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 전하.”
“밤이 늦었는데 아직 안 자고 뭐 해, 에드.”
문에서 몸을 뗀 대공이 에드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에드의 셔츠에 물이 튀어 동그랗게 남은 자국들이 신경 쓰였다.
그 눈빛을 읽은 에드가 먼저 말했다.
“아, 이건 요 녀석이 물에 들어가 파닥거리다 튄 건데요, 그렇게 많이 젖은 건 아니라서 금방 마를 거예요. 날도 많이 풀려서 춥지도 않아요.”
에드가 용을 쿡 찌르며 답하자 대공은 수건을 찾아 그의 몸에 둘러 주었다.
“그래도 얼른 닦는 게 좋겠어. 그리고 금방 씻고 갈 테니 에드는 방에 먼저 내려가 있어. 피곤할 텐데.”
대공이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자 목욕 시중을 들려던 에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의 피로를 풀어 드리고 싶지만, 지금은 용 때문에 더 번잡스럽기만 할 것 같아.’
대공은 자신을 염려했지만, 에드는 대공이 걱정될 뿐이었다. 그가 편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으면 했다.
에드는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욕조 턱에 앉아서 물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용을 주시하다가 살금살금 다가갔다.
‘물하고 무슨 원수가 진 걸까?’
자꾸만 물에 불을 뿜으려는 용을 향해 에드는 손을 뻗었다.
대공의 느긋한 목욕 시간을 방해할 장해물은 원천 차단이 답이었다. 용을 잡아 방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어?”
그러나 멀뚱히 욕조 턱에 앉아 있던 용이 퐁 튀어 올라 에드의 머리에 툭 앉으니 에드의 눈이 크게 떠졌다.
무겁진 않았다. 하지만 그 바람에 몸의 중심이 흔들리며 기우뚱한 에드는 예감했다.
’이대로 욕조에 빠질 것 같은데.‘
동시에 풍덩, 하는 소리가 에드의 귓가에 들리며 따스한 물이 몸을 휘감았다. 뒤이어 제 몸을 뒤에서 받치는 탄탄한 느낌이 느껴졌다.
에드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몸이 기울어 욕조에 얼굴부터 빠질 줄 알았던 그는 어느새 제 등 뒤를 단단하게 받치고 있는 대공의 가슴을 느꼈다.
넓은 욕조에 미끄러지듯이 들어와 있었다. 몸에 물이 튀었지만 어디가 아프거나 하는 충격은 없었다.
몸을 날려 자신을 잡아챈 대공 덕분이었다. 제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대공의 숨결이 느릿하게 퍼졌다.
“괜찮아, 에드?”
“죄, 죄송해요. 저는 괜찮습니다. 전하는 어떠세요? 어디 다친 곳은 없으세요?”
고개를 뒤로 돌린 에드는 젖은 천끼리 부딪치며 쓸리는 소리에 대공과 제가 얼마나 딱 들러붙어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나도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대공의 차분한 목소리에 에드는 놀란 마음이 차츰 가라앉았다. 제 배를 살살 쓰다듬는 대공의 손을 내려다보며 호흡을 가다듬자 긴장으로 뭉쳤던 몸이 이완되었다.
힘이 들어갔던 에드의 어깨가 느슨하게 내려앉은 걸 보며 대공이 부드럽게 손을 움직였다. 슬쩍 닿았다 떨어지는 에드의 발을 발가락으로 톡, 톡 쳐보기도 했다.
그에 에드가 웃자 따스한 물을 헤엄치듯이 발을 움직인 대공이 에드의 움푹 팬 발 안쪽을 발등으로 가볍게 문질렀다.
그게 간지러운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에드가 제 가슴에 등을 푹 기대자 대공이 그의 오른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그리고 오히려 잘 된 걸 수도 있겠다. 물을 뒤집어쓴 김에 에드에게 알려줄 게 있어.”
“……저에게요?”
잔잔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대공은 에드의 목 뒤에 입을 가볍게 붙였다 뗐다.
“알아보니까 젤다족에게 능력이 계승되는 것 같아.”
“……능력이라면.”
에드는 대공이 깍지 낀 손을 움직이며 물을 가르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따뜻하고 기분 좋은 물살이 피부를 건드렸다.
“마법사들이 쓰는 마법은 자연에 깃든 마력을 끌어당기기 위한 매개체가 필요해. 그래서 술식을 외거나 마법진을 그리는 것이거든.”
수면을 가볍게 노닐던 깍지 낀 손이 물속으로 깊이 들어갔다가 다시 떠올랐다.
간질간질하고 묘한 감각.
잡힌 손을 따라 팔이 수면을 오르락내리락하자 에드는 몸에 힘을 뺀 채 대공과 물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찰랑찰랑, 수면을 다시 올라온 손이 물을 가볍게 튕기자 바닥에 내려갔던 작은 용이 욕조에 뛰어올라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캬아.
또다시 불을 뿜으려는 용에게 대공이 깍지를 낀 손바닥으로 물을 통, 튕겼다.
그러자 얼굴에 물을 잔뜩 맞은 용이 앞발로 얼굴을 마구 비볐다.
에드는 아까의 복수를 해 준 것 같은 대공의 모습에 작게 웃으며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등에 맞닿은 대공의 안정적인 호흡이 느껴질 때마다 에드의 기분도 나른하게 풀렸다.
“그런데 일부의 젤다족은 그런 매개체 없이 힘을 쓸 수 있는 것으로 보여.”
“그렇다는 건 저도 그렇게 힘을 쓸 수 있는 걸까요?”
“그래, 피 자체에 마력이 흐르는 거지. 그래서 외부의 기운을 유인하지 않아도 되는 건데.”
에드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에드가 나와 접촉을 했을 때 썼던 치유의 힘도 그런 힘을 이어받은 것일 거야.”
대공은 이제까지 찾은 자료를 상기하며 잡은 에드의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젤다족 중 일부에게는 힘이 계승되는데 ‘길잡이’라는 형태로 표출되는 것 같아. 내가 받은 용의 ‘축복’과 비슷한데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게 아닐까 싶어. 힘의 응축이나 마력의 형태에 따라서 말이지.”
“…….”
“에드도 젤다족에 대해서 찾아봐서 알지? 인어의 피를 이어받은 길잡이로 불리는 젤다족을 말이야.”
“네.”
에드의 대답에 대공은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가 뗐다.
“‘길잡이’라는 게 뭘까 궁금했는데, 그건 아마도 자신이 염원하는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힘의 원천이 아닐까 싶어.”
대공은 에드의 어머니가 별이 일러 주는 길을 따라 덴과 에드를 살린 것을 떠올렸다. 그는 에드가 그녀처럼 피를 흘리고 목숨을 내놓으며 힘을 쓰길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에드의 피에 흐르는 마력을 몸에 부담을 주지 않고 밖으로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훈련하고자 했다.
“그리고 외부의 힘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안에 든 걸 꺼내는 방식은.”
“…….”
“내가 용의 피를 다루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거든.”
에드는 대공의 말을 경청했다.
등 뒤를 안은 대공의 단단함, 수면을 가르는 장난 같은 손길, 따뜻한 물이 찰랑이며 몸을 감싸는 느낌…… 이 모든 게 좋았다.
그때 에드는 손을 잡은 대공의 손바닥에서 작은 힘이 나오는 게 느껴졌다.
“이런 식으로 말이지.”
보글보글, 작은 기포들이 물에서 일어나며 손등을 간지럽히자 에드가 옅게 웃었다.
“제가 이런 걸 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가벼운 접촉만으로도 내 몸을 치유한 에드인걸.”
“…….”
“그리고 물과 친한 것으로 알려진 젤다족이니 이렇게 배우면 더 좋지 않을까 싶어.”
대공이 깍지를 낀 손으로 에드의 배꼽 주변을 톡, 톡 건드리자 물이 찰박거리며 몸을 간지럽혔다.
“어때? 할 만할 것 같지?”
에드는 애매하게 웃었다.
‘전하와 몸을 맞대야 치유가 가능한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하지만 대공과 훈련을 하고 싶었다. 그러고 나면 황제가 얄팍한 수를 쓰더라도 맞설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을까?
‘그리고 내 마음에 존재하는 불안도 지울 수 있을 것 같고.’
에드에게 일말의 걱정이 남아 있었다. 대공 의 운명의 짝이 자신이 아니라 ‘빙의하기 이전의 에드’이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물론, 대공의 치유가 가능한 제가 그와 운명의 짝이 맞다 싶으면서도 불현듯 찾아드는 그런 마음이 있었다.
‘그러니 내가 지닌 이 힘을 잘 쓸 수 있다면, 정말로 전하의 신탁을 받은 사람이 나라는 굳은 확신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에드는 대공이 깍지 낀 손에 힘을 주며 꽉 잡았다.
“그럼 전하께서 제 선생님이 되시는 거네요? 선생님께서는 어떤 학생을 좋아하시는지 궁금한데요.”
“에드는 어떤 학생이 되고 싶은데?”
“음, 저는 빨리빨리 배워서 얼른 전하의 곁에 나란히 설 수 있는 사람이요.”
“나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학생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잠시 말을 멈춘 대공이 미끄러진 에드의 몸을 잡아 끌어올렸다. 보드라운 향이 코를 간질이는 기분이었다.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야.”
* * *
훈련은 매일 계속되었다.
대공은 에드에게 뭔가를 가르쳐주는 게 좋았고, 에드는 대공과 함께 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배꼽과 명치 사이로 흐르는 힘을 느낀다고 생각하고 그걸 머리 위로 끌어올린다고 상상해 봐.”
뒤에서 끌어안은 대공이 가야 할 길을 그려 주듯이 손가락으로 제 몸을 타고 올라갔다.
에드는 눈을 감은 채 그의 말에 집중하다가도 손길이 간지러워 몸을 꼼질대곤 했다.
그러면 대공은 에드의 목이나 어깨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이래서 실력이 언제 늘까요?.”
물방울이 똑, 똑 떨어지는 욕실 안에서 에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대공의 가슴에 등을 깊게 기댄 채였다.
“잘하고 있는데 왜?”
잘하고 있는 게 맞는 걸까?
대공이 손바닥을 펴면 마력의 흐름에 따라 물이 길을 트듯이 갈라졌다가 모여드는데 에드는 그렇지 않았다. 아무리 손에 힘을 줘 봐도 욕조 속의 물은 잠잠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