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62화 (162/198)

그는 여전히 텐스와 제이논이 티격태격하는 걸 보다가 말을 얹었다.

“다른 도울 일은 없을까요?”

“그럼 이르텔에게 기사들이 먹을 간식거리는 연무장 앞에 뒀다고 전해 줄래? 넉넉히 챙기긴 했는데 혹시 부족할 것 같으면 부주방장님께 말하라고 하고.”

“네, 그렇게 전할게요.”

제이논과 텐스에게 인사한 에드는 이르텔을 찾아 말을 전했다. 그리고 외투 주머니에 넣어 뒀던 작은 봉투를 열어 보았다.

눈앞에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온실의 000나무 아래에 그대를 위한 붉은 표식을 붙여 뒀습니다.

어? 이건?

눈으로 카드에 적힌 글을 빠르게 읽어 내려가던 에드는 품에서 수첩을 꺼내 펼쳤다.

‘전하께서 쓴 글씨인 것 같은데?’

그는 카드와 수첩에 쓰인 글씨를 대조해 보다가 확신했다. 둘 다 대공의 필체가 확실했다.

‘로넨이 재미 삼아 전해 준 것인 줄 알았는데.’

에드는 카드에 적힌 내용을 확인하다가 물푸레나무를 중얼거렸다.

빈칸에 들어갈 말은 그거였다. 수첩과 비교해 답을 확인한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여기로 찾아오라는 걸까?’

마침 북부 성의 온실에도 작은 물푸레나무가 있었다. 카드를 조심스레 접어 외투 주머니에 넣은 에드는 발길을 옮겼다.

헛걸음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대공이 자신에게 내준 수수께끼라면 그를 풀기 위해 북부 성을 하루 종일 빙빙 돌다가 허탕을 치더라도 즐거울 것 같았다.

빠르게 움직인 그는 후원 온실에 도착하자 바로 물푸레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눈동자를 굴리기도 전에 시야에 들어오는 붉은 봉투를 손에 들었다.

로아의 집

이번엔 빙고 게임판 중앙에 로넨의 글씨가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꼭 와야 한다는 듯 별표까지 크게 박아 놓은 것이 무척 귀엽게 느껴졌다.

에드는 옅게 웃으며 온실을 나섰다. 그렇게 차례차례 힌트를 얻은 에드는 마침내 창고 앞에 다다랐다.

묵직한 창고 문을 열자 원형 테이블에 놓인 마법 등이 은은하게 안을 밝히고 있었다.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선 에드는 마법 등 옆에 놓인 동화책과 붉은 봉투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번엔 또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까?’

궁금함과 설렘이 담긴 손길로 에드가 재빠르게 봉투를 열어 안을 확인했다.

“…….”

이번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카드였다.

‘왜 빈 카드이지?’

에드는 새하얀 카드를 위로 들어도 보고, 아래로 내려도 보고, 마법 등에 가까이 대 보기도 했지만 아무 글씨도 찾아낼 수 없었다.

“이게 마지막 힌트인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한 에드는 주변을 살필 겸 마법 등 옆에 놓인 동화책을 들었다.

‘혹시 동화책에 어떤 암시가 있는 걸까?’

그는 혹여 힌트를 놓칠까 봐 책을 차근차근 살폈다. 그러다 페이지 맨 끝에 껴있는 쪽지를 발견했다.

에드, 에드도 청년이 하고 싶었던 것을 하고 싶어?

그를 본 에드는 아! 하고 감탄했다.

〈에드도 재미있는 노래를 아는 게 있다면 알려줘.〉

얼마 전 북부 노래를 들려주던 대공이 자신에게도 노래를 불러 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에드는 언젠가 수업에서 들었던 곡을 그에게 불러 주었다. 노래에 자신이 없어 어렴풋이 떠오르는 가사를 생각나는 대로 바꿔서 웅얼거리긴 했지만.

청년은 누군가와 함께 정원 위에 있었지.

그 사람은 버드나무 옆에 서 있었고

청년은 그에게 입을 맞추길 원했어.

하지만 그가 말했지.

입을 맞추는 순간 도망칠 수 없다고.

그러나 청년은 용기를 내 키스를 했고

그는 그 키스를 깊이 받아들였지.

그 뒤로 어떻게 됐냐고? 어떻게 됐긴

아직도 그에게 붙잡혀 있지.

그 노래의 틀이 된 건 베토벤의 가곡 중에 하나였다는 것만 어슴푸레 기억났다.

‘그때 과제를 하느라 쉬지 않고 들은 탓인지 음이 아직도 머릿속에 맴돌아.’

그걸 전하께 스쳐 지나가듯이 알려 준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이에서 따온 질문인 것 같았다.

그를 잊지 않은 대공이 놀라워 쪽지를 한동안 내려다보던 에드는 동화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연인이 입을 맞추는 삽화를 발견했다.

‘이게 내게 알려 준 힌트라면 두 개의 내용이 가리키는 건…….’

에드는 빈 카드를 들어 보았다. 다시 이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입을 살짝 갖다 대었다.

‘만약 이게 아니라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면 되지, 뭐.’

하지만 차선책을 궁리하던 것이 무색하게도 그 순간 카드 중앙에 반딧불같이 빛나는 글귀가 스르르 생겼다.

〈에드, 이번 가면무도회에서 나의 파트너가 되어 주지 않을래?〉

그와 동시에 창고 문이 열리며 대공과 로넨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에드는 사르르 웃고 말았다.

무도회 당일 오전, 에드는 테이블에 놓인 상자를 발견했다. 뭐지? 하고 열자 보이는 쪽지와 물건에 그가 옅게 웃었다.

에드를 위해 준비했어!

로넨이 준비한 가면이었다. 척 보기에도 훌륭하고 근사해 이 때문에 고민이 많았던 그의 걱정이 무색했다.

인중까지 가리는 가면은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고, 귀를 덮는 옆부분에는 날개를 펼친 작은 용이 자리 잡고 있었다.

‘텐스의 손이 많이 갔겠는데.’

에드는 가볍고 견고한 가면을 손에 든 채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용이 장식된 물품을 내가 써도 되려나?”

그는 가면에 달린 용을 살펴보았다.

‘대공 전하와 로넨이 어떤 가면을 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검은 용은 북부의 상징이니까…….’

에드는 테이블에 그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밖에서는 무도회 준비와 봄맞이가 겹쳐 들썩들썩했다.

‘평소였다면 나도 저들 틈에 끼어 연회를 준비하느라 바빴을 텐데.’

어제오늘 그는 옷을 입어 봐야 하네, 구두를 맞춰 신어야 하네 하던 로넨 덕분에 일과 동떨어져 있었다.

에드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런 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창을 올려다보았다.

북부 성의 집사로 알려진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는 행동을 해서 좋을 건 없었다.

‘그러니 다른 가면을 쓰거나 무도회 막바지에 잠깐 참석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발끝을 까딱이며 몸을 푼 에드는 뒤로 몸을 눕혔다. 저를 편안하게 받치는 매트리스에 몸을 깊게 묻으며 그는 생각했다.

‘이대로 조금만 뒹굴다 일어나서 무도회 준비를 도와야지.’

* * *

발밑이 진득한 진흙이 엉긴 것처럼 물컹거렸다. 그 비현실적인 감각에 에드는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이런. 자고 있을 때가 아닌데.’

그는 둔한 머릿속을 깨우며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했으나 눈을 뜰 수 없었다. 몸이 제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탁, 탁 무언가가 바닥을 치는 소리도 들렸다.

‘뭐지?’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며 간신히 눈을 뜨자 커다란 줄이 규칙적으로 바닥을 때렸다가 허공으로 튀어 오르는 게 보였다.

‘……단체 줄넘기구나.’

줄 안에는 흐릿하게 보이는 인영들이 박자에 맞춰 줄을 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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