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43화 (143/198)

“어렴풋이 기억이 나, 거기 비뚤비뚤한 바느질 보이지? 어머니께서 로넨을 가진 걸 아시고 직접 만드셔서 그래. 바느질에 유달리 약하셔서 바늘에 손을 찔리기도 하셨지.”

잔잔한 미소와 함께 손가락으로 옷을 가리킨 대공의 손끝을 에드는 눈으로 따라갔다.

“그땐 기분이 어떠셨어요?”

“동생이 생겼다는 걸 알았을 때?”

“네.”

대공은 에드의 앞머리를 살살 쓸어 넘기며 답했다.

“좋았지. 여동생일지 남동생일지 궁금하기도 했고, 얼마나 귀여울까 기대도 되었고.”

에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대공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에드의 배에 아이가 있다고 생각하니 만약 그 아이가 태어난다면 로넨처럼 마냥 귀여워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네.”

“네? 왜요?”

“왜긴, 에드의 속을 썩이면 안 되잖아.”

하하, 하고 에드가 작게 웃자 대공이 팔짱을 끼며 근엄하게 말했다.

“그리고 로넨 때와는 또 다른 생각이 드는군. 반드시 에드와 아이를 행복하게 해 줘야겠다는, 그런 생각이.”

에드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소설 속에 빙의했을 당시만 해도 살아남기에 급급했고, 이름 없는 악당에게 빙의해서 누군가에게 사랑받기는 글렀다고 생각했었는데…….

대공은 말 없는 에드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 입지는 걱정할 것 없어, 에드. 역사서를 보면 최초의 용의 아이를 품은 사람도 두루뭉술한 표현이긴 했지만 남성인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순간 에드는 대공과 거리감이 확 줄어든 것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에드에게 가까이 다가붙은 대공이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에드가 임신을 했다고 하면.”

갑자기 짓궂어진 대공의 목소리에 에드가 꿀꺽, 침을 삼켰다.

“모두가 나를 다시 보게 될 거야.”

“네?”

“기적을 일으키는 용의 피가 내게 존재한다는 걸 실감하게 될 테니까. 남성까지도 임신시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구나, 하고 나를 경외할 거야. 그 어떤 마법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니 말이야.”

에드가 멍하니 대공을 바라보자 그가 에드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니 내 입지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할 것 없어. 에드는 잘 먹고 잘 자는 것만 생각해. 제국을 넘어 이 세상에서 가장 실력 있는 의사를 찾아내 에드를 돌보게 할 테니 아이 걱정도 하지 말고.”

“…….”

“그리고 더 궁금한 점은?”

에드는 자신만만한 대공의 얼굴을 보다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임신한 상황에서 걱정이 된 건 대공의 상황과 아이의 건강, 그 외에는 없으니까.’

그러자 대공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남은 건 하나인가.”

“하나요?”

“그래.”

에드의 볼을 매만지던 손가락이 목을 타고 내려와 가슴을 톡, 톡 두드렸다.

“에드의 마음 말이야.”

“……제 마음이요?”

“지금까지 에드가 걱정하고 염려한 것은 나와 아이에 대한 것이었잖아?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제일 중요한 건 에드의 마음이야.”

“…….”

“우리의 아이를 낳고 싶은지 말이야.”

“아.”

‘우리의 아이.

“에드의 소원으로 이루어진 일이긴 하지만 겪어 보고 마음이 바뀔 수도 있잖아. 두려울 수도 있고.”

“…….”

“에드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에드가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할 거야.”

대공이 에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니 어떻게 하고 싶어, 에드는?”

‘내 마음이라니.’

그야 당연히…… 에드는 제 가슴에 닿은 대공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가볍게 가슴을 두드리는 손길을 느낀 에드는 대공의 손끝에 닿았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대공의 팔, 어깨, 목, 목덜미, 턱 끝으로 천천히 올라가던 눈길이 그의 눈과 마주치자 느리게 깜빡였다.

‘그래, 내가 원하는 것은.’

에드는 대공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만약에 내가 임신을 한 게 확실하다면, 저 얼굴과 똑같은 아이가 태어날 수도…… 있다는 건가?’

대공의 얼굴과 성격, 그리고 기품까지 똑 닮은 아이가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이 눈앞에 떠오르자 에드는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그럼 이제는 후계자라는 장애물도 사라졌으니 대공 전하께 향한 마음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에드는 가슴을 꽈악 가로막고 있던 둑이 투두둑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야 아무런 방해물 없이 대공을 향한 제 진심을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전하께서 내게 사심 없이 짓던 미소와 에드, 하며 부르던 다정한 목소리……. 그리고 사랑해, 라고 말하던 단정한 입술과 항상 날 따스하게 바라보는 눈동자.’

그동안 애써 무시하려고 했던 것들을 떠올린 에드는 꽈악 옥죄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손바닥에서 심장이 펄떡펄떡 뛰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내가 대공 전하를 정말로 많이 좋아하는구나.’

자신이 충분히 생각할 수 있도록 말을 아끼는 대공을 바라보며 에드는 생각했다.

‘전하께서 내 의견을 존중한다는 것은 아이를 낳지 않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 말이겠지만.’

에드는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대공 전하와 가족이 되고 싶었고, 그리고…….’

에드는 저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가장 중요하고 근원적인 대답을 떠올렸다.

그를 사랑하니까.

그래, 대공 전하를 사랑하니까 그와 나 사이에 있는 우리의 아이를 낳고 싶었다. 그게 비록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일이라 당황스럽고 두려운 일이 될지라도 용기를 내고 싶었다.

“대공 전하께서 제가 임신한 것을 이상하다고 여기셨으면.”

“…….”

“그럼 저는 아마도 혼자서 낳아 키워야지, 하고 생각을 하면 했지 다른 선택지를 두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에드가 잠시 말을 멈추자 대공이 다시 컵을 손에 쥐여 주었다. 마침 목이 탔던 에드가 옅게 웃으며 물을 마신 뒤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대공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전하께서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긴 걸 진심으로 기뻐해 주셔서 저도 정말 행복해요.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대공 전하와 저, 두 사람 모두의 축복을 받은 아이라서요.”

“에드.”

“네, 결론은 당연히 하나입니다. 낳을 거예요, 이 아이를.”

어느새 배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에드는 대공이 손등을 덮으며 깍지를 껴 오는 손에 그를 올려다보았다.

“고마워, 에드.”

그리고 손을 뻗은 대공이 에드를 껴안았다. 또다시 와락 안긴 대공의 품이 따뜻하고 아늑했다. 잠시 머뭇거린 에드는 눈동자를 굴렸다.

‘지금이라면 내가 먼저 전하를 껴안아 봐도 되는 걸까?’

아니, 뭐. 고백을 거절하려고 마음먹은 이후로는 대공 전하와 접촉을 일절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괜찮을 것 같은…… 데?

고민하던 에드가 조심스레 대공의 등 뒤로 팔을 겹쳐 그를 안자 대공이 작게 웃었다.

그 기분 좋은 울림이 맞닿은 가슴과 가슴을 타고 올라왔다. 그에 볼이 홧홧하게 달아오른 에드도 따라 웃자 대공이 그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한참을 그렇게 껴안고 있다가 팔을 먼저 푼 건 에드였다. 대공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자니 다른 부분이 걱정되었다.

‘내가 정말 임신을 한 게 맞을까?’

에드는 잠옷 위를 손으로 살살 문지르며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라도 주치의의 오진이나 내 상상임신이라면?’

에드는 나이 지긋하고 신중한 주치의를 떠올리며 오진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만약 잘못 진단했다면 그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고 말겠다고 결심했다.

생각이 이어질수록 괜한 걱정이 되었던 에드는 옷 안으로 손을 넣고 배를 조심스레 쓰다듬어 보았다.

‘뭐라도 확신을 할 수 있는 느낌이 오면 좋은데…… 아가야, 정말 네가 내 안에 있니? 있다면 어디에 있는 걸까? 여기쯤? 아니면 여기?’

에드는 제 배를 이렇게나 만져 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구석구석 짚어 보았다. 조심스럽고 신중한 손길이었다.

‘손이나 발로 내 배를 한 번쯤 걷어차서 존재감을 드러내면 좋을 텐데…… 내가 동굴에서 나온 게 2달이 안 되었으니까 아직 그러기엔 이르겠지……. 초음파 사진이라도 봤다면 실감이 났을 텐데.’

문득 21세기의 과학 기술이 아쉬워진 에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21세기 현대였다면 이런 마법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지금은 없는 걸 아쉬워만 하고 있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 앞으로 해야 하는 것들만 생각하자’

에드는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와 함께 앞일을 헤쳐 나가면 뭐든지 다 잘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대공과 자신, 아이와 북부 성의 사람들과 있으면 무슨 일이든 잘 풀릴 것 같았다. 무서울 게 없었다.

‘이런 마음이 나의 어머니나 에드의 어머니, 그리고 대공 전하의 어머니께서도 아이를 가졌을 때 드셨던 마음일까?’

나를 비롯한 그들도 이런 축복을 받고 태어났겠지? 그랬으면 좋겠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눈가가 뜨거워지나 했더니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어, 왜 이러지?”

에드가 멍하게 중얼거리자 대공을 그를 감싼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제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에드의 눈에 눈물이 보이자 대공은 마음이 착잡했다.

“에드, 많이 힘들었지?”

“아, 힘든 건 아니었는데요…… 아니, 맞나?”

에드는 대답하다가 맞닿은 대공의 어깨에 눈을 슥슥 문질렀다.

힘들었나? 그래, 힘들었다. 좋아하면서도 마음을 숨겨야 했고 사랑하면서도 그를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래서 에드는 소리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

흔들리던 등이 잦아들 때까지 대공은 에드는 머리를 가만가만히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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