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71화 (171/198)

며칠간 이어진 무도회가 끝나고 에드와 로넨이 후원에 나와서 나른한 오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로아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뛰어다녔고, 작은 용은 로넨의 머리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그에 용이 떨어질까 봐 부동자세로 얼음이 되었던 로넨이 용을 만져 보려고 손을 들자 녀석이 에드에게로 훌쩍 날아올랐다.

아앗! 하며 로넨이 발을 동동 굴리는 모습이 보였고, 그런 용을 작게 타이르려는 에드도 눈에 들어왔다.

똑, 똑

그때 집무실 문을 노크한 제이논이 빠르게 안으로 들어왔다.

“대공 전하.”

얼굴색이 좋지 않았다.

“황실에서 온 편지입니다.”

대공은 제이논이 들고 온 황금색 편지 봉투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책상에 내려놓았다.

“봄이 되어 길이 녹았으니 황도로 물자를 보내라는 압박이려나요? 아니면…….”

제이논이 심란함을 숨기지 못하고 묻자 대공이 의자에 앉으며 답했다.

“글쎄, 황실에서 언제 그렇게까지 북부의 도로 사정을 신경 썼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이유로 황제가 연락했다면 되려 반가 울 것 같군.”

“그렇긴 하네요. 일방적으로 통보를 하면 했지, 이런 식으로 눈에 띄게 황금색 봉투에 담아 보내진 않았으니까요.”

그래, 그러니 더 수상했다.

대공은 헤린스 백작 저에 있었을 때 황제가 보냈던 편지를 떠올렸다.

그때도 황제는 표면적으로는 사촌 간의 정을 나누자며 손을 내밀더니 뒤로는 로넨을 농락하기 위한 무대를 설치했었다.

“이 편지를 가지고 온 연락책은 어디에 있지?”

“응접실로 안내했습니다.”

“나를 만나 답을 가져오라거나 황제가 내게 따로 전하라는 건 없는 모양이군.”

“그런 것 같습니다. 전하를 만나 뵈어야 한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대공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가 휴식을 취하고 돌아갈 수 있게 하고, 황실에서 연락이 왔다는 말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주의해. 성내 분위기가 어수선해질 수 있으니.”

“네, 알겠습니다.”

제이논이 밖으로 나가자 주위가 조용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대공은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에드와 로넨은 여전히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을 가만히 내려다본 대공이 다시 의자에 앉아 몸을 기댔다.

황태후와 황금 용.

대공은 며칠 전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편지를 확인했다.

아스넬 린든 대공.

제국에서 가장 늦게 봄의 여신이 입을 맞춘다는 북부의 설산에도 봄바람이 찾아들었다고 들었지.

황도는 일찌감치 봄을 맞이하는 준비로 바빴는데 북부는 조금 더 게으름을 부릴 수 있었겠군.

짐이 바쁜 이유는 항상 제국의 평화와 미래를 위해 기도하고 고민하기 때문이 아니겠나.

그리고 얼마 전, 짐의 공력이 하늘에 닿아 좋은 소식을 받을 수 있었네. 전 대신관이 신탁을 받았다는 기록을 찾았어.

짐이 제국의 평화와 미래를 위해 기원하던 때에 마침 그 소식이 닿으니, 이 모든 게 제국이 옳은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짐이 공력을 들이는 걸 하늘도 아는 것이 아니겠나.

선황께서 오랫동안 정양하시던 때부터 오로지 제국의 평안과 찬란한 미래만을 생각한 짐을.

신탁의 내용은,

제국의 시름에 잠기게 하는 흉터를 용의 피가 흐르는 북부의 검과 얼음 호수의 기운이 흐르는 빛이 만남으로 치유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고 하더군.

전 대신관이 급사한 이후, 짐은 흩어졌던 그의 기록을 찾는 작업을 지시했지. 그런데 그 결과가 이렇게 빛을 보니 짐의 도리에 항상 제국의 광명과 영광이 따르는 것 아니겠는가.

신관들과 신탁을 해석한 결과 북부의 검이란 대공을 가리키는 것이고, 얼음 호수의 기운이 흐르는 빛이란 젤다족으로 밝혀졌네.

기뻐하게, 대공.

대공의 힘으로 제국의 오랜 걱정을 잠재울 수 있는 사명과 영예를 지닌 운명을. 그대의 힘으로 제국의 한숨을 물리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영광된 축복인가!

그러니 짐은 이 신탁을 받들어 대공과 운명으로 엮인 대공비를 찾기 위해 온 힘을 다하겠네.

북부의 봄이 다 가기 전에 제국에 좋은 소식이 울려 퍼질 것임을 기대하고 확신하네.

편지를 다 읽은 대공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황제의 입맛대로 짜깁기된 진실과 교묘한 거짓에 그는 생각했다.

‘내가 대신전에서 에드와 성축을 받는 것을 막고, 제국에서 움트는 불만들을 내게로 돌리려는 수작이군.’

대공은 젤다족을 학살한 황제가 그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을 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황제가 신탁을 해석해 찾았다는 대공비를 내가 거절하면, 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대공이 신탁을 받아들이지 않고 잘못된 행동을 해서 그렇다고 몰아붙일 수 있을 테니.’

의자에 몸을 깊게 기댄 대공은 생각을 정리했다.

‘그럴 일은 없지만, 혹여 황제가 찾은 대공비를 내가 받아들인다고 해도 신탁과 전혀 다른 운명의 사람을 보낸 것이니 제국이 안정될 리가 없지.’

그럼 다음 황제의 행보는 뻔했다. 신탁에 따라 성심성의를 다 하지 않는 대공의 불의, 불충, 불신 때문에 제국에 불행이 닥친다고 할 테니.

어느 손에 쥐어도 황제의 입맛대로 맞추기 편한 국면을 짜놓았다.

눈을 감으며 짧게 조소를 흘린 대공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그려 보았다.

‘제이논에게 입을 막게 한 게 별 소용이 없겠군.’

그 예상대로 다음 날, 제국의 신문들에는 황제 폐하께서 제국의 미래를 위해 힘을 쏟은 일들이 실렸다.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 직접 신관들을 이끌고 해석했다는 전 대신관이 신탁이 크게 쓰여있었다.

* * *

다음 날 오전, 방문을 연 에드는 평소와 다르게 웅성웅성하는 북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손에 신문과 서류를 잔뜩 든 제이논이 눈앞을 빠르게 지나가자 뭔가를 느낀 그는 그 뒤를 따르려고 했다.

“제이논.”

“아, 에드.”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그러나 대답을 들을 새는 없었다. 때마침 에드를 찾은 대공이 그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에드, 할 이야기가 있어.”

제이논에게 눈짓한 대공이 방으로 걸음을 떼자 에드는 발맞춰 걸었다.

“평소와 다르게 북부 성이 소란스러운 것 같아요.”

소파에 앉으며 에드가 운을 떼자 대공이 물잔을 건넸다. 그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자 맞은편에 앉은 대공이 답했다.

“황제에게 편지가 왔어.”

“황제에게서요?”

작게 고개를 끄덕인 대공이 에드에게 신문을 건넸다.

신문 1면에 크게 적힌 제목과 황제의 초상화에 에드는 빠르게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리고 전 대신관의 신탁이 눈에 들어오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건.”

“여론전이지. 내 예상보다 빠른.”

대공이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전 대신관이 죽은 지 이미 한참 전이야. 그는 인망이 두터웠지만 죽은 이후로 누군가 의도적으로 지우듯이 흔적이 남지 않았지.”

대공은 대신관이 죽었던 시기를 가늠하며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니 선황제에게 신탁을 알려 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후였다.

“그런데 그런 전 대신관을 전면에 내세워서 이야기를 하는 건 황제가 그만큼 수세에 몰렸다는 것이야.”

“수세라면.”

“그래, 서부에서는 봄이 되어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다고 하고, 동남부에서는 얼마 전 큰 화재가 났다고 해. 남부에서도 마물이 출현한다고 하고.”

에드는 대공의 말에 집중했다.

“게다가 황제가 세금을 높이려는 시도를 하니 귀족들 사이에서도 분위기가 좋지 않아.”

“……”

“그리고 고야 섬과 논쟁이 오고 가니 황제는 그 불만들을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고 싶었겠지.”

“고야 섬이라면, 황태후 폐하의 고향 아닌가요?”

“맞아, 에드.”

“그곳과 논쟁이 있는 거라면.”

고야 섬은 해산물이 풍부한 소국이었다. 에드는 테이블을 내려다보며 생각하다가 핵심을 깨닫고 시선을 들었다.

“소금.”

“…….”

“고야 섬에서 소금의 출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모양이군요.”

정답이라는 듯 대공이 미소 지었다.

“그래, 황제는 황녀를 싫어하지만 죽이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도 있어.”

“고야 섬에서 소금 거래를 빌미로 황실을 압박하면 그들과 무역으로 이득을 보고 있는 귀족들이 들고일어날 테니까요?”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여름의 태풍을 빌미로 고야 섬에서 소금의 출하를 줄였어. 하지만 그 속내는 황태후와 황녀를 냉궁에서 꺼내라는 시위지.”

“…….”

“귀족들의 충성심은 결국 금화에서 나와. 황제도 그걸 모를 리 없지. 귀족들의 돈줄이 말라가고 끊긴다면 불만이 거듭될 테니까.”

에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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