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48화 (148/198)

“입부터 풀어 보면 되겠네.”

대공이 제 입술을 부드럽게 훑으며 하는 말에 에드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에드는 대공이 왜 그를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하는지 잘 알았다.

그는 위계질서로 꽉 막힌 상하 관계가 아니라 그의 유일무이한 존재이자 연인으로서 에드와 감정을 나누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러니 입이 쉽게 떼어지면 좋으련만.

‘아니, 그런데 왜 이렇게 멋쩍고 어렵지?’

마음은 분명 통했다. 두 사람 다 상대방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서로를 위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 뭐랄까. 완벽하고 위엄 넘치는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 대기가 저어되었다.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또 이해하고 있음에도…… 에드는 아직 대공의 곁에 있는 ‘동반자’로서의 자신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전하께서는 아실까? 때로는 이 일이 모두 꿈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나를.’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랬다.

‘어떻게 저렇게 완벽하고 멋진 대공 전하께서 나와 같은 마음일 수 있는 거지?’

신기하기도 했고 현실감이 없어 에드는 몸이 붕 뜬 느낌이기도 했다.

‘이렇게 모든 일이 잘 풀릴 수가 있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좋아하는 이들과 가족이 되고…….’

행복감이 고조될 때마다 두려움도 조금씩 자라났다.

어느 날 갑자기 소설 속에 눈을 떴으니만큼, 눈을 깜빡하면 어느새 다시 현실로 돌아가게 될까 봐.

그리고 그렇게 에드의 마음속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려고 할 때마다 대공은 그런 제 마음을 쏙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이 선명한 색을 부여해 왔다.

지금도 그랬다. 제 입술을 가볍게 물었던 대공이 어느새 몸 아래로 내려가 그의 발목을 깨물자 등줄기를 타고 쾌감이 올라왔다. 쾌감으로 가물가물해진 에드의 시야에는 오롯이 대공만이 들어왔다.

어렵고 복잡한 말은 필요 없었다.

대공이 이렇게 자신을 뜨겁게 안아 올 때면 에드는 불안함으로 물들려는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으…… 으응.”

다시 몸을 핥으며 올라오는 깊어진 애무에 신음이 절로 나왔다. 아랫배가 저릿해지며 열기가 뭉치는 것을 느끼며 에드는 대공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맞닿은 이 따뜻한 체온은 거짓이나 환상이 아니었다.

* * *

며칠 만에 입덧이 사라지는 드라마틱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주기적으로 뭔가를 먹지를 않으면 어지럼증이 일어났는데 그렇다고 음식을 섭취하면 입덧 증상 때문에 메스꺼움이 일어나 고역이었다.

‘이게 무슨.’

둘 중에 하나만 하면 안 될까?

아직 어두운 밤이었지만 선잠에서 깬 에드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임신으로 인해 변화하는 인체의 신비를 곱씹었다.

‘보통 입덧이 이렇게 심하면 음식을 눈앞에 떠올리기도 싫어져야 할 텐데, 먹고 싶은 건 왜 또 그렇게 많이 생각나는 건지.’

속이 안 좋다가도 오늘은 이걸 먹고 싶은데, 하는 생각이 불쑥 떠오르기까지는 3초면 충분했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에드로 지낼 때나 이선유로 살 때나 식탐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는데.’

그에게 끼니란 그냥 영양을 섭취하는 행동이었기에 이렇게 빨간 경고등처럼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튀어 오르는 강한 식욕이 신기하기만 했다.

주치의는 이게 다 아기가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렇게 아이가 존재감을 드러낼 때마다 에드는 또바기가 대공의 어디를 얼마나 닮았을까를 상상하며 즐거움을 느꼈다.

잘 때 꿈을 꾸는 빈도도 잦아졌다.

뭔 꿈이 이렇게 요란하지 싶은 것에서부터 잠에서 깨면 기억에서 깡그리 사라지는 것까지.

태몽으로 성별을 유추하기도 하니 그중에서 또바기의 성이 무엇일지 알 수 있을 만한 꿈이 있지 않을까? 했지만 신통치 않았다.

사과도 나오고 보름달도 나오고…… 선잠이 들었다 깬 에드는 지난 꿈들을 곱씹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딸이든 아들이든 상관없어. 건강하게만 자라자, 또바기야.’

그때 뽀그르르, 뱃속에서 물방울이 휘도는 느낌에 혹시 또바기가 움직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에드는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아! 또다.’

뱃속에서 잔물결처럼 느껴지는 감각에 그는 씨익 웃었다.

“우리 또바기는 천재가 아닐까? 배 속에 있는데도 이렇게 내 말을 알아듣고 건강하게 잘 자라겠다고 대답도 하고.”

이후 에드의 웃음소리를 듣고 깬 대공이 무슨 일이냐 물었지만, 에드는 말하지 않았다. 제가 생각해도 스스로가 너무 팔불출 같았으니까.

그렇게 다시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오후였다.

“에드.”

방으로 놀러 온 로넨과 시간을 보내던 에드는 작게 노크를 하고 들어온 제이논을 올려다보았다.

“지오가 왔는데.”

“지오?”

에드보다 로넨이 먼저 반응했다. 체스를 두던 손이 멈추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인 로넨이 아! 하며 웃었다.

“헤린스 백작 저의 정원사인 지오?”

“맞습니다, 도련님.”

“정말 지오가 놀러 온 거야?”

기뻐하는 로넨의 목소리를 들으며 에드는 생각했다. 여기까지 직접 찾아왔다고?

확실히 로넨의 생일 파티가 있기 며칠 전, 지오에게 편지를 보내긴 했었다.

‘하지만 그건 로넨 도련님의 생신이니 이를 축하하는 내용의 답장을 보내 주었으면 한다는 말을 전할 겸 간단한 안부를 물어보기 위해서였는데.’

에드가 제이논에게 물었다.

“지금 어디에 있어요?”

“응접실에.”

로넨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빠르게 밖으로 뛰어나가자 에드도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 뒤를 쫓았다.

“지오!”

응접실에 앉아 눈으로 이곳저곳을 탐색하고 있던 지오가 로넨의 목소리를 듣고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헤린스 백작 저와는 완전히 다른 성의 모습에 불안해하던 기색이 에드와 로넨을 보자 눈 녹듯이 사라졌다.

“로넨 도련님!”

로넨과 지오가 반갑게 인사를 하자 에드가 작게 웃었다.

“지오, 이게 얼마 만이야.”

“그러게, 에드. 잘 지냈어?”

“그럼, 지오는?”

“나도 뭐 잘 지냈지.”

어깨를 으쓱하는 그의 모습에 에드는 지오를 소파에 앉혔다.

뒤따라 들어온 제이논이 편하게 회포를 풀라며 차와 과일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자 로넨이 에드에게 과일을 챙겨 줬다. 그 모습을 보고 지오가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에드가 로넨 도련님과 여전히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안심이 되네요. 도련님도 건강히 잘 지내시는 것 같고요.”

지오의 말에 에드가 고개를 들었다.

“사실 이곳에 오면서 걱정을 많이 했었어. 에드가 처음에 로넨 도련님을 따라 북부 성에 간다고 했을 때 나 같은 평민이 보기에는 백작이나 대공이나 둘 다 넘볼 수 없는 높으신 분들이라 별달리 걱정하지 않았거든.”

“…….”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되었어. 대공 전하는 백작보다 훨씬, 까마득히 더 높으신 분이라는 걸. 사는 곳만 해도 백작이 있는 곳은 커 봤자 저택 수준이지만, 대공 전하께서는 동화책에 나오는 것 같은 커다란 성에서 지내신다고.”

그렇게 조금 서로의 근황을 나누며 응접실에서 노는데 텐스가 로넨을 불렀다.

“도련님,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형이? 알았어.”

그 말에 더 놀고 싶은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을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난 로넨이 응접실을 나섰다.

에드는 로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응접실 문이 완전히 닫히자 물었다.

“내 편지를 받고 북부 성으로 온 거야?”

“그건 아니야, 원래는 그냥 도련님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편지만 보낼 생각이었어. 북부 성에 직접 방문하고 싶어도 혼자서는 시간이 엄청 오래 걸리는 방법뿐이었으니까.”

“그럼 어떻게 이렇게 빨리 북부 성에 도착한 거야? 편지를 보낸 지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

“편지가 도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공 전하께서 마차랑 같이 사람을 보내셨는데, 몰랐어?”

“전하께서?”

“응, 헤린스 백작가가 망했으니까 따라오면 일자리를 소개해 주시겠다고 해서 냉큼 탔지.”

“어, 잠깐만.”

에드는 지오의 입에서 나온 말을 되새겼다. 헤린스 백작가가 망했다고?

“소식이 여기까지 닿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로넨 도련님께서 북부로 떠나시기 무섭게 가세가 급격히 기울더니 결국 파산했어.”

“그랬구나.”

“백작 부부가 다시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서 여기저기 손을 벌리기는 했는데 별 소용은 없었던 것 같아.”

에드는 헤린스 백작 저를 떠날 때 황금빛 미래를 꿈꾸며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던 부부의 모습을 떠올리다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어쨌든 그러다 보니 백작 부부가 돈이 되는 것들을 다 처리했는데…… 그 바람에 정원에 있던 꽃도 나무도 전부 사라졌지 뭐야.”

“아.”

“그래서 나는 백작 저를 떠나 그 근처 꽃집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헤린스 백작 저에서 일했던 지오를 찾는 소문이 들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네가 보내 준 편지가 도착한 거였어. 그다음 날 바로 대공 전하께서 보낸 사람이 왔고.”

작게 웃는 지오의 모습에 에드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반가워, 정말 잘 왔어. 다시 보게 되니까 정말 기쁘다.”

“나도! 북부로 떠난다고 하기에 다시 만나게 될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인연이란 게 정말 신기하다.”

“그럼 앞으로 여기서 사는 거야?”

“아마도 그렇게 될 것 같아. 아까 대공 전하를 먼저 찾아뵈었는데 묘한 말씀을 하시더라고.”

“어떤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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