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하시고 현명하신 황제 폐하께서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그저 신은 속임수로 폐하의 눈을 가린 죄인들을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공의 말에 몇몇 사람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에드는 그들을 기억해 두기 위해서 얼굴들을 눈여겨 보았다.
“하!”
황제가 분노로 소리쳤다.
“대공의 말이야말로 교묘하구나. 그대가 숨겨둔 연인을 신부로 맞이하고 싶어 신탁을 받았다고 우기려는 모양인데, 짐이 찾은 대공비가 가짜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대공은 마침내 이 사실을 말할 수 있어 기쁘다는 듯이 잇새로 한 음절 한 음절 씹어뱉었다.
“제 연인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오랫동안 참아온, 고백이었다.
“멸족했다고 알려진 젤다족을 폐하께서 찾으신 위대한 여정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젤다족이 오직 저 여성 한 명뿐이란 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녀 외에도 다른 젤다족이 있을 수 있습니다.”
“…….”
“폐하께서 직접 그들의 멸족을 눈으로 보시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황제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그러니 저는 대공비의 검증을 다시 할 것을 요청합니다.”
대공은 물러나지 않고 계속 몰아붙였다.
“그리고 그 방법은 선황께서 남겨 주신 양피지에 용의 피가 흐르는 황족이 피를 묻히면 나타난다고 합니다.”
황제가 손에 든 양피지를 확 구기며 사나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그 말은, 짐이 보기도 전에 감히 대공이 선황의 유지를 함부로 들춰 보았다는 것인가?”
“감히,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황태후께서 제게 이를 전해 주시며 선황께서 남기신 유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뜻밖의 인물이 언급되자 황제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황태후라.”
“필요하다면 황태후께서 직접 증언을 해 주실 것입니다.”
손끝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양피지를 쥔 황제가 시선을 돌렸다. 수석 마법사를 바라보다가 대공에게 입을 뗐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지. 증언을 받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있지 않나? 대공이 말하는 신탁을 받았다는 자를 이 자리에 올려 진짜와 가짜를 가리면 될 테니.”
황제는 대공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자신이 하고픈 말만 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짐이 틀렸다고 입에 담은 것이라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것이겠지. 그러니 대공은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의 반려를 데리고 오라!”
* * *
단상에서 내려선 대공이 한 발 한 발 뗄 때마다 사람들의 눈길이 몰려들었다. 그가 사람들의 시선을 가리듯이 에드 앞에 서자 경악에 찬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설마 남자인 거예요?”
“귀족도 아닌 것 같은데요.”
“북부의 대공이 저런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을 배우자로 맞는다고요?”
무시하는 발언을 대놓고 하는 이들을 향해 대공은 경고하듯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사람들은 서늘한 눈동자에 딴청을 부리며 시선을 돌렸다.
주위가 정리되자 대공은 조금 전과 달리 따듯하고 온화한 눈빛으로 에드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이런 상황에 놓이게 해서 미안해.”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였다.
에드는 신경 쓰지 말라는 것처럼 대공의 손을 먼저 잡았다.
“아니에요, 전하. 이미 해 주셨던 이야기잖아요. 우리가 미래를 함께 나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여정이기도 하고요.”
에드는 걸음을 옮기기 전에 주변을 둘러봤다. 어느덧 시간이 많이 흘렀는지 밖에는 어둠이 내려앉아 어둑해져 있었다.
밖에서 조그마하게 툭, 툭 하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비까지 내리는 모양이었다.
“가요, 전하.”
에드는 다시 고개를 단상으로 돌리고는 힘찬 음성으로 말했다.
황제가 그런 에드를 오만하게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겨우 저런 인간을 포기하지 못해서 분란을 일으킨다는 건가? 하는 눈빛이었다.
에드는 등에 꽂히는 시선의 홍수를 느끼며 앞으로 나아갔다. 타인이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보고 생각하는지 상관없었다.
대공도 마찬가지인 건지 손에 깍지를 껴 더 단단하게 결속해 왔다.
소중한 그의 온기가 떨어지지 않는다면 에드는 이 앞에 어떤 길이 펼쳐지더라도 잘 헤쳐 나갈 수 있음을 의심치 않았다.
황제가 묻힌 얼룩으로 지저분해진 카펫을 대공과 함께 밟아 나아간 그는 계단을 오르기 전에 작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대공의 손을 더 꽉 쥐며 에드가 단상에 올랐다.
황좌 앞에 다다른 두 사람은 무릎을 굽히고 예를 취했다.
그들을 내려다보던 황제가 턱을 괸 채 옅은 금발을 쏘아보았다. 거만한 시선으로 비틀린 조소를 흘리고 있었다.
대공은 황제가 입을 떼기도 전에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마음도, 욕망도 숨기지 않고 한 자 한 자 진심을 담아 내뱉었다.
“이 사람이 신탁에 나온 제 운명의 상대이며, 미래의 대공비인 에드입니다.”
고개를 젖힌 황제가 크게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하하! 대공, 짐이 혹시 잘못 보고 있는 건 아닌가 해서 확인차 물어보는데.”
말을 멈춘 그가 비뚜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말라비틀어진 허수아비 같은 자를, 그것도 남자를 그대의 연인이라고 소개하는군.”
대공의 손을 잡은 에드의 손등에 힘이 들어갔다.
허수아비, 황제는 에드의 외양뿐만 아니라 귀족 가문도 아닌 그가 제구실도 하지 못하고 그저 대공비 자리를 지키기에 급급한 신세가 될 것이라고 깎아내렸다.
그 뜻을 알아차린 대공이 바로 반박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부재중일 때 북부 성을 다스려야 하는 대공비는 무릇 위험할 때마다 가장 앞서 나서서 북부 시민들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거기까지 말을 한 대공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고개를 돌려 대중들을 한 번 훑어보았다.
대공의 많은 의미를 담은 시선을 느낀 귀족들은 저마다 고개를 돌리며 그의 눈빛을 피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에드를 쳐다보곤 다시 황제를 쳐다본 대공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제 옆에 선 에드는 그 누구보다 그 행동을 솔선수범해서 보인 자입니다. 그 때문에 이미 성의 사용인들 역시 그를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 대공비가 허수아비라는 말은 거둬 주시길 바랍니다.”
“그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면 뭔들 못했겠나.”
“그리고 운명의 상대가 어떤 성별인지가 중요하겠습니까? 그저 그 사람이 내 옆에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생각되옵니다.”
황제는 대공의 답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데 에드라고 소개하는 것 보면 성이 없는 모양이지? 출신 성분도 확실하지 않은 자를 곁에 두다니 대공도 참, 비위가 좋아.”
대공의 입에서 서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저희 가문의 비가 될 사람입니다. 앞으로는 에드가 아닌 에드 린든이라고 불러 주시길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그 한마디에 연회장이 술렁였다. 깜짝 놀란 에드도 대공에게 시선을 주었다.
“짐의 허락을 받지도 않았는데 에드 린든이라고?”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한 자 한 자 짓이기듯 말을 내뱉던 황제가 이죽거렸다.
“하긴 북부에서 대공의 관대함은 따를 자가 없다지? 이러다 개나 소도 린든이라는 성을 받겠어.”
“개나 소가 아니라 젤다족입니다.”
“…….”
“그리고 신탁을 받은 대공비를 찾으신 폐하께서라면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젤다족은 성이 아닌 이름으로 자신을 일컫는다는 것을요.”
“그러니 제 뿌리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사라졌겠지.”
대공과 황제의 시선이 맹렬하게 부딪쳤다. 젤다족을 멸족시킨 장본인을 주시하는 대공의 눈빛이 흉포했다.
“젤다족 역시 폐하께서 살펴야 할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닥친 슬픔을 그리 쉽게 입에 담으십니까?”
황제가 발로 바닥을 쾅, 내려쳤다.
“지금 네가 짐을 비난하는 것이냐! 왜? 이 자리가 탐나기라도 하나 보지?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갑작스러운 황제의 비약에 지금까지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재무대신이 끼어들었다.
“폐하, 대공이 설마 그런 불순한 마음을 품었겠습니까?”
단상 가까이에 선 그가 에드를 가리켰다.
“그보다는 신탁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저자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부터 밝히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대공은 평소 누구의 편에 서지도 않고 뱀처럼 요사스럽게 굴던 재무대신을 의외라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자신과 에드에게 상처와 불안을 심어 주기 위해 검증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황제 대신 입을 열었다.
“시종장은 선황의 유지가 적힌 양피지를 주워 폐하께 다시 올리게.”
눈치를 보던 시종장이 쭈뼛거리자 대공이 다시 일갈했다.
“어서.”
서릿발 같은 음성에 시종장이 명을 따르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황제는 그가 내민 양피지를 받아들이지 않고 대공만 노려보았다.
이대로 가면 황제의 체면이 바닥에 떨어질 판이었다. 결국 재무 대신이 또다시 개입했다.
“대공 전하, 아까 듣기론 양피지에 용의 피를 떨어뜨려야 선황의 진정한 유지를 볼 수 있다고 하던데 제가 들은 게 맞습니까?”
대공은 황제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무대신은 양피지를 들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시종장을 보며 한 가지를 제안했다.
“그렇다면 폐하의 몸에 상처를 낼 순 없으니 전하의 피로 이를 확인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대공의 시선은 여전히 황제를 향해 있었다.
“폐하께서도 용의 피가 흐르시겠지만, 자네 말도 일리가 있군.”
대공이 시종장에게 고갯짓을 하자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황제와 대공, 두 사람 사이에서 자신만 죽어 나갈 판이었다.
황제의 기색을 살피던 재무대신이 그에게 눈짓했다. 결국 시종장은 대공 앞에 양피지를 펼쳤다. 그 사이 대공은 근위대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피를 봐야 하니 검을 내놓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