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52화 (152/198)
  • 그 순간 부부가 트롤리를 끌고 나타났다. 그들이 테이블에 가까이 다가오자 에드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꽃밭에라도 들어온 기분이었다. 바닥과 벽뿐만 아니라 트롤리에도, 식기에도, 심지어 부부의 머리에도 꽃장식이 매달려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다만 생화가 귀한 북부에서 어떻게 이렇게 잎이 싱싱하고 풍성한 꽃을 구한 걸까?

    가게 안을 장식하고 있는 꽃들을 보며 에드가 신기해하자 부부가 멋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께서 식당을 환하고 향기롭게 꾸며 달라고 하셔서 분위기를 내 봤는데 집사인 에드가 보기엔 어떤지 모르겠네. 어때, 괜찮아 보이나?”

    “기사 생활을 할 땐 전하께 이런 요청을 받아 본 적이 없었거든. 색다른 기분에 남편과 신경을 쓰다 보니…… 조금 과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지?”

    들뜬 기색이 역력한 부부의 모습에 대공이 피식 웃으며 에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정말 아름다워요. 꼭 두 정령이 이끄는 길을 따라 봄의 한복판으로 들어온 것 같은데요. 그리고…….”

    작게 코를 킁킁거리며 에드가 말을 끊자 부부의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제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기대하는 것이 보여 에드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장미 향과 함께 향긋하고 묵직하게 다가오는 꽃향기가 정말 좋아요. 혹시 어떤 꽃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아마 히아신스와 달리아 향일 거야. 정말 다행이다.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숨을 깊게 들이켜며 꽃향기에 취했던 에드는 로넨의 생일 파티를 준비했던 때를 떠올리며 부부를 존경스러움이 묻어나는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꽃을 구하느라 엄청 힘드셨겠어요.”

    “에드도 잘 아는구나!”

    “네, 이맘때쯤에는 수도에 있는 화원에서도 이렇게 꽃잎이 풍성하고 싱싱한 꽃은 구하기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이번에 파티를 준비하면서 알았는데요…….”

    대공은 부부와 대화를 나누는 에드를 바라보았다.

    전 부단장 부부를 본 건 한 번뿐인데 어느새 다음에도 놀러 오겠다며 웃는 그를 보며 대공은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리송했다.

    ‘에드가 누구나와 잘 어울리고 호감을 사는 건 좋은 일이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 그리 유쾌하지 않단 말이지.’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대공은 슬쩍 웃으며 턱을 매만졌다. 그리고 작년에 이곳에 처음 방문했을 때를 되돌아보았다.

    ‘그때 로넨과 에드를 북부에 데리고 오는 동안 길을 왔었는데…….’

    날이 따뜻하고 물자가 풍부한 남부에서 지내던 아이들이 춥고 척박한 북부의 모습에 실망하고 적응하지 못할까 봐 조금이라도 날이 풀린 뒤 도착하기 위해서.

    ‘북부가 싫다고 떠난다 하면 잡을 명분이 없었으니, 좋은 곳도 데려가고 선물도 해 주고.’

    다행히 로넨과 에드 모두 북부의 생활을 마음에 들어 했다. 대공은 그게 새삼 고맙고 놀라웠다.

    ‘에드를 놓치기 싫어서 잘해 준다고 노력하긴 했지만, 옆에서 험한 일들을 많이 겪었는데, 기꺼이 모든 고초를 함께 짊어지고 내 곁에 남아 주다니.’

    그는 길어지는 대화를 끊지 않고 에드를 응시했다. 그러자 그 시선을 알아챈 부부가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대화가 너무 길었죠? 바로 음식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서둘러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수프와 음식들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부부가 설명했다.

    “오늘은 전하께서 요청하신 대로 음식의 간을 조금 약하게 맞춰 보았습니다. 혹시 드시다가 싱겁게 느껴지시면 말씀해 주세요. 소금과 후추를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대공이 따뜻한 물을 마시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혹시 더 필요한 건 없으신가요?”

    “준비를 잘해 줘서 이 이상 바랄 게 없어. 고마워.”

    “아닙니다, 대공 전하. 저희 부부가 전하께 이렇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그 후 짧게 담소를 마친 부부가 자리를 뜨자 대공이 에드를 살폈다.

    “향이 강하지 않은 음식들로 부탁하긴 했지만 괜찮을지 모르겠어. 속이 거북하면 바로 말해 줘.”

    “네, 그런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전하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어서 그런지 오늘은 이걸 다 먹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요.”

    목소리를 낮춰 답한 에드가 씨익 웃으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걱정을 덜어 주려는 모습에 대공이 에드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긴 후 수프를 입에 댔다.

    적당히 배가 고팠던 에드도 숟가락을 들고 수프를 떠먹었다. 담백한 수프가 입맛을 돋워 금세 그릇의 반을 비웠다.

    “어때, 입에 맞아?”

    “네, 전에 왔을 때보다 더 맛있어진 것 같아요.”

    그러나 대공은 안심하지 않았다. 에드는 잘 먹다가도 입을 틀어막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이번엔 샐러드에 포크를 갖다 대던 에드가 고개를 들었다.

    “왜 안 드세요? 저 정말로 괜찮으니까 전하께서도 어서 드셔 보세요. 진짜 맛있어요.”

    “잘 먹으니까 다행이야.”

    주위를 살핀 에드가 입을 손으로 가리며 작게 말했다.

    “제가 입덧을 했던 건 너무 방에서만 지내서 그랬던 거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또바기도 이제 적응을 한 거 아닐까? 처음엔 에드의 몸이 익숙하지 않아서 칭얼거렸는데, 에드가 말도 걸고 배도 쓰다듬고 하니까 친숙함과 애착이 생기며 좋아진 거지.”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한 대공의 의견이 에드는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럼 이 녀석도 이제는 우리가 한 가족이라는 걸 느끼고 있는 거겠죠?”

    “그렇겠지. 옌 말로는 내가 에드 곁에 있으면 태아도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느낀다던데. 그러니까 알고 있을 거야. 우리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에드가 씨익 웃었다.

    “그럼 앞으로도 계속 말을 걸고 대답해야겠어요. 그동안에는 저를 수다쟁이로 생각할까 봐 자중하고 있었거든요.”

    “무슨 말을 했는데?”

    “예쁘다, 사랑스럽다, 천재…… 흠흠. 앞으로도 좋은 말만 입에 담고 생각해야겠습니다.”

    살포시 얼굴을 붉히면서도 어쩔 수 없는 애정을 숨기지 못하는 에드를 보며 대공은 웃었다.

    “나도 앞으로 분발해야겠군.”

    에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음식을 먹자 대공이 나이프로 고기를 잘라 그의 접시에 올려 주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면 조이를 타고 산 정상에 오를까 하는데 어때? 마음에 들지 않거나 몸이 힘들 것 같으면 다음에 오고.”

    씹기 쉽게 조각난 고기를 음미하던 에드가 바로 대답했다.

    “지난번에 왔을 때 산에서 본 북부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오늘도 꼭 보고 싶습니다.”

    “그럼 식사를 한 후 천천히 움직여 보자.”

    느긋하게 식사를 이어가며 대화를 나눈 그들이 식당을 나선 건 땅거미가 길게 늘어진 오후였다.

    부부와 작별 인사를 마친 대공이 텐스에게 전했다.

    “에드와 정상에 올라갔다가 올게.”

    “네, 그럼 저는 전 부단장님과 수다나 떨며 여기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텐스가 조이를 마차에서 풀어 끌고 나오는 동안 대공이 에드에게 외투를 하나 덧입혔다.

    “움직이기 불편하거나 바람이 새어 들진 않아? 산에 오르면 기온이 더 떨어질 테니 채비를 잘해야 해.”

    “네, 괜찮습니다.”

    에드를 조이에 먼저 태운 대공이 뒤에 훌쩍 올라탔다. 그들을 배웅하는 텐스와 부부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천천히 말을 몰기 시작했다.

    그리고 북부 전체가 보이는 정상에 도착하자 에드는 감탄을 내뱉었다.

    “전하, 전에 왔을 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요.”

    말에서 내린 대공이 에드의 하마를 도우며 답했다.

    “에드에게 이 풍경을 꼭 보여 주고 싶었어.”

    바닥에 내려선 에드는 북부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길을 대공과 나란히 걸었다.

    살랑이는 바람결에 흔들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밤공기가 스며들었지만 하나도 춥지 않았다.

    시야에는 하나둘씩 켜지는 마법 등과 연기가 올라오는 굴뚝이 보였다. 어둠을 내몰고 빛을 밝히며 밤을 맞이하는 북부 주민들의 삶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모습이었다.

    에드의 어깨로 대공이 팔이 올라왔다. 그렇지 않아도 가까운 거리였으나 더 바싹 자신에게 끌어당기는 손길에 에드는 대공에게 밀착했다.

    대공의 온기가 닿은 곳에서부터 느껴지는 이 안온함이 너무 좋았다.

    “에드 고마워.”

    “……갑자기요?”

    “그러게. 그런데 순간순간마다 고맙고 사랑스럽고 자랑스럽고…… 이 세상의 어떤 말을 갖다가 내놓아도 모자랄 정도로 벅차고 묘한 기분이야.”

    에드 또한 그랬다.

    매 순간이 그랬고 찰나까지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보고 있어도 더 보고 싶고 닿고 있어도 또 닿고 싶은……. 그래서 뒤꿈치를 들어 올려 대공의 입술에 입을 맞췄을 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꼭 붙어 있음에도 흘러가는 이 시간이 참 아깝고 애틋하다고. 그래서 더 소중하다고.

    가볍게 입을 맞춘 에드가 발을 내리자 대공이 웃었다. 부끄러운지 살짝 시선을 피하는 에드의 귀가 붉어져 있었다.

    대공은 에드의 머리를 가볍게 흐트러뜨렸다. 손에 감기는 실타래 같은 머리카락마저 사랑스러웠다.

    다정하고 간질거리는 손길에 에드가 다시 고개를 들자 이번엔 대공이 고개를 숙였다.

    “……으음.”

    따스한 온기가 어린 입술이 가볍게 물리자 에드는 발끝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몸이 흔들리지 않게 에드의 허리를 받친 대공이 가볍게 입을 맞대고 비비다 혀로 그의 입술을 느릿하게 갈랐다

    그에 에드가 입을 마주 벌리자 혀로 여린 점막을 부드럽게 핥던 대공이 입 안 구석구석을 탐험했다. 한층 더 깊어진 키스에 물기 어린 신음이 샜다.

    에드는 눈을 감으며 대공을 깊게 끌어안았다. 그러곤 그와 함께하며 느껴지는 감각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두근거리는 가슴, 떨리는 손끝, 발긋하게 달아오른 뺨. 그리고 뒷덜미를 타고 오르는 이 감각들이 제 기억 속에 그대로 새겨져 지워지지 않고 영원히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 맞붙어 있다가 떨어졌을 때 대공이 에드의 입술을 손으로 가볍게 훔쳤다.

    “더 하고 싶지만 오늘은 여기서 이만. 아직 할 게 더 남아 있거든.”

    이미 다리가 후들거리다 못해 기운이 빠져 쓰러질 것 같았지만, 아직 더 할 게 남았다는 말에 에드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궁금하고 기대되었다. 대공이 이제까지 자신을 위해서 준비해 줬던 건 모두 항상 즐겁고 행복했다.

    ‘이번에는 또 뭘까?’

    대공의 손에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에드가 숨을 죽였다.

    “아란.”

    대공의 손에서 일렁이던 은색 빛덩이가 화살처럼 허공으로 날아올랐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소환진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환한 빛 속에서 소환된 아란이 기지개를 켜듯이 몸을 부르르 털더니 에드의 주변을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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