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87화 (187/198)

‘설마 아이가 놀란 건가? 아냐, 평소에 발로 차는 거랑은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어.’

에드가 뭔가를 가늠하듯이 미간을 찌푸리자 대공은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에드 왜 그래? 어디가 아픈 거야?”

그는 전쟁터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 때마저도 냉철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에드의 미세한 변화 하나에는 도무지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배 속의 아이 때문이야? 아니면 에드가 아픈 거야?”

대답을 기다리지 못할 정도로 초조한 대공이 덧붙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지금이라도 에드를 안전한 곳으로 보내 줄게.”

그제야 에드가 고개를 휙 들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 뭔가 좀 이상한 느낌을 받아서요.”

“이상한 느낌?”

“네, 아프거나 한 건 아니에요! 그게 그러니까…….”

아픈 건 아니라는 말에 굳어 있던 대공의 얼굴이 살짝 풀어졌다.

그러나 에드는 좀 더 확실하게 말해 주고 싶었다. 자신이 느낀 것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말을 고르는 중에, 하늘에서 커다란 굉음이 들렸다.

마물 핵을 흡수하고 되찾은 힘에 해방감을 만끽하던 검은 용이 갑자기 발작이라도 하는 것처럼 찢어지는 울음소리를 냈다.

그건 마치 짐승이 제 영역을 침범하려는 적을 향해 위협하는 소리와 비슷했다.

에드가 놀라서 중얼거렸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걸까요?”

으름장을 놓듯 울부짖던 검은 용이 별안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

에드가 배를 감쌌다. 착각이면 좋겠지만 그는 분명 조금 전에 용이 제 배 안의 아이를 바라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검은 용이 길게 울며 상체를 뒤로 젖히고 큰 숨을 들이켰다.

땅에 있는 모두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숨을 들이켠 용이 지상을 향해 불길을 내뿜으리라는 것을.

대공과 에드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다시 한번 힘을 끌어올릴 준비를 했다.

에드가 긴장된 얼굴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물이 부족해. 전하랑 같이 방어막을 만들어도 오래 버티진 못할 거야. 게다가 훈련한다고 했는데도 벌써…… 어떡하지?’

체력 소모를 생각하며 그가 걱정하는 동안, 폐부 깊숙한 곳까지 숨을 들이켠 검은 용이 지상을 향해 입을 벌리고 불길을 토해 냈다.

그리고 불기둥이 쏟아져 내린 바로 그 순간, 에드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섬광 같은 빛이 날아들었다.

크아아.

어쩐지 익숙한 울음소리도 들렸다.

질퍽한 땅에 남은 수분기를 모조리 끌어올려서라도 방어막을 만들어 내려던 에드는 눈앞을 환하게 물들인 금빛에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어느새 대공이 쳤던 방어막 위를 황금빛 날개가 덮고 있었다.

에드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황금 용…….”

금가루를 뿌린 듯한 커다란 몸체는 아름다움과 용맹함, 위엄과 우아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그건 전에 대공이 황궁에서 소환한 루안이 아니었다.

‘그럼 대체 이 용은 뭐지?’

그때 불길을 막아낸 황금 용이 최대한 몸을 웅크리더니 커다란 주둥이를 에드의 배 위에 살짝 가져다 댔다.

그리고 칭찬을 조르듯 가볍게 문질렀다.

얼결에 손을 뻗은 에드가 용의 뺨과 주둥이를 가볍게 만져 주자, 용이 좋다고 목을 그르렁댔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인데?’

배 속의 아이도 그런 에드의 생각에 동의했는지 꼬물거리다 못해 갑자기 뿅, 발차기했다. 자그마한 아이의 발 크기만큼 배가 튀어나왔다가 가라앉았다.

아이의 이런 반응도 익숙했다. 북부에서 새끼 용이 자신의 배 위에서 놀 때랑 똑같았다.

“혹시…….”

설마 하는 에드에게 대공이 말했다.

“에드, 북부 성을 지키고 있어야 할 녀석이 왔어.”

아, 짧게 침음한 에드는 로넨의 머리 위에서 뛰놀던 작은 용을 떠올리며 신기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건지 그 용이 날아와 몸집을 키우고 커다란 날개를 펼쳐 자신들을 감싸주고 있었다.

“어, 어떻게…… 아! 전하께서 목걸이에 용의 이동 마법을 심어 두신 건가요?”

“그렇긴 했지만.”

대공이 말끝을 늘이며 에드의 배를 짚었다.

“내가 녀석의 몸집을 이렇게까지 키우진 않았거든.”

급박한 상황이었는데도 대공은 차분한 모습으로 답했다. 자신의 눈높이보다 훨씬 커진 용이 입을 끌어올려 웃는 것 같기도 했다.

“녀석이 에드의 배에서 잘 놀더니 아무래도 우리 아이와 친해졌나 봐. 아이의 힘을 받아 이렇게 자란 것 같아.”

대공의 말이 끝나자마자 황금 용이 에드의 배에 뺨을 비볐다.

에드는 그 감촉이 주는 간질거림에 작게 웃다가 용의 턱을 살살 쓸어 주었다.

“이렇게 듬직하게 보이는 용이라니…… 북부 성에서는 장난을 치기에만 바빴는데.”

그런 교감이 기분 좋은지 배 안에서도 다시 발을 뿅, 뿅 차는 아이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광기에 물든 황제, 흉악한 검은 용, 검은 연기에 중독되어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사람들.

방금 전까지 폐허와 다름없이 보이던 곳이 체계 잡힌 북부 기사단과 빛줄기를 타고 온 용이 나타나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변했다.

“이런 지원군이라면 정말 든든한데요?”

에드는 대공과 함께 황제가 쑥대밭으로 만든 이 황폐한 정원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는 상상을 했다.

아니, 그건 헛된 환상이 아니었다. 곧 이루어질 현실이었다.

“정말 듬직하지. 아이가 얼른 집에 가자며 힘을 보탰으니 빨리 일을 해결하고 북부로 돌아가자, 에드.”

“네.”

그 대답에 마치 호응이라도 하듯이 에드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던 황금 용의 날개가 퍼덕거렸다.

아름다운 날개가 움직일 때마다 에드의 얼굴로 음영이 깊게 졌다가 사라지며 사방으로 바람이 확 일었다.

황제의 머리카락이 마구 흔들리며 황좌에 앉아 있는 몸이 압박될 정도의 위력이었다.

묵직한 충격에 그의 얼굴이 왈칵 찌푸려졌으나 왕홀을 손에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하늘에 힐끗 시선을 준 황금 용이 대공을 바라보았다. 언제든 날아갈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몸을 펴자 대공이 끄덕였다.

“…….”

날개를 활짝 편 황금 용이 어두운 밤하늘을 쏜살같이 가르며 날아오르자 세찬 바람이 휘몰아쳤다.

솟구치는 기운에 공기가 팽팽하게 조여들었다가 확 퍼지며 대공의 옷자락이 크게 휘날렸다.

방어막 아래에서 용의 꼬리가 남긴 긴 잔상을 올려다보는 에드의 눈동자가 금빛 색채로 물들었다.

어느새 밤하늘로 떠오른 황금 용이 맞닥뜨린 검은 용을 꼬리로 후려치자 커다란 굉음과 함께 번쩍이는 금색 물결이 하늘에 수놓아졌다.

그 빛이 어찌나 밝은지 황도에 사는 사람이라면 황금 용의 형상을 모두 볼 수 있을 정도였다.

황금 용이 움직일 때마다 검은 용의 몸체가 벼락을 맞은 것처럼 퍼뜩퍼뜩 튀었다. 어둠을 가른 황금빛이 마치 밤하늘에 스며든 물줄기 같았다.

쿠르르릉, 하늘이 포효하듯이 울었다. 검은 용의 비명에 사람들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황금 용이 움직일 때마다 휙휙 몰아치는 광풍 아래에서 대공 또한 하늘을 주시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배는 더 커졌지만, 과연 검은 용을 혼자 상대할 수 있을까?’

혹여 황궁에서 루안을 부르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북부에서 미리 주문을 걸어 두었던 새끼 용은 예상보다 기세가 강했지만, 검은 용을 이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대공은 우연 따위에 목숨을 맡기진 않으므로 손목에 걸린 구속구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며 가늠했다.

황금 용의 발톱이 자란 새끼 용과 황금 용의 비늘에서 떨어져 나온 루안이 함께 공격하면 검은 용을 제압하기 수월할 터.

하지만 악의가 짙은 흑마법을 쓴 구속구를 파괴하기 위해선 억압된 몸에서 힘을 끌어내야 했다.

그리고 그러면…… 대공은 에드를 바라보았다. 결국은 무리가 간 자신의 몸을 치유한다고 에드가 힘을 쓸 것이 눈에 선했다.

괜찮다고 했지만 그의 체력이 소진된 것이 눈에 보였다.

대공은 이내 결단했다.

덩치가 커지긴 했지만 검은 용 크기의 반밖에 되지 않는 새끼 용에게 우선 하늘을 맡기는 것으로.

현재까지는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니 상황을 보다가 몰린다 싶으면 그때 구속구를 파괴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구속구를 파괴할 다른 방법이 있기도 하니.’

대공은 황제를 응시했다.

새끼 용에게 힘을 불어넣은 것도 루안을 부를 수 있을 때까지 버티기 위한 선택이었으니, 처음 계획을 짤 때와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이 상황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는 황제는 예상 밖의 일이었지만, 대공은 에드가 체력을 비축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게 중요했다.

‘새끼 용이 검은 용을 물리치면 제일 좋은 결과이기도 하고.’

그는 지금까지 좋은 예감, 유쾌한 징조와 같은 불확실성에는 전혀 기대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이가 만들어 준 기회, 아이의 힘으로 자란 용을 전적으로 믿어 보고 싶었다.

이전의 대공은 미래를 생각하는 건 사치와 다름없었다. 과거를 수없이 되뇌며 잃어버린 로넨을 찾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에드와 만나면서 그는 현재를 살았고, 미래를 꿈꾸었다.

그런 자신과 에드의 결실인 아이가 전해 준 선물은 기적과 다름없었다.

자신이 대비한 일에 아이가 힘을 더해 큰 도움으로 나타났고, 대공은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의 가족들과 어떤 길 위에 오른 건지 잠시나마 엿본 기분이었다.

신뢰로 연결된 자신과 에드, 그리고 아이와 로넨이 서로를 의지하고 뜻을 이루어가며 결국 승리하는 그 길을.

그 순간이었다.

끼이이익.

대공은 눈앞을 파고들 듯이 달려드는 금속에 들고 있던 검을 세워 그를 빗겨 흘렸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검과 왕홀의 끄트머리가 부딪치는 힘에 검 표면으로 불꽃이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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