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86화 (186/198)

마법사의 가슴이 뻥 뚫린 건 순식간이었다. 단말마를 내뱉은 마법사의 몸이 단상으로 쿵 떨어졌다.

황제는 눈도 감지 못하고 숨을 거둔 그를 보며 혀를 찼다.

“쯧쯧, 사냥이 끝나면 쓸모를 다한 사냥개는 없애야 했는데, 짐이 너무 늦었어.”

이미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검은 핏줄은 핏대뿐만 아니라 황제의 얼굴을 타고 올라와 흰자위까지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황제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황실 마법사를 단숨에 죽이는 것을 모두가 지켜보았다. 그것도 출처를 알 수 없는 마법을 이용해서.

‘황…… 황제가 미쳤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더는 이곳에 있을 수 없었다. 유리 벽마저 부서져 내렸으니 출구가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충격에 벌벌 떨고 있던 사람들은 힘을 쥐어짜 허물어진 벽 너머로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봐, 비켜!"

"이칼르 남작 이게 무슨 짓인가?"

아수라장이 된 연회장에서 대공은 에드의 손을 잡아 왔다. 다른 손에는 검을 꽉 쥔 채였다.

“전하.”

“괜찮아.”

대공이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연회장 문이 열리며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묵직하지만 재빠른 수십 개의 발걸음, 바람에 휘날리는 잿빛 망토, 북부를 상징하는 용이 수놓아진 표식.

대공이 뽑아 수도에 데려온 북부의 수호자, 로얄트 기사단이었다.

선두에 선 남자는 이르텔이었다.

난장판이 된 곳에서도 그의 표정은 엄숙하고 진지했다. 그가 신호를 보내자 기사단이 흩어져 도망치는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반가움과 뿌듯함을 느끼던 에드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텐스가 보이질 않네요?”

텐스라면 불쑥 튀어나와 한쪽 눈을 찡긋거리기 바빴을 텐데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

그러자 대공이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조금 낮아진 음성으로 속삭였다.

“에드, 그 녀석을 걱정할 필요 없어.”

에드에게 그 음성은 마치 다른 이에게 걱정 한 톨도 나눠주지 말라는 것처럼 살짝 치기 어린 아이의 말처럼 들렸다.

에드가 힐끗 눈동자를 굴려 대공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인상을 살짝 구기고 앞을 보고 있었다.

그때 이르텔이 도망치는 사람들을 거슬러 이쪽으로 다가왔다.

“대공 전하.”

이르텔은 발뒤꿈치를 붙이고 허리를 곧게 세운 채 대공을 바라보았다.

“북부 로얄트 기사단 단장, 이르텔 보고합니다.”

그리고 입술을 떼려는데 대공이 먼저 말을 가로챘다.

“늦었군.”

“죄송합니다. 예상보다 늦어졌습니다.”

“됐다. 그보다 그분은?”

“지금 모셔 오는 중입니다.”

‘그분?’

아마 수도로 오기 전 무언가 기사단 내부에서 따로 계획한 일이 있는 듯싶었다. 에드는 그분은 누구고, 왜 이곳으로 모셔 오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황제는 틈을 주지 않았다. 여유롭게 웃으며 도망가는 사람들을 개미 구경하듯 보던 그는 기사단이 나타나자 벌컥 치미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턱 끝의 근육이 기괴하게 실룩일 정도로 이를 꽉 깨문 황제가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듯이 왕홀로 단상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전하 피하십시오!"

이르텔이 소리치며 대공과 에드의 앞을 막아섰다.

“읍! 윽!”

“이게 대체, 뭐, 컥!”

왕홀에서 무수히 많은 검은 안개들이 뻗어 나오더니 도망치는 사람들의 몸통을 휘감고 강제로 입을 벌리게 했다.

검은 안개가 반항하는 사람들의 입 안으로 파고들어 가자 마치 독이라도 퍼진 듯이 사람들이 하나둘씩 픽픽 쓰러졌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잠시 뒤, 쓰러졌던 사람들이 줄에 매달린 인형처럼 일어났다. 부릅뜬 그들의 눈이 모두 검게 변해 있었다.

에드는 숨을 집어삼켰다.

그 모습이 즐거운 듯 밤하늘을 선회하던 검은 용이 길게 울부짖었다.

사람들을 돕던 기사단도, 대공과 에드도 모두 숨을 죽이며 주변을 살폈다.

“…….”

폭풍전야의 고요함이 맴돌았다. 누구 하나 섣불리 말을 뗄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숨이 막힐 듯한 정적을 깨트린 건 황제였다.

“짐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것들은 필요 없다.”

단상 아래로 굴러떨어진 마법사를 고압적인 시선으로 비웃은 황제가 대공을 응시했다.

“감히 짐의 말을 거역하는 자들도 필요 없지.”

그가 왕홀을 들지 않은 손으로 황좌의 팔걸이를 쓰다듬었다.

“모두가 짐의 발아래에 있어야 마땅하다.”

상아로 만든 뼈대. 붉은 벨벳과 금색 자수. 촘촘히 박아 넣은 보석.

오직 제왕에게만 허락된 자리에 앉은 그가 모두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짐이 곧 제국의 태양이다.”

그 말이 신호라도 된 듯 검은 연기에 중독된 이들이 멀쩡한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흡사 굶주린 짐승 같은 모습이었다.

“악! 저리 가! 이거 놔! 놓으라고!”

여기저기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기사단의 등장으로 질서가 잡혀가던 연회장 주변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이게 무슨.”

좀처럼 당황하는 일이 없는 이르텔 마저도 기괴한 광경 앞에선 별다른 수가 없었다. 무작정 검을 빼 들고 방어 자세를 취하려는데, 등 뒤에서 침착한 어조의 대공 목소리가 들렸다.

“검은 연기와 구속구가 연동되어 사람들을 움직이고 있어.”

그 검은 연기는 화려한 왕홀에서 시작되었다. 굵고 기다란 왕홀의 끝에 뾰족하게 장식된 검붉은 부분을 본 대공이 이르텔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기사단은 사람들을 보호해라.”

대공과 에드가 걱정되었으나 이르텔은 곧장 몸을 돌렸다.

자신의 주군은 현명하고 강했으며, 언제나 최선의 판단을 내렸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힘차게 대답한 이르텔이 큰 소리로 기사단에 지시를 내렸다.

잠깐 혼란스러워하던 기사들은 이르텔의 말을 듣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제일 먼저 취한 행동은 구속구를 착용한 사람들을 한곳으로 모으는 것이었다.

소수정예인 기사단이 많은 사람을 관리하려면 한 곳에 몰아넣어 보호하는 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므로.

결집한 사람들 주위를 둥글게 에워싼 기사단이 검을 뽑으려는 순간, 대공이 날카롭게 외쳤다.

“이들은 조종당하는 것뿐이니 절대 큰 부상을 입히지 마라, 최대한 제압을 목표로 해!”

지금은 비록 검은 연기를 마시고 이지를 빼앗겼으나, 그들도 기사단의 수호를 받아 마땅한 이들이었다.

기사단 중 누군가 낮게 읊조렸다.

“공격은 하지 못하고 방어만 해야 한다니.”

죽여도 되는 적이나 마물만 상대해 온 그들에게는 까다로운 명령이었다.

그러나 난감해하던 것도 잠시, 기사단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일제히 검집을 들어 올리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철커덕.

누구 하나 흐트러짐 없이 모두가 같은 박자로 움직였다.

검날은 뽑지 않았으나 기세만큼은 살기등등한 기사단을 향해 이르텔이 외쳤다.

“북부의 수호자! 로얄트 기사단의 이름으로!”

그러자 기사단들이 입을 모았다.

“대공 전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들의 호기에 뒤로 물러나 있던 근위대들도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며 합세했다.

기사단의 재빠른 움직임을 확인한 대공은 생각했다.

‘황제는 흑마법도, 용도 완벽히 장악하지 못하고 오히려 잠식당했어.’

예상보다 황제가 더 위험한 것에 손을 대 애초의 계획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대책이 없는 건 아니었다.

대공은 고개를 돌렸다.

“에드.”

금빛 보호막에 감싸인 그는 조금도 겁먹지 않은 모습으로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네, 전하. 제가 따로 도울 일이 있을까요?”

에드는 여태껏 오늘처럼 힘을 많이 써 본 적이 없었다. 갑작스럽게 무리를 하는 바람에 몸이 조금 힘들었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배 속의 아이가 잘 버텨 주길 바랄 뿐이었다.

“잠깐 목걸이 좀 만질게.”

가까이 다가온 대공이 에드의 품에서 목걸이를 찾아 손에 올린 뒤 무언가를 작게 속삭였다.

“전하 방금 뭐라고 하신…… 어?”

말을 하다 말고 에드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배 위에 손을 올렸다.

무언가를 읊조린 대공이 목걸이를 내려놓자마자 배 안에서 쿵, 하고 세찬 박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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