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67화 (167/198)

“……네, 보았습니다.”

“그때 들었던 말이 진짜였다니…….”

혼잣말하듯 작게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대공은 잠시 기다리다 물었다.

“폐하,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다는 것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니, 그보다 동굴에 벽화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는 에드와 함께 사고에 휘말리기 전까지 북부에 그런 벽화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황태후는 허공을 바라보다가 대공을 향해 돌아섰다.

대공이 어린 시절과 똑같이 맑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제대로 찾아온 게 맞아.’

그를 보며 다시금 확인한 황태후는 물었다.

“먼저 묻고 싶은 게 있네. 공은 날 얼마나 신뢰하지? 내가 만약 황제와 손을 잡고 이곳에 온 거라면 어찌할 텐가?”

그 말을 들은 대공이 차분하게 말했다.

“신뢰라…… 하시면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무슨 일이 있더라도 황제와 손을 잡지 않을 사람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중 한 명이 제 앞에 계신 폐하시고요.”

일찍이 페즈를 황태자로 책봉한 선황제는 재혼 상대를 고를 때 무엇보다 ‘힘의 균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제국에 도움이 되는 기반을 지니고 있되 외척 세력이 수도 중심부까지는 미치지 못할 것.

그렇게 고른 신붓감이 바로 눈앞의 황태후였다.

그러나 선황제가 놓친 부분이 있었다. 바로 제 아들의 어리석음이었다.

선황제가 살아 있을 때까지 황태후와 페즈의 사이는 좋았다.

하지만 그가 죽자마자 황좌에 오른 페즈는 본심을 드러냈다. 사이좋은 가족 연기를 집어치우고 황태후와 그녀가 낳은 이복동생인 제인트 황녀를 냉궁으로 쫓아냈다.

사실 페즈는 오래전부터 자신에게만은 발현되지 않은 용의 피를 저주스러워하며 그걸 가진 사람을 시샘해 왔다.

그런데 어린 황녀마저 자신에게 없는 용의 피가 흐르는 걸 확인하고 황위에 오르자마자 바로 그 속내를 드러낸 거였다.

하지만 기회를 틈타 두 모녀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당사자인 황태후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와 손을 잡는다는 건 북부가 황제의 편에 서는 것만큼이나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황제의 견제를 받느라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서로의 입장을 다시금 확인했다.

황태후는 굳어 있던 표정을 풀며 어렵게 북부까지 온 이유를 밝혔다.

“요양 중이셨던 선황, 그 양반이 내게 해 준 말이 있어. 그때 한창 열병을 앓고 있던 때라 헛소리인 줄 알고 넘겼지만.”

“…….”

“오늘 와 보니 그 얘기가 그냥 한 말은 아닌 것 같군.”

그녀가 품속에서 하얀 구슬을 꺼냈다. 그 물건을 살펴보던 대공의 눈가가 좁혀졌다.

“이게 무엇입니까?”

“선황께서 쓰러진 뒤에야 황태자의 본성을 눈치채고 내게 남겨 준 거라네.”

잠시 말을 멈춘 그녀가 따뜻한 시선으로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자네가 이걸 들고 동굴 안으로 들어가 보게.”

“이 구슬을 제가 받아도 되겠습니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황태후가 대공에게 구슬을 건넸다. 크고 따스한 손을 가볍게 토닥이다 뗀 그녀가 후련한 얼굴을 했다.

대공은 손에 쥐어진 구슬을 가볍게 만져 보았다. 특별한 기운이라도 머금고 있는 것인지 온기가 느껴졌다.

“그냥 구슬을 들고 동굴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대공이 의심 없이 자신을 내려다보자 황태후가 옅게 웃었다.

“나도 정확히는 모르네. 이걸 넘겨줄 당시 선황께서 워낙 혼몽할 때이기도 했고, 황태자의 눈이 사방에 깔려 있을 때라 설명도 자세히 해 줄 수 없었으니까.”

“…….”

“하지만 선황의 의중은 오로지 하나, 내가 이 구슬을 잘 가지고 있다가 빛이 나면 공에게 전해 주라는 것이었어. 그러니 이건 본래 나한테 준 게 아닌 거지.”

황태후의 말을 경청하던 대공이 무겁게 입을 뗐다.

“……북부까지 오시는 길이 험하지 않으셨습니까?”

복잡한 심경을 숨기지 못하는 대공을 올려다보며 황태후는 온화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공을 만날 생각에 설레기만 했을 뿐이네.”

충분한 설명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공은 선황제의 유지를 받들어 위험을 무릅쓰고 북부로 향한 그녀에게 존경을 담아 예를 갖췄다.

“황태후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 * *

마법 등을 켤 필요는 없었다. 손에 든 구슬에서 풍기는 은은한 빛이 앞을 밝히며 어둠을 물리쳤다.

황태후가 무엇을 바라고 이곳까지 왔는지 대공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든 구슬이 지닌 따스함에 모든 의혹을 내려놓았다. 이 앞에 무엇이 있는지 직접 나아가 제 두 눈으로 확인하고자 했다.

한 발 한 발, 민첩하게 앞으로 내디딘 그는 자신이 쳐 놓은 결계를 넘어 안쪽으로 들어섰다.

아직 복구가 덜 된 주위를 살펴보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동굴 입구에 다다르자 문득 에드가 떠올랐다.

“함께 왔다면 좋았을 텐데.”

그와 함께 동굴을 탐험했던 기억을 떠올린 그는 저절로 입매가 느슨하게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때 동굴 안에서 휘이잉, 한차례 긴 바람이 불어왔다. 폐부 깊숙이 와닿는 찬 공기에 작게 숨을 들이켠 대공은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에드의 얼굴이 생각나자 이 일을 빨리 해결하고 성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한밤중, 깊은 잠에 빠져 있을 그의 곁에 누워 포근하고 따뜻한 그 몸을 꽉 끌어안고 싶었다.

볕 좋은 날 보송보송하게 말린 이불같이 향긋하고 기분 좋은 느낌이 드는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간지러운 시간을 보냈으면 했다.

지금 당장 제 손에 착 감겨오는 부드럽고 매끈한 살결을 느끼고 싶었고, 다정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도 간절하리만치 듣고 싶었다.

이 순간 대공은 에드가 그리울 정도로 절실하게 다가오자 행동이 빨라졌다. 그가 뇌리에 자리 잡자 발길이 절로 닿는 느낌이었다.

‘에드와 함께했던 그곳으로.’

어느새 지진이 났을 때 그와 함께 떨어졌던 곳에 도착한 대공은 고개를 돌렸다. 차근차근 주위를 살펴보다가 벽화에 구슬을 비췄다.

구슬이 내뿜는 빛이 이동하는 방향에 따라 그림이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그때와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군.’

손으로 턱을 쓸며 동굴 안을 확인한 대공은 다른 곳으로 몸을 돌리려다 문득 발걸음 멈췄다.

‘방금 벽화에 그려진 용이 움직인 것 같은데?’

한 사람이 용의 목을 껴안고 있는 그림이었다. 대공이 그를 다시 살펴보려고 구슬을 들어 가까이 댄 순간이었다.

휘이잉

강한 바람이 그의 몸을 확 휘어 감았다.

동시에 구슬에서도 환한 빛무리가 떠올랐다. 강렬한 섬광처럼 일순간에 확 터진 빛이 사방으로 흩어져 동굴의 암흑을 밀어내며 부유했다.

강렬한 빛을 마주했던 대공은 제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다. 제 몸 안에 흐르는 용의 피가 각성했을 때였다.

세상의 모든 감각이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뭘 해야겠다, 어떻게 해야겠다고 생각할 새도 없이 거대한 기운이 흡수되는 그런 느낌.

“…….”

그때, 벽화에서 무언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공의 시선이 움직였다.

벽화가 울룩불룩하게 굴곡지고 이지러지듯이 움직이자 동굴에 다시 바람이 훅, 불어닥쳤다.

그 순간, 대공의 손에 쥔 구슬이 그에 호응하듯 우웅 소리를 내며 떨렸다. 한참을 그렇게 공명하던 구슬에서 금빛 가루가 너울너울 흘러나오더니 벽화 쪽으로 날아갔다.

그 가루가 벽화에 닿자 무언가가 밖으로 쑤욱 빠져나왔다.

동굴을 밝히던 빛이 거대한 몸체에 가려지는 바람에 시야에 제한이 생겼던 대공은 마법 등을 비추고 나서야 눈앞에 나타난 존재가 용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를 깨운 아이야.]

그는 벽화에서 갑작스럽게 솟아난 용의 질문에도 답하지 않고 그저 눈앞의 존재가 적인지 아군인지를 파악하기 여념이 없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지?]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황금빛 비늘로 둘러싸인 몸체, 자신을 쳐다보는 저와 같은 붉은 눈동자.

그 모습은 제국의 건국 신화에서 나오는 용과 똑 닮아 있었다.

사실 대공은 그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았어도 이 존재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을 터였다.

“아인드 제국의 북부를 지키는 검. 그리고 당신의 피를 이은 자 아스넬 린든.”

그는 이 용의 모습을 꿈에서 본 적이 있었다. 열세 살 때였다.

[그래, 그 이름이었지.]

그때도 용은 그에게 이름을 물었었다. 오랜 잠에서 깬 용은 아직 정신이 맑지 않은지 작게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하지만 워낙 큰 크기의 존재였기에 그 행동만으로 동굴 안은 태풍이라도 온 듯 바람에 거세게 불었다.

[인간의 시간은 정말 찰나에 불과하구나. 아주 조그마했던 어린아이가 이렇게 자라다니.]

대공이 옅게 웃었다.

“인간 세계는 그 찰나의 시간에 나라가 사라졌다가 다시 생기기도 합니다.”

[그래, 너희 인간은 항상 그렇게 폭죽처럼 짧지만 강렬한 삶들을 살아왔으니까.]

용이 즐겁다는 듯 눈꼬리를 살짝 휘었다.

[정말이지 인간이란…….]

용이 잠시 말을 멈추고 대공을 바라보았다.

[볼 때마다 몰라보게 바뀌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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