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88화 (188/198)

거친 바람을 헤치고 쭈욱 늘린 왕홀이 대공에게 막히자 황제가 목청을 높였다.

“근위대장! 재무대신! 부대신관!”

온몸으로 검은 반점이 오른 그는 자신을 응당히 지켜야 한다고 여기는 이들을 입에 담았다.

하지만 그의 부름에 응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제의 얼굴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황좌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황제가 대공을 노려보았다.

“이게 다 너 때문이다! 짐에게 와야 했을 황금 용의 힘도! 피도! 가호도 모두 네가 빼앗아 갔기에 내가!”

마치 포효하는 듯한 노성이었으나 의미 없는 외침이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동조하지 못하는, 결국 스스로가 토해 낸 고약한 열등감과 애잔함의 발로였다.

“아니, 그건 나 때문이 아니야. 그건 전부 당신의 그릇이 작고 부족했던 것 때문이지.”

“다시 말해 보거라! 대공! 이 반역자가 이제는 시장통에서 굴러다니는 하찮은 벌레들이나 할 법한 말을 입에 올리다니!”

대공의 정확한 지적에도 황제는 경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에만 생각이 미쳐 황좌에서 일어나 길길이 날뛰었다.

대공은 힘이 억제된 상태에서도 황제의 심장을 단번에 꿰뚫을 힘이 있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치적인 요소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에드와 아이 앞에서 누군가를 죽이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길어진 왕홀의 몸체를 잡아 확 끌어당긴 대공이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은, 당신이 한 일을 눈으로 봐야 해. 당신이 떼를 쓰듯이 벌인 일들의 결과를. 황금 용의 가호로 우뚝 솟았던 황궁이, 황도가, 제국이 지금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황제의 밑바닥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때를 기다렸던 대공이 말을 이었다.

“눈을 떠서 봐, 페즈 네이트런.”

“감히 그 누구도 부를 수 없는 존귀한 이름이 네가! 너 따위가!”

“당신의 욕심으로 이루어진 이 황폐한 정원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

자신이 품어야 할 제국민들을 제 손으로 망친 순간, 그는 더 이상 황제가 아니었다.

대공이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페즈 네이트런, 당신은 저 용을 감당할 힘이 있는가!”

“짐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

“당신의 썩어 빠진 머리에는 제국을 위한 생각은 들어있지 않지. 오직 그 황좌와 왕관을 지키기에만 급급할 뿐.”

“하!”

“그러니 당신이 소리 높여 불러도 아무도 오지 않는 것이다! 충심으로 하는 조언에는 귀를 닫고 자신에게 기어오른다고 생각하며 처리하기에만 바빴으니.”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이 제국에서 짐보다 높은 자는 없거늘! 짐의 권위에 도전한다면 반드시 짓밟아 없애는 것이 짐의 사명이다!”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저 검은 용 아래에서 두렵고 막막함으로 떨고 있는 사람들이 당신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거겠지.”

“짐이 그런 버러지들을 일일이 신경 써야 하는가!”

“그러니 당신도 저 검은 용 아래 엎드려 그 심정을 느껴 봐.”

황좌에서 벗어나면, 왕관이 벗겨지면, 왕홀이 사라지면, 황제에게 남는 건 허울뿐인 과거의 영광과 페즈 네이트런이란 비루한 이름뿐.

아니, 이제는 그것들이 있어도 스스로가 부른 검은 용을 감당할 수 없는 이상 황제를 믿고 따를 사람들은 없었다.

황제는 이미 끝났다.

대공이 잡은 왕홀을 확 잡아당겼다.

“당신은 제국의 태양이 아니야.”

“짐이 제국의 태양이 아니라고?”

황제의 동공이 빠르게 수축했다. 광기에 물든 눈동자가 불타는 것처럼 들끓었다.

대공은 그 시선을 묵묵히 마주하며 왕홀의 끄트머리를 힐끔 바라보았다.

‘저걸로 용을 소환했었지.’

끝을 뾰족하게 장식한 검붉은 광석과 왕홀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왕홀은 구속구를 파괴할 방법이었다.

끝내 참지 못한 황제가 대공에게 달려들었다. 흑마법에 잠식된 그가 왕홀을 휘둘렀다.

냉랭한 기운으로 황제를 도발한 대공은 오히려 들고 있던 검까지 놔 버렸다. 황제가 안심하고 거리를 좁히도록 내버려 두었다.

“전하!”

뒤에서 에드의 간절한 외침이 들렸다. 동시에 근처까지 달려든 황제가 왕홀을 힘껏 내려쳤다.

대공은 구속구를 착용한 손을 들어 올렸다. 카앙, 금속끼리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보는 사람의 심장마저 철렁일 정도의 어마어마한 파열음이었다.

왕홀을 그대로 받아낸 손목이 저릿하다는 걸 느낄 새도 없이, 구속구가 깨지며 금빛이 대공의 시야를 물들였다. 억압된 힘이 일순 해방되며 터져 나온 빛이었다.

“너! 네 놈이…!”

황제가 격노하며 다시 달려들었다.

대공은 땅에 떨어져 있던 검을 발등으로 툭 쳐올려 손에 쥐었다. 서슬 퍼렇게 꽂히는 왕홀을 검날로 막아내자 다시 한번 캉, 하는 소리가 정원을 갈랐다.

검으로 왕홀을 가로막은 대공이 무표정한 얼굴로 황제를 마주 보았다.

“한때는 나도 널 증오했다.”

‘당신’이라 불러주던 것마저 관 둔 대공이 황제만 들을 수 있게 속삭였다.

“그런데 넌 증오할 가치조차 없는 놈이었어.”

대공은 마치 이 말을 전하기 위해 봐줬다는 것처럼 황제의 왕홀을 툭하고 밀어냈다.

“……!”

대공의 일격에 떠밀린 황제가 잠시 비틀거리다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닥쳤기 때문이었다. 그가 땅을 팔로 짚은 채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검은 용이 자신과 왕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크르르릉, 목울대를 깊이 울리던 검은 용이 불을 토해냈다.

“으윽……!”

벼락처럼 어둠을 뚫고 날아든 불길이 왕홀의 끄트머리에 내리꽂혔다. 왕홀이 부서지며 날카로운 금속과 광석이 산산조각이 나며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아악, 황제가 긴 신음을 흘렸다. 검붉은 파편이 두 눈을 찌르고 들어가더니 눈동자를 파고든 건 순식간이었다.

“왜…… 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눈앞이 어둠으로 물들자 황제가 주춤주춤 물러나며 눈을 감쌌다.

붉은 카펫을 더듬더듬 짚는 황제를 보며 대공은 발치에서 데구르르 구르는 왕홀을 집어 들었다.

‘역시 여기에도 마물 핵을 넣어 뒀던 것이군.’

대공은 두 동강 난 왕홀을 긴 창 내던지듯이 던졌다. 힘차게 날아가 황좌의 등받이에 왕홀이 콱, 콱 박혀드는 걸 본 그는 고개를 들었다. 황금 용이 꼬리로 검은 용의 목을 칭칭 감아 죄고 있는 게 보였다.

“…….”

그때 검은 용이 부족한 힘을 채우기 위해 바닥에 흩어진 마물 핵을 모아 올리려고 시도했다.

그를 발견한 대공이 구속구가 사라진 손으로 마법진을 그렸다.

“고대의 황금 용 루안.”

그의 오른손에서 빛이 퍼지며 우르르콰앙, 커다란 소리와 함께 황금 용 루안이 소환되었다.

[오랜만이군, 계약자 아스넬 린든.]

영롱한 빛깔의 안개를 몸에 두르고 나타난 루안이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서 검은 용을 몰고 있는 황금 용을 보며 긴 입김을 뿜어낸 루안이 에드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못 보던 사이 가족도 늘었고.]

에드의 배를 가만히 바라보던 루안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대공의 힘을 통해 이전보다 크고 강해진 황금 용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축하 인사는 이따가 나누는 게 좋을 것 같군.]

대공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날개를 활짝 펼친 루안이 하늘로 올라갔다.

대공은 하늘로 힘차게 오른 루안이 검은 용을 상대하는 것을 주시했다.

제국의 초석을 세운 황금 용의 힘을 이어받은 두 용은 특별히 어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호흡이 잘 맞았다.

검은 용이 지닌 마물 핵을 찾기 위해서 새끼 용이 검은 용을 옭아매면 루안이 크고 단단한 발톱을 휘두르며 크고 작은 상처를 입혔다.

그럴 때마다 검은 용은 황금 용들을 피하며 공격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입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시야를 가리고 작은 불꽃을 아래로 내리꽂았다.

어느새 황좌에 엉금엉금 올라가 왕홀을 더듬거리던 황제는 검은 용이 떨어뜨리는 불벼락을 보지 못했다. 오로지 왕홀에만 집착하다가 머리 위로 불벼락이 스쳐 지나가자 몸을 옹송그렸다.

대공은 그런 황제를 응시하다 몸을 돌렸다.

황제는 자멸하다시피 했고, 검은 용은 두 마리의 용에게 맡기고…… 이제 남은 건 이지를 잃고 헤매는 사람들을 정화 시키는 일이었다.

왕홀이 부서지지 않았다면 구속구를 파괴하는 게 더 수월했을 테지만, 검은 용의 술수에 망가진 것을 아쉬워할 필요는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을 숨죽여 지켜보던 에드와 시선을 마주치자 대공은 옅게 웃었다. 입술만 움직이며 소리 없이 말했다.

“에드, 늦지 않게 끝날 거야.”

대공은 에드가 아까 자신에게 흘려 준 치유의 힘을 떠올리며 마법을 끌어올렸다. 온몸을 따뜻하게 도는 이 온기는 에드가 전해주고, 함께하며 울리는 공명 같았다.

대공은 그 느낌을 머금은 채 힘을 썼다.

‘에드가 돕겠다고 나서기 전에 빠르고 정확하게.’

대공은 우선 이따금 떨어지는 검은 불벼락에 사람들이 맞지 않게 넓은 방어막을 둘렀다. 그리고 정화를 위해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때였다. 대공에게 한시도 눈을 떼지 않은 채 상황을 주의 깊게 살피던 에드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전하!”

에드의 부름에 눈을 뜬 대공은 뒤편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을 쫓으며 미간을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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