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코앞에서 무기를 달라고 하니 그렇지 않아도 싸늘하게 느껴지던 연회장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근위대장은 황제의 명령만 기다리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공도 손을 뻗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숨통을 조이는 긴장감이 이어지자 모두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 냉기가 감도는 대치를 끊은 건 황제였다. 실소를 터뜨린 그가 입술을 뗐다.
“그래, 그의 뜻대로 어디 한 번 줘 보거라.”
그제야 근위대장이 움직여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건넸다. 충직한 그는 언제든지 몸을 던져 검을 막아낼 수 있도록 황제의 곁을 지키고 섰다.
그러나 그들에겐 관심도 없이 시선을 거둔 대공이 사뭇 다른 온기로 말했다.
“에드, 잠시 눈을 감고 있어.”
“……전하.”
“이런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아.”
〈놀랄까 봐 미리 말하는데, 혹시 연회 자리에서 내가…….〉
대공이 했던 말을 상기한 에드는 숨을 고르며 그의 뜻에 따랐다.
대공의 온유한 음성에 사람들이 눈동자를 굴렸다. 재무대신도 마찬가지였으나 티를 내지 않으며 다음 일을 재촉했다.
“부시종장은 전하의 피를 닦을 천을 가져오고, 전하께선 선황의 유지를 확인하시지요.”
한평생 검을 잡아 온 사람답게 대공은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의 손바닥을 날카로운 검으로 내리그었다.
그러자 시종장이 펼치고 있는 양피지 위로 붉은 피가 떨어졌다.
“…….”
시종장의 눈이 크게 떠졌다. 종이가 붉게 물들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양피지는 피를 빨아들였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대공의 피를 흡수할수록 종이가 금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글, 글자가……!”
무릎을 굽히고 양피지를 펼치고 있던 시종장이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붉은 피는 금색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글자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신탁 속의 북부 제일 검과 얼음 호수의 빛이 누구인지 밝히려는 자, 황실에 대대로 내려오는 검 앞에서 그들의 피를 섞으면 환하게 빛나는 별을 볼 수 있으리라.
한동안 공중에 떠 있던 글자는 금빛 모래처럼 사르르 바닥으로 쏟아져 내리며 다시 양피지로 스며들었다.
글자의 기운에 압도된 사람들은 섣불리 입을 떼지 못했다.
“전하.”
이때 침묵을 깨고 에드가 손을 뻗었다. 어느새 눈을 뜨고 모든 것을 지켜본 그가 품에 챙겨 온 깨끗한 천으로 대공의 손을 감쌌다.
흰 천이 붉게 변해가자 안쓰러움에 에드의 눈빛도 가라앉았다.
그는 이 넓은 연회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대공의 상처만 중요하다는 듯이 지혈에 집중했다.
부드러운 에드의 손놀림에 대공은 문득 지난 일을 떠올렸다.
“내가 에드의 상처를 이렇게 감싼 적이 있었는데.”
“헤린스 백작 저에서 말이죠?”
“그래, 그런데 괜찮아. 아직 지혈하기는 이르잖아.”
“그렇죠, 우리들의 피를 섞어 선황의 유지를 증명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에드는 대공의 상처를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는 둘의 태도에 헛웃음을 흘린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를 갈았다.
“그대가 그랬지? 짐의 눈과 귀를 가리는 이들이 있다고. 그런데 그 말은 대공, 스스로에게 해야 할 말이지 않겠나?”
날카로운 언사에 고개를 든 대공을 보며 황제가 비릿하게 웃었다.
“기껏해야 사특한 방법을 쓰며 그대를 기만하는 사기꾼에게 현혹되다니, 대공의 안목도 참으로 알만 하거든.”
황제가 마법사에게 턱짓하자 그가 다가왔다.
“궁중 수석 마법사는 양피지를 수거해 선황께서 남기신 진품인지 알아보아라.”
“네, 황제 폐하.”
단상 아래로 내려가 양피지를 들여다보던 그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황제에게 되돌아왔다.
“확인해 본 결과 흑마법이 걸린 가짜인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마법사가 거침없이 외치자 장내는 다시 시끌시끌해졌다.
황제는 손바닥을 뒤집듯이 더 이상의 확인 절차도 없이 선황이 남긴 뜻을 단숨에 뒤엎었다. 그러고는 왕홀로 에드를 내리꽂듯이 가리켰다.
“근위대장! 대공을 현혹하는 저 악독한 놈을 당장 잡아 감옥에 가두어라!”
억지였다, 그러나 근위대장은 황제가 이치에 맞지 않은 명을 내리는데도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그가 에드를 잡기 위해서 걸음을 떼자 이제까지 상황을 주시하며 신중하게 움직이던 대공이 자리에서 바로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아까 근위대장에게서 넘겨받은 검이 들려 있었다.
황제는 그 검을 내려다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격노했다.
“대공, 지금 그 칼은 왜 드는 것인가? 내 명에 불복하겠다는 건가? 지금 당장 칼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반역이라고 알겠네!”
에드를 막아선 대공이 대답 없이 검을 바로 잡자 황제가 목청을 더 높였다.
“뭣들 하느냐! 저 반역자를 당장 제압하지 않고!”
“폐하, 저는 부모님과 동생을 지키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낮게 울리는 대공의 음성이 결연했다.
“그걸 짐에게 말하는 의도가 무엇이냐? 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고? 그렇다고 죽은 자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이번에는 제 모든 것을 걸고 가족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대공이 황제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선언했다.
“에드 린든을 비롯하여 제 사람이라면 모두 말입니다.”
흔들림 없는 대공의 각오에 황제가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안면을 크게 구겼다.
“뭣들 하느냐,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냐!”
사람들은 눈동자를 팽팽 굴리며 이 일에 연관되고 싶지 않아 안색을 굳혔고, 근위대는 단상을 에워싸며 긴장감을 높였다.
그때 분노로 몸을 들썩이며 씨근덕거리는 황제에게 마법사가 다가왔다.
“폐하, 이러다가는 계획한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빠르게 몇 마디 소곤거리자 황제가 이를 꽉 물었다. 이맛살을 찌푸린 채 대공을 노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마법사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소리 없이 입을 벌렸다.
그를 살피던 대공은 마법사가 쓴 마력의 흐름을 깨닫자마자 일으켜 세웠던 에드를 자신 쪽으로 더 끌어당겼다.
“에드, 내게서 떨어지지 말고.”
그 순간, 대공은 손목에서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압박감을 느꼈다. 아까 착용했던 구속구가 확 조여들며 남기는 감각이었다.
“전하?”
대공의 몸이 살짝 굳는 걸 알아챈 에드가 소리를 죽여 물었다. 손목을 찌르는 따끔한 감각에 구속구를 노려본 대공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놀라면 안 돼, 에드.”
“그게 무슨……?”
에드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대공의 손끝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전하!”
놀란 에드와 달리 황제가 무슨 일을 할지 지켜보려던 대공의 표정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담담했다.
‘차가 아니라 구속구에 치졸한 짓을 해 두었군.’
그때 이쪽을 보던 누군가가 이변을 눈치채고 소리쳤다.
“저, 저것 봐요! 대공의 손이 까맣게 변하고 있어요!”
그러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대공의 몸에 검은 반점이 빠른 속도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황제는 그 상황이 무르익을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다가 사람들의 불안감이 커지자 때가 되었다는 듯 핏대를 세웠다.
“이것 봐라! 대공! 하늘의 뜻을 받은 짐이 찾은 진실을 부정하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게 아닌가!”
앞으로 크게 한 걸음 걸어 나온 황제가 목청을 높였다.
“마치 신의 저주를 받은 것 같지 않은가!’
선황의 유지는 예상치 못했던 것이지만 결국 자신이 준비한 대로 일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는 얼굴의 핏줄까지 거뭇하게 변한 대공을 보며 황제가 외쳤다.
“모두 대공에게서 떨어져라!”
그 명에 대공 주변에 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를 포위하고 있던 기사들까지 전염병 환자를 보듯이 뒤로 물러났다. 머지않아 대공의 곁에는 오직 에드만이 남아 있었다.
소란스러웠던 연회장이 쥐 죽은 듯한 공백으로 가득 차자 수석 마법사가 황제에게 허리를 숙이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해 보아라.”
“대공 전하가 폐하께 검을 겨눠 신의 천벌을 받았다 해도 황실의 일원이십니다. 더군다나 그 역시 지금쯤 머리가 식어 스스로의 죄를 뉘우치고 계실 테니, 이번 한 번은 아량을 베푸시는 건 어떠시겠습니까?”
황제는 고심하는 척하면서 바로 답을 하지 않더니 마치 크나큰 은혜를 베풀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의 말이 틀리지 않군. 마침 제국 아인드의 평화를 기원하는 자리이기도 하니 짐이 이번 한 번만은 대공을 용서하도록 하겠다.”
”네, 폐하의 관대하심에 모두가 탄복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끼어들 틈도 없이 마법사와 주거니 받거니 한 대화 끝에 황제가 베일을 쓴 여성에게 명했다.
“대공비는 어서 이쪽으로 와서 대공을 부축하도록 하라. 신의 천벌을 받은 대공이 회복할 때까지 짐이 보살피겠다.”
거침없이 대공에게 다가간 그녀가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