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 탁, 탁.
굵은 줄이 움직이는 소리는 컸고, 에드는 이번엔 자신이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걸 알았다.
‘읏.’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줄 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여유로운 시간을 즐겼지만, 그 밖에 있는 자신에게는 이것이 단순한 놀이로 다가오지 않았다.
쌔앵, 쌔앵, 쌔애앵
안에 들어선 이들에겐 한없이 너그러운 줄이 제 앞에선 모질게 느껴질 정도로 세차게 돌아갔다.
타이밍을 못 맞춰서 저 커다란 줄에 맞으면 온몸이 찢길 것 같았다.
‘네가 뭔데 여길 들어와?’
바닥을 힘차게 박차고 튀어 오르는 줄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힘차게 돌아가던 줄이 쭈욱 늘어나 에드의 발목을 옭아맸다.
“…….”
날카로운 한기가 몸을 타고 올라오며 주위가 어두워지자 그는 순식간에 적막에 사로잡혔다.
“에드.”
그때,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꿈을 꿨어?”
부드럽게 제 손을 주무르는 손길도 느껴졌다.
에드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흐릿했던 초점이 맞아 들어가며 보이는 얼굴에 안정감을 느꼈다.
“……잠깐 눕는다고 한 건데 잠이 들었나 봐요. 지금 몇 시죠? 무도회 준비로 바쁘실 텐데요.”
에드는 환한 창가를 올려다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본격적인 연회는 해가 진 뒤에 열리니 아직은 여유가 있어. 그런데 무슨 꿈을 꿨기에 그렇게 끙끙거렸어?”
염려가 어린 질문에 에드는 입매를 끌어올렸다.
“전하를 보자마자 머릿속에서 지워진 걸 보니 별것 아닌 꿈이었나 봐요.”
아까 대충 누운 채 뒹굴다 잠이 들었는데 어느새 에드는 침대에 반듯하게 눕혀져 있었다.
에드는 침대에 걸터 앉은 대공의 탄탄한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뒤통수를 살살 비볐다.
천이 쓸리는 소리와 몸과 몸이 맞대어지는 감촉…… 이렇게 대공과 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감각 하나하나에 에드는 매번 새로운 자극에 휩싸이는 것 같았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방금 전까지 저를 짓누르던 악몽의 잔해는 사라지고 눈앞에 존재하는 대공에게만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대공이 제 손등을 부드럽게 감싸며 깍지를 끼자 에드는 그를 입으로 끌고 왔다. 힘을 뺀 채 그 손길을 따르는 대공의 손등에 입술을 대었다.
이렇게 닿은 온기는 너무 따사롭고 감미로워 잠시라도 불안하거나 방심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가 대공과 닿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오로지 하나였다. 자신이 속한 세상은 다름 아닌 이곳이라는 것.
그러니 누군가가 선을 그어 놓고 여긴 네가 들어올 곳이 아니라고 엄포를 놓는 꿈을 꿨더라도 두려울 것은 없었다.
입술을 살짝 벌린 에드가 대공의 손등을 빨 듯이 물었다. 그러자 부드러우면서도 탄력 있는 살결이 입안으로 쭈욱 들어왔다.
‘……아니,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뜬 에드가 고개를 뒤로 빼며 물었던 피부를 놓자 쪼옥과 뽀옥 사이의 소리가 울렸다.
대공의 손등에 붉은 자국이 어렸다가 희미해졌다. 대공이 이를 보며 소리 없이 웃다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아깝게 왜 사라지지?”
그 자국을 엄지로 살살 긁던 대공이 에드에게 다시 손등을 갖다 대었다. 이번엔 더 세게 빨아 흔적을 남겨 달라는 뜻이었다.
“……이러다 정말 무도회 준비에 늦으시면 어쩌려고요, 전하.”
“그게 걱정이라면 에드가 더 빠르고 세게 입을 움직이면 될 것 같은데?”
입술을 가볍게 건드리는 손길에 에드는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아까보다 강하게 살갗을 빨아들이자 대공이 흡족함에 에드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렇게 공을 들였음에도 입술을 떼기가 무섭게 사라지는 붉은 자국에 에드는 아쉬움을 느끼며 작게 혀를 찼다.
대공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에드의 배를 가볍게 문지르며 열기가 남은 입술에 입을 맞대고 가볍게 비비다가 곧 딱 붙게 겹쳤다.
귀가 뜨끈해진 에드는 밀착된 대공의 열기에 작게 숨을 터뜨렸다. 그 숨결을 샅샅이 핥듯이 혀로 뜨거운 입술을 빤 대공이 몸을 더 붙여 왔다.
후끈해진 입 안을 가르고 들어오는 촉촉한 살덩이에 에드는 대공의 목에 팔을 감았다.
* * *
‘아니, 이래도 되는 건가.’
침대에서 홀로 눈을 뜬 에드는 허탈하게 웃었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오후였다.
‘전하께 먼저 입을 들이댄 건 나였으나 그 뒤에는…….’
이불에 꽁꽁 싸이다시피한 채로 잠이 들었다가 깬 에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을 바라보았다.
이리저리 쓸리며 헝클어졌던 머리카락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대공의 뒷정리 솜씨에 에드가 감탄하는데 조용히 방문이 열렸다.
“에드, 준비 다 되어 가?”
로넨이었다. 가면을 쓴 그가 고개를 움직이자 그의 머리 위에 날개를 활짝 편 용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비슷한데.’
에드는 오전에 받아 본 가면에 흘낏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로넨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음에 안 들어?”
에드는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네?”
“가면 말이야.”
“아, 아뇨. 정말 멋있어요.”
“그런데 왜 안 써?”
아무래도 자신은 오늘 무도회에서 다른 가면을 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에드는 로넨에게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했다.
가면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로넨이 입을 살짝 내민 채 생각에 잠겨 있는 게 느껴졌다.
에드는 로넨이 준비해 준 가면을 쓰지 않으면 그가 몹시 실망할 것을 예감하고 다른 핑계를 댔다.
“저는 무도회에 조금 늦게 참석할 것 같아서요.”
“왜? 무슨 일 있어? 아니면 어디 아파?”
금세 염려가 담긴 대답이 돌아오자 에드는 손을 내저으며 답했다.
“아, 아뇨. 그건 아니고, 제가 오늘까지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아직 다 마치지 못해서요.”
에드가 무슨 일이 남았다고 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는데, 열린 방문 사이로 작은 용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아직 멀었어, 에드?”
“에드도 잘 어울리려나?”
가면을 쓴 제이논과 텐스였다. 에드가 어?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도회에서 사용인들도 가면을 쓰는 건가요?”
“아, 원래는 아니었는데 이번엔 그렇게 되었다.”
“로넨 도련님의 넘치는 창의성과 북부의 훌륭한 손재주를 보여 주자는 의견이 대세여서 반대표를 던진 나도 결국 이렇게 쓰고 말았지 뭐야.”
텐스와 제이논의 대답에 에드는 제 손을 잡아 오는 로넨을 내려다보았다. 날개를 활짝 편 작은 용 가면 아래로 그가 환하게 웃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에드도 급한 일이 아니라면 무도회를 즐긴 뒤에 하자, 응?”
로넨이 준비해 준 옷으로 갈아입은 에드는 가면을 썼다.
“…….”
성의 사용인들도 모두 가면을 쓰고 단장을 한 덕에 크게 튀지는 않는 것 같았다.
거울을 보며 옷매무시를 확인해 에드가 방문을 열었다.
“어?”
로넨이 대연회홀에 먼저 내려가 방밖에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문 앞에 사람이 서 있었다.
“대공 전하?”
에드는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음에도 특유의 분위기가 남아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근사한 가면 아래로 보이는 입매에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문득 그 입술을 건드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에드는 싱겁게 웃었다.
“기분은 어때?”
“기분이요?”
대공이 손을 내밀었다. 에드는 그 손을 잡으며 그가 낮에 악몽을 꾼 것을 염려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모두가 바쁜 와중에 염치없이 자고 일어나 마음은 무겁지만, 몸은 가뿐해요. 그리고 전하와 연회에 참석할 예정이라 그런지…….”
걸음을 옮기는 대공이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게 느껴졌다.
“설레고 얼떨떨하기도 해요.”
들뜬 북부 성의 분위기가 이곳저곳에서 느껴졌다. 트레이를 든 시종도, 북부 성에 발을 들인 초청객들도 모두 즐거워하는 낯으로 무도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연회 홀이 가까워질수록 호기심과 기대로 들뜬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대공이 속삭였다.
“에드를 정식으로 소개하지 못하는 건 안타깝지만, 그래도 즐거운 무도회가 되었으면 좋겠어.”
에드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대연회 홀의 문이 열렸다. 담소를 나누던 이들의 시선이 활짝 열린 문으로 쏠렸다.
그를 느낀 에드의 행동이 느려지자 대공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에드는 에드 그대로 있으면 돼.”
가면을 썼음에도 대공을 확실히 알아본 사람들의 시선에 그와 함께 들어오는 이는 누구인지? 하는 의아함이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