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65화 (165/198)
  • “검을 배우는 기사 중에 그런 경우가 있어. 연무장에서는 기가 막히게 검을 휘두르는데 실전에만 나갔다 하면 몸이 굳어서 제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녀석들이.”

    경직된 에드의 등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대공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 반복 훈련을 하거든.”

    에드를 발등에 올린 채 대공이 작게 원을 그리며 돌자 꼭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춤을 추는 것도 결국 몸을 쓰는 일이니까 거듭해 연습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자유자재로 몸이 움직일 테지.”

    에드는 머리에 닿는 대공의 턱에 간지러움과 겸연쩍음을 동시에 느꼈다.

    “그때까지는 내가 즐거운 마음으로 도와줄게.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따라와, 에드. 이렇게 있으면 내 발을 다시 밟을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자신에게 발을 내어 주는 정도는 일도 아니라는 대공의 선언이었다.

    “무겁지 않으세요?”

    “누가? 에드가?”

    에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대공은 턱으로 옅은 금발을 가볍게 쓸며 흐트러뜨렸다.

    스윽, 스윽.

    에드는 대공이 움직일 때마다 스쳤다 떨어지는 옷감 사이로 닿는 단단한 뼈대를 느꼈다.

    대공은 대답 대신 에드를 더 단단히 부여잡은 채 춤을 추었다.

    자신 때문에 대공의 움직임이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하던 에드도 결국 대공이 이끄는 분위기에 잠겨 들었다.

    음악이 끝났을 때 발을 멈춘 대공과 고개를 든 에드 사이로 은은한 달빛이 고였다.

    그때 대공의 고개가 움직였다. 에드의 입술에 입을 가볍게 맞춘 그가 몸을 바로 세웠다.

    에드가 눈을 깜빡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신기루처럼 사라진 온기에 에드는 입술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다 웃었다.

    너무 짧아서 아쉬운 입맞춤이었다.

    음악이 바뀌었다. 바이올린 연주를 시작으로 분위기가 바뀐 음악에 에드는 대공의 발에서 내려섰다.

    이번엔 에드가 팔을 내밀었다. 대공이 손을 잡아 오자 그가 음악에 맞춰 발을 움직였다. 몸을 통통 튕기듯이 움직이는 게 이번 춤의 핵심이었다.

    어려운 동작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몸을 튕길 때마다 대공의 발도 콕콕 밟는다는 것이었다.

    “아…….”

    대공의 발을 또 밟은 에드가 자조적으로 한숨을 내쉬자 대공이 에드의 발등을 구두로 톡, 톡 두드렸다.

    “내가 누구지?”

    에드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야 당연히 대공 전하시죠.”

    “그래, 그걸 알고 있으면 돼.”

    “…….”

    “내가 누구와 있는지, 에드가 누구와 있는지 말이야. 그리고 나는 에드의 무게를 얼마든지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고작 내 발을 밟았다는 이유로 자책한다면.”

    대공이 에드의 손을 잡으며 웃었다.

    “이번엔 에드를 안아 올리고 춤을 출 거야.”

    대공이 자신을 안은 채 빙글빙글 도는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린 에드는 다시 힘차게 발을 움직였다.

    대공이 자신을 안고 춤을 추는 것도 새롭고 즐거울 터였다.

    하지만 방금 그의 발등에서 내려온 것은 그와 시선을 맞추고 발을 놀리며 호흡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의 품에 안겨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공이 웃으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그의 머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 감촉에 에드가 고개를 들자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나를 보면서.”

    절정으로 이어져 가는 음악에 따라 대공과 에드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몸에 걸쳐진 망토가 둥그렇게 퍼지며 원을 그릴 때마다 에드의 호흡도 달아올랐다.

    바람은 시원했고 몸은 가벼웠다.

    소리 없이 웃으며 대공과 박자와 리듬을 맞춰 가던 에드는 노래가 끝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느꼈다.

    에드가 살짝 뒤로 빠지며 거리를 벌리자 대공은 잡고 있던 손을 앞으로 확 당겼다. 그에 몸이 확 쏠린 에드가 자석에 붙듯이 대공에게 끌려왔다.

    “…….”

    “…….”

    이번에는 대공의 발을 밟지도 않았고, 몸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완벽한 두 사람의 호흡과 함께 음악이 멈추고 대공과 에드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대공의 턱 아래에서 에드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다.

    “……으음.”

    누가 먼저 닿았는지 알 수 없었다.

    대공이 고개를 숙이고, 에드가 발을 들어 올렸을 때 이미 서로의 입술은 맞붙어 있었다. 쪽, 쪼옥 가볍게 닿았다 떨어진 입술 사이로 따스한 숨결이 새어 나왔다.

    대공은 에드의 뒤통수를 커다란 손으로 감쌌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게 그의 턱을 손가락으로 누른 그가 다시 입술을 붙였다. 뜨거웠다. 여러 번 각도를 바꿔가며 입 안을 헤집은 살덩이가 물기 어린 소리를 냈다.

    “아…….”

    한동안 맞닿아 있던 입술이 쯔읏, 소리를 내며 떨어지자 에드는 혀로 입술을 가볍게 쓸었다. 눈가로 더운 열이 스며들었다.

    대공은 깊어지는 밤하늘 아래에서 붉어진 에드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의 입술에 입을 맞붙였다.

    젖은 혀가 입술을 빠르게 가르고 들어가자 에드의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대공은 에드를 꽉 끌어안은 채 키스를 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입 안 깊숙한 곳까지 느릿하게 빨고 문지르고 나서야 그는 에드를 놓아 주었다.

    “……하아.”

    온몸을 짓누르는 쾌감에 에드가 몸을 잘게 떨었다. 대공이 그의 입술을 엄지로 가볍게 훔치며 호흡이 안정되기를 기다렸다.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이 넓은 세상에 오로지 둘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스스슥.

    그때였다. 어디선가 들리는 나뭇잎 스치는 소리에 에드가 고개를 돌렸고, 테라스 아래를 확인한 대공이 물었다.

    “거기 누구지?”

    후원과 이어진 수풀에 누군가가 숨어 2층을 올려다보는 게 느껴졌다. 대공은 자신의 질문에도 대답 없이 빠르게 자리를 뜨려는 인영을 주시했다.

    “북부 사람이 아니군.”

    그가 에드의 망토를 여며 주며 말했다.

    “방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 에드.”

    “아닙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저은 대공이 품속에서 호각을 꺼내 불었다. 그러자 위층에서 기사 하나가 테라스로 풀쩍 뛰어내렸다.

    “지나가던 초청객일 거야. 금방 다녀올게.”

    물론,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자신과 시간을 보내고 있더라도 주위의 경계를 놓치지 않았을 대공이었다.

    ‘……그 경비를 뚫고 온 사람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이 구역은 제가 완벽하게 지키겠습니다!”

    곁에 선 기사가 당차게 대답하자 에드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이 옅게 웃으며 에드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고는 테라스 난간 아래로 빠르게 몸을 던졌다.

    에드는 테라스 난간에 몸을 바짝 붙였다. 바닥에 착지한 대공의 곁으로 이르텔이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단순 방문객이었다면 당황했더라도 이렇게 철저히 모습을 감추진 않았을 거야. 대체 누구지?’

    대공에게 도움이 될만한 단서를 찾고 싶었던 에드는 몸을 더 앞으로 내밀며 아래를 살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기사가 그의 망토를 잡고 살짝 당겼다.

    “조심하십쇼, 그러다 떨어집니다.”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앞섰던 에드는 아, 하며 몸을 물렸다. 씨익 웃으며 망토에서 손을 뗀 기사가 주위를 살폈다.

    “집사님이 다치면 이 넓은 북부 성을 누가 돌보겠습니까?”

    가볍게 분위기를 풀려는 기사의 말에 에드는 굳은 얼굴을 손으로 두드렸다. 지금은 대공을 믿고 기다릴 때였다.

    “그럼 대연회홀은 이상 없으니 안으로 들어갈까요?”

    무도회와 어우러진 연주는 그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에드는 앞서 걷는 기사를 뒤따랐다.

    * * *

    대공이 호각을 불자 이르텔과 두 명의 기사들이 뛰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말없이 마법 등을 건네받은 그가 수풀 아래를 비췄다.

    그러자 납작 엎드려 있던 검은 그림자가 뭉클뭉클 뭉치듯이 엉겨 붙더니 확 퍼졌다.

    사람이 아니었다. 검은 연기처럼 흩어졌다가 형태를 갖추는 그것을 대공은 차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

    “…….”

    그 기묘한 모습을 이르텔과 다른 기사들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 무언가가 있는 것입니까?”

    그들의 반응에 대공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시전자가 정해 준 대상에게만 보이는 마법인 모양이군.”

    그림자는 순식간에 작은 날개를 파닥이는 작은 새 형태로 변했다. 그리고 부리에는 말린 하얀 히아신스와 노란 수선화를 물고 있었다.

    ‘……하얀 히아신스와 노란 수선화라면, 어머니와 황태후께서 편지를 주고받으실 때 사용하시던 건데.’

    수상한 물체를 빠르게 잡아채려던 대공은 새 부리에 손을 가까이 대보았다. 그러자 새가 살포시 꽃을 내려놓았다.

    “대공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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