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80화 (180/198)

단상에 선 황제는 더러워진 바닥에 무릎을 굽힌 채 명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며 묘한 뿌듯함과 우월감을 느꼈다.

그 기분을 조금 더 만끽한 그는 피식 웃으며 근위대장에게 손짓을 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단상 아래에서 근위대장이 외치자 사람들이 머리를 더 깊게 조아렸다.

“고개를 들어 짐의 말을 들어라.”

제 말에 일제히 몸을 펴는 좌중을 보며 다시 한번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낀 황제가 말을 이었다.

“이렇게 좋은 날 그대들을 보게 되어서 몹시 기쁘다.”

황제가 쓴 왕관과 손에 든 호사스러운 왕홀이 여전히 우중충한 하늘 아래에서 빛을 드러냈다.

그런 황제의 시선이 한 번씩 대공에게 닿을 때마다 에드는 옷에 감춰진 목걸이를 조심스레 잡았다가 놓았다.

“오늘 이 자리는 아인드 제국의 평화를 기원하는 기쁜 자리이지.”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한 공간에 황제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알다시피 제국의 평화를 위해 짐이 오랜 시간 묻혀 있던 신탁을 찾아냈지. 그리고 신의 보살핌을 받은 덕에 신탁에서 언급된 대공비를 구해 보호할 수 있었다.”

황제에게 집중해 있던 시선들이 흩어졌다. 대공과 대공비를 찾는 눈길이 빠르게 허공에서 부딪혔다가 걷혔다.

소리 없는 소란을 보며 작게 콧방귀를 낀 황제가 일순 냉엄한 눈빛을 하며 덧붙였다.

“그런데 간혹 이런 짐의 노력에 의문을 품은 자들이 있다고 하더군.”

황제의 나지막한 분노가 섞인 말에 분산되었던 이목이 일제히 단상으로 향했다.

황금과 붉은색으로 꾸며진 정복을 입은 황제가 금빛으로 빛나는 왕홀을 바닥에 탁, 내려쳤다. 입가에는 비뚜름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래서 오늘 짐은 그런 의혹을 모두 풀고자 신탁 속의 대공비를 지금 이곳에서 선보이려고 한다. 하지만 그 전에 증명을 먼저 해야겠지.”

잠시 말을 멈춘 황제가 얼굴을 돌렸다. 대공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군중을 향해 크게 외쳤다.

“모두 고개를 제대로 들어라!”

마치 대공에게 명하듯이 황제가 말하자 그렇지 않아도 꼿꼿하게 서 있던 사람들이 자세를 바르게 잡았다.

“고개를 제대로 들라 하지 않나!”

하지만 성에 차지 않은 황제는 으르렁거리듯이 다시 한번 말했고,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그들을 내려다본 황제가 왕홀로 다시 한번 바닥을 내려찍자 흰색 정복을 입은 신관이 그 단상으로 올라왔다.

부시종장을 따라 황제 앞으로 온 신관이 허리를 굽혀 예를 갖췄다. 황제가 고개를 까닥이며 입을 열었다.

“위대한 제국, 아인드를 수호하는 대신전의 부대신관 헤르.”

“네, 황제 폐하.”

“부대신관이 존경하는 전 대신관의 자료를 찾던 중 그가 신탁을 받았다는 것을 발견했다지?”

“그러합니다, 황제 폐하.”

“그 신탁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말하라.”

“제국을 시름에 잠기게 하는 흉터는 용의 피가 흐르는 북부의 검과 얼음 호수의 기운이 흐르는 빛이 만남으로 치유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신을 섬기는 사자로서 부대신관은 그에 대해 한 톨의 거짓도 없음을 짐에게 맹세할 수 있는가?”

잘 짜인 한 편의 연극 같았다.

부대신관이 신의 가호를 통해 제국을 수호하는 신관으로서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며 답하자 황제가 왕홀을 내리치며 힘주어 말했다.

“아무리 위엄 있는 제국의 황제라도 신의 섭리를 따르는 대신전에 입김을 가할 수는 없는 법.”

황제가 자신만만하게 목청을 높였다.

“이로써 전 대신관이 신탁을 받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진실이라는 것은 확실히 밝혀졌다. 자, 이제 제국을 치유할 대공비가 누구인지 똑똑히 보아라.”

단상 아래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박수를 치며 함성을 울렸다.

“황제 폐하 만세!”

뜬금없는 외침이었으나 기분이 좋아진 황제가 황좌에 앉았다.

그 뒤를 따라 황후가 옆에 앉자 미리 준비된 극본처럼 단상이 치워졌다. 사람들의 시야를 가리는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들라 하라.”

마침내 하얀 베일을 쓴 여성이 단상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열린 문으로 등장한 그녀를 주시했다.

넓은 연회장에는 그녀가 내딛는 발걸음 소리와 홀 가장자리 곳곳에 놓인 작은 분수대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다.

단상 앞에 다다른 그녀가 무릎을 굽혀 예를 취하자 황제가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제국을 괴롭혀온 시름을 풀 열쇠를 찾아 짐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다시 좌중에서 박수 소리가 터지며 황제를 연호하는 소리가 울렸다.

에드는 마치 이 공간 안의 사람들이 무형의 실에 묶여 움직이는 것 같다고 느꼈다.

황제는 여유로운 자세로 자신을 환호하는 외침을 들으며 눈짓했다. 그러자 몸을 일으킨 베일을 쓴 여성이 뒤로 물러났다.

황제가 좌중을 주시하며 말했다.

“하지만 이 여인이 신탁의 주인공이 맞는지 의문을 품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황제의 눈길이 대공에게 닿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증명을 하는 게 옳은 일이라 생각되는군.”

황제가 손짓했다.

“부대신관.”

“네, 폐하.”

“신탁에서 말하는 ‘얼음 호수의 기운이 흐르는 빛’이 젤다족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가?”

“네, 그렇습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전 대신관님께서 신탁을 해석한 기록을 저에게 남겨 주셨습니다.”

“그 기록이 전 대신관이 남겼다는 증거가 있는가?”

“네, 전 대신관님의 필체가 틀림없다는 증서를 가져왔습니다.”

부대신관이 공손히 손을 모아 자료를 넘기자 그를 확인한 황제가 왕홀로 바닥을 쿵, 찍었다.

그러자 시종장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천을 가져왔다. 그 위에는 오묘한 빛깔을 뿜어내는 마도구가 올려져 있었다.

“그게 무엇이지?”

황제의 질문에 시종장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이 마도구는 젤다족을 구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투명한 파편은 ‘인어의 눈물’이라고 불리는 보석입니다.”

“계속 말하라.”

“네, 이 보석은 고대에 존재했다고 알려진 인어의 비늘을 품은 조개에서만 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 짐도 알고 있다.”

“그리고 인어의 피를 물려받았다고 일컬어지는 젤다족은 이 보석에 반응한다는 것을 고대 자료를 통해서 확인했습니다.”

황제가 턱을 쓸며 아주 흥미롭다는 듯이 반문했다.

“그런가? 그렇다면 어떻게 반응한다는 거지?”

“젤다족의 체액이 닿으면 투명한 보석이 바닷물 색깔로 차오릅니다.”

“그렇군.”

흥미로워하는 표정의 황제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덧붙였다.

“좋다! 그럼 그녀를 이쪽으로 데리고 오라.”

황좌에서 일어난 황제가 고갯짓하자 베일을 쓴 여인이 시종장에게 다가갔다.

황제가 그녀에게 명했다.

“체액이라고 하였으니 그대는 마도구에 눈물을 떨어뜨려라.”

베일을 살짝 걷은 그녀가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재빨리 도로 얼굴을 가렸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눈물이 떨어졌는지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윽고 커다란 진주에 광채가 떠오르며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환호를 질렀고 대공은 에드의 손을 잡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황제가 웃으며 단상 아래를 굽어보듯이 내려다보았다.

“이걸로 그녀가 젤다족이라는 게 확인되었다!”

황제가 자신만만하게 입을 뗐다.

“소수 종족인 그들은 멸족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잠시 말을 멈춘 황제는 대공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짐이 온 세상을 탐문 해 그녀를 찾는데 성공했지!”

때마침 단상 아래에서 황제파 중 누군가 한 명이 목청을 높였다.

“이것이 곧 폐하께서 제국의 태양이심을 하늘이 답을 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를 보며 기쁘게 웃은 황제가 일순 목소리를 깔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겠지. 이에 한 가지 방법을 더해 그녀를 검증하고자 한다.”

황제가 시선을 돌렸다.

“궁중 마법사는 들라.”

푸른 정복을 입고 지팡이로 바닥을 짚으며 남자가 단상으로 올라왔다.

“짐이 그대에게 묻노라.”

“하문하십시오, 폐하.”

“젤다족을 찾을 수 있는 마법이 있는가?”

“네, 그렇습니다. 그들의 특징을 탐지하는 추적 마법을 이용하면 가능합니다.”

턱을 쓸며 잠시 생각에 빠진 척을 하던 황제가 물었다.

“그렇다면 혹시 그대는 젤다족을 발견할 수 있는 추적 마법을 쓸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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