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49화 (149/198)

에드의 물음에 지오가 마시던 음료를 내려놓았다.

“앞으로도 에드랑 로넨 도련님의 다정한 친구가 되어 달라고.”

“다정한 친구?”

“응, 그런데 내가 로넨 도련님의 친구가 된다는 건 말도 안 되잖아? 명을 따르는 하인이면 몰라도.”

딱딱하게 굴러가던 헤린스 백작 저에서 지내던 지오가 상하 관계에 유연한 부분이 있는 북부 성에 발을 들이자 신기하고 이상한 모양이었다.

에드는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웃었다.

“헤린스 백작 저에서 일을 할 때는 윗분들이 하도 돌려 말하니 이렇게 말해도 실은 다른 속뜻이 있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하곤 했잖아? 지시를 잘못해놓고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는 일도 많았고.”

“맞아. 백작만 해도 지오! 저 화분을 당장에 치워 버리라고 했는데 왜 그대로 있어? 하고 화를 내서 달려가 정리하면 다음 날 그 화분이 어디 갔냐며 다시 찾고.”

지오가 크윽, 하며 눈물을 삼켰다.

“처음엔 내가 잘못한 건 줄 알았는데 그냥 백작의 변덕과 심술이었어.”

“그런데 지오, 북부 성에 온 이후로 나는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없었어. 북부 성의 사람들은 자신이 한 말에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고, 아무에게나 일을 떠넘기지 않거든.”

지오가 에드의 말에 집중했다.

“그러니 대공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돼. 하시는 말씀에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미리 겁먹지 말고.”

“…….”

“내가 장담해. 북부 성은 헤린스 백작 저에서 지낼 때보다 훨씬 더 즐겁고 좋을 거야.”

에드가 말을 마치자 지오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백작 저에서는 내가 선배였는데, 에드가 북부 성에 오더니 완전히 멋진 어른이 되었네? 알겠습니다, 에드 선배님! 오늘 해 주신 말씀 명심하며 북부에 뼈를 묻겠습니다!”

당찬 지오의 포부에 에드가 키득거리다 답했다.

“에린과 세나와는 휴식 시간일 때 인사를 하자.”

“아, 맞다. 대공 전하께 들었는데 에드가 북부 성의 집사라고 하던데?”

“아…….”

에드가 쑥스러워하며 눈을 피하자 지오가 이번엔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럼 에드에게 잘 보여야겠는데?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집사님!”

* * *

지오가 북부 성에 온 이후로 로넨과 에드는 무척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세 사람은 쉬는 시간이면 작은 조각들의 퍼즐을 맞추거나 블록을 쌓으며 놀았다.

오늘 오전에도 로넨과 지오가 에드의 방에 방문했다. 몸 상태가 나쁘지 않았던 에드는 그들과 시간을 보냈다.

즐겁게 놀다가 로넨은 공부를 할 시간이 되자 아쉬움을 뚝뚝 흘리며 방을 나섰고, 지오는 남아 에드와 담소를 나누었다.

“참, 에드는 북부에 처음 왔을 때 어땠어?”

“북부에 처음 왔을 때?”

“응, 나는 아직도 아침에 일어났을 때 창가에 잔뜩 쌓인 눈이나 익숙하지 않은 음식을 볼 때마다 기분이 묘해. 꼭 다른 세상에 똑 떨어진 느낌?”

‘그러고 보니 나도 그런 적이 있었지.’

에드는 작년에 북부 성에 왔을 때를 회상했다. 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녹지 않는 눈과 온몸을 꽁꽁 감싸도록 입는 옷이 신기했었다.

그런데도 크게 바뀐 환경이 불편하거나 힘들지 않았던 건 모두 다 대공이 신경을 써 줬기 때문이었다.

‘나중에는 할 일이 없냐고 이리저리 쫓아다닐 정도로 말이지.’

에드는 어느새 마치 고향처럼 익숙하고 친숙해진 북부를 느끼며 옅게 웃었다.

그때 똑, 똑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양손에 펠트지와 천 등을 가득 든 텐스가 문을 열었다.

“에드, 필요하다는 거 준비해 왔어.”

“안 그래도 이따가 가지러 가려고 했는데 텐스가 먼저 왔네요. 바쁠 텐데 고마워요.”

“이 정도로 뭘. 그런데 이걸로 뭘 만들려고?”

에드는 또바기에게 선물을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뭐가 좋을까? 고민하다가 제 손으로 장난감을 만들어 주면 어떨까 싶었다.

“이맘때 북부에서 아이들이 많이 태어난다고 들어서요. 쉬는 김에 아기들 장난감으로 펠트 인형 좀 만들려고요.”

에드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직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았으니 미리 생각해 뒀던 핑계를 댔다.

“그럼 여기는 테이블이 좁으니까 응접실에서 만들까?”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알았어. 로넨 도련님도 함께 만들고 싶다고 하셨으니까 내려오시면 시작하자.”

“그럼 제가 로넨 도련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지오가 쌩하니 움직였고 에드는 텐스와 응접실로 내려갔다.

응접실 테이블에 준비한 재료를 내려놓은 텐스가 의자를 정리하는 동안 에드는 색색의 펠트지와 천을 하나하나 들어서 아이가 좋아할 색이 뭘지 고민했다.

“에드.”

응접실로 내려온 로넨이 손을 흔들며 반가워했다. 에드 옆에 꼭 붙어 앉는 로넨을 확인한 텐스가 설명했다.

“재료는 많으니까 마음껏 쓰시면 됩니다. 혹시 필요한 재료가 더 있다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제이논이 어떻게든 구해 올 테니까요.”

“뭐, 내가?”

마침 응접실 옆을 지나쳐가던 제이논이 텐스의 말에 난입하자 로넨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제이논, 나는 용을 만들고 싶은데 잘할 수 있을까? 용을 완성하면 제이논에게 보여 주고 싶은데!”

“네, 정말 기대됩니다. 도련님.”

“그럼 저는 뱀을 만들어 볼까요? 제이논의 발목을 콱 물어 버릴 수 있는, 이만큼 큰 뱀을요.”

“야, 네가 뭘 만들 건지는 관심 없으니까 입 다물고 얼른 만들어라.”

한바탕 소란과 함께 진행된 장난감 인형 만들기는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에드는 동물 인형이 무난하지 않을까 하며 귀여운 로아를 떠올렸다. 눈에 익숙하니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건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도안부터 막히더니 뭘 어떻게 손을 대야 하나 난감했다.

“…….”

이런 걸 해 본 적이 있었어야지.

아이에게 선물을 해 주고 싶다는 생각에 의욕이 넘친 나머지 앞뒤 재지 않고 너무 쉽게 덤빈 것 같았다.

에드가 이마를 긁적이며 끙끙거리자 킥킥 웃은 텐스가 에드의 옆에 달라붙었다.

“어떤 걸 만들고 싶은데?”

“여우요.”

“크기는?”

“한 이 정도?”

에드가 어정쩡하게 손으로 가늠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은 텐스가 펠트지에 그림을 그렸고, 그걸 에드가 가위로 자르면 바느질을 도와줬다.

‘과연 여우 모양이 나오긴 할 것인가.’

텐스의 도움에도 의구심을 떨치지 못한 채 모양을 잡은 펠트지에 솜을 살살 펴 넣던 에드는 점점 통통해지며 형체가 드러나는 인형에 눈을 크게 떴다.

“와, 텐스. 이것 봐요. 이게 되네요?”

“그럼, 그럼. 내 손을 거쳐서 안 되는 게 없거든.”

“오.”

“에드, 이 정도로 놀라기는 이르다고. 내가 정말로 이만한 뱀을 완성해 줄 테니까.”

그 옆에서 에드가 뭘 만드나 지켜보던 로넨도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넨은 에드가 만든 여우보다 조금 작은 아기 여우를 만들었다.

텐스와 지오 둘이 달라붙을 때마다 어떤 모양의 인형이든 뚝딱 만들어지자 그걸 신기하게 바라보던 로넨이 완성된 장난감 두 개를 높이 치켜들었다.

“이건 로아고, 이건 로아 친구!”

그러더니 두 마리 여우를 손에 쥐고 테이블 위에서 달리기 시합을 시작했다.

로넨의 귀여운 모습에 작게 웃은 에드는 문득 시간이 꽤 지났음을 인지했다.

“그런데 간단한 인형을 하나 만드는 데도 시간이 꽤 드네요?”

“괜찮아, 도움이 필요하다면 몇 날 며칠이 걸리더라도 내가 도와줄 테니까. 재료 준비야 제이논이 해 줄 거고.”

“내가?”

때마침 응접실에 들어오던 제이논이 그 말을 듣고 어이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에드에게 눈짓했다.

“에드, 대공 전하께서 찾으시는데.”

“저를요?”

“응, 그런데 당장 급한 건 아니라 천천히 올라와도 괜찮다고 하셨어. 집무실로 올라오면 된대.”

조금 더 이 시간을 즐기고 싶었지만, 대공이 부른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에드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로넨이 그의 손에 여우 두 마리를 꼭 쥐여 주었다.

“에드, 걱정하지 마! 내가 로아 친구들을 더 만들어 놓을 테니까.”

에드가 로넨의 든든한 지원에 씨익 웃었다.

“네. 기대할게요, 도련님.”

“응,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형에게 다녀와.”

로넨의 배웅을 받으며 응접실을 나선 에드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런데 제이논은 왜 꼭 이 길로 걸어가라고 한 걸까?’

응접실을 나서기 전에 제이논이 덧붙였던 말을 떠올리며 걷던 에드는 계단을 오르기 위해 벽 모퉁이를 돌다가 누군가에게 손목이 가볍게 잡혔다.

“어?”

피부에 닿는 익숙한 온기에 고개를 들자 눈앞에 대공이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대공을 만난 에드의 입가가 가볍게 풀어졌다.

“제이논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