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39화 (139/198)

다행히 한국의 취준생이었던 그의 몸은 짜인 계획에 맞춰서 딱딱 모든 행사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렇게 일을 정리하고 나니 다음은 당연하게도 대공과 로넨의 관계로 초점이 맞춰졌다.

‘로넨이 이래서야 대공 전하께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달라고 한 의미가 없잖아.’

계속된 계획 실패에 수첩을 펜 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머리를 싸맨 에드는 발걸음을 대공의 집무실로 돌렸다.

하지만 그가 집무실에 도착했을 때 집무실 문 앞에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휴가중. 급한 일은 모두 제이논에게 일임함.

에드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대공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들어와.”

대공의 방에 들어오니 뜻밖의 인물이 방의 주인보다 먼저 인사를 했다.

“에드, 안녕!”

에드는 고민의 원인이 이 방에 있는 것에 조금 놀랐지만 이를 내색하지 않으며 밝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도련님. 저녁인데 아직 대공 전하의 방에 계셨네요?”

침대 위에 반쯤 누워 있던 로넨이 제 몸 위에 놓인 동화책을 번쩍 들어 올리고 왼쪽 오른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형한테 동화책을 읽어 달라 하려고 왔어. 형은 지금 휴가니까!”

로넨의 말이 끝나자 대공이 똑같은 포즈를 취하며 말을 받았다.

“걱정하지 마, 로넨. 에드 덕분에 앞으로 형은 휴가가 아니더라도 언제든 동생을 위해 시간을 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커다란 덩치를 가진 대공이 로넨을 따라 하는 모습이 굉장히 어색했지만, 잘생긴 외모 덕분인지 그조차 그림이 되었다.

‘어쩐지 좀 귀여운 거 같기도 하고.’

대공의 이런 행동에 마음에 무언가 핑 꽂힌 에드는 가슴 언저리를 만지며 심호흡했다.

“에드도 거기 서 있지만 말고 이리로 와.”

“아닙니다, 전하. 도련님과 즐거운 시간…….”

“아, 에드…… 혹시 일 얘기인데 로넨 때문에 못 하는 거야?”

에드가 대공의 제안을 거절하자 로넨이 말간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 눈에 금방이라도 물기가 어릴 것 같은 느낌에 에드는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가서 침대 옆에 앉았다.

하지만 로넨의 눈빛 공세는 끝이 나지 않았다.

“에드, 로넨의 옆이 비었는걸?”

“맞아, 내 옆자리가 비어 있는걸?”

로넨이 매트리스를 통통 두드리는 것을 본 에드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저긴 침대 위잖아!’

그를 열렬히 쳐다보던 로넨의 눈이 낙담한 듯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에드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대공을 바라보자 그의 입이 소리 없이 열렸다.

‘사. 춘. 기.’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은 에드가 침대에 오르자 그를 본 로넨과 대공이 비밀스레 눈빛을 교환하고는 씩 웃었다.

그러나 이걸 보지 못한 에드는 폭신폭신한 침대에 반쯤 몸을 눕히며 생각했다.

‘조금만 이렇게 있다가 자연스럽게 방 밖으로 나가야겠다.’

“그럼 읽어 볼까?”

“네!”

그런데 저녁을 먹은 직후라서 그런 걸까?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워 잔잔한 대공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졸음이 쏟아졌다.

에드는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불 속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며 편한 자세를 찾았다.

‘이래서 이불 속은 위험하단 말이지.’

한 번 들어오면 나가기가 싫어지니까.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 에드는 작게 고개를 저으며 졸음을 몰아내려고 했지만, 끝내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어느새 까무룩 잠이 들었다.

에드가 잠에서 깬 것은 제법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가 멍하게 눈꺼풀을 깜빡이다 주변이 어둑해진 걸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급히 시선을 돌리자 모로 누운 채 손으로 머리를 괴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대공과 눈이 마주쳤다.

“아…….”

그에 에드가 재빨리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대공이 어깨를 잡아 왔다.

“괜찮아, 에드. 밤이 늦었으니 조금 더 자.”

“하지만 도련님도 방으로 돌아가셔서 주무셔야…….”

“로넨은 몇 시간 전에 방으로 돌아갔으니까 걱정하지 마.”

‘아니, 그럼 내가 잠든 지 벌써 몇 시간이나 지났다는 거잖아?’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에드가 주섬주섬 일어나 앉자 대공도 일어나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에드는 침대 밖으로 나가려 했으나 대공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감지하고는 조심스레 이불 밖으로 나간 왼쪽 다리를 수거했다.

‘대공 전하께서 할 말이 있으신 걸까?’

그러나 대공에게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가 자신을 그저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하자 민망해진 에드는 볼을 긁적이다 말했다.

“저는 겨울만 되면 이상하게 사과가 먹고 싶던데, 전하께서도 저처럼 이 시기만 되면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으신가요?”

어색한 분위기도 타파할 겸, 대공의 입도 열게 할 겸해서 꺼낸 말이었다.

“……좋아해.”

‘어…… 이런 대답을 바라고 꺼낸 말이 아니었는데.’

“네?”

대공의 입에서 가볍게 툭, 하고 내뱉어진 말에 동공 지진을 일으킨 에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 전, 전하께서도 사과를 좋아하신다는 말씀이시죠?”

에드의 대답에 대공이 한 번 더 말했다. 이번엔 주어까지 확실히 붙여서.

“좋아해, 에드.”

“…….”

에드가 멍하게 대공을 바라보았다. 잠, 잠깐만. 이건 그, 그러니까…… 아, 그래!

“……아하하, 저도 전하를 좋아합니다. 로넨 도련님도 좋아하고요.”

“이건 에드가 로넨을 좋아하는 것과 다른 감정으로 좋아한다는 뜻이야.”

“…….”

대공이 달빛이 어린 시선으로 에드를 덧그리며 고백했다.

“사랑해, 에드.”

대공의 고백에 너무 놀란 나머지 에드는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그러고는 곧 현실 부정으로 들어갔다.

‘아, 혹시 내가 쓰러진 사이에 북부에서 사랑이라는 단어 뜻이 ‘고생했다’라는 의미로 바뀐 건가? 그래, 이게 맞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전하께서 갑자기 내게 이런 말을 하실 리가 없는걸.’

대공이 한 말을 가만히 되짚어 보던 에드는 그런 결론을 도출하곤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깜짝 놀란 심정은 끝내 숨길 수 없었기에 입 밖으로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전하께서 이성을 잃으신 것도 아닌데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을 할…….”

‘전하 농담도 잘하시네요. 깜빡 속을 뻔했어요.’

에드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이 상황이 더 혼란스러웠기 때문일까? 하려던 말이 그의 생각과 뒤바뀌어 나오고 말았다.

그 때문에 대공과 에드 사이에는 아주 짤막한 정적이 지나갔다.

아스넬은 완전히 넋이 나간 듯한 에드의 모습을 보곤 끝내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아…… 미안해, 에드. 웃으면 안 되는데, 방금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갑작스럽게 놀라게 한 내 잘못이니까.”

이런 대공의 반응에도 에드는 아무런 응답을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그의 머릿속에서는 다양한 자아들이 모여 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한창 논의 중이었다.

‘진정해, 일단 심호흡부터 길게 내쉬어…….’

‘그런데 전하께서 날 사랑하신다잖아?’

‘아, 전하께서 날 사랑하신대!’

‘전하께서 기다리고 있으시잖아. 언제까지 이렇게 멍청하게 같은 말만 중얼거릴래?’

‘……하, 웃으시는 것도 너무 멋있어.’

‘야, 너 자꾸만 딴생각하고 있지!’

‘내가 아까부터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역시 단어의 뜻이 바뀐 게…….’

한창 끝없이 이어지던 에드의 생각은 대공의 물음에 중단되었다.

“에드는 어때?”

“……네?”

“이런 상황에서 고백을 들어 당혹스럽겠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난 정말 진지하게 에드를 로넨과 다른 감정으로 사랑하고 있어.”

대공에 대한 감정을 자각하기 전부터 그에게 빠져 있던 에드는 바로 입을 떼려고 했다. 그러나 마음속에 남은 걱정들이 그를 멈칫하게 했다.

‘대공 전하는 북부 전체를 다스리는 가문의 수장이셔. 그런 분이 나 같은 거랑 엮여도 되는 걸까?’

아니, 뭐 어딘가에선 사랑에는 국경도 나이도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지만 막상 제가 그 입장이 되니 둘 사이를 가로막는 것에 대해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아무 생각 없이 그의 고백을 받는다면 자신은 그저 짐이 될 뿐이었다. 지금까지 대공이 어떻게 북부를 지켜 왔는지 옆에서 다 봐 왔는데, 원작에서 그가 어떤 최후를 맞는지 다 알면서도 모른 척 제 감정을 앞세울 수는 없었다.

‘게다가 더 문제인 점은.’

에드는 대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대공을 좋아했다. 사랑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대공이 이성을 잃고 제 피를 취했을 때 목숨을 내어 줘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지.

‘나는 그의 아이를 낳을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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