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에드는 아침이 되자마자 이곳저곳에서 밀려오는 일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집사님!”
“에드 집사님!”
갑작스럽게 바뀐 체계에 적응할 새도 없이 진행된 로넨의 생일 파티 준비 때문이었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일 때문에 어찌나 피곤한지 당장에라도 침대로 가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에드에게 잠깐의 망상도 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에드! 아, 아니다. 이제 집사님이구나. 아무튼 주방장님이 어제 말해 놓은 거 식당에 다 준비 다 끝냈으니까 몸만 오면 된다고 하셨어.”
에드는 밀려드는 일을 최대한 빠르게 끝내고 로넨을 위한 첫 번째 이벤트를 시작해야 했으니까.
“알았어, 세나. 이것만 끝내고 대공 전하를 모시고 갈게. 도련님은 지금 방에 계시지?”
“응, 아까 보니까 도련님의 방이 소란스럽던걸. 또 로아를 몰래 데려와서 놀고 계신 모양이야. 그런데 왜?”
“정말 오랜만에 형제가 모여서 시간을 보내는 거니까…… 식당까지도 함께 내려가면 좋을 것 같아서.”
민망하다는 듯 볼을 긁는 에드를 보며 세나가 한껏 장난기가 묻어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역시 대공 전하의 하나뿐인 직속 집사님은 다르네. 그럼 주방장님께는 내가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다고 말해 놓을게.”
그렇게 세나를 돌려보낸 에드는 한시름 덜었다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 후 에드는 ‘짝’ 소리가 나게 자신의 볼을 한 번 때린 후 주변에서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는 사용인들을 각 부서의 담당자에게 인계했다.
“이건 폭탄 돌리기라고!”
제이논과 텐스가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깨끗이 무시했다.
‘좋아, 이걸로 한동안은 잠잠하겠지.’
주위가 한산해진 것을 확인한 에드는 기지개를 펴며 로넨의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자 세나가 왜 방이 소란스러웠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로넨 도련님.”
방 안이 온통 로아의 털과 베개에서 빠져나온 깃털로 뒤덮여 있었다.
침대 위를 데구루루 구르는 로아와 이곳저곳에 떨어진 공, 그리고 비지땀을 흘리는 로넨을 보니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가 일목요연했다.
아마 점점 둥글어지고 있는- 에드는 로아를 보며 21세기 현대에서 유행했던 ‘확대당했다’라는 단어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로아의 건강을 걱정하는 의사의 말에 로넨이 나름대로 노력하는 듯했다.
‘뭐, 침대 위를 굴러다니는 로아를 보면 딱히 효과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앗, 에드! 지금 로아랑 공놀이 중이었는데 같이 할래?”
‘……결과보다는 마음이 중요한 거지, 암.’
에드는 해맑게 웃으며 제게 달려온 로넨의 이마에 붙은 깃털을 떼어 준 뒤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 줬다.
“권유는 감사하지만, 오늘은 식당에서 연말 파티에 있을 케이크를 만들 예정이라서요.”
손에 공을 든 채 아쉽다는 듯 땅을 쳐다보는 로넨을 보며 에드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 너무 귀여워.’
“크흡…… 괜찮으시다면 도련님도 함께 가실래요?”
에드는 자신의 말에 언제 뾰로통해졌냐는 듯 맑은 얼굴로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로넨의 모습에 다시 한번 가슴께를 붙잡았다.
“그럼 손이랑 얼굴 깨끗이 씻고 식당으로 내려오세요. 오늘 케이크 만들기는 대공 전하도 같이할 예정인데 괜찮으시죠?”
“응, 좋아! 깨끗하게 씻고 식당으로 내려갈게, 그러니까 에드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형한테 가 봐!”
‘어라……?’
대공 전하랑 함께한다고 하면 분명 좋아할 줄 알았는데, 로넨의 반응이 예상과 묘하게 달랐다.
로넨에 의해 방 밖으로 밀려난 에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대공의 집무실로 향했다.
‘……뭔가 보육원 아이들이 사고 치기 전에 보였던 모습이랑 비슷한데?’
* * *
에드가 대공을 모시고 식당에 내려왔을 때 로넨은 에린에게 조리복까지 빌려 완전 무장을 마친 상태였다.
신이 났는지 연신 에린에게 질문 세례를 쏟아 내던 로넨이 그들을 발견하고 입구로 뽀로로 달려왔다.
뛸 때마다 종아리까지 내려온 요리사 옷이 팔랑거렸다. 그게 불편했는지 로넨이 잠깐 멈칫거리긴 했지만 넘어지지 않고 에드와 대공 앞에 도착했다.
“에드, 어때? 잘 어울려?”
그 말과 함께 로넨이 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그러다 옷이 걸려 넘어질 뻔하자 놀란 에드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로넨을 감싸듯이 안은 에드가 덩달아 휘청이자 대공이 등 뒤에서 에드를 받쳐 주었다.
“도련님!”
“로넨!”
크게 몸이 흔들린 로넨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놀라다가 이내 자신이 두 사람의 품속에 안겼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헤실헤실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웃고 있는 로넨과 달리 에드는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앞에는 포실포실한 볼을 뽐내며 자신에게 안겨 있는 로넨이, 뒤로는 단단하고 넓은 가슴으로 그를 감싸 오는 대공이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싶었지만, 이 형제는 무슨 생각인지 그를 풀어 주지 않고 있었다.
덜컹.
“자, 케이크를 만들 시트가 다 구워졌습니다. 음……?”
트롤리에 커다란 제누아즈를 싣고 나오던 주방장은 눈앞에 벌어진 이 상황에 물음표를 띄웠다.
형제 사이에서 굳어 있는 에드와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웃고 있는 대공 전하, 그리고 에드의 품에 안겨 헤실헤실 웃고 있는 로넨 도련님, 마지막으로 그들이 무슨 일을 하든 신경 쓰지 않고 홀로 3단 케이크를 완성하고 있는 에린까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주방장은 조용히 에린 옆에 빵을 내려놓고 아무것도 못 본 척 다시 트롤리를 끌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 * *
그들이 본격적으로 케이크 만들기를 시작한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이때 에린은 2번째 케이크를 위한 밑 작업을 하고 있었다.-
시작하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렸지만,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은 에린과 주방장이 이미 거의 끝낸 상태였기 때문에 대공과 로넨은 케이크를 꾸미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여기서 또 문제가 발생했다.
평소라면 대공과 에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을 로넨이 그들이 작업에 집중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 사라져 에린의 곁에 가 있었다.
그렇다 보니 결국 눈앞에 완성된 케이크는 로넨&아스넬의 케이크가 아니라 에드&아스넬의 케이크가 되어 버렸다.
이런 일은 오후에도 계속됐다.
날이 맑아 간식을 챙겨 들고 비교적 따뜻한 뒷동산으로 소풍을 나갔더니 어느새 로아와 로넨은 저 멀리로 뛰어놀러 가고, 돗자리 위에는 에드와 대공만이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뭔가 이상해. 평소라면 전하의 곁을 떠나지 않았을 로넨인데, 식당에서도 그렇고 여기서도 그렇고 이렇게 티 나게 피하다니.’
에드는 원작처럼 대공과 로넨의 사이가 벌어진 게 아닐지 걱정이 됐다.
“에드.”
‘어쩌지? 로넨을 빨리 찾았으니 둘 사이가 나빠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에드.”
“헉!”
살짝 떨어져 앉아 있던 대공이 어느새 그의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아…… 부르셨나요?”
대공이 심각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지, 에드? 로넨한테…….”
대공 역시 저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에드가 침을 꿀꺽 삼켰다.
‘로넨한테……?’
대공이 입을 열 듯 말 듯 하다가 결국 꺼내려던 말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예전에 인터넷에서 봤던 말 귀퉁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람을 화나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말을 하다가 마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으음…….’
그런 에드의 표정을 차분히 바라보며 충분히 즐긴 대공은 끊어진 말을 다시 이었다.
“로넨한테 사춘기가 온 게 아닐까?”
대공의 말에 에드는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친 거 같았다.
‘사, 사춘기!’
“하……하지만 전하, 로넨 도련님은 아직 10살밖에 안 되었는걸요? 너무 이른 거 아닐까요?”
“그래? 나는 로넨 나이쯤에 사춘기가 왔던 것 같은데.”
연구실에서 봤던 초상화를 기억해 내자 에드는 점점 대공의 말에 납득이 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조금 이르게 사춘기가 오는 애들도 있긴 했으니까……. 헉, 그럼 지금 이러는 게 정말 사춘기 때문이라고?’
원작의 스토리와 현실 사이에서 느껴지는 괴리감에 충격을 받은 에드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대공이 그런 자신을 보며 즐거이 웃고 있다는 걸.
갑작스러운 정보로 파업했던 에드의 머릿속이 재부팅된 건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저녁때였다.