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이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어떡하긴, 이렇게 하면 되지.”
그가 자신의 허벅지에 저를 앉히며 단번에 자세를 바꾸자 에드는 소리 죽여 웃었다. 대공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 * *
로넨은 고민에 빠졌다. 테이블에 놓인 수첩을 앞뒤로 팔랑팔랑 넘기다 이내 펜을 탁, 내려놓았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로아야.”
소파에 길게 늘어진 여우가 귀를 쫑긋거렸다.
“가면으로 어떤 동물을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
입을 동그랗게 말아 살짝 내민 로넨이 소파 등받이에 등을 깊게 기댔다.
처음 맞는 북부의 가면무도회는 추운 겨울 동안 교류가 적었던 사람들이 한데 모이는 신나는 축제 같은 거라고 제이논이 말했다.
소파 아래로 다리를 가볍게 흔들던 로넨은 테이블에 널브러진 동화책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손이 가는 대로 페이지를 펼치자 작은 고양이가 앉아 있는 그림이 나왔다.
“로아야, 이것 봐! 귀엽지? 로아랑 닮은 것도 같고?”
로넨은 앞발에 고개를 묻고 작게 하품하는 로아의 눈앞에 책을 들이댔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서관을 왔다 갔다 하며 여러 가지 동물 그림들을 봤지만 아직 마땅히 이거다! 하는 걸 찾지 못했다.
“하지만 형이랑 같은 가면을 쓸 거니까 귀여운 건 좀 그렇겠지.”
책을 뒤로 휘리릭 넘겼다가 도로 앞으로 뒤적거린 로넨이 그림들을 내려보았다.
“가면에 맞춰서 옷을 만든다고 했으니까 얼른 결정해야 해.”
역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진 로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책들과 수첩을 옆구리에 낀 채 로아와 함께 방을 나섰다.
복도는 벌써 어둠이 내려앉아 서늘함마저 느껴졌지만, 옆에서 타박타박 소리를 내며 걷는 로아 덕에 무섭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로넨은 에드의 방 앞에 다다르자 방문에 귀를 대 보았다. 그 모습이 신기해 보였는지 로아도 주둥이를 방문에 들이댔다.
그 모습에 킥킥 웃은 로넨이 말했다.
“얼마 전에 에드가 아팠잖아?”
끼잉.
그 말을 알아들은 건지 로아가 작게 낑낑거렸다.
“그러니까 이렇게 방 안의 기척을 확인해봐야 해. 아직 다 낫지 않은 에드가 자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 그런데 로아야, 아무 소리가 안 나.”
정말 잠이 들었나?
귀를 쫑긋 세운 로넨이 고개를 갸웃하는데 로아가 흙을 파듯이 주둥이로 문틈을 마구 비비자 공교롭게도 문이 열렸다.
앗! 하고 놀란 로넨이 뒤로 물러났다가 살금살금 다가와 살짝 열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에드가 없어, 어디 갔지?”
눈동자를 굴리며 방 안을 구석구석 살펴본 로넨이 아! 하며 작게 말했다.
“혹시 형이랑 일하고 있는 걸까?”
‘그럼 방에 돌아갔다가 내일 아침에 다시 오는 게 좋겠지? 바쁠지도 모르니.’
하지만 곁에 있던 로아가 자신만 따라오라는 듯이 앞으로 몇 걸음 걷고는 그를 쳐다보자 마음이 바뀌었다.
“좋아! 가 보자!”
깡깡.
작게 대답한 로아가 앞서 걷자 로넨이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하지만 형의 집무실에도 에드가 보이지 않자 로넨은 고민에 잠겼다.
“혹시 식당에 간 걸까?”
요즘에 식사량이 많아진 에드를 떠올린 로넨은 몸을 빙글 돌렸다. 그에 질 새라 로아가 그의 뒤에 바짝 붙었다.
“마지막으로 식당만 확인해 보자.”
몸을 숙인 로넨이 소리 죽여 말하자 여우가 대답이라도 하듯이 그의 다리에 몸을 살살 비볐다.
그러나 로넨은 식당에서도 에드를 찾을 수 없었다. 고요한 밤의 북부 성을 조심조심 돌아다니던 로넨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터덜터덜 걷자 로아가 그의 바지를 입으로 물고 끌어당겼다.
“왜? 로아야. 이대로는 아쉬우니까 에드를 조금만 더 찾아보자고?”
제자리에서 뛴 로아가 다시 바짓단을 물자 잠시 망설였던 로넨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금만 더 찾아보는 거야!”
그렇게 시작된 수색은 응접실과 온실, 대공이 마련해 준 창고에까지 이르렀지만 에드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로넨이 고개를 갸웃했다.
‘밤이 늦었는데 어디 갔지?’
묵직한 창고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던 로넨은 어느새 들고 있던 책이 구겨진 걸 깨달았다.
‘도서관 책이라서 상하면 안 되는데.’
로아와 조심스레 창고로 들어선 그는 마침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을 찾았다.
“이거면 될 것 같아.”
많은 물건을 들고 다녀야 하는 여행객을 위한 주머니였다. 그를 집어 든 로넨이 책과 수첩을 챙겨 넣었다.
그리고 옆에 놓인 작은 마법 등을 손에 들고 주머니에 달린 끈을 어깨에 가로질러 맸다.
책이 들어 불룩해진 주머니를 가볍게 탁, 탁 쳐 정리한 로넨이 고개를 들고 저를 올려다보는 로아와 시선을 맞췄다.
“이제 다시 출발해 볼까?”
깡!
든든한 여우의 대답에 등을 한 번 쓸어 준 로넨이 창고를 나섰다.
“에드가 갈 만한 곳은 식당, 응접실, 온실, 창고, 세탁실, 연구실…….”
생각보다 많네…… 하고 중얼거린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로아와 눈을 마주쳤다.
“그래도 찾을 수 있어! 로아는 후각이 뛰어나고 나는…….”
잠시 말을 멈춘 로넨이 외쳤다.
“숨바꼭질을 잘하니까!”
정답이라는 듯이 로아가 깡! 하고 대답했다. 기분이 좋아진 로넨은 마법 등을 작게 흔들었다.
“어디를 먼저 가 보지? 에드가 방에 돌아왔을지도 모르니까 본성? 아니면 아직 안 가 본 외성?”
고민하며 걷는 로넨의 보폭에 맞춰 토독토독 움직이던 로아가 일순 멈췄다. 허공을 향해 고개를 들고 코를 킁킁거리더니 이내 빠르게 뛰어갔다.
“어? 로아야! 어디 가?”
마법 등으로 앞을 휘휘 밝히며 로넨이 이름을 부르자 성큼성큼 뛰어가던 로아가 멈춰 뒤를 돌아보았다.
“같이 가야지! 응?”
뽀얀 입김을 내뱉으며 따라오는 로넨을 확인한 여우가 작은 풀숲으로 몸을 쏘옥 숨겼다.
로아의 아리송한 행동에 고개를 갸웃하던 로넨은 고개를 들었다가 무언가 발견하고는 앗! 하고 눈을 깜빡였다.
누군가가 본성과 외성을 잇는 구름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누구지? 혹시 에드일까?’
로넨이 마법 등을 위로 한껏 들어 앞을 밝혔다. 다리를 건너는 사람이 에드라면 당장 뛰어가 계단을 오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작은 마법 등이 내뿜는 불빛은 거기까지 닿지 못했다. 결국 로넨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희미한 실루엣으로 상대를 가늠했다.
‘거리가 있어서 잘 안 보이긴 하지만 몸집이 에드보다 훨씬 큰 것 같은데.’
로넨이 자리에 멀뚱히 서서 그의 모습을 살피는데 그 순간, 풀숲에서 얼굴을 쏘옥 내민 로아가 바지를 물어 질질 끌어당겼다.
“아, 맞다.”
급박한 여우의 움직임에 로넨이 정신을 차렸다. 다른 사람이 이 모습을 본다면 이제까지 제가 조용조용히 움직인 보람이 없어져 버린다.
늦은 밤에 자신이 북부 성을 뒤지고 다니는 걸 누군가 본다면 그대로 방으로 돌아가야 할 수도 있었다.
〈야심한 시간에 안 주무시고 뭐 하세요? 도련님. 어서 방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에드요? 방에 없다면 북부 성 어딘가에는 있을 겁니다. 제가 찾아볼 테니 도련님께서는 걱정하지 마시고 방에서 편안한 밤을 보내세요.〉
그들과 마주치면 분명 그렇게 말할 거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로넨은 얼른 바닥에 몸을 숙였다. 마법 등도 껐다.
두근두근, 가슴이 터질 것 같이 뛰었다. 방금 전까지는 자신이 에드를 찾았는데 이제는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아까 마법 등을 괜히 흔들었나 봐. 그것 때문에 들키면 어쩌지?’
구름다리에 있던 사람이 자신을 못 보고 지나쳤으면 하는 바람으로 로넨은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을 본 모양인지 뚜벅뚜벅, 규칙적이고 단정한 발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로넨은 그가 자신을 찾지 못하기를 바라며 숨까지 꾸욱 참고 눈도 질끈 감았다.
“로넨, 여기서 뭐 해?”
하지만 별 소용은 없었는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로넨은 눈을 번쩍 떴다.
‘형이다!’
익숙한 음성이었다. 로넨이 고개를 들자 멀고 어두운 구름다리에 서 있을 때는 잘 보이지 않았던 대공이 눈앞에 있었다.
“형, 외성에 계셨어요?”
로넨이 풀숲에서 부스스 일어나며 물었다. 어느새 밖으로 나온 로아도 대공의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그래, 그런데 로넨은 왜 여기까지 나왔어? 밤도 늦었는데.”
“아, 그게요.”
대공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마법 등을 다시 켠 로넨은 눈을 크게 떴다.
형이 잠든 누군가를 품에 안고 있었다.
로넨은 살짝 보이는 금발과 옅은 숨소리에 그의 정체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에드예요?”
목소리를 낮춰 묻자 대공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