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게 숨을 들이켠 에드가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 대연회 홀에서 음료수를 마시던 로넨이 뛰어왔다.
‘에드!’
소리 없이 입으로만 에드를 부른 로넨이 대공과 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즐거워했다.
그러자 의문이 깃들었던 사람들의 시선에 이해가 들어차는 것이 느껴졌다.
“북부 성에 대공자님과 친분이 돈독한 사용인이 있다고 하던데, 그 사람인가 봐요.”
“아, 그 소식이야 저도 들어서 알고 있죠. 대공 전하와 대공자님의…….”
그때 로넨이 에드의 손을 붙잡았다.
“이쪽에 신기한 과일이 있어! 오늘 무도회에 초대된 상단이 가지고 왔다는데 새콤달콤한 게 정말 맛있어.”
작게 말하며 에드를 한쪽으로 이끄는 로넨의 손길에 에드는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긴장하고 어색해한 것이 무색했다. 대공과 로넨, 그 둘이 함께한다면 에드는 언제나 두려울 것이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들이 다 먹기 전에 어서 가자며 자신을 이끄는 로넨의 모습에 에드가 작게 웃었다.
* * *
음악이 바뀌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관심사로 대화를 나누며 무도회를 즐기기 시작했다.
가면에는 숨겨진 힘이라도 있는 걸까? 그 밑으로 얼굴을 가리자 사람들은 더 용감해지기도, 더 조심스러워지기도 했다.
“대공자님, 저와 춤을 추지 않으시겠어요?”
그리고 이 숙녀는 대담해지는 편이었다.
로넨이 춤을 신청한 영애를 바라보며 머뭇거리자 에드가 작게 물었다.
“혹시 자리가 불편하세요?”
“아니, 그건 아닌데.”
로넨이 에드에게 작게 속삭였다.
“내가 춤을 추러 가면 에드는?”
“네?”
고개를 기울인 에드가 로넨이 걱정하는 부분을 알아차리고 옅게 웃었다.
“저는 다른 데 가지 않고 대공 전하의 곁에 딱 붙어 있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로넨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가시지 않자 영애가 말했다.
“혹시 제 발을 밟을까 봐 염려되시는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공자님. 가면 때문에 발밑이 잘 보이지 않는 건 저도 마찬가지이니까요.”
에드는 시원시원한 영애의 말을 들으며 뒤로 물러났다. 가면 때문에 잘 보이진 않겠지만 로넨에게 눈도 찡긋했다.
그 응원에 힘입은 건지 고개를 끄덕인 로넨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영애가 자연스럽게 그를 이끌며 홀 중앙으로 나아갔다.
에드는 그 둘의 뒷모습을 보며 웃다가 고개를 들어 홀을 둘러보았다.
“…….”
과연 북부의 봄을 알리는 무도회답게 대연회홀은 북적북적했다. 그중에서도 대공의 주위가 도드라지게 눈에 뜨였다.
대공의 곁에서 입을 가린 채 말하는 귀족과 그가 비키길 기다리는 사람, 상단 관계자로 보이는 이와 북부의 옷차림과 사뭇 다른 복장을 갖춰 입은 외지인까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대공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에드는 그런 이들의 틈에서 눈빛을 주고받거나 대화를 나누는 대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움직였다.
‘안이 너무 더워서 그런가.’
몸에 열이 나는 것도 같고…… 무도회 분위기를 끌어 올리는 음악 소리를 들으며 에드는 대연회 홀과 이어진 테라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에 걸리지 않게 조심히 문을 닫고 난간에 팔을 기대자 왁자지껄했던 소리가 사라지고 고요함이 맴돌았다.
에드는 선선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가면을 벗었다.
“…….”
기분이 묘했다. 쓸쓸하거나 고독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가면을 쓰고 있음에도 모두가 알아보고 다가오는 대공과 로넨의 확고한 위상을 보자 음, 뭐랄까.
자신이 어떻게 그들의 틈에 낄 수 있었나, 신기하기도 하고 초조한 마음도 들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인 전하와 내가 연인이라니.’
에드는 고개를 들어 보름달이 뜬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아직은 부족하지만.’
에드는 대공과 같은 선상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대공뿐만 아니라 로넨과 아이, 북부에 힘이 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그 순간, 음악 소리가 에드의 귀에 확 들어왔다가 일순간에 작아졌다. 어? 하고 그가 고개를 돌리자 테라스 문을 닫고 제게로 다가오는 대공이 보였다.
“…….”
“…….”
부드럽고 따뜻한 옷감이 에드의 등을 감쌌다. 그에게 망토를 둘러 준 대공이 난간에 몸을 기대며 에드의 어깨를 감쌌다.
대공의 시선이 하늘로 향하는 걸 응시하며 에드는 문득 그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대공이 가면을 벗으며 에드를 마주 보았다. 그러곤 에드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올렸다.
반듯한 이마와 콧대, 콧날을 타고 내려온 손에 대공이 입술을 묻기까지 에드는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입술을 맞붙였던 에드의 손을 내려놓은 대공이 걸음을 옮겼다. 너른 테라스를 가로질러 움직이는 그의 모습에 에드는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했다.
‘뭘 하려고 하시는 걸까?’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민 대공이 테라스로 흘러나오는 부드러운 선율을 따라 발을 옮겼다.
밖을 밝히는 마법 등 불빛에 그의 그림자가 너울거리듯이 번졌다가 에드에게 반듯하게 향했다.
대공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자 에드가 작게 웃었다.
대연회홀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히는 빛도, 장작이 타오르는 벽난로도 없는 테라스였지만 대공과 함께 하니 이보다 근사한 무대가 없었다.
서로에게 향한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뒤로 살짝 물러나는 대공을 쳐다본 에드는 저도 모르게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러자 다시 앞으로 다가오는 대공을 보며 에드는 이제까지 배웠던 춤 수업을 떠올렸다.
이건 나와 춤을 함께 추지 않을래? 하는 권유의 몸짓이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에드가 대공의 구둣발 옆으로 발을 옮겼다. 다시 다리를 움직인 대공이 에드의 발 옆으로 그의 발을 붙이며 몸을 바짝 붙여 왔다.
대공과 에드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그림자에 가려졌던 대공의 얼굴이 은은한 불빛에 완연히 드러났다.
“…….”
“…….”
에드는 갑작스레 온몸을 덮쳤던 싱숭생숭한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분명 무의미한 고민은 아니었다.
‘살다 보면 땅을 팔 수도 있지.’
그대로 무덤에 들어가 비석까지 세우는 것이 아닌 이상, 씩씩하게 털고 나오면 한층 더 성장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좀 어이가 없었다.
‘전하의 올곧은 시선에 모든 불안이 일순간에 사라지다니.’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변하는 감정의 폭은 온 세상에서 오직 대공만이 저에게 줄 수 있는 게 틀림없었다.
에드를 이끌며 자리를 이동하던 대공이 살짝 짓궂은 내색을 내비쳤다. 그러고는 이어 제 등허리를 양손으로 감싸며 몸을 훌쩍 들어 올리자 에드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전, 전하.”
이건 배웠던 춤에서는 없었던 동작이었다. 에드의 눈높이가 올라가며 대공과 시선이 엇비슷해졌다.
대공은 옅게 웃으며 에드를 끌어안은 채 느긋하고 여유롭게 원을 그리며 발을 놀렸다.
처음엔 대공이 힘들면 어쩌나 긴장했던 에드는 곧 굳센 대공의 악력에 마음을 놓고 몸에 힘을 풀었다.
당황해 뻣뻣하게 굳어 있던 연인이 자신에게 흐름을 완벽하게 맡기는 것을 느끼며 대공은 말했다.
“꼭 수업에서 배운 대로 춤을 출 필요는 없잖아.”
이제 노래는 경쾌한 리듬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에드는 작게 웃으면서도 대공에게 애원했다.
“그렇긴 하지만 조금만 천천히요.”
“어지러워?”
“아뇨, 재밌어요. 하지만 제 발로 바닥을 딛고 전하와 박자를 맞추고 싶어서요.”
에드는 지금도 즐거웠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대공과 함께 손발을 맞추며 춤추고 싶었다.
그 말에 대공은 웃으며 에드를 내려놓았다. 바닥에 발이 닿자 에드는 찬찬히 수업 시간에 배운 것들을 떠올렸다.
에드는 대공이 리드하는 움직임을 따라 밀고 당기듯이 몸을 움직이다가 대공의 발을 콱 밟자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졌다.
“허억, 죄송합니다.”
그동안 부단히 노력했어도 여전히 늘지 않는 춤 실력이 이젠 신기할 지경이었다.
대공이 에드의 손을 잡으며 웃었다.
“복습할 때는 긴장하지 않고 잘 추더니 오늘은 왜 이렇게 삐걱거려?”
“복습 시간에도 그리 좋은 실력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니…… 예상치 못한 응용문제에 정신을 빼앗겨 그만 기본을 놓친 게 아닌가 싶어요.”
에드는 대공이 제 몸을 들어 올리던 것을 상기하며 답했다.
“그렇다면 조금 더 다양한 응용문제에 노출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에드 생각은 어때?”
“다시 차근차근 배워 기초부터 탄탄히 다져 보자는 게 아니고요?”
대공이 에드의 허리에 손을 대며 말했다.
“그 방법도 나쁘진 않지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에드를 살짝 들어 올린 대공이 에드의 발밑에 발을 갖다 댔다.
“어? 대, 대공 전하.”
대공이 에드를 내려놓은 곳은 바닥이 아니었다. 에드는 자신이 대공의 발을 밟고 있는 것에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 땅으로 내려서려고 했다.
하지만 대공이 그를 더 꽉 껴안으며 움직임을 막는 통에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