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57화 (157/198)

연구실로 다시 내려온 대공은 에드를 의자에 앉히고 벽난로를 살폈다. 손에 장갑을 끼고 군불에 잘 익은 감자를 꺼내는 손길이 여유롭고 노련했다.

“이걸 미리 준비해 두셨어요?”

김이 나는 감자 그릇이 테이블에 놓이자 에드가 입바람을 후후 불어 식히며 물었다.

“오늘따라 에드와 연구실에서 간식으로 먹었던 감자가 생각나잖아. 그래서 에드가 오기 전에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지.”

대공이 껍질을 반쯤 깐 감자를 꼬치에 찍어 에드에게 건넸다.

“아직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네.”

대공의 시선이 뜨거운 감자를 조심스레 베어 먹는 에드의 얼굴에 머물렀다.

“어때? 맛있어?”

“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북부 감자는 정말 포슬포슬한 식감이네요. 다른 지방의 감자와 달리 정말 달고 맛있어요.”

“그리고.”

“그리고요?”

“이왕 입에 칭찬을 담았으니 거기서 그치지 말고 더 풀어 꺼내 줘.”

에드가 감자 껍질을 까며 답했다.

“음, 그럼……. 전하께서 손수 구워 주셔서인가, 그렇지 않아도 맛있는 감자가 정말 꿀맛이에요.”

하하, 작게 웃은 대공이 에드의 맞은편에 앉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내가 졸라서 그런 평을 해 주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맛있다고 하니 기분은 좋군.”

“어, 아닌데요. 진심으로 맛있어서 그렇게 말한 거예요.”

에드가 감자를 크게 물어 씹어 삼키자 대공이 물잔을 건넸다.

“에드가 그렇다면 또바기도 맛있어 한다는 뜻이겠지?”

“물론이죠.”

“그럼 이 감자가 내 입에도 맞으면 우리 셋의 입맛이 똑같다는 것이겠군.”

대공이 에드의 손목을 붙잡고 그가 들고 있던 감자를 크게 베어 물었다. 반쯤 남았던 감자가 어느새 거의 사라졌다.

부드러운 감자를 씹어 삼킨 대공이 입매를 살짝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다시 에드의 손을 붙들고 남은 감자를 모두 먹어 치웠다.

에드가 대공의 기색을 살피며 물었다.

“어떠세요? 전하의 맛 평가도 듣고 싶어요.”

대공이 작게 웃으며 에드의 손가락에 묻은 감자의 잔해를 부드럽게 핥았다.

“응, 정말 맛있네.”

에드는 간지러운 손끝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전하와 제 입맛이 잘 맞는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입맛이 다르면 감정의 벽이 생길 수도 있다고 했거든요.”

“감정의 벽?”

“네, 맵고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과 싱겁고 순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 둘이 교제하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도 생겨서…… 아.”

가볍게 손가락을 핥던 입술이 손바닥을 타고 내려오자 에드의 발가락이 움츠러들었다.

“에드가 매운 걸 좋아했었지? 그럼 싱거운 걸 좋아하는 놈은 누구였을까?”

“……네?”

“그 인생의 진리를 몸소 가르쳐 준 상대방에 대해 묻는 거야.”

말의 의도를 파악하던 에드는 가늘어진 대공의 눈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질투……는 아니겠지?’

에이, 설마 하면서도 손을 깨무는 감촉에 어깨를 살짝 떤 에드가 물었다.

“혹시 그런 상대방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글쎄, 아직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어쩐지 위험한 미소가 퍼지는 대공의 얼굴에 에드가 불길함을 느끼고는 재빨리 대답했다.

“책이요, 책에서 봤어요.”

그러자 손끝을 잘근거리며 깨물던 대공의 턱에 힘이 빠지며 부드러운 입술이 손을 타고 내려왔다.

‘전하께 이런 면모도 있었다니.’

그의 이런 모습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린 에드는 점점 더 농밀해지는 애무에 숨을 크게 들이켰다.

방을 나서기 전에도 자신의 온몸 곳곳에 맞닿았던 입술이건만, 매번 닿을 때마다 이렇게 또 다른 감각이 퍼지는 게 신기하고 생경했다.

아찔한 자극에 녹아버린 에드는 손을 타고 올라오던 대공의 입술이 소매를 슬쩍 걷고 손목 안쪽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여기서 조금 더 진도를 나가도 되려나?”

대공의 물음에 에드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하루 한 번의 자극만으로도 온몸에 전기가 오르는 것 같이 찌릿찌릿한데 여기서 일을 치렀다간 과부하로 몸이 터져 나갈지도 몰랐다.

에드를 응시한 대공이 붉은 입술에 입을 맞췄다. 짧고 간결한 버드 키스였다. 그러나 그가 고개를 뒤로 물리자 떨어지려는 입술에 아쉬움을 느낀 에드가 대공의 입술을 물었다.

대공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웃으며 얌전히 입술을 내주었다.

멀어지려다 도로 다가와 포개어지듯 들러붙은 입술을 쪽 빤 에드가 아, 하며 입을 떼자 대공의 눈가가 휘어졌다.

“말과 행동이 다른데?”

흠흠, 작게 목을 가다듬은 에드가 답했다.

“……가끔은 이렇게 예측 불허한 상황이 생기면 유쾌하지 않을까요?”

아까 대공이 언급한 말을 떠올린 에드는 그냥 이대로 넘어갔으면, 하고 바라며 대꾸했다.

“그야 그렇지, 그렇다면.”

하지만 에드의 바람과 달리 대공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모양 좋은 입술이 열기가 가시지 않은 입에 닿으며 다시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아.”

깊고 질척한 키스였다. 온몸을 달구는 저릿함에 에드의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촘촘하게 맞닿은 입술 사이로 간신히 숨을 내쉬자 대공이 얼굴을 살짝 틀었다.

내리깐 시야에 들어오는 에드의 몽롱한 표정에 대공이 딱 맞물려 있던 입술을 느리게 떼어 냈다.

“이런 불가피한 경우도 즐거울 것 같지?”

대공이 열 오른 에드의 귀를 가볍게 만지작거리며 묻자 에드가 옅게 웃었다. 나른한 그 미소를 주시한 대공이 말을 이었다.

“참, 아까 그림을 유심히 보던데.”

“아, 그건…….”

“아, 그건…….”

길게 숨을 내쉰 에드가 시원한 물로 목을 축였다. 긴 입맞춤의 후유증으로 갈증이 일었다.

그의 느릿한 대답에 귀에서 손을 뗀 대공이 에드의 잔에 물을 더 따랐다.

에드는 물을 한 모금 더 마시며 옷에 가려진 목걸이를 더듬거렸다.

“결혼식 그림에서 멜라 님이 하고 계시던 목걸이가 이 목걸이와 비슷한 것 같아서요.”

“아버지께서 청혼할 때 마련했던 목걸이와 결혼식을 위해 준비했던 목걸이는 다르지만 모양이 거의 흡사하거든.”

“아, 그랬군요. 그래서 눈에 익었나 봐요. 그런데…… 그림을 보다 보니 생각이 났어요. 제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림 속의 루비 목걸이가 황궁에서 봤던 그 가짜 아이가 차고 있던 목걸이와 무척 비슷해요.”

대공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황제 폐하께서 만든 가짜 목걸이였어.”

“…….”

“내가 로넨과 헤어질 때 목에 걸어 준 것은 동생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께서 어머니께 선물로 주신 거였거든. 이것들과는 달라.”

“그렇다는 것은…….”

“폐하께서 모조품을 만들어 계략을 짠 거야. 내가 로넨이 지냈던 고아원에 가짜 정보를 흘렸었는데, 그걸 문 거지.”

에드는 대공이 차분하게 풀어내는 이야기에 숨을 죽였다.

“어머니께서 결혼식 때 하셨던 목걸이는 내가 가지고 있는데 말이야.”

에드가 잔에 물을 더 채우자 대공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불을 살피는 것을 보며 에드는 벽난로 앞의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감자와 물이 넉넉하니 벽난로의 불만 꺼지지 않는다면 밤새 대화를 나눠도 괜찮을 것 같아요.”

이야기가 길어져도 자리를 뜨지 않고 집중하겠다는 의미였다.

에드의 어깨에 모포를 둘러 준 대공이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아 벽난로에 장작을 더 넣었다.

“선 황제께서는 어머니와 사이가 좋으셨다고 해. 아니, 좋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지도 모르겠어.”

에드는 느린 파도처럼 일렁이는 벽난로의 불길에 음영이 드리워지는 대공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그런데 현 황제께서는 각별했던 두 분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야.”

타닥타닥, 작은 불똥을 튀기며 타는 장작을 한동안 바라보던 대공이 몸을 일으켰다.

“선 황제께서 승하하시자마자 적개심을 드러냈거든.”

“…….”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께서 이미 모든 정쟁에서 등을 돌렸음에도 여전히 이쪽을 지지하는 세력들과 합심한 내가 자신의 지위를 노릴까 봐 무서워했던 것 같아. 나는 세대 중에서 용의 힘을 가장 진하게 타고났다는 평가를 받았으니까.”

대공이 말을 멈추자 온 사방이 고요해졌다. 이따금씩 들려 오는 장작 타는 소리만이 그 조용함을 갈랐다.

에드는 그의 속내를 완벽하게 읽어 낼 수 없었다.

황실을 위해 수많은 땀과 피를 흘렸지만 결국 날 선 증오에 부모님을 잃고 만 그가 느꼈을 참담함과 슬픔의 깊이를 제가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그렇기에 멋지고 놀라웠다.

그런 풍랑을 겪고도 지금까지 북부 성을 굳건히 지켜 온 대공의 우직함과 기개가.

‘나였다면 괴로움에 짓눌려 모든 것을 다 포기했을지도 몰라.’

에드는 말없이 대공의 손을 잡았다. 속에서 솟구치는 많은 감정들을 내리누르고 있을 그에게 완벽한 위안을 주진 못하더라도, 잠깐 숨을 돌릴 수 있는 위로 정도는 되고 싶었다.

에드는 대공이 한 말을 떠올렸다.

〈이 사람이 제가 홀로 짊어지고 있던 짐을 같이 들어 줄 사람이라는 걸요.〉

그가 말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자신에게 기댈 줄도 알았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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