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막을 수 있을까? 아니, 나는…… 못 해.'
마법사는 광인처럼 웃고 있는 황제에게서 조금씩 멀어졌다. 그리고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도를 찾으려는 그의 시야 끝에 두 사람이 걸렸다.
멸족시킨 줄 알았던 젤다족의 생존자와 용의 피가 흐르는 북부의 검.
잠시 망설인 마법사가 그들을 향해 입술을 떼려는 찰나였다.
“……!”
저 멀리서 등줄기가 뻣뻣해질 정도로 사납게 울부짖은 짐승의 소리가 들려왔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자신에게 뭔가를 말하려던 마법사를 응시하며 대공은 에드의 옷자락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 안에 담아 놓은 마법을 이용해 에드를 대피시키려는데 손등을 덮어 오는 따스한 손이 있었다.
대공이 시선을 돌리자 그러지 말라는 듯 고개를 내젓고 있는 에드가 보였다.
“전하께서 목걸이에 마법을 걸어 놓을 것을 알고 있어요.”
“…….”
“그리고 저를 가장 안전하게 피신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으셨겠죠. 하지만 전하께서 함께 가시는 게 아니라면 전 가지 않겠습니다.”
대공의 말을 듣지 않아도 자신을 혼자 보내려 했다는 걸 안 에드가 덧붙였다.
“이럴 때일수록 전하의 곁을 제가 지켜야 합니다.”
에드는 더 이상 무력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또한, 그의 곁에 자신이 있음을 알려 주고 싶었다.
대공이 마물을 처치하러 북부 성을 나섰다가 연락이 닿지 않았을 때 에드는 그의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대공이 무사히 귀환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지만, 그와 함께하지 못하고 기다리기만 해야 했던 그런 감정을 다시는 느끼기 싫었다.
대공이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고 싶은 만큼, 자신 또한 대공의 곁에서 함께 하고 싶었다.
“그러니 전하…….”
“……에드.”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이 손을 마주 잡는 그때, 머리 위로 짙은 그림자가 졌다.
누군가 외쳤다.
“용, 용이다!”
하늘로 솟은 검은 안개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용이 바람 소리를 내며 뼈대만 남은 유리 천장 위를 선회했다.
대공과 에드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둠이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까만 용은 그 크기와 기세가 대단했다.
빙글빙글 하늘을 맴돌던 용은 천장 가까이에 다가와 연회장을 들여다보았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짐승의 동공이 무언가를 찾듯 사람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용이 눈을 끔뻑일 때마다 얇은 표피가 가로로 닫혔다 열렸다.
용의 눈을 가까이에서 볼 일이 없는 사람들은 기겁하며 주저앉거나 벌벌 떨기에 급급했다.
앙상한 뼈, 쭈글쭈글하지만 단단해 보이는 가죽, 날카롭고 소름 돋는 발톱.
모든 것이 꺼림칙했다.
게다가 뚫린 연회장 안으로 들이댄 용의 얼굴은 흉측하기 그지없었다.
왼쪽 얼굴은 비늘이 온전히 덮이지 않아 흰 뼈가 드러나 있었고, 턱 아래로는 피 같은 검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
용의 얼굴을 따라 줄줄 흘러내리는 검은 액체가 바닥에 떨어지자 치지직 소리가 나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를 피하느라 꺄아악, 울리는 비명 소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금빛 보호막이 에드의 주변을 감쌌다.
그에 놀란 에드가 옆을 바라보았다.
“전하 괜찮으세요? 구속구 때문에 힘을 못 쓰실 텐데 어떻게?”
대공의 손목에는 힘을 제어하는 구속구가 아직 그대로 착용되어 있었다.
“아까 치유할 때 에드의 힘 일부가 내게 들어온 걸 느꼈거든. 에드는 구속구의 영향을 받지 않으니 나도 그럴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지.”
두 사람이 안도하는 것도 잠시, 베일을 확 벗어 던진 가짜 대공비가 팔을 벌리고 섰다.
그러자 용이 두리번거리던 것을 멈추고 연회장 안쪽으로 들이민 주둥이를 쫙 벌렸다.
“……허억!”
“저, 저건 또 뭐야!”
가짜 대공비의 몸이 검은 모래성 무너지듯 허물어지더니, 검붉은 광석 같은 것이 바닥에 도르르를 떨어졌다.
‘검붉은 광석의 모습이 마치…….’
에드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설마 마물의 핵?”
수년간 마물을 토벌해 온 대공은 그것이 마물 핵임을 바로 알아보았다.
그걸 수거하기 위해 빠르게 에드 앞으로 나서는데 주둥이를 벌린 용이 검은 불길을 내뿜었다.
쏴아악.
그와 동시에 대공은 자신을 가로막은 보호막을 보았다. 뒤를 돌아보자 자신이 쳐준 금빛 보호막 안에서 손을 뻗은 에드가 보였다.
“…….”
연회장 곳곳에 놓인 분수대의 물이 에드의 손끝을 따라 움직이며 날아가 자신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감싸고 있었다.
대공은 자신을 감싼 방어막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커다란 물방울처럼 생긴 방어막의 표면은 푸른 물결이 일렁였고, 귀를 기울이면 찰랑거리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대공이 그에 손을 대보려고 하자 급하게 만든 탓인지 보호막은 이내 빗줄기처럼 쫘르륵 흘러내리며 바닥을 적셨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대공은 에드가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는데 에드의 외침이 들렸다.
“전하, 검은 용이!”
불길을 내뿜어 대공의 움직임을 막은 용이 바닥에 떨어진 마물 핵을 공기와 함께 후읍 빨아들였다.
크르릉!
핵을 흡수한 마물이 밤하늘을 향해 크게 울부짖었다. 소름이 끼치는 짐승의 울음소리와 함께 연회장의 유리 벽이 완전히 부서져 내렸다.
그 후 용이 사람들을 모인 곳을 향해 불을 뿜어내려고 입을 벌렸다.
그 모습을 보고 에드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손을 치켜들며 분수대를 바라봤다.
하지만 아까 한 차례 방어막을 만든 탓인지 이미 분수대에는 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불을 쏘려는 용을 보며 에드는 다급히 이곳저곳 둘러봤지만, 보호막을 사용할 정도의 물이 고인 곳은 찾지 못했다.
그때 그의 시야에 연회장 한쪽에 굴러다니는 수많은 포도주와 샴페인 병들이 담겼다. 대부분의 병이 깨져서 그 안에 들어 있던 술이 바닥에 흐르고 있었지만, 이 정도 양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의심하지 마. 할 수 있어!’
그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분수대에 있던 남은 물들 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 고여 있던 술까지 전부 에드의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됐어!’
간발의 차로 푸른색을 뿜어내던 아까와 달리 포도주와 샴페인 색이 섞인 오묘한 빛깔의 방어막이 사람들을 감싸며 용이 쏘아 낸 화염을 막아냈다.
‘좋아, 금방 사라졌지만 방금 공격으로 다친 사람은 없어.’
크르르릉!
검은 불길이 막히자 마물의 핵을 완전히 흡수한 용이 또다시 울부짖으며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투둑, 하고 거친 가죽이 뜯어지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 소리는 이내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다.
두려움을 자아내는 소리에 사람들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세, 세상에!”
“……도, 도대체 저게 무슨!”
검은 용의 몸집이 거대해지고 있었다.
짐승은 마치 해방감을 맛보듯이 날개를 퍼덕이며 세찬 바람을 일으켰다. 밤하늘 위로 솟아 올라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석 마법사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마물을 흑마법으로 조종하려고 일부러 핵과 분리해 둔 건데!’
마물에게서 핵을 빼 가짜 대공비에게 넣어 둔 건 흑마법으로 쉽게 마물을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고개를 돌린 마법사가 황제를 살펴보았다. 이지를 잃은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제대로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큰일이었다.
황제의 의지가 남아 있다면 대공을 치우고 끝날 일이었지만, 그게 아니라면 여기 있는 모두가 위험했다. 어쩌면 제국 전체가.
자기 몸 하나 대피하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머뭇대는 이유는 욕심 때문이었다.
‘어차피 대공도, 저 에드라는 놈도 내가 젤다족을 멸족시켰다는 것을 모르니 황제를 버리고 이번 일을 수습하며 내 자리는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지도.’
마법사의 마음이 대공에게로 기울어졌다. 타고 있는 배가 부서지고 물이 차오르면 가라앉기 전에 다른 배로 옮겨가는 것이 세상의 이치 아니던가.
마법사의 갈등을 알아챈 대공이 그를 향해 말했다.
“구속구를 풀어라.”
대공은 처음 검은 용을 보았을 때 몸에 스며든 에드의 힘을 사용해 자신의 용을 부르려 했다.
하지만 구속구에 또 다른 제약이 걸려 있는지 소환을 할 수가 없었다.
대공은 아까보다 몸 안에 도는 힘을 조절하기 수월했으나 당장 황금 용 루안을 부를 수는 없었다.
그는 저 짐승이 하늘로 올라가 있는 지금 바로 루안을 소환해 저 검은 용을 맡기고, 자신은 에드의 보호에만 집중할 생각이었다.
"얼른."
대공이 한 번 더 재촉하자 계산을 끝낸 마법사가 황제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예전과 달리 예의를 차리는 척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그럼 폐하 긴박한 상황이니만큼 대공 전하의 구속구를…….”
그러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황제가 실소를 터뜨렸다.
“하하, 그래 짐이 너무 늦었다.”
“……네? 그게 무슨?"
좋지 않은 예감에 마법사가 뒤로 물러나려는데 황제가 씩 웃더니 왕홀로 바닥을 쿵 찧었다. 일순간 검은 연기가 송곳처럼 뾰족해지더니 그대로 마법사의 가슴을 관통했다.
“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