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논?”
“네, 꼭 이쪽 길로 가라고 했으니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데 여기에는 왜 나와 계세요? 혹시 다른 볼일이 생기신 건가요?”
“왜기는.”
대공이 에드의 몸을 껴안듯이 부축하며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에드를 에스코트하러 나왔지.”
저를 감싼 따뜻한 온기에 안정감을 느끼면서도 혹시라도 누가 볼까 봐 고개를 휙휙 돌려 주위를 살핀 에드는 대공이 저를 벽 쪽으로 모는 걸 느꼈다. 점점 뒤로 밀리다가 끝내 등이 벽에 닿으며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진 그가 대공을 올려다봤다.
“…….”
“…….”
의아함이 담긴 눈동자를 내려다보던 대공이 고개를 숙였다.
“키스할까?”
작게 속삭여 묻긴 했으나 대답할 새도 없이 에드의 입술에 쪽, 쪽 내려앉은 입맞춤이 농염해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 전하.”
숨이 막힌 에드가 대공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자 그제야 입술이 떨어졌다. 겨우 트인 숨통에 숨을 몰아 내쉰 에드가 물었다.
“갑, 갑자기 왜.”
“갑자기는 아니고, 에드가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귀여워서 그만.”
대공의 귓속말에 에드는 감각이 고조되며 온몸의 솜털이 바짝 서는 기분을 느꼈다.
“아니, 그게 무슨…….”
“그러니 한 번 더.”
다시 고개를 숙이는 대공의 모습에 에드는 손을 들어 제 입을 막았다.
“잠, 잠깐만요.”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에드가 소리 죽여 외치자 대공이 웃었다.
“왜 이렇게 좋지, 에드?”
그냥 서 있어도, 웃고 있어도. 심지어는 멍하게 있어도, 언제 어디서든 네가 어떤 모습이든 간에 너무 좋아서 못 견디겠어.
속으로 나지막하게 진심을 쏟아 낸 대공이 에드의 입을 가린 손을 잡아 앞으로 끌고 왔다.
손끝에 한 번, 손바닥에 한 번 가볍게 입을 맞춘 대공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손목을 타고 내려오는 단 키스에 숨이 거칠어진 에드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에드 역시 이대로 대공의 목을 끌어안고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그럴 수 없었다. 끝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그가 대공을 말렸다.
“손, 손이 지저분합니다.”
“지저분하기는, 깨끗하기만 한데.”
“그, 그럴 리가요. 방금 전까지 인형을 만드느라 천들을 만져서 먼지투성이일 텐데요.”
보드라운 살결에서 입을 뗀 대공이 숙였던 몸을 폈다. 느긋한 시선으로 에드를 응시하던 그는 에드의 양쪽 주머니에서 고개를 빠끔 내밀고 있는 인형을 발견했다.
“오늘 이걸 만든 거야?”
“네. 이건 제가 만든 것이고요, 이쪽 주머니에 든 작은 여우는 로넨 도련님의 작품입니다.”
대공의 주의가 다른 쪽으로 쏠린 것 같자 에드가 빠르게 답했다. 손가락으로 인형을 가리키며 텐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설명하는데 대공이 집중하는 것이 보였다.
‘전하께서도 인형이 마음에 드셨나 보네.’
에드가 그에게 인형을 가까이에서 보여 주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던 순간이었다.
대공이 에드의 오른손을 가볍게 잡았다. 그러고는 깍지를 껴서 손에 가볍게 힘을 주었다 풀며 마사지하듯이 주물렀다.
“시원하지?”
“……네, 전하.”
“만드는데 힘들진 않았고?”
“앉아서 손만 움직이면 되니까 힘든 건 없었습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텐스가 많이 도와주기도 했고요.”
그 작은 행동에도 설렘이 끼어들어 얼굴을 붉히는 에드의 소매 안쪽으로 손가락을 넣은 대공이 손목 안쪽을 살살 문질렀다. 느릿한 움직임이었다.
에드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신음을 눌러 삼켰다.
“전, 전하. 이러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진짜 걱정은 그것이었군.”
“……아무래도 신경 쓰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외진 곳이긴 했지만 아직 어둠이 내려앉지 않은 늦은 오후였다. 이러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런 걱정이라면 내려놓아도 괜찮아. 이쪽 통로로는 오늘 아무도 오지 말라고 했으니까.”
“…….”
“그거 말고 또 신경 쓰이는 건?”
에드가 아무 말 없이 대공을 응시하자 그가 천천히 몸을 숙였다.
“그럼 다시 입 맞춰도 되지, 에드?”
* * *
대공과 밀회를 즐기고 집무실에 도착했을 때 에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 익은 홍당무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대공과 함께 방 안쪽으로 들어서던 에드는 3인용 소파를 홀로 차지하고 누운 채 단잠에 빠져 있는 낯선 사람을 발견했다.
‘……누구지?’
작고 왜소한 체구의 30대 초중반 남성이었다. 머리를 굴리며 다시 생각해 봐도 북부 성에서는 보지 못했던 사람이라 에드는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전하, 이분은 누구신데 여기서 잠들어 계신 건가요?”
에드를 자리에 앉히던 대공이 답했다.
“대신관이 보낸 의사야.”
“의사요? 의사가 왜 여기서 자고 있는 거죠?”
혹시 남자가 깰까 봐 작은 목소리로 묻는 에드의 정수리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대공이 입을 열었다.
“북부까지 급히 오느라 피곤했는지 집무실에 올라올 때부터 눈이 반쯤 감겨 있더라고.”
에드에게 따스한 물 한 잔을 건네며 대공이 말을 이었다.
“에드를 데려오겠다고 하고 집무실을 나섰다가 다시 들어온 건데 아니나 다를까, 이렇게 잠들어 있네.”
에드의 무릎에 작은 담요를 덮어 준 대공이 품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조금 더 자게 두는 게 좋으려나.”
“그럼 깨우지 말고 나중에 진료를 볼까요?”
“그러는 게 좋겠지? 피곤한 상태로 에드의 몸을 보면…….”
그때 남자가 눈을 번쩍 뜨며 여기가 어디지? 하더니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일어나 앉았다.
“죄,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그가 제 맞은편에 앉은 대공에게 꾸벅, 사과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긴 여행으로 피로가 컸던 모양이군. 그렇다면 진찰은 푹 쉰 후에 하는 게 좋지 않겠나?”
“아닙니다, 이제 완전히 정신을 차렸으니 진찰을 할 수 있습니다.”
흐음, 턱을 가볍게 쓸며 의사를 바라본 대공이 에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할까? 하고 묻는 시선에 에드는 그를 살펴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까지 보여 준 모습을 생각하면 미덥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대신관님이 보내 준 사람이라 하니 한 번쯤 믿어 봐도 좋을 듯했다.
에드의 허락에 의사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떨쳐 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저는 대신관님께서 보내신 옌이라고 합니다. 제가 에드 님의 몸을 살펴봐도 될까요?”
“네.”
“그럼 소파에 등을 기대 보시겠어요? 너무 긴장하지 마시고, 마음을 편히 가지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옌이 진찰을 시작했다. 그리고 꼼꼼하게 에드를 살피더니 이내 확신했다.
“임신이 맞습니다.”
대공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대공 전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제가 에드 님께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대공은 에드가 진찰받는 동안 대신관이 보내 주었던 그의 경력을 상기했다.
현재 30대 후반인 그는 어릴 때부터 대신전에서 수학하며 고대 자료와 최신 의학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지식을 두루두루 섭렵하고 있었다.
대신관이 적어 보낸 서신에 따르면, 그는 사람들의 출산을 도운 경험이 많았고 입이 무거우니 믿음직한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뛰어난 인재이건 제일 중요한 건 에드가 그에게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었다.
“에드 생각은 어때?”
첫인상과 달리 진중한 얼굴과 세세한 손길로 진찰을 이어가던 옌에게 신뢰를 느낀 에드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옌 님.”
옌이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그날 밤, 대공은 에드 없이 옌과 자리를 가졌다.
“남성이 아이를 가지는 경우를 보았나?”
옌은 대공의 깊고 진중한 붉은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답했다.
“문헌상으로는 젤다 족 남성이 출산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있습니다.”
“젤다 족이라면 동북부 산맥의 얼음 호수에서 사는 엘프들을 말하는 건가? 그들은 멸족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네, 워낙 소수인지라 잘 알려지지 않은 종족인데 알고 계시는군요. 맞습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부턴가 자취를 감춰 버려 이제는 찾을 수 없는 종족이 되었죠.”
“그렇군. 대신관의 말로는 남성의 출산을 도운 적이 있다던데, 그들을 만난 적이 있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어릴 때 일이지만 그들을 도운 것은 사실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