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76화 (176/198)

“에드, 속이 불편하거나 마차 속도가 너무 빠르진 않아?”

옆에 앉은 대공의 질문에 에드는 로넨이 한땀 한땀 만들어 준 여우 모양의 쿠션을 허리에 덧대며 말했다.

“아뇨, 괜찮아요. 더 빠르게 달려도 문제없습니다.”

“하지만.”

대공의 눈길이 에드의 아랫배에 머물렀다. 그의 걱정을 깨달은 에드가 배에 손을 올리며 답했다.

“아이도 괜찮대요. 조금이라도 힘들면 꼭 말씀드릴게요.”

“그래, 꼭 말해야 해. 에드의 몸이니까 말하지 않으면 나는 모르거든.”

대공이 배를 감싼 에드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렸다.

아무도 없는 마차에서 이러고 있으니 왠지 몸이 더워지는 기분이었다. 에드는 일부러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그리고 마차 여행은 한 번 해봐서 그런지 생각보다 답답하거나 그러지도 않아요. 아! 이것 덕분에 허리가 배기거나 아프지도 않고요.”

에드가 푹신한 쿠션을 손으로 가리키며 덧붙였다.

〈형, 북부는 걱정하지 마시고 조심히 다녀오세요!〉

일행을 배웅하던 로넨이 떠오르자 에드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언제 그렇게 컸는지 의젓해졌다. 물론, 그의 머리에 폴짝 뛰어오른 용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기는 했지만.

그때 마차가 속도를 줄이다가 이내 멈춰 섰다.

대공이 배를 살살 문질러 주는 손길에 상념에 빠져 있던 에드가 고개를 들었다. 대공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올라가 있었다.

“잠깐 쉬었다 가는 게 좋겠어.”

“네.”

마차 밖으로 나온 에드는 팔을 가볍게 앞뒤로 흔들어 몸을 풀었다. 자신과 달리 기사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말에게 물을 먹이러 이동하는 기사들을 바라보던 그는 시선을 옮겼다.

“…….”

대공도 이르텔과 함께 지도를 펼치고 무언가를 상의 중이었다.

하늘에는 우중충한 먹구름이 가득했다. 바닥으론 진흙투성이의 웅덩이가 군데군데 보여서 진로를 방해하고 있었다.

‘이미 땅이 젖은 상태라 비까지 내리면 큰일인데.’

단출하게 일행을 꾸린 대공은 속도를 높여 움직이고 있었다.

‘황제가 연회를 개최하는 날은 앞으로 5일 후.’

이미 북부에서 벗어나 시간은 충분하지만, 미리 도착해 황제의 있을지 모를 함정에 대해 대비를 해야 했기에 비를 만나 발이 묶이면 곤란했다.

빠른 길을 택할지, 비를 피해 갈지 대공의 결정을 기다리던 에드는 주위를 살피다 커다란 나무 뒤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기사 한 명이 따라붙어 이마를 긁적였다.

“……저 볼일 보러 가는 건데, 설마 따라오실 건 아니죠?”

“전하께서 집사님 곁에 꼭 붙어 있으라고 명하셔서요.”

“전하께서 이렇게 보호 마도구도 챙겨 주셨으니 화장실 정도는 혼자 다녀올게요.”

에드는 손목을 감싼 팔찌를 기사에게 보여줬다. 그의 간절한 눈빛에 대공을 살피던 기사가 큰 결심을 했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열 발자국 떨어져 있겠습니다.”

“대신 뒤돌아 있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에드는 기사를 등지고 작은 물웅덩이 앞에 앉았다. 그리고 주위를 살피다가 사람들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손가락을 움직였다.

대공과 물을 움직인 이후로 그는 틈이 날 때마다 연습했고, 이제는 어느 정도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전하를 치유하는 능력 그리고 물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 이 두 가지가 내가 가진 힘이라고 했지.’

처음엔 힘이 더 빨리 강해졌으면 하고 바란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이렇게 힘을 쓸 수 있으니 황제가 아무리 수를 쓴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 없어, 에드.〉

등을 감싸는 대공의 온기는 따뜻했고, 그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 에드는 매 순간 온 힘을 다해 집중했고, 조금씩 늘어가는 실력에 미소 짓곤 했다.

앞에 있는 웅덩이의 물이 점점 파도가 철썩이는 것처럼 흔들리는 것을 본 에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제대로 힘을 쓴 것도 아닌데 금방 탈력감이 느껴지네.’

체력을 늘릴 수 있도록 운동도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그는 중얼거렸다.

“……전하께서도 힘을 쓰시면 이런 느낌이 들겠지?”

그와 공유할 수 있는 감각이 하나 더 늘어나자 묘한 충족감을 느낀 에드는 배를 살살 쓰다듬으며 허락받듯이 속삭였다.

“한 번만 더 연습해 보고 쉴게.”

그렇게 도둑 연습을 마친 에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기사가 뒤돌아 달려왔고, 나무 앞으로 나왔을 때 대공은 보이지 않았다.

‘길 상태를 확인하러 가셨나 보다.’

주위를 둘러보며 휴식 공간을 찾던 그는 미간을 좁혔다.

“어?”

비탈길에 세워 둔 짐수레가 한쪽으로 기우는 게 눈에 들어왔다. 바퀴를 받쳐둔 나무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서진 탓이었다.

그리고 짐수레가 쓰러지는 방향에는 나무에 몸을 기대고 앉은 텐스가 보였다.

“젠장! 텐스!”

에드 옆에 선 기사가 그를 보고 외쳤으나 달려가서 도와주기엔 거리가 멀었다.

주변 경계를 하고 있던 다른 기사 두 명도 그를 봤으나 역시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텐스가 마차에 깔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대로는 위험해!’

입술을 질끈 깨문 에드는 눈에 보이는 웅덩이를 곧장 손에 짚었다. 온 정신을 집중해 갈고리 모양을 생각하며 텐스를 향해 날렸다.

‘제발.’

화살처럼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간 물기둥이 텐스의 몸을 감았다. 에드는 이를 악물며 손끝에서 느껴지는 힘에 몰두했다.

‘텐스를 구해야 해!’

오로지 이 생각만이 에드를 휘감았다. 동시에 온몸에 열기가 돌며 머리카락이 부웅 뜨는 느낌이 들었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렇게 하면 된다고 머릿속에 자연스레 능력을 사용하는 법이 그려졌다.

물을 확 끌어당기듯이 움직이자 텐스의 몸을 휘감은 물이 에드의 손 모양대로 움직였다.

“…….”

텐스의 몸이 앞으로 주르륵 끌려오며 바닥에 긴 자국을 남겼다. 뒤이어 쿠우웅, 짐마차가 넘어가는 소리가 길게 울렸다.

놀라 눈이 커다래진 텐스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어느새 짐마차와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하아아, 그를 보며 긴 한숨을 토한 에드는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았다.

……구했다.

내가 텐스를 구했어.

그제야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도, 끼이익 소리가 나는 짐마차도, 에드! 하고 부르는 텐스의 목소리도 느낄 수 있었다.

“집사님, 괜찮으십니까?”

옆에 선 기사가 자신을 살피려 했으나 에드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으니까 텐스를…….”

확인하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벌떡 일어난 텐스가 제게로 빠르게 달려와 앉았다.

“뭐야, 에드? 이거?”

“……괜찮아요?”

“나야 당연히 괜찮지! 에드는 괜찮은 거야?”

눈 깜빡할 새에 일어난 일에 당황했던 텐스는 여전히 제 몸을 감고 있는 물을 내려다보았다.

여러 가닥이 얽힌 실타래 같은 형상의 물이 에드의 손동작에 맞춰서 물웅덩이에서 뻗쳐 나와 있었다.

“……하아아, 네.”

“고마워, 에드. 네 덕분에 살았다. 그런데 그건 뭐였어? 마법이야? 대체 언제부터 배운 거야? 아! 전하께서 가르쳐 주신 거구나!”

그제야 스르르 풀리는 물에 시선이 떨어진 텐스가 씨익 웃었다. 조금 전까지 위험에 빠졌던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는 장난기가 가득한 웃음이었다.

텐스를 구하지 못할까 봐 긴장했던 에드가 타박하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에 정말 큰일 날 뻔했다고요, 텐스.”

“그거야 그렇지만 이렇게 안 다쳤잖아?”

텐스가 이번엔 에드의 등을 팡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나는 항상 행운의 여신이 함께하는 텐스라고.”

“…….”

“이번에도 그 여신이 함께했고! 에드에게 마법사가 될 자질이 있는 줄 몰랐네? 왜 진작 말 안 했어!”

“……마법사가 된 건 아니고요.”

에드가 말하기 꺼리는 기색을 보이자 텐스가 고개를 들었다. 에드를 살피는 기사들에게 조금 떨어지라고 눈짓하며 말을 돌렸다.

“이야, 그런데 이거 제이논도 알아? 아니, 모를 거야. 그 녀석이 알았으면 틀림없이 자랑했을 거니까! 너는 모르는 비밀이 있다며! 맞지, 에드? 내가 제이논보다 먼저 에드의 능력을 본 게?”

이 상황에서도 제이논을 걸어 넘어지자 에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텐스가 머쓱하게 웃으며 물이 닿았던 자신의 배를 문질렀다. 차가웠지만 분명히 부드러웠던 감촉이었다. 눈가를 접은 그가 장난스레 말했다.

“그런데 에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무슨 부탁이요?”

“한 번 더 나를 물로 감싸줄 수 있어?”

“…….”

“물 위에 누워서 잠을 자 보는 게 꿈이었거든!”

어쩐지 나사가 빠진 듯한 텐스를 보며 에드가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 대 때려도 될까요, 텐스?”

“그야 물론이지. 생명의 은인이 부탁하는데 그 정도야! 대신 한 대 때리고 내 몸을 물로 감싸주는 건 어때? 한 1시간 정도면 될 것 같은데?”

텐스의 수선에 완전히 긴장이 가신 에드가 피식 웃었다. 그러자 자리에서 일어난 텐스가 손을 내밀었다.

“자, 그럼 뒷정리는 내가 할 테니까 생명의 은인은 마차에 가서 쉬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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