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김이 올라오는 뜨거운 차를 사이에 두고 서늘한 말들이 오갔다. 황제가 찻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하긴 북부와 황성이 오죽 먼가. 자네도 다 뜻이 있고, 사정이 있겠지."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곳이었다. 대공이 마음만 먹는다면 북부에서 황성까지 드나드는 게 무엇이 힘들겠는가.
하지만 그 거리만큼 틈이 생긴 건 황제가 그의 부모를 죽인 원수이자 여전히 그에게 지독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그래. 자네의 뜻과 사정. 전에 짐에게 말했던 것처럼 북부의 마물 출현은 골칫덩이이고, 그 때문에 시간을 내기 어려운 대공의 사정이야 잘 알고말고.”
“…….”
“그런 그대의 노고를 알아서 짐이 이번에 대공을 대신해 몸소 움직인 것 아니겠나. 마땅히 그대가 감읍할 일이지.”
대공이 무릎을 굽힌 채 대꾸하지 않자 황제가 피식 웃으며 차갑게 말했다.
“그런데 척박한 북부에서 지낸 것 치곤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얼굴이 좋아진 것 같군.”
“이 모든 게 폐하의 은덕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공허하게 웃는 황제의 웃음소리가 넓은 공간을 울렸다.
“공치사를 받는 것은 되었으니 그만 자리에 앉게.”
“네, 폐하.”
붉은 카펫에서 몸을 일으킨 대공이 소파에 앉자 황제의 시선이 힐끗, 그의 손끝에 머물렀다 빠르게 흩어졌다.
“그나저나 부른다고 자네가 이렇게 단번에 올 줄은 몰랐는데. 의외군.”
“제가,”
황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공이 말을 가로챘다.
“어찌 폐하의 명을 거절하겠습니까.”
감히, 작게 덧붙이며 대공이 찻잔에 새겨진 무늬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심기를 건드릴만한 행동을 한 사람치고는 무심한 표정이었다.
황제는 붉은 차를 내려다보다가 작게 콧방귀를 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 자네가 짐의 명을 어찌 거절하겠어. 감히. 아니 그런가?”
대공은 손가락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릴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황제가 물었다.
“그렇다면 대공비와의 결혼 또한 짐의 뜻에 따라 행하겠다는 의미로 들리는데, 맞나?”
황제는 대공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건져 내려는 사람처럼 뚫어지게 응시했다.
대공은 자신을 해체라도 할 듯한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반문했다.
“어떤 대공비를 말씀하시는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어떤 대공비라니, 대공비는 한 명뿐이지 않은가.”
“그렇죠. 제 대공비는 한 명뿐이죠.”
처음으로 황제에게 옳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린 대공이 찻잔에 손을 뻗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황제가 떠보듯이 질문했다.
“그렇게 말할 정도면 대공비를 맞을 준비도 잘 되어가고 있겠지?”
대공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평생의, 단 한 번뿐인 결혼이니 제가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것들로 준비 중입니다.”
“그런데 그리 관심이 있는 것치곤 짐에게 간단한 답장만 보낼 뿐, 대공비의 초상화 한 장 보내 달란 요청도 하지 않았다?”
“…….”
“북부인들의 성정은 좋게 말해 호방하고 나쁘게 말하면 정이 없다더니 자네도 다정한 남편은 되지 못할 모양이야. 아니면…….”
흐르는 물 위에 놓인 돌다리를 두드리듯 황제가 신중히 말을 이어갔다.
“신탁이 내려졌으니 얼굴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신실하다는 건가?”
“대공비의 겉모습이 어떻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황제가 언짢다는 듯이 한쪽 입꼬리를 비죽였다.
“짐은 또 대공이 다른 마음을 품은 건 아닌가 싶어서 말이지.”
잔을 들어 올리던 대공이 차를 마시지 않고 도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전 제 대공비 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대공에게 대신전에서 성축을 함께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아는 황제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가 하고자 일에 제때 훼방을 놓은 것이 흡족했다.
“그거야 자네의 마음이 굳건해 변하지 않는다면 될 일 아니겠는가…….”
하고 말끝을 늘이던 황제가 아직 입에 대지 않은 대공의 찻잔을 내려다보며 화제를 돌렸다.
“이런, 어느새 차가 식었군. 따뜻할 때 마셔야 좋은 것을. 차에 무슨 짓을 할 정도로 짐은 치졸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황제가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와 시선을 맞춘 대공이 찻잔을 잡아 입에 가져가며 답했다.
“향이 무척이나 좋은 것이 맛도 기대됩니다, 황제 폐하.”
대공의 목울대가 움직이며 차가 줄어들자 황제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겨우 이런 차를 맛보는 정도에 만족하라고 짐이 자네를 불렀겠나? 오늘 연회는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을 걸세.”
대공의 집무실에 올라온 로넨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형이 북부 성을 비운 지 어느새 일주일이 되었다.
“안이 너무 어두운 것 같아.”
로넨은 집무실 내부의 조명과 책상에 올려진 마법 등을 모두 켰다. 형이 항상 집무를 보던 곳이 어두우면 그의 빈 자리가 더 느껴질 것 같아서 창가의 커튼도 걷었다.
요 며칠 흐린 날씨가 이어졌으나 오늘 오후에는 태양이 구름 사이로 빠끔 얼굴을 내밀었다.
커튼을 잘 정리해 묶은 로넨은 오전보다 한층 밝아진 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형과 에드가 얼른 왔으면.”
그러자 머리 위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앉아 있던 작은 용이 고개를 들고 캬아, 하고 답했다. 긍정의 대답을 들은 것 같아 로넨이 킥킥 웃었다.
“그래, 일찍 올 거야!”
형이 있을 때면 언제나 밝고 북적북적하던 북부 성이 조금 가라앉은 느낌이었지만, 로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짐했다.
“그러니까 형과 에드가 올 때까지 내가 북부 성을 잘 지키고 있어야지.”
그리고 제이논이 알려준 황도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는데 머리에서 폴짝 뛴 용이 별안간 캬아아, 하고 불을 내뿜었다.
작은 촛불 크기의 화력이었지만 깜짝 놀란 로넨이 손을 위로 올렸다.
“그러다 커튼을 태우면 안 된다고.”
손에 쥔 용을 다그친 그가 혹시 불똥이 튄 곳이 없을까 싶어 창턱을 살피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구름 사이에서 해가 완전히 드러나며 창가에 환히 비춰 들었다. 창에 손을 짚은 로넨이 환하게 웃었다.
“황도도 이렇게 날이 맑았으면 좋겠다.”
* * *
다행히 연회 시간이 가까워지자 비가 그치고 날이 개었다.
황제의 알현을 마치고 돌아온 대공과 별관을 나온 에드는 질퍽한 느낌이 나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비는 멈췄지만, 바닥은 곳곳에 튄 흙과 고인 웅덩이로 엉망이었다.
“대공 전하께서는 이쪽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야외에 마련된 유리 돔 형태의 연회 홀로 들어서기 위한 입구는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별실을 나설 때부터 앞서 걷던 부시종장이 그중 한 쪽 길을 가리키며 말하자 대공을 향해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대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에드와 함께 안내에 따랐다. 입구 근처에는 귀족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연회를 개최한다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날도 계속 좋지 않았는데 말이죠.”
“그러니까요. 연회가 열린다고 해서 의상도 준비했는데 바닥이 이래서야 원. 신발이고 뭐고 엉망이 되고 말았네요.”
“무슨 불만들이 그리 많으시오? 오직 제국의 안위만 염려하시는 폐하께서 대공비를 찾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대공이 근처로 다가가자 사람들의 목소리가 작아졌지만, 호기심 어린 시선을 감출 수는 없었다.
수런거리는 귀족들 사이를 지나 대공이 첫 번째 입구에 서자 근위병이 팔찌를 내밀었다.
“내부 인원을 관리하기 위한 방편이니 손목에 차시면 됩니다.”
“알겠네.”
금속으로 이루어진 팔찌였는데 중간중간 묘한 빛이 감도는 걸 보니 마법이 걸린 물품처럼 보였다.
대공과 에드가 그를 받아 손목에 끼자 저절로 조여들며 크기를 조정했는데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런지 장신구 용도보다는 구속구처럼 보였다.
대공이 연회 홀로 들어서며 에드의 기색을 살폈다.
“사람이 많은 곳에 들어왔는데 울렁거림이나 메스꺼움 같은 건 없어?”
팔찌 때문에 이물감이 느껴진 손목을 가볍게 흔들며 에드가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실내는 밖에서 묻히고 들어온 진흙으로 인해 조금 더러워진 상태였다.
하인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바닥을 정리 중이었지만, 워낙 많은 귀족들이 움직이다 보니 개선되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어쩐지 헤린스 백작 저에서 지내던 생활이 떠오르는데.’
아득하게 느껴지는 과거에 작게 고개를 저은 에드가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얼룩덜룩 더러워진 바닥에서 유일하게 깨끗한 붉은 카펫이 눈에 들어왔다.
황제만이 걸을 수 있는 길.
혹시라도 카펫을 더럽힐까 두려웠는지 주변에 있는 귀족들은 모두 멀리 떨어진 채 서 있었다.
부시종장을 따라 단상 근처로 간 에드는 고개를 젖혔다. 유리 천장 너머로 보이는 먹구름이 낀 하늘은 우중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납십니다.”
그때 크게 울리는 목소리에 사람들이 빠르게 자리를 잡으며 예를 갖췄다.
곧이어 중앙의 커다란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사이로 황제가 붉은 카펫을 밟으며 당당히 걸어 나왔다.
황제는 반대편 끝에 있는 단상까지 단 한치의 머뭇거림 없이 나아갔다.
황제가 내딛는 걸음마다 시커먼 진흙이 묻어나며 검은 길이 길게 이어졌다. 에드의 눈에는 그것이 그간 벌인 황제의 행적과 겹쳐 보였다.
‘어쩐지 상처가 난 주위에 붉게 피가 흐르는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