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53화 (153/198)
  • 어쩐지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활기차 보이는 은빛 늑대의 모습에 에드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대공 전하께서 이제 아프지 않으신 것과 연관이 있는 거겠지?’

    그때 대공의 손에서 또 다른 빛이 떠올랐다. 에드가 아란에게서 시선을 떼자 순식간에 환한 빛무리가 대공과 그의 주변을 둘러쌌다.

    금빛 테두리가 반짝이는 결계였다.

    처음에 균열의 틈에 들어갔을 때도 느꼈지만 대공의 마법은 언제 봐도 아름다웠다. 반짝이는 빛을 보며 감탄하는 동시에 에드는 의문을 떠올렸다.

    ‘그런데 전하께서 왜 결계를 치신 걸까?’

    아란이 꼬리를 살랑이며 둥글게 쳐진 결계 주변부를 신나게 돌아다녔다. 그러다 대공이 가볍게 손짓하자 곁에 있는 높은 나무를 탁탁탁 올라탄 은빛 늑대가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와아.”

    그런 아란을 시선으로 쫓던 에드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어느새 입에 마법 구를 머금은 아란이 허공에서 그걸 터트리며 화려한 마법을 수놓았다.

    마치 하늘에서 유성우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허공에서 확 터졌다가 결계 밖으로 통통통 내리 떨어지는 빛의 결정체들을 홀린 듯이 바라보던 에드는 다시 허공으로 뛰어오르는 아란을 올려다보았다.

    대공은 결계 가까이에 다가가 신기해하는 에드를 보면서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와 함께 한 이후로 점점 좋아진 몸은 더 이상 부작용에도, 폭주에 대한 악몽에도 시달리지 않았다.

    에드의 곁에 다가간 대공이 그의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 넘겼다.

    “에드.”

    “…….”

    그리고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너는 내게 기적, 그 자체야.”

    그 순간, 어두운 허공으로 빛이 팍 튀어 올랐다가 결계로 내리 떨어졌다. 허공을 달리듯이 노닐던 아란이 또다시 마법 구를 깨트린 것이었다.

    얼마나 힘이 넘치는지 마법 구를 하나 더 만들어 내는 아란을 본 대공이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란, 이제 그만해도 괜찮아.”

    그러나 아란은 듣지 못했다는 듯이 결계 아래로 다시 빛을 떨어뜨렸다.

    결국 대공은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를 둔 것 같은 보호자의 모습으로 어깨를 늘어트리며 에드에게 하소연했다.

    “요즘 아란이 힘이 부쩍 늘어서 그런지 옛날과 다르게 내 말을 잘 안 들어.”

    “혹시 아란도 사춘기가 온 것 아닐까요?”

    에드가 작게 웃으며 대답하자 대공이 그게 아니라며 실상을 짚어 주었다.

    “녀석이 에드를 너무 좋아해서 그래. 위에서 빛이 떨어질 때마다 에드의 눈이 정말 반짝반짝 빛이 나니까.”

    “그래서 아란 때문에 서운하십니까?”

    “서운하기보다는, 에드가 참 빛나는 사람이구나 하고 새삼 느끼게 돼. 아란도, 북부 성의 사람들도, 이 산에 머무는 이들도 모두 에드를 좋아하는 게 보이니까.”

    에드가 대공의 등에 팔을 둘러 껴안으며 말했다.

    “그래도 저에게는 대공 전하가 세상에서 제일 빛나 보입니다.”

    그 순간 대공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꺼움을 느꼈다. 에드의 두 눈에 오롯이 담긴 애정과 경애에 그의 이마 위로 입술을 내리눌렀다. 정중한 키스였다.

    “……아.”

    그를 달게 받던 에드가 얼굴을 타고 내려오는 대공의 입술에 껴안은 몸을 작게 두드리며 만류했다.

    어느새 바닥으로 내려선 아란이 자신도 놀아 달라고 꼬리를 살랑이며 결계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지만, 에드와 대공은 서로에게 신경을 쏟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으응…….”

    대공이 에드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고개를 살짝 틀었다. 부드럽게 빨고 물었던 혀를 혀로 세차게 감으며 얽었다.

    갑작스러운 변주에 에드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뜨겁고 얼얼한 감각에 허리가 움찔움찔 떨렸다.

    한참 후에서야 입술이 떨어지고, 에드는 온몸에 잔물결처럼 남은 여운을 느끼다가 말했다.

    “……야외에서는 이러면 안 되는데 말이죠.”

    대공이 옅게 웃으며 에드의 이마에 키스했다.

    “괜찮아, 아란이 보초를 잘 서고 있으니까.”

    에드는 웃으며 대공의 품에서 떨어졌다. 서로 얼마나 꼭 붙어 있었는지 온몸이 후끈후끈한 느낌이었다.

    에드를 내려다보던 대공은 품에서 보석 케이스를 꺼내 열었다.

    “이건 아버지가 어머니께 청혼할 때 선물하셨던 건데.”

    입을 활짝 벌린 보석 케이스에는 붉은 루비가 박힌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내게 좋은 인연이 생기면 전해 주라며 물려주셨어.”

    대공이 목걸이 줄을 정리하며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그런데 그때 아버지가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알아, 에드?”

    에드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상대방에게 목걸이를 걸어 줄 때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아스넬.”

    “…….”

    “그렇지 않으면 일생일대의 마음을 먹고 한 청혼이 엉망이 될 수도 있거든.”

    에드는 대공이 솜씨 좋게 목걸이의 고리를 푸는 것을 응시했다.

    “처음엔 그게 무슨 말일지 잘 알지 못했는데.”

    대공이 에드를 내려다보며 이리저리 가늠했다.

    “이제야 이해가 되네. 손이 떨려서 목걸이 고리를 푸는 일조차 쉽지 않아.”

    “…….”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어머니의 목에 목걸이를 걸 때 너무 긴장한 나머지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고 하셨거든. 시선은 어디에 둬야 할지, 손은 또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으셨다면서 말이야.”

    “목걸이는 한 번에 잘 거셨나요?”

    “아니, 너무 떨려서 손이 몇 번이나 미끄러지는 바람에 결국 어머니께서 스스로 목걸이를 하셨지.”

    “하하, 그렇다면 더 기억에 남는 청혼이 되셨겠는데요?”

    “그랬을지도 모르겠어. 결혼기념일 때마다 빠짐없이 언급된 사건이었거든.”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듯한 대공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가 살짝 뿌듯해하며 에드에게 목걸이를 내보였다.

    “어때, 에드. 이 정도면 잘 풀었지?”

    “물론입니다.”

    그러자 대공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럼 내게 기회를 주지 않겠어?”

    “어떤 기회를 드리면 될까요?”

    “내가 아버지와 어머니 중 어느 분의 손을 닮았을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 말이야.”

    대공이 에드의 눈앞에 양손을 들어 보이자 에드가 옅게 웃었다.

    “그것만 드리면 될까요?”

    “음, 가능하다면 내가 에드에게 받고 싶은 게 있는데 그걸 함께 부탁해도 될까?”

    에드는 황금빛 결계의 광채가 반사되어 더 밝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저는 가진 게 많지 않은데요, 과연 전하께서 바라는 것을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만족스럽다 못해 넘칠 거야. 내가 가지고 싶은 건.”

    “…….”

    대공이 에드의 몸을 꼼꼼하게 감싼 후드에 손을 뻗으며 답했다.

    “에드, 너니까.”

    에드는 열이 올라 간질거리는 귀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후드의 버클을 푸는 가늘고 긴 손가락을 응시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적당히 아무 옷이나 걸치게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드시죠?”

    “그러게, 왜 이렇게 버클이 많은 옷으로 꽁꽁 감쌌지? 아버지는 목걸이 때문에 고전했다고 하시더니, 나는 버클 때문에 밤을 지새울지도 모르겠어.”

    대공이 살짝 엄살을 부리자 에드가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저는 전하를 도와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오늘의 모든 순간순간을 수첩에 남겨두려면 집중해야 해서요. 절대로 까먹지 않게요.”

    “기록으로 남겨두다니, 정말로 실수하면 안 되겠는데?”

    “음, 실수하셔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 때문에 더 특별한 날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나중에 나 때문에 화가 나거나 속상한 일이 생기면 에드가 그걸 들여다보며 오늘을 회상하는 날도 있겠지?”

    대공이 차분히 손을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화가 풀릴 수 있게, 아주 멋진 순간으로 각인되도록 노력해야겠어.”

    흐음, 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에드가 고개를 들었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제가 전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읊는 건 어떨까요? 그럼 전하께서도, 저도 오늘 일을 상기하게 되겠죠? 이렇게 좋아서 함께한 건데, 하고요.”

    대공이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인데? 만약 내가 지금 실수를 해서 기록에 남는다면, 에드가 절대 수첩을 읽을 일이 없게 해야겠다는 동기 부여도 될 테고 말이야.”

    “전하께서도 저 때문에 마음이 아픈 일이 생기신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제 수첩을 빌려드릴게요. 그걸 어떻게 쓰시든 절대 궁금해하지 않고요, 겸허한 마음으로 전하를 기다리겠습니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돼, 에드. 그러다 내가 나쁜 마음을 먹고 에드를 감시하기 위해서 핑계를 대면 어쩌려고.”

    “……그게 감시……인 거라면 아마 괜찮지 않을까요? 전하께서 어디서 뭘 하고 계실까, 하고 하루 종일 궁금해하는 건 저도 마찬가지거든요.”

    하, 하고 짧은 탄성을 내쉰 대공이 에드를 끌어안았다.

    “아버지는 청혼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셨었지.”

    “술을 잘 드셨나요?”

    “아니, 와인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셨어. 하지만 그럴 때면 평소의 무뚝뚝한 모습이 희석되어 보여서인지 어머니는 아버지의 잔에 술을 더 따라주곤 하셨지.”

    “전하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두 분께서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느껴집니다. 전에 가족사진을 봤을 때도 그랬고요. ”

    대공이 에드의 정수리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응, 그리고 나는 그 행복을 에드와도 함께 누리고 싶어. 그리고…….”

    대공이 잠깐 말을 멈춘 사이에 후드가 에드의 등줄기를 타고 스르르 아래로 내려갔다.

    “다행히 에드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옷 때문에 애를 먹을 것 같진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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