꼬리에 주었던 힘을 풀었다.

다시 자유의 몸이 된 새끼 용은 분풀이 대상을 찾아 검은 용을 향해 눈을 돌렸다.

스르륵.

느릿하게 돌아간 새끼 용의 동공에 검은 용이 움츠러든 게 보였다.

급변한 분위기에 검은 용은 두꺼운 외피 아래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고 판단했는지 지상으로 입을 벌렸다.

‘또 불인가?’

미간을 좁힌 에드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로얄트 기사단과 황궁 근위대가 아직 구속구를 벗지 못한 사람들을 한데 모아 관리 중이었다.

대공은 에드가 쏘아 올린 물줄기를 감탄하다가 재빠르게 손을 뻗어 보호막에 힘을 더 실었다. 반원 모양의 보호막이 금빛을 뿌리며 마법 등보다 더 밝게 빛났다.

지상에는 굵어진 빗방울이 바닥을 적시는 소리만 요란했다.

모두가 검은 용이 뿜어낼 불길을 대비하며 전투태세를 다지던 그때 빗줄기 사이로 번쩍, 번개가 내리쳤다. 뒤이어 콰르르릉하고 천지를 뒤흔들 정도로 커다란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다음은 검은 용의 비늘이었다. 역방향으로 뾰족하게 돋아난 비늘에서 날카로운 검은 실이 뿜어져 나오더니 지상을 향해 날아들었다. 흡사 뱀처럼 요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에드!”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대공이 손을 뻗어 에드의 안전을 확인했다.

“전하, 전 괜찮아요. 하지만…….”

크고 단단한 가슴팍에 안긴 에드는 어깨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대공의 허리춤을 꽉 잡았다.

‘황제한테 그런 것처럼 생명력을 흡수하려는 거야.’

에드의 예상처럼 검은 실의 목표는 구속구를 벗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대공의 보호막에 가로막혀 나아가지 못하자 검은 실은 끝을 뾰족하게 바꾸더니 보호막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전하!”

기사단이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수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감싸는 커다란 보호막이었다. 반복되는 공격에 대공 혼자 유지하는 보호막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현재로서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에드는 자신을 끌어안은 대공의 근육이 팽팽하게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천둥소리 때문에 기사단이 외치는 소리는 다 들리지 않았지만, 주군을 힘들게 하는 검은 용 때문에 분노로 가득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들과 같은 심정인 에드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너무 화가 나요.”

“에드, 난 괜찮으니까 진정해.”

대공은 팔에 힘을 빼고 최대한 부드럽게 고쳐 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가 힘들어한다는 걸 알자마자 루안도 새끼 용을 따라 검은 용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검은 용은 제 가죽이 물어뜯기든 말든 대공의 보호막을 뚫어 사람들의 생명력을 흡수하는 것에 몰두했다.

수백, 수천 개의 검은 실이 계속해서 보호막을 꿰뚫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부딪혔다. 그때마다 지면으로 벼락이 내리치듯 엄청난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검은 용의 눈이 한차례 검붉게 빛났다 가라앉았다. 동시에 구속구도 같은 색으로 빛났다. 그러자 잠잠해졌던 사람들이 기사단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윽! 움직임이 거세졌어! 조심해!”

누군가 검집으로 사람들을 막으며 소리쳤다.

그를 본 에드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전하의 보호막을 뚫지 못할 것 같으니, 사람들을 밖으로 나오게 하려나 봐요.”

기사단의 숫자가 부족하다 보니 서서히 빈틈이 생기기 시작하자 에드는 대공에게서 한 발짝 떨어졌다. 대공이 의아하단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전하께서는 가서 기사단을 지휘해 주세요.”

대공이 그럴 수 없다는 답을 하기 전에 에드가 덧붙였다.

“전 걱정하지 말고 시간을 벌어 주세요.”

“시간?”

“전하께선 검은 용을 지상으로 끌어내려 싸우실 생각이시죠?”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사람들을 정화해 모두 피할 수 있게 한 뒤 검은 용을 끌어 내릴 생각이었어.”

에드가 미소를 지었다.

“저한테 더 좋은 계획이 있어요.”

검은 용의 처리는 결국 대공과 자신이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용을 지금 이곳에 끌어내리는 건 너무 위험해요.”

에드가 사람들을 가리켰다. 어쩌면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대공과 용과의 싸움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려는 거지?”

대공이 다정하게 물었다. 에드가 무엇을 하든 해내리라는 조건 없는 신뢰가 가득한 눈빛이었다. 기대에 부응하듯 에드가 대답했다.

“미리 알면 재미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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