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지는 않아?”
“네, 괜찮아요. 로넨 도련님께서 짐을 잘 챙겨 주셔서 이렇게 요긴하게 쓰이네요.”
에드가 부스럭 소리를 내며 단추를 다 잠그자 대공이 그에게 우비 모자를 씌워 주었다.
“그럼 나갈까?”
“네.”
에드가 마차 문을 열자 전에 봤던 부시종장이 우산을 든 채 호들갑을 떨며 인사했다.
“대공 전하, 다시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나도 반갑군.”
마차에서 내리며 짧게 인사한 대공이 주위를 살폈다. 부시종장이 우산을 씌워 주려 했으나 그 손길을 막으며 시선을 들었다.
“연회가 열리는 야외 홀만이 아니라 여기까지 결계를 쳐 둔 것 같군.”
대공이 무언가를 가늠하듯이 위를 올려다보자 그를 뒤따라 내린 에드의 시선도 그를 따랐다.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공기가 조금 묵직한 느낌이 있었다.
“네, 황궁 마법사들이 연회 자리를 수호하겠다며 어찌나 결의를 다지던지요, 폐하께서 말리셔도 소용이 있어야지요.”
“그런가.”
“조금 갑갑하시더라도 참아 주십시오. 황궁 수석 마법사에게 건의를 넣겠습니다.”
에드는 대공의 시선이 제게 닿자 고개를 작게 저었다.
‘괜찮습니다, 전하. 몸에 무리가 오는 느낌은 전혀 없어요.’
그 눈빛을 알아챈 대공이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이르지도 늦지도 않게 도착한 참이었다.
“연회는 오후 4시부터 시작이지?”
“네, 하지만 그 전에 황제 폐하께서 전하를 만나고자 하시니 제가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그 전에 내가 묵을 곳을 먼저 알려주게. 폐하를 뵙기 전에 옷차림을 정돈하고 싶네.”
부시종장의 눈길이 젖은 티가 거의 나지 않은 대공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전하 그 정도는…… 우비만 벗으면 괜찮지 않으실지요.”
“신하 된 도리로서 응당 갖춰야 할 예를 간과할 수는 없지. 나 말고도 폐하를 알현하려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질 텐데, 내 순서를 조금 뒤로 미뤄 주게. 옷을 갈아입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을 테니.”
“…….”
“그러니 이럴 시간에 앞장서면 되겠군, 졸렌 부시종장.”
작게 한숨을 내쉰 부시종장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 * *
별관으로 향하는 길에 빗줄기가 강해졌다. 부시종장은 마음이 초조한지 발걸음을 서둘렀다. 무장 해제한 대공 일행은 속도를 적당히 맞추며 그의 뒤를 따랐다.
에드의 시선이 복도 창가에 닿았다. 빗물이 톡, 톡 떨어지는 유리창에 뿌옇게 서린 김이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보였다.
부시종장은 별관의 가장 큰 별실 앞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문 앞에 멈춰 선 그는 대공 곁에 있는 에드를 힐끗 쳐다보았다.
“시중을 드는 이는 전하께서 데려온 시종 한 명이면 되겠습니까?”
“북부의 기사 단장과 함께 내 곁을 돌볼 사람이니 황궁에서는 달리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네,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묵으실 곳은 이 방입니다. 기사분들은 호위를 위해 곁방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부시종장이 크고 넓은 별실 문을 열자 이르텔에게서 가방을 넘겨받은 에드는 대공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고맙군, 부시종장.”
“별말씀을요.”
“그럼 옷을 갈아입고 나가겠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네, 전하께서 준비하는 동안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알겠네, 이르텔은 북부 기사단을 인솔하고, 별실 앞 보초는 두 명을 세우도록 해.”
“네, 대공 전하.”
부시종장과 이르텔이 꾸벅 인사를 한 뒤 시야에서 사라지자 대공이 방을 확인했다.
“결계 느낌이 나긴 하지만 나는 괜찮은데 에드는 어때?”
대공과 단둘이 되자 에드는 비로소 방을 살필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우비를 벗으며 주변을 훑어본 그는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답답하거나 무겁게 느껴지진 않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긴 황궁에 친 결계이니 공격적인 마법에 대비한 것일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대공은 방 안을 한참이나 더 둘러보았다. 자신이 방을 비울 동안 에드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자 가방에서 꺼낸 옷을 손에 든 에드가 서둘러 말했다
“이러다 이 이상 시간을 드릴 수 없다면서 부시종장이 문을 두드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재촉에 대공이 우비를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대공이 작게 중얼거렸다.
“……여러 가지가 신경이 쓰이는군.”
알현을 명하는 황제의 의도는 뻔했다. 대공을 귀찮게 하면서 속내를 파악하는 자리. 그가 패를 쥐고 있다면 어떤 것인지, 혹은 비운 자리에 빈틈은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대공이 무엇을 염려하는지 아는 에드가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하께 위협을 가하고 싶더라도 다른 귀족들의 눈이 있으니 황제는 연회가 끝날 때까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거예요.”
“…….”
“그리고 전하께서 주신 몸을 지킬 목걸이도 있으니까요.”
에드는 제 목을 가리키며 밝게 답했다. 다른 무기나 마도구는 반입 금지였어도 대공 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물품은 예외였다. 선황 때부터 내려온 면책이었다.
목걸이에 방어 마법이 새겨진 걸 알고 있는 에드가 대공의 걱정을 덜며 옷을 살폈다. 한 걸음 물러나 살펴보자 검은 예복과 흰 셔츠가 금욕적인 얼굴과 잘 어울렸다.
흡족함에 에드가 미소 짓자 대공의 눈매가 살짝 풀렸다.
“그럼 다녀올게, 에드.”
“네.”
“아, 그리고.”
방문을 열기 전 고개를 숙인 대공의 입술이 에드에게 닿았다.
“놀랄까 봐 미리 말하는데, 혹시 연회 자리에서 내가…….”
귓가를 간질이며 흘러들어 오는 말에 집중하던 에드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고개를 번쩍 든 그가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흔들림 없는 붉은 눈동자에 깃든 담담함에 에드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 방법은 너무 위험할 것 같아요.”
대공이 언급한 내용은 황제가 대공비를 선보일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해서였다.
대공이 에드의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그러니.”
생략된 의미를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자신이 대공을 신뢰하는 만큼 대공도 자신을 믿고 한 말에 에드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대공을 꽉 끌어안았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래, 내가 돌아올 때까지 다른 생각하지 말고 편히 쉬고 있어.”
“네, 전하.”
탄탄한 등을 껴안았던 손을 푼 에드가 방문을 열자 대공을 기다리고 있는 부시종장이 보였다.
“준비가 예상보다 길어졌군.”
“아닙니다, 전하. 저를 따라오시지요.”
반색하며 대꾸한 부시종장이 재빠르게 몸을 돌렸고, 그를 따르는 대공의 등을 에드는 한참이나 응시했다.
* * *
부시종장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대공이 의아함에 입을 열었다.
“알현실에서 폐하를 뵙는 게 아니군.”
“네, 오붓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으시다면서 전하를 응접실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부시종장을 따라 들어간 응접실 내부는 지나칠 정도로 화려했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과시하듯이 금칠이 더해져 있었으며 사치스러운 장식품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황제의 안색은 파리했다.대공이 무릎을 굽히고 예를 갖추자 팔걸이에 손을 대고 머리를 짚은 황제가 비뚜름한 미소를 입에 건 채 부시종장에게 명했다.
“오늘은 따뜻한 차를 마시고 싶군.”
“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뒷걸음질 치듯이 사라진 부시종장이 다기 세트가 담긴 트롤리를 끌고 올 때까지 황제는 대공을 일으켜 세우지 않았다.
달그락, 달그락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울리자 미간을 찌푸린 황제가 손을 내저으며 사납게 말했다.
“여전히 시끄럽군. 짐이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해야 하지?”
“죄송합니다, 폐하.”
한층 더 조심스러운 손길로 티팟을 들어 차를 따른 부시종장이 뒤로 물러나자 대공은 찻잔에서 뜨겁게 오르는 김을 바라보았다.
“그거 아나? 대공의 얼굴은 늘 신문에 실린 초상화만 보다 보니, 오늘도 자네의 초상화에 대고 인사를 할 뻔했지 않은가.”
“신의 얼굴을 보기 힘들다는 소리를 그렇게 하시니 면구스러울 뿐입니다, 폐하.”
“자네를 탓하는 것은 아닐세.”
“제 탓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