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도 함께 배우는 줄은 몰랐네.”
로넨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에드도 함께 배우면 더 재밌을 것 같아서요! 괜찮죠, 형?”
“그럼, 당연하지.”
대공이 로넨과 함께 에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신사에게 가볍게 눈짓하자 그가 인사를 했다.
“오늘 수업을 맡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공자님. 잘 부탁드립니다.”
그의 인자한 미소를 올려다보던 로넨이 답했다.
“잘 부탁해요! 아, 그런데 에드와 함께 춤을 배우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신사가 시선을 들어 대공과 곁에 선 에드를 보며 답했다.
“물론 괜찮습니다. 혹시 두 분께서는 춤을 배워 보신 적이 있으실까요?”
로넨이 고개를 젓자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답했다.
“제가 두 분을 한꺼번에 가르쳐 드릴 수는 없으니 대공 전하께서 한 분을 맡아 주셔야 할 텐데요, 전하께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꽤 시간이 걸릴 터라…….”
근심이 섞인 그의 말에 대공이 대답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그렇다면 좋습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걸리는 점이 또 있는데요.”
그가 대공을 바라보았다.
“말하게.”
“두 분 모두 춤을 처음 배우신다고 하니 대공 전하와 제가 리드 받는 역할을 맡아야 할 것 같습니다.”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나는 상대방의 춤도 다 외우고 있으니.”
“그렇다면 좋습니다.”
신사가 로넨과 에드에게 자리를 짚어 주고 천천히 설명했다.
“북부의 사교 춤은 수도와 다르게 격정적이기보다는 정중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게 특징입니다. 그 때문에 춤의 속도도 다른 곳보다는 조금 느린 대신 정확하죠. 초보자이신 대공자님과 에드가 배우기에 딱 적합한 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모두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확인해 주시고요.”
로넨은 신사를 향해, 에드는 마주 선 대공과 함께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했다.
“네, 훌륭하십니다. 그다음은 대공자님, 먼저 이쪽으로 한 발 내미시고요…….”
이어지는 설명에 따라 가볍게 몸을 움직이다가 본격적으로 박자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하자 방에는 로넨의 목소리와 정처 없이 흔들리는 에드의 시선이 난무했다.
“앗! 죄송해요! 제가 또 발을……!”
“으앗! 괜찮으세요? 선생님? 이번엔 엄청 세게 밟은 것 같은데!”
“아앗…… 잠, 잠시 쉬었다가 할까요?”
* * *
수업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에드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춤을 추며 상대방의 호흡을 느낀다는 건 굉장히 묘한 기분이었다.
상대방의 발이 신경 쓰여 고개를 숙였다가도 제 손이 잡히거나 허리에 손길이 닿으면 다른 생각은 모두 정지, 오로지 대공의 얼굴만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에드는 조심한다고 하면서도 대공의 발을 쉴 새 없이 밟고 말았다.
로넨은 그런 에드를 보며 웃었지만, 자신도 파트너의 발을 밟는 일이 반복되자 이내 풀이 죽었다. 칭찬 세례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계속 의기소침해 있었을 것이다.
찬 바람에 얼굴을 식히며 길게 한숨을 내쉬자 옆에서 걷던 대공이 물었다.
“생각보다 움직임이 좋던데?”
“전하께서 잘 이끌어 주셔서 그나마 이 정도에서 끝났지, 그렇지 않았다면 전하의 발이 남아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대공의 그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래도 재미있지 않았어?”
“네, 즐거웠어요. 다음엔 전하께서 제게 발밑을 맡겨도 마음을 푹 놓을 수 있도록 열심히 춤을 익혀야겠다는 의욕도 샘솟았고요.”
“그거 기대되는데?”
목으로 작게 웃음을 삼킨 대공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듣다 보니 의문이 드는 게, 그 연습은 누구랑 하겠다는 거야? 묘하게 나를 빼놓고 말하는 것 같은데, 나 아닌 누구와 손을 잡겠다는 걸까?”
에드가 눈을 깜빡이다 피식 웃었다.
“전하께서는 공사다망하시니 혼자 수업에 들어가 배울 생각이에요.”
“혼자서 춤을 연습할 에드를 생각하면 내 속이 편치 않은데.”
“그림자를 파트너 삼아서 배우면 발을 밟을 염려하지를 않아도 되니 더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될 테고, 그럼 실력이 더 쑥쑥 늘지 않을까요?”
옅게 웃은 대공이 답했다.
“그럼 밤에는 반드시 에드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할게. 배움에는 복습이 필수잖아?”
에드는 가슴속에서 뭔가가 차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도 대공과 공유하는 것이 많았지만, 앞으로도 그와 자신 사이에서 이런 식의 새로운 기약이 생긴다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 일 줄 몰랐다.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오는 대공의 손을 마주 잡은 에드가 웃었다.
“제가 전하께 춤을 먼저 신청할 수 있는 실력이 되도록 열심히 배우고 노력할게요. 그러니 그 전에 절대 다른 분에게 파트너 자리를 내어 주셔선 안 됩니다.”
북부에 조금씩 봄기운이 스며들고, 춤 연습이 계속될수록 에드는 대공의 발을 밟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대공과 매일 밤 함께 하는 복습 덕이었다.
“에드, 오늘은 수업에 아주 집중한 모양이야. 더 연습할 필요가 없겠는데?”
“아닙니다, 전하께서 잘 리드해 주셔서 그런 것뿐인걸요. 아직 한참은 더 배워야 해요.”
“아니긴, 이렇게 잘하는데.”
몸의 변화도 생겼다.
‘배가 좀 나온 것 같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바라본 에드는 어느새 부푼 배를 보며 그 위를 살살 쓸어 보았다.
이렇게 쓰다듬으면 가끔씩 배 속에서 작은 물방울이 터지는 것 같은 감각이 느껴지곤 했는데 오늘은 잠잠했다.
‘편하게 쉬고 있나 보다.’
에드는 제 안에서 자리 잡고 있는 생명이 놀라지 않게 작게 숨을 내쉬며 외투를 껴입었다. 표는 나지 않았지만 넉넉한 옷을 챙겨입었다.
‘그나저나 아직은 괜찮지만 조금 더 배가 나오면 바지도 조금 더 큰 걸 입어야 하겠지?’
제 모습을 살펴보던 에드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새 옷을 마련한다고 치수를 잰 게 며칠 전인데, 이렇게 계속 배가 나오면 완성된 옷을 입어 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겠는걸.’
자신의 배를 보고 있자니 얼마 전에 대공과 치수를 재던 때 일이 생각 나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내 임신 사실을 주변에 알리지 않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그 누가 전하께서 직접 치수를 재주는 호사를 누려보겠어.’
목에 건 목걸이가 보이지 않는지 확인을 마치고 나서야 거울 앞을 떠난 에드는 벽난로 앞에 앉아서 수첩을 펼쳐 들었다.
페이지를 휘리릭 넘기자 대공의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낚싯대에 걸린 얼음 호수의 은빙어를 짊어지고 오는 씩씩한 아이야,
눈앞에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물푸레나무 아래에 몸을 기대 보렴.
어제 머리맡에서 들렸던 노래였다.
최근에 대공은 잠들기 전에 자신과 함께 침대에 누워 북부에서 전해지는 노래를 하나둘씩 불러 주었다.
그리고 그 가사를 다음 날 아침에 그가 적어 두면 에드는 그의 목소리를 상기하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여느 때처럼 북부의 전통 노래를 부르며 아침을 시작한 에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방문을 열기 전에 다시 한번 옷차림을 살펴본 후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무도회의 전야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그 때문에 북부 성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모두가 분주했다.
에드는 빠르게 눈길을 돌리다 제이논이 보이자 다가갔다.
“제이논, 일손을 거들 게 있다면 도울게요.”
“어, 에드. 그럼 이거 오늘 북부 성에 도착할 초청객들의 명단인데 텐스에게 전해 줘. 마차가 들어올 때 꼼꼼하게 확인하라고 하고.”
“알겠어요.”
“고마워.”
“고맙긴요, 요즘에 일을 많이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기만 한걸요.”
“아니야, 저번에 개편된 조직 체계 덕분에 일이 많이 수월해졌거든. 파티 때부터 지금까지 이미 충분히 도와준 셈이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
제이논이 덤덤하게 털어놓는 이야기에 에드는 볼을 긁적였다.
제이논이 피식 웃자 마침 지나가다 그 소리에 걸음을 멈춘 텐스가 그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말했다.
“나 빼고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해?”
“눈치 챙겨, 텐스. 재미난 이야기가 아니라 감동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니까.”
“제이논, 지금 감동이라고 말했어?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구야, 누구? 북부 성의 찬바람이라고 불리는 네 가슴을 녹인 사람이?”
“헛소리를 할 거면 그냥 저리 가라. 안 그래도 바빠 죽겠으니까.”
이에 텐스가 작게 웃으며 에드의 손에 들린 명단을 쏘옥 빼 갔다. 그리고 그 빈손에 명단 대신 작은 봉투를 내려놓았다.
“에드, 로넨 도련님께서 이걸 전해 주라고 하셨어. 꼭 에드 혼자 있을 때 봐야 한다고 그러시던데?”
“아, 고마워요.”
에드는 붉은색의 앙증맞은 봉투를 내려다보다가 작게 웃었다. 또 텐스와 뭔가를 만들다가 제 것을 챙겨 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