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와 접촉해 치유하는 건 가능했으니 이 느낌을 방사하는 것처럼 다루면 될 것 같은데…… 어째 신통치가 않단 말이지.’
“이러다 선생님께서 포기하셔서 제가 낙오할지도 모르겠어요.”
“이미 우등 학생인데 뭐가 걱정이실까?”
에드는 피식 웃으며 물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대공이 마법을 써서 물 온도를 맞춰 주는 중이었다.
“저도 이렇게 뭐든 척척 가능하게 힘을 쓸 수 있으면 좋겠는데.”
“에드가 이렇게 손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힘이 차오르는걸.”
대공이 부드럽게 자신을 달래는 말에 에드는 다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대공은 바빴으나 에드를 위한 시간을 아끼지 않았고, 에드는 대공이 가르쳐주는 것을 하루도 빼먹지 않고 단련하며 지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에드는 손끝에서 뭔가 뽀르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대공이 손을 잡은 채 힘을 밖으로 밀 듯이 퍼뜨리라는 조언을 했을 때였다.
아주 조금이었지만 물이 부드럽게 밀려나는 걸 본 에드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전, 전하. 보셨어요?”
대공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그러곤 에드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그것 봐, 에드. 내가 말했지? 할 수 있다고.”
가슴이 벅차오른 에드는 다시 대공의 손을 잡고 그 느낌을 몇 번이고 되새겼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오후, 북부 성에 황제가 보낸 전령이 도착했다.
“황궁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이르텔이 보고했을 때 대공은 황제가 보낸 첫 번째 편지를 떠올렸다. 그로부터 보름 만에 온 기별이었다.
그동안 신문은 황제가 대공비를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다방면으로 실었다.
그리고 이틀 전.
제국의 안녕을 위한 폐하의 위대한 여정
페즈 황제께서 찾아낸 대공비
베일에 감춰진 대공비, 공개 임박?
황제가 드디어 신탁을 받은 대공비를 찾았다는 기사가 났다.
그 신문들을 훑은 대공은 생각했다.
‘젤다족을 학살한 황제가 가짜를 내세우기 위해서는 여러 장치가 필요하겠지. 무턱대고 자신이 찾은 사람을 진짜라고 내세우진 않을 테니.’
시선을 든 그가 이르텔에게 물었다.
“전령은?”
“알현실에 있습니다.”
“그를 만나 봐야겠군.”
“네, 준비하겠습니다.”
대공은 쓴맛이 도는 입을 차로 적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현실로 내려가자 전령은 서신 한 장을 건넸다. 한껏 기고만장해진 황제의 전갈을 가지고 왔을 거란 대공의 예상과 다른 행보였다.
제국의 평화를 기원하는 연회에 아스넬 린든 대공을 초청하며.
기다리겠네.
페즈 황제답지 않은 간략한 초대 메시지였다.
‘연회 개최 날짜는 열흘 후, 그때가 황제가 노린 날짜군.’
짧은 내용을 꼼꼼하게 확인한 대공은 그날 밤 집무실로 측근 기사들을 불러들였다.
“사흘 후 황성으로 출발한다.”
* * *
도도도, 이른 아침부터 로넨이 북부 성을 뛰어다니느라고 바빴다.
“제이논, 로아 모양의 쿠션이 어디 갔지? 마차에 없는데?”
“여기에 있습니다. 로넨 도련님!”
“응! 그리고 담요랑 초콜릿도 꼭 준비해 둬야 하고…… 아, 맞다! 회색 외투도 챙겨야 하는데.”
대공 일행이 황성으로 출발하는 날이었다.
“조심하세요, 도련님! 그렇게 뛰다간 넘어지십니다!”
“어, 알았어!”
“말만 그렇게 하지 마시고요.”
제이논 역시 분주했다. 로넨의 뒤를 따르랴, 짐 상태 확인하랴, 사용인들의 보고를 받으랴. 오늘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것 같았다.
“출발 시간까지 얼마 남았지? 헉, 제이논! 비가 내릴 수도 있으니 우비도 필요해!”
“네, 그렇지 않아도 가방에 넣어 마차 짐칸에 넣어 두었습니다.”
“응! 그런데 가방이 많으면 찾기 힘드니까 이름을 써서 붙여 두면 좋지 않을까?”
“좋은 생각이십니다, 도련님.”
짐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온 에드는 로넨의 뒤를 쫓는 로아와 여우 등에 앉아 날개를 파닥이는 용을 보곤 웃었다.
‘녀석들도 당분간 전하께서 성을 비운다는 걸 알고 배웅하려나 보네.’
에드가 마차로 다가가자 그를 발견한 로넨이 힘차게 달려왔다.
“에드! 준비 다 끝났어?”
“네, 도련님.”
“일주일도 넘게 북부 성을 비우는데……역시 짐이 너무 부족한 거 아닐까?”
마차에 짐을 챙겨 넣던 로넨의 얼굴에 근심이 어려 있었다. 에드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그와 시선을 맞추며 답했다.
“도련님이 꼼꼼히 챙겨 주신 덕분에 충분합니다.”
대공이 황성에 다녀오는 동안 로넨은 북부 성을 지키는 중책을 맡았다.
“나도 함께 가면 좋을 텐데.”
“저도 이번에 도련님과 함께하지 못해 아쉽지만, 북부 성을 비워 둘 수는 없으니까요. 황성만 갔다가 바로 돌아올게요.”
“응.”
“북부 성을 안전하게 잘 지키고 계시면 선물 많이 가져올게요.”
“알았어, 에드!”
로넨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자 에드는 옅게 웃었다. 그러고 마차에 가방을 올리려고 하자 어느새 나타난 이르텔이 도와주었다.
“고마워요, 이르텔 경.”
“전하께서 나오시면 바로 출발할 거야. 혹시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해. 바로 준비해 줄게.”
말과 기사들, 마차에 실린 짐들을 살펴보는 이르텔의 눈빛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황제가 연회를 마련했다며 대공을 초청한 이후로 부쩍 날카로워진 그였다.
그 연회는 대공비를 선보일 자리인 동시에 대공의 부재로 방어가 약해진 북부 성을 공격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이르텔이 평소보다 기사들의 훈련 강도를 높였다. 성의 순찰과 병력 배치도 거듭 확인한 걸 에드는 알았다.
“이번 여정도 이르텔 경과 함께 해서 정말 든든해요.”
“…….”
시선만 내린 이르텔이 미간이 좁혔다가 곧 풀었다.
“나야말로.”
과묵한 그는 더 이상 입을 떼지 않았으나 누그러진 표정으로 기사들의 무기를 점검하러 갔다.
에드는 마차 옆에 서서 대공을 기다렸다. 북부 성의 방비를 꼼꼼하게 확인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형!”
그리고 몸 안의 힘을 끌어올리는 느낌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을 때 로넨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드가 고개를 들자 대공을 향해 달려가는 로넨과 그 뒤를 따르는 로아가 보였다. 여우의 등에 올라탄 채 폴짝 뛰어오르는 용도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이르텔과 제이논, 텐스를 비롯한 북부의 사용인들과 기사들도 눈에 들어왔다.
뇌리에 선명하게 박힐 정도로 따뜻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에드의 의식을 비집고 꽃망울처럼 생각이 맺혔다.
‘나의 세상, 나의 집, 나의 가족.’
이 모든 걸 뜻하는 게 바로 이곳, 북부였다.
* * *
성을 출발한 마차는 이틀간 쉴 새 없이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