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55화 (155/198)

한결 얼굴이 밝아진 로넨을 살핀 에드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런 염려는 내려놓으시고 천천히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대공 전하와 같은 가면을 쓰고 싶은지, 아닌지요.”

“알았어! 에드.”

“그리고 가면 모양을 결정하는 게 어렵다고 느껴지시면 텐스나 제이논, 아니면 저에게 물어보세요. 그럼 저희가 도련님의 고민을 덜어 드릴 수 있을 거예요.”

“응, 정말 고마워!”

생기 넘치는 로넨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에드는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마침 제가 도련님께 보여 드릴 게 있는데요, 시간 괜찮으신가요?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닙니다.”

“당연히 되지!”

에드의 뒤를 졸졸 따라 방으로 들어온 로넨이 의자에 앉았다. 뒤따라 들어온 텐스도 그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자 에드는 서랍에서 수건을 몇 장 꺼내 왔다.

“이걸로 뭘 할 건데?”

“잠시만요, 도련님.”

로넨의 맞은편에 앉은 에드가 수건을 가로로 3등분을 해서 접은 후 끝을 돌돌돌 접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는 게 맞던가?’

어렴풋하게 기억이 나는 대로 손을 놀리자 어설프긴 해도 양 머리 모양의 수건이 완성되었다.

에드의 손에서 뭐가 만들어지나 신기하게 바라보던 로넨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게 뭔데?”

“도련님의 머리에 이걸 씌워 봐도 될까요?”

로넨이 고개를 끄덕이자 에드는 그의 머리에 조심스레 수건을 올려 정리했다.

머리에 뭔가가 잘 들어맞게 손질되는 느낌에 로넨은 숨까지 참으며 차분히 기다렸다. 에드가 앞머리를 정리한 뒤 손을 물리자 로넨이 제 머리를 더듬더듬 짚어 보았다.

“이거 모자야?”

에드가 대답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로넨이 뽀르르 달려갔다. 그러곤 벽에 걸린 거울에 자신을 비춰 봤다.

“별 건 아니고요,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모자를 만들 수도 있다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신기해하는 로넨에게 답하던 에드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어떻게 한 거야, 에드? 수건을 몇 번 돌돌 접은 걸로 이렇게 귀여운 모자가 만들어지다니!”

허공에서 손가락을 놀리며 손짓하던 로넨이 빠르게 자리로 돌아오더니 테이블에 놓인 수건을 집어 들었다. 마치 별이 깃든 것처럼 에드를 바라보는 시선이 반짝거렸다.

에드는 정말 간단하게 만든 소품으로도 이렇게 즐거워하는 로넨의 모습에 뿌듯해졌다.

“마음에 드세요?”

“진짜 귀엽고 예뻐. 그러니까 만드는 법을 알려 줘. 나도 배우고 싶어!”

텐스에게도 수건을 쥐여 준 로넨이 조바심을 냈다. 에드는 몰려든 로넨과 텐스의 시선에 긴장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요.”

텐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긴. 너무 신기해서 혼이 쏘옥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는데?”

에드는 그가 이미 만드는 법을 알아챘음에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 얼른 다시 해 봐, 에드.”

로넨의 성화에 에드는 수건을 쫙쫙 펴며 다시 모자 만들 준비를 했다. 그를 따라 로넨도 작은 손을 연신 이리저리 움직이며 에드를 따라 했다.

“됐다, 에드!”

로넨이 완성된 양 머리 모자를 번쩍 들고 신기해하다가 에드의 머리에 씌웠다.

그리고 그걸로 끝나지 않고 수건을 몇 개 더 접더니 텐스에게도, 심부름을 온 제이논의 머리에도 양 머리를 얹었다.

이윽고는 양손에 모자를 챙겨 세나와 지오에게도 선물을 내미는 그 덕분에 북부 성은 순식간에 양 떼 목장이 되었다.

처음엔 단순한 재미로 시작했는데 점점 늘어나는 양들의 숫자에 복도를 내다보던 에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텐스와 마음이 맞아 수건이 아니라 오색찬란한 천으로 소재를 바꾼 로넨이 북부 성의 사용인들을 알록달록한 양으로 탈바꿈시키고 있었다.

‘내가 괜한 일을 한 건 아닐까?’

에드는 제 머리에도 올려졌던 양 머리를 상기하며 방문을 닫다가 놀랐다.

“어?”

톡, 톡

창밖에서 유리를 부리로 쪼는 작은 새가 보였다. 그가 창가로 빠르게 다가가자 또다시 새가 창문을 콕, 콕 두드렸다.

‘문을 열어 달라는 거지?’

창문을 열자 방으로 날아든 새를 에드는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방을 빙글빙글 돌다가 혹시나 하고 내민 에드의 팔 위에 새가 당당하게 앉았다.

“어디서 온 친구야?”

에드는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새를 살피다가 발에 달린 죽통을 발견했다.

‘……혹시 전하께서 보내신 건가?’

죽통을 떼는 동안에도 얌전한 새를 가볍게 쓰다듬은 에드는 그 안에 든 쪽지를 확인했다.

에드, 오랜만에 연구실에서 감자를 구워 먹으면 어떨까?

비밀 연애의 묘미가 이런 걸까?

무슨 큰 트릭이 숨겨진 편지도 아닌데 에드는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그는 대공과 마음이 통한 이후로 매일 매일이 즐겁고 새로웠다.

전에는 뭔가를 배우고 북부 성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며 적응해 가는 것에 재미를 느꼈다면, 최근에는 조금 다른 방식의 삶과 설렘이 자신을 통째로 뒤흔들었다.

대공 아스넬 린든.

그와 함께하는 순간순간마다 행복이 차올랐고 유쾌함이 통통 튀어 올랐다. 대공과 닿아 있을 때뿐만 아니라 떨어져 있을 때도 그를 떠올리면 온갖 달콤한 상상이 머릿속을 장악했다.

에드는 펜을 꾹꾹 눌러 답장을 썼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새가 놀라지 않게 주의하며 다리에 죽통을 매단 에드가 창밖으로 팔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 올라타 주위를 살피던 새가 힘차게 날아갔다.

외성으로 날갯짓을 하는 녀석을 확인한 그는 목에 걸린 목걸이를 혹시라도 누가 볼까 봐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방을 나섰다.

발걸음은 가벼웠고, 대공을 만나겠다는 생각에 가슴은 들떴다.

그리고 연구실 문을 열었을 때 에드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전하, 그건.”

대공의 손에 들린 양 머리 모자를 보면서.

“로넨이 주던데. 에드가 만드는 방법을 알려 줬다면서.”

“로넨 도련님께 그걸 씌워 드릴 때까지만 해도 일이 이렇게 커질 줄 정말 몰랐습니다.”

에드가 항복하듯이 양손을 들어 사정을 설명하자 대공이 입가로 천천히 미소가 번져 나갔다.

“로넨의 머리엔 이미 올려 줬단 말이지?”

그러더니 에드의 손에 모자를 건넸다.

‘이걸 어떻게 하라는 거지?’

에드가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는 사이 난로 앞에 자리를 잡은 대공이 그를 잡아끌었다. 그러곤 바짝 붙은 늘씬한 몸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게도 씌워 줘야지.”

“…….”

“에드의 손으로 나에게 왕관을.”

“왕관이라뇨.”

그냥 재미 삼아서 접은 것뿐인데요…… 하면서도 에드는 제게 닿은 대공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겼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에 감기는 느낌을 즐기던 그는 마치 존경하는 주군의 손등에 키스하는 기사처럼 검은 머리카락을 손바닥에 올려 입을 맞췄다.

온유한 햇살이 창으로 쏟아져 내리는 한낮, 고개를 든 에드는 대공의 손에서 양 머리 모자를 넘겨받았다.

그런 뒤 이를 조심스레 머리에 올려 손을 놀렸다. 자신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는 다정한 손길에 대공은 웃었고, 에드는 몸을 숙이며 속삭였다.

“다음엔 제가 만든 것으로 전하의 머리를 단장해 드리겠습니다.”

대공이 에드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이어 허벅지에 그를 앉히고 정수리에 턱을 기대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래, 기대할게. 에드.”

대공은 격무에 시달려 굳은 몸이 그와 닿을 때면 부드럽게 이완되는 것을 느꼈다. 가만히 에드를 껴안은 채 그대로 눈을 감은 대공이 물었다.

“오늘 점심 식사는 어땠어? 메뉴는 마음에 들었고? 속이 안 좋진 않았어?”

“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특히나 샐러드가 맛있어서 그릇을 싹싹 비웠어요. 주방장님은 천재 요리사임이 틀림없어요.”

대공의 품에 안긴 에드가 성심성의껏 답했다.

북부 성의 주인인 대공은 할 일이 많았다. 안 그래도 바쁜 그를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던 에드는 임신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이려고 했다.

에드는 가늘고 긴 대공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참, 오랜만에 로아를 봤는데 뱃살이 빠지고 털 색이 변했더라고요. 한겨울엔 하얀색 털이 올라와서 신기했는데 지금은 회갈색으로 바뀌니 신기했어요.”

대공이 느릿하게 눈을 떴다.

“살이 빠진 건 요즘 로넨이 훈련 삼아서 뒷동산에 오를 때 함께 해서 그런 걸 거야. 털 색이 변하는 건 겨울을 나기 위해 눈과 비슷한 보호색을 드러냈다가 이제는 겨울이 지나가니 제 색을 찾는 것일 테고.”

“아, 그럼 로아에게도 봄이 찾아오고 있는 거군요.”

에드의 귀여운 답에 대공이 작게 웃으며 동그란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뗐다.

살가운 그 행동에 에드가 이마를 가볍게 손으로 긁적였다. 그러자 대공이 이마를 가린 손등에도, 곧게 뻗은 콧대에도, 매끈한 뺨에도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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