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68화 (168/198)

모든 것을 통달한 것 같은 용의 말에 대공은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왜 저를 찾으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네가 날 만나러 온 상황이건만, 어째서 내가 널 찾았다고 말하는 거지?]

“저는 선황제 폐하께서 황태후 전하께 아무도 알지 못했던 북부 유적지에 관한 구슬을 맡기신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이런 생각이 떠오르더군요.”

용은 아무 말 없이 대공이 나머지 말을 잇길 기다렸다.

“혹시 선황제 폐하의 열병은 병이 아니라 성치 않은 몸으로 용과 교감하다 생긴 증상일 수도 있겠다고 말입니다.”

대공은 자신이 각성할 때 몸이 뜨거웠던 것을 떠올리며 답했다.

[어질고 현명한 아이야, 그래 나는 그가 그토록 바라던 자신이 죽고 난 뒤에 제국에 생길 미래를 보여 주었다.]

“…….”

[하지만 그 미래를 본 후, 너에게 구슬을 넘기고 나를 만나게 한 선택을 한 건 선황제였다.]

“…….”

[그리고 그 구슬을 너에게 건네기 위해 이 먼 북부까지 온 건 그의 반려인 황태후고.]

용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나는 많은 것을 보여 줄 수 있고, 큰 힘을 줄 수도 있지만 결국 그를 받아들여 무언가를 만들고 이룩해가는 것은.]

잠시 말을 멈춘 용이 대공을 인자하게 내려다보았다.

[내 피를 이어 조금이라도 이 땅이 나아지기를 원하는 이의 의지란다. 나는 그런 이들을 응원하고 약간의 힘을 불어넣어 줄 뿐.]

용이 말을 마치자 사위가 정적에 휩싸였다. 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던 대공은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설화에 의하면, 이 땅 위의 사악한 존재들을 몰아내고 제국을 세운 용은 그의 아이에게 황좌를 물려 준 이후로 자취를 감췄다고 했다.

생의 시간이 다른 그의 반려와 둘만 지내기 위해서였다.

‘그곳이 이곳이었군.’

용과 그가 사랑하는 반려의 둥지.

반려가 죽은 이후엔 그의 피를 지닌 아이들에게 축복과 기적을 내려 줄 때 외에는 잠에 빠지는 용의 안식처.

‘그림은 두 분의 추억을 남긴 거겠지.’

그들의 보금자리로 떨어졌던 자신과 에드를 떠올린 대공은 벽화로 시선을 주었다.

검은 용이 그려져 있는 곳이었다. 그러자 용의 시선도 함께 따랐다.

[황금 용인 내 거처에 검은 용이 왜 그려져 있는지 궁금한 모양이구나.]

“…….”

[반려를 만나기 전에 황금빛이었던 내 몸은 저주받고 삿된 것들과 싸우면서 그들의 영향을 받아 검게 물들었었다.]

“…….”

[하지만 다행히 나의 반려를 만나 그가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그 저주를 풀어 주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너희들의 기록에 난 북부의 깃발처럼 흑룡이었겠지.]

마치 너와 에드처럼 말이야, 하는 뒷말을 삼킨 용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용이 지닌 힘이란 것도 결국 세월이 가면 약해지고 희미해지더군.]

“…….”

[나의 반려가 죽고 내 아이에게 힘을 불어넣어 준 후, 나는 이곳에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지. 그리고 내 아이에게 자식이 태어났다는 걸 알고 축복을 내려 주었다. 그러곤 또 잠이 들었지.]

대공은 용의 말을 경청했다.

[내 아이의 아이들에게, 그 아이들의 아이들에게로 축복을 내려 줄 때마다 내 힘은 약해지고 잠은 더 길어졌어.]

“아.”

대공이 짧게 침음했다.

[그래서 네가 용의 힘을 각성할 때 부족한 부분이 생기게 되었지.]

대공은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몇 번의 축복을 내린 뒤 또다시 긴 잠에 빠졌는데, 어디선가 대화 소리가 들리더구나.]

“그것이 저와 에드였습니까?”

용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곤조곤 너희 둘이 나누는 이야기에 내 귀가 얼마나 간지러웠는지 모른다. 벽화를 보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기에 내 욕이라도 하면 나가 볼까, 하던 참이었지.]

대공은 에드를 떠올리며 그때 나눴던 대화들을 상기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작게 웃은 용이 말을 이었다.

[너희 둘이 하는 말을 듣는 동안 나도 마음이 수런거렸다. 내 반려와 함께했던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반려와 함께 나눴던 좋았던 시간을 떠올리는지 용의 목소리가 동굴에 나지막하게 울렸다.

[그리고 너희 둘이 출구 앞에 있는 구슬에 손을 맞대었을 때 나는 느꼈지. 내 몸에 힘이 차오르는 것을.]

대공의 시선이 올라갔다.

[아까도 말했듯이 영원할 것 같은 내 힘도 오랜 세월의 흐름에 약해졌다. 그런데 기운이 나기에 나는 너희의 대화에 내 반려와 함께 했던 때를 떠올려서 그런 줄 알았지.]

“…….”

[하지만 그게 아니라 너희가 내 구슬에 함께 손을 댔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는 더 이상 힘이 차오르지 않았거든.]

대공은 아무 말 없이 용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건, 너와 너의 반려인 에드가 운명의 상대이기 때문이겠지.]

“……운명의 상대라 하셨습니까?”

[그래, 아스넬 린든.]

가만히 대공을 내려다보던 용이 입을 뗐다.

[너는 진실을 마주할 준비가 되었다.]

* * *

[너는 진실을 마주할 준비가 되었다.]

용의 말에 대공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차례 광풍이 불었다. 어깨가 무거워진 느낌에 시선을 내리자 작은 도마뱀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그것이 캬아, 입을 벌리자 작은 불길이 치솟고 순식간에 눈앞이 검게 물들었다. 그러곤 풍경이 바뀌었다.

대공의 눈앞에는 40대의 선황제와 전 대신관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신탁이 내려왔다고?〉

〈네, 황제 폐하. 제국을 시름에 잠기게 하는 흉터는 용의 피가 흐르는 북부의 검과 얼음 호수의 기운이 흐르는 빛이 만남으로 치유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선황제가 물었다.

〈흉터라니?〉

〈아무래도 균열의 틈을 말하는 것이 아닐지요?〉

〈하! 그렇군. 그런데 얼음 호수의 기운이 흐르는 이라면…….〉

〈……수소문을 해 본 결과 아마 젤다족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젤다족?〉

그 순간, 대공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젤다족? 하고 중얼거리는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대공의 눈에 대신전의 방 한편에서 대화를 엿듣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당시 황태자였던 페즈였다.

그리고 장면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깊은 어둠으로 물든 밤이었다.

스스스슥, 발목을 잡는 수풀을 헤치며 산기슭을 오르는 두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쪽으로 도망갔다! 찾아라!〉

그 뒤를 쫓는 말 울음소리가 우렁찼다. 거침없이 울리는 말발굽 소리에 여성의 손을 잡고 앞서 달리던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힘을 내, 베이.〉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러다간 모두 죽을 거예요.〉

산기슭 아래에는 불이 번진 마을이 보였다. 차가운 호수 앞에서 소수의 일족이 꾸려가던 터전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베이는 남성의 손을 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한 품에 아이를 안은 채 그녀의 손을 잡은 그가 말했다.

〈차라리 내가 저들을 유인할게. 베이가 도망가.〉

남성이 품에 안고 있던 아이를 베이에게 넘기려고 했다.

그에 강보에 감싸여 순하게 잠든 아이의 모습이 살짝 드러나자 대공의 눈이 크게 떠졌다.

‘……에드?’

대공은 확신했다.

옅은 금발과 하얀 얼굴의 아이가 바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에드인 것을.

그 사실을 깨닫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눈앞에 보이는 위기에 빠진 그들을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공이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건지 손을 뻗은 그를 그냥 관통해서 지나갔다.

〈베이, 어서.〉

자신이 안고 있던 아이를 품에 넘기려는 남자의 손길이 다급했다.

그러나 베이는 단호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잖아요, 덴.〉

기적적으로 시간을 벌 수 있는 틈이 생겼지만, 그게 길게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걸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배를 꾹, 누른 베이의 손에 묻어난 피에 덴은 그대로 주저앉아 그녀를 품에 안아 보듬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베이는 그를 살짝 밀어내며 현 상황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우리에겐 시간이 많지 않아요. 적들이 마법사들을 저렇게 많이 데리고 있는 걸 보면 평범한 도적단일 가능성은 없을 거예요.〉

베이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예감한 덴의 눈동자가 절망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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