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58화 (158/198)

에드는 강해지고 싶었다. 이는 신체적인 힘만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대공에게 좋든 나쁘든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그의 손이 제게 활짝 펼쳐질 수 있기를 바랐다.

환호하며 하이 파이브를 하는 것도, 아쉬움에 맥없이 손바닥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도 모두 상관없었다. 그가 겪는 일 모두 자신과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으면 했다.

에드는 그런 강함을 바랐다. 대공이 저에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시선을 내리깔고 불을 바라보던 대공이 다시 이야기를 이어 갔다.

“결국 황도에서 벗어나 마물의 침입에 반쯤 무너진 북부에 처음 왔을 때는…… 눈에 보이는 곳마다 폐허였지. 이전에 북부를 지키던 성주는 마물의 습격에 목숨을 잃은 지 오래였어.”

“…….”

“끝없는 비극에 지친 북부민들을 다독이며 주인 잃은 성을 재건하는 동안 그런 일이 다신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고 부모님과 다짐했었지.”

에드는 대공의 말을 한 자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집중했다.

소설로 봤을 때는 고작 몇 줄로 추려졌던 그의 삶이 눈앞에 펼쳐졌다.

대공의 말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계속되었다. 부모님과 온실에서 가졌던 소중한 시간과 로넨이 태어났을 때 느꼈던 감정까지……에드는 다짐했다.

대공이 어떤 길을 가든 간에 잡은 이 손을 절대 놓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가 너무 무거워졌지?”

에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하의 몰랐던 모습을 새로 알게 되어서 기쁩니다.”

대공이 느슨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에드와 내가 부부라고 황제 폐하의 동의를 받는 일이 쉽지는 않을 거야.”

“…….”

“그래서 완벽한 환경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에드에게 청혼한 것이 마음이 쓰여.”

에드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완벽한 환경을 갖추지 못했다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에드의 너스레에 대공이 말없이 웃었다.

“이렇게 멋들어진 성채, 그에 맞물려 빈틈없이 돌아가는 체계, 게다가 전하께서 최근 개편하시어 더 촘촘해진 조직체제를 떠올려 보세요. 모두가 감탄을 금치 못했잖아요?”

“…….”

“적재적소에 배치된 훌륭한 인재는 물론이거니와 빈틈없는 국방력. 그것뿐만 아니라 풍족한 경제력과 문화, 외교력까지…… 북부가 이렇게 강력한 힘을 유지할 수 있는 건 폐허였던 북부 성을 재건하는데 그치지 않고 더 나은 북부를 위해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하셨던 전하의 공이라고 생각해요.”

에드가 불쏘시개로 벽난로 안을 뒤적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그런 전하의 진정성을 언젠가는 폐하께서도 알아주실 겁니다. 그러니 저는 지금 이 상황이 결코 불완전한 환경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대공이 포근한 미소를 짓자 에드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만약 전하께서 북부를 다스리지 않았더라면, 제국의 형태도 지금처럼 완전한 모습을 유지하지 못했을 걸요.”

불경한 말이라고 벌을 받아도 상관없었다. 틀림없는 진실이었으니까.

에드는 대공을 외면하는 황제가 답답할 뿐이었다.

‘사실 전하께서 너무 뛰어나 두려움에 배척하려는 거겠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란 무릇 전체를 내다보고 아우르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고집과 오만함에 매몰된 지금의 황제는 생떼만 쓰고 있었다.

‘그가 편협한 사고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전하께서도 그런 역경을 겪는 일은 없었을 테고.’

안타까움에 작게 한숨을 내쉰 에드는 입 앞에 다가온 감자에 고개를 들었다. 대공이 따뜻한 감자를 꼬치에 꿰어 그의 입 앞에 대 주었다.

감자를 한 입 베어 문 에드가 꼬치를 손에 쥐고 물을 마셨다. 그리고 대공이 신발을 벗긴 제 왼쪽 발을 그의 허벅지에 올리는 걸 지켜보았다.

“지루한 이야기였지?”

“아뇨, 전하께서 해 주시는 이야기는 모두 귀에 쏙쏙 박혀서 따분할 틈이 없습니다.”

“에드가 그렇게 말해 주니 힘이 나.”

옅게 웃은 대공이 에드의 발을 가볍게 주물렀다. 부드럽게 몸을 이완시키는 마법 같은 손놀림에 에드는 몸을 살짝 돌려 소파 팔걸이에 등을 기대앉았다.

“몸이 훨씬 편안해진 것 같아요.”

“좋아?”

“네, 그럼요.”

“그럼 앞으로 할 이야기도 이렇게 개운했으면 좋겠는데.”

에드는 뒤로 나른하게 늘어졌던 몸을 앞으로 세우며 대공을 바라보았다. 대공이 에드의 발목을 가볍게 돌렸다.

“옌과 상의하니 다음 달쯤이면 에드도 마차로 장거리 여행을 하는 게 가능할 것 같다고 해.”

“마차로 장거리 여행이요?”

대공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서 말인데, 가면무도회를 마치고 나면 우리 함께 대신전에 가는 건 어떨까?”

“대신전이라면…….”

에드는 눈치챘다. 지금 하려는 말을 꺼내기 위해서 그가 앞선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에드와 내가 부부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황제 폐하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했잖아. 그러나 내 일이라면 조그마한 일도 꼬투리로 잡아서 공격하시는 분이니 긍정적인 답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지.”

“…….”

“그러나 폐하께서 승인하지 않는다고 해도 대신전에서 나와 에드가 함께 축복을 받고 성혼서약을 하면 부부에 준하는 사이로 인정받을 수 있어.”

에드는 대공의 설명에 집중했다.

“성혼서약을 맺고 나면 아무리 강력한 황제라도 하더라도 함부로 둘을 무시할 수 없거든. 물론…….”

잠시 말을 멈춘 대공이 에드의 무릎을 세워 종아리를 살살 눌러 올라갔다.

“그럼에도 폐하라면 우리 사이를 갈라 놓으려고 애쓰시겠지만, 나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거야.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감히 에드에게 가짜 대공비라고 말할 수 없게 할 거거든. 그것도 내가 직접.”

대공이 에드의 왼발을 자신에게로 쭈욱 끌어당기며 몸을 숙였다. 자신을 직시하는 푸른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 에드, 오르기 힘든 길이긴 하지만 느리더라도 나와 함께 걸음을 떼어 줘.”

대공이 끌어당기는 힘에 스륵 끌려간 에드는 제 뒤통수를 받치는 손길을 느끼곤 슬쩍 웃었다.

이어 바닥으로 늘어진 제 오른쪽 다리를 잡은 대공이 그의 허리에 두르듯이 놓자 에드가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함께 걸음을 떼자면서 이 손은 또 뭘까요?”

“걸을 땐 손과 발이 같이 움직이니까.”

“그렇지 않아요, 저는 두 팔을 몸에 딱 붙여 고정하고도 잘 걸을 수 있으니까요.”

대공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니까 이건 분명히 반칙인데 말이죠. 반칙을 당했을 땐 눈 돌리지 말고 정당하게 항의하고 그에 따라오는 결과에는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고 하던데…….”

“그렇게 좋은 말은 누가 또 알려 줬지?”

에드는 씨익 웃으며 대공의 목에 양팔을 걸어 감싸 제게로 끌어당겼다.

“그런데 그런 명언도 전하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전하께서 하시는 거라면 나쁘지 않으니까요.”

“나쁘지 않다? 나는 에드의 마음에 쏙 들었으면 좋겠는데.”

에드는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대공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혹시 전하께서 나 때문에 어려운 길을 걸어가야 하는 건 아닐까?’

말이 없어진 에드를 내려다보던 대공이 고개를 숙였다. 장난스럽게 턱을 잘근거리며 무는 입술과 이에 에드는 대공의 뒷머리를 가볍게 헤집었다.

‘전하께서도 어렸을 땐 로넨처럼 호기심이 많고 귀여우셨겠지?’

부모에게 어리광을 부릴 나이에 고단한 자리에 홀로 올라 북부를 지키느라 분투했을 그를 떠올리자 안타까운 한편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전하께서 많이 힘들었을 때 내가 곁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헤린스 백작 저에서 처음 본 그의 모습이 워낙 강렬해서 과연 그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을까? 싶긴 하지만…… 아픔을 숨기는 게 일상이 되기까지 자신을 얼마나 단련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아렸다.

“음, 반응이 미지근한 걸 보면 이 정도로는 만족이 안 된다는 거지?”

턱을 지분거리던 입술이 입으로 올라오자 에드는 작게 웃었다. 입술을 이로 깨무는 행동에는 대공의 머리를 짚은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이 행동에 아까 과거를 이야기하며 옅은 긴장감마저 돌았던 분위기가 단번에 희석되었다.

그건 황제가 엮인 주제를 벗어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일이 닥쳐도 대공이 항상 저와 함께 할 것을 알기에 두렵지 않아진 것에 가까웠다.

믿음직하고 건실한 대공이었다.

그래서 에드는 그의 결정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고, 그가 그의 꿈을 자신과 공유한다면 언제든 넙죽 올라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이 황제와 척을 졌다고 하면 온갖 근심에 대책을 세우느라 미간이 찌푸려졌겠지만.’

에드가 입을 벌리자 대공의 입매가 올라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참, 이상하지. 그와 함께 할 때는 묘한 자신감이 솟았다.

다 잘 될 거라는.

그래, 모든 게 다 잘 될 거라는.

그리고 이것도 기이했다. 듣기 좋은 노래도 자꾸 하면 질린다던데 대공과 이렇게 맞닿아 사랑을 속삭이는 일은 해도 해도 질리지 않았다.

한참 만에 입술을 뗀 대공이 고개를 들었다.

“생각 같아서는 가면무도회에서 에드가 나와 어떤 사이인지 알리고 싶지만.”

잠시 말을 멈춘 그가 에드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에드의 존재를 드러내 봐야 다른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안줏거리밖에 되지 않겠지.”

양 머리 두건은 이미 어딘가로 날아가 보이지 않았다. 에드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기며 대공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건 내 생각이고 이 일에는 어디까지나 에드의 의견이 중요해. 에드가 사람들 앞에서 우리 사이를 밝히고 싶다고 한다면.”

“…….”

“기꺼이 밝은 빛 속으로 모셔야지.”

다시 고개를 숙인 그가 턱을 가볍게 깨물자 에드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이러다 자국이 남으면 어떡하지?’

최근에 대공은 제게 흔적을 남기곤 했다. 이성과 합리의 저울을 잘 맞추는 그가 제 앞에서는 짙은 욕망이 드리워진 소유욕을 드러내니 에드는 그게 무척 신기하고 놀라웠다.

에드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저는 지금 그런 생각은 안중에도 없고 이 비좁은 소파에서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만 드는데, 어떡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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