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40화 (140/198)

21세기 한국이었다면 그 역시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이곳은 중세고,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런 부분 역시 중요했다. 특히 지금처럼 황제가 북부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다른 사람들은 로넨이 있는데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말하겠지. 하지만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로넨은 아직 어리고, 북부를 탄탄하게 유지하려면 아무래도 대공의 후계자가…….’

물론, 그간 보아 온 전하와 로넨의 성격이라면 이런 자신의 고민을 알게 되는 순간 입양아를 들이자고 말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 방법 역시 황제에게 빌미를 줄 수는 있겠지만 똘똘 뭉친 북부라면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걸 예상하면서도 답을 망설이는 건 그냥 내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겠지.’

에드는 대공과 로넨을 닮은 아이를 보고 싶었다. 설령 지금 자신의 고민 때문에 그와 맺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부모와 헤어진 것만으로 모자라 원작에서 힘들고 비틀린 삶을 살아온 그들에게 일방적인 욕심이지만 제가 생각한 이상적인 가족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정신 차려, 에드. 네가 로넨을 따라온 이유가 뭐였는지 잊었어?’

역시 진정으로 대공을 위한다면 이 자리에서 그의 마음을 거절하는 것이 맞았다.

‘지금 당장은 조금 힘드실지도 몰라. 하지만 분명 전하께서는 금방 극복하시고 북부를 위해 가장 올바른 선택이 뭔지 깨달으실 테지. 그리고 훗날…….’

내가 고백을 거절해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몰라.

마지막에 떠오른 그 말은 에드의 가슴속을 깊게 할퀴고 지나가며 큰 상처를 남겼다. 대공의 마음에 등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에드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공은 아까와 다르게 여러 가지 감정들이 휘몰아치는 에드의 눈동자를 깊게 들여다보다 사과의 말을 입에 담았다.

“미안해, 에드.”

대공의 갑작스러운 사과에 되레 당황한 것은 에드였다.

‘혹시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눈치채신 걸까?’

“아니에요. 사실 전하께서도 알고 계셨던 거죠? 동굴에서 있었던 일과 제가 했던 말들 전부요.”

에드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낼 줄 몰랐던 대공은 순간적으로 조금 놀랐지만 곧 감정을 다스리고는 그에 대한 답을 내놨다.

“그래. 하지만 기억도 희미하고 무엇보다 내가 그때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다 내 망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에드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다행히 진짜였나 보네.”

거기까지 말한 대공이 쑥스러운지 손바닥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슥슥 문질렀다. 처음 보는 대공의 모습에 에드는 마음이 다시 파도치듯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그때 에드가 했던 말이 전부 다 내 망상이었다고 해도 내 고백은 달라지지 않았을 거야. 하…… 미안해. 원래는 에드의 마음이 다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나도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하는 건 처음이라 감정 조절이 쉽지 않네.”

벽난로의 불빛 때문에 발갛게 보이는 줄 알았던 대공의 얼굴이 사실은 민망함 때문에 붉게 변한 것이라는 걸 깨달은 에드의 볼이 덩달아 빨갛게 물들었다.

대공은 그런 에드의 표정 변화에 크음, 작게 헛기침을 한 뒤 그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에드에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그러니까 마음이 확실히 정해지면 그때 내 고백에 대한 답을 줘.”

마음이야 지금 당장 그의 품에 안기면서 저 역시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에드는 그 고백을 속으로 삼키며 애써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말 좋아해요, 대공 전하.’

“……네, 그래도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에드의 진지한 대답에 대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웃음을 쳤다. 그 시선을 홀린 듯이 바라보던 에드는 대공이 침대에서 일어나자 자신도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대공이 그런 에드를 막았다.

“밤도 늦었고 생각할 게 많을 테니까 오늘은 여기서 자. 난 서재에 가서 잘 테니까.”

“아, 아닙니다. 대공 전하.”

그럼에도 에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가볍게 고개를 저은 대공이 그의 어깨를 붙잡고 다시 침대에 눕혔다.

“……망해서.”

“네?”

“내가 민망해 여기에서 못 잘 것 같아서 그래. 여기서 자면 계속 방금 한 고백이 생각날 듯하거든…….”

“……아.”

에드의 목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준 대공이 잠시 그를 내려다보다가 성큼성큼 발을 뗐다.

대공의 뒷모습은 벽난로로부터 멀리 떨어져 어느새 검은 실루엣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에드는 그의 귀가 옆에서 타오르는 불보다 붉게 번져있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에드 역시 민망해 침대 이불만 쳐다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문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상함에 슬쩍 고개를 올려 보니 당장이라도 방에서 나갈 것 같았던 대공이 문고리를 잡은 채 서 있었다.

타닥타닥, 벽난로에서 장작 타는 소리가 몇 번이나 들릴 때 때까지 가만히 서 있던 대공이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거 하나는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해, 에드.”

“……네?”

“고백은 에드가 먼저였어도 좋아하는 감정은 내가 먼저였다는 걸. 나는 에드를 백작 저에서 본 순간 첫눈에 반했으니까.”

탁.

순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닫힌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에드의 얼굴은 대공이 나간 후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밤새 뒤척이느라 제대로 자지 못해 눈이 발갛게 충혈된 에드는 문고리를 잡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대공 전하를 어떻게 보지?’

벌써 몇 분째 머리만 쥐어뜯던 에드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방을 나서 파티 준비가 한창인 연회장으로 향했다.

“이르텔! 이것 좀 부탁해!”

“텐스, 화분은 저쪽으로 옮겨.”

이른 아침인데도 사람들이 한창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연회장 입구에서 기웃거리며 서 있는 에드를 발견한 제이논이 그를 불렀다.

“아, 에드! 이건 반송된 초대장들인데 혹시 주소가 잘못되어 돌아온 건 아닌지 확인해 줘.”

‘그래, 지금 개인적인 고민으로 시간을 보낼 때가 아니었지.’

이틀밖에 남지 않은 로넨의 생일 때문에 지금 북부 성 전체가 들썩이고 있었다.

‘이럴 때 이 행사를 주최한 당사자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니…….’

가볍게 고개를 저은 에드가 빠르게 움직였다.

“에드 집사님! 이건 어디다 갖다 놓으면 될까요?”

“에드, 화분을 몇 개 더 시켜야 한다고 했지?”

“계단을 꾸밀 꽃장식은 어떤 걸로 할지 결정이 난 건가요?”

하나를 처리하면 두 개가, 두 개를 처리하면 세 개가 몰려드는 일들을 정신없이 해결하고 나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된 에드는 다시 머리 한구석에 어젯밤 일이 떠오르자 식탁에 앉아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정신 차려, 에드. 네가 기획한 파티로 몇 날 며칠 동안 북부 성의 모든 사용인들이 잠도 못 자고 고생하고 있는데 계속 이렇게 어리숙하게 굴래? 지금은 로넨의 생일 파티를 성공적으로 마치는 일만 생각하자 제발.’

고개를 휘휘 저으며 정신을 다잡은 에드는 그 자리에 편지지와 펜을 올려놓고 자신의 친구에게 어제 미처 보내지 못했던 편지를 썼다.

에드가 편지를 다 쓰자 때마침 텐스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에 에드는 쥐고 있던 편지를 그에게 바로 건네고 아직 손도 안 댄 음식들 중에 빵만 들고 일어났다.

“텐스, 이거 여기에 적힌 곳으로 보내 줄 수 있을까요?”

“편지네? 날 보자마자 편지부터 건네는 걸 보니 급하게 보내야 하는 건가 봐?”

“네, 최대한 빨리 부탁드려요. 원래 좀 더 일찍 드렸어야 했는데 다른 일을 하느라 늦었어요, 죄송해요.”

어디로 보내는 것인지 주소를 확인하던 텐스는 도착지가 헤린스 백작 저인 걸 발견하자마자 어? 하고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저만치 사라진 에드의 모습에 뒷머리를 긁으며 답했다.

“알았어! 나에게 맡겨 둬.”

그렇게 빵 한 개로 끼니를 때운 채 오후에도 바쁘게 뛰어다니던 에드는 밤이 되어서야 비틀비틀 제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침대로 걸어가 풀썩, 하고 베게 위에 얼굴을 묻었다.

‘중간중간에 사용인들을 통해 들은 소식으로는 로넨 도련님이 대공 전하와 사이좋게 딱 붙어 있었다고 했지……. 그럼 더 이상 사춘기 걱정은 할 필요 없겠다.’

에드는 햇살처럼 포근한 로넨의 웃음소리가 당장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아 베게 위에서 실실거렸다. 하지만 그 미소는 살살 떠오르는 어제 일 때문에 금세 사그라들었다.

‘어떻게 거절해야 대공 전하께서 가장 상처를 덜 받으실까. 똑똑하신 분이니 어쭙잖은 핑계로는 납득하지 못하실 텐데…….’

최대한 빠르게 답을 주기 의욕을 불태우던 에드였지만 그의 마음과 다르게 피로로 물든 몸은 너무 빠르게 전원이 내려가고 말았다.

* * *

다음 날 아침 역시 에드의 발은 쉴새 없이 바빴다.

각 부서의 장들과 함께 초대객 명단과 준비한 음식들을 재확인하고, 혹시 모를 사태에 대한 대비책을 논의하는 등 할 일이 무척 많았기 때문이다.

어찌나 바빴는지 제대로 식사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아작, 아작.

벌써 며칠째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그들이 아직도 영양실조로 쓰러지지 않은 건 모두 그들의 손에는 들린 한국식 에너지바-이런 일이 있을 거라 예상한 에드가 주방장에게 초콜릿과 견과류 등의 재료를 이용해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덕이 컸다.

“텐스, 손님들이 타고 온 마차를 위한 공간도 정리가 다 되었나요?”

“어, 지금 울타리를 터서 공간을 더 넓히고 있어. 아마 저녁 전에는 다 끝날 거야.”

“다들 제가 나눠 드린 책자 잘 가지고 계시죠? 많은 분들이 모이는 행사다 보니 철저히 준비했어도 분명 문제가 발생할 거예요. 그럼 각 상황에 맞춰서 붙여 둔 태그를 참고해서…….”

그들이 논의를 모두 마쳤을 때는 벌써 창밖으로 석양이 떨어지고 있었다.

“하…… 내일까지만 힘내면 끝이네. 조직을 개편하고 치르는 첫 행사다 보니 더 신경 쓸 게 많은 거 같다.”

에드 옆에 앉아 있었던 텐스가 기지개를 켜고는 테이블 위에 축 늘어졌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의 생각에 동의했기에 쓴웃음을 짓고는 똑같이 엎어졌다.-총괄 집사장만이 꼿꼿이 자리에 앉아 있다가 일을 마치자마자 사라졌다.-

그런 생각을 하던 에드는 점점 무거워지는 팔다리를 느끼며 일부러 ‘으쌰’ 하는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그럼 저 마을 좀 다녀올게요.”

“내가 데려다줄까?”

“괜찮아요, 텐스도 힘들 텐데 조금이라도 쉬어 둬요.”

다시 한번 속으로 기합을 낸 에드는 날이 더 어둑해지기 전에 마을로 내려갔다.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그가 마을 입구에 다다랐을 때는 사위가 어둑해져 있었다.

“와, 진짜 졸리네.”

에드는 비몽사몽한 정신을 억지로 깨우며 대장간으로 가 미리 주문해 둔 로넨의 생일 선물을 받아 들었다.

‘로넨이 검을 좋아하는 건 알지만, 그래도 장난감 하나쯤은 갖고 있어야지.’

주인에게 감사 인사까지 야무지게 한 에드는 서둘러 귀로에 올랐다.

‘내일도 새벽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지금 시간이…… 9시네. 성에 도착하면 10시 조금 넘을 테고, 씻으면 11시쯤 되려나?’

잘 때 이외에는 품에서 떼지 않는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 에드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떼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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